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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2월 22일 월요일

화씨 451, 레이 브래드버리

출처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65076

작가가 그리는 미래, '책은 불태워야 한다'

[지나간 책 다시읽기 46] <화씨 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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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화씨 451> 표지
ⓒ 황금가지
2년 전 타계한 환상 문학의 거장 '레이 브래드버리'의 대표작 <화씨 451>(황금가지). 이 소설에 대해 할 말이 참으로 많다. 그만큼 이 소설이 주는 메시지가 많고 강렬하다. 제목부터 그러한데, '화씨 451'은 종이가 불에 타는 온도라고 한다.

그렇다. <화씨 451>의 배경은 종이를 불에 태우는, 즉 '책'을 불에 태우는 직업인 '방화수'(?)가 존재하는 미래이다. 60여 년 전에 쓰인 소설이니 만큼, 그 미래가 바로 지금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작가가 예측한 그 미래로 정확히 달려가고 있는 지금이라고 해야 맞는 것도 같다.

책은 어떻게 사라졌는가?

주인공은 책을 태우는 직업인 방화수 가이 몬태그이다. 그는 즐겁게 그 일을 한다. 하지만 가슴 한 편에는 씁쓸함과 공허함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이상한(?) 소녀 클라리세를 만난다. 그 소녀는 뭐든지 냄새를 맡아 보고, 눈으로 쳐다보는 걸 좋아한다. 반면 벽면 텔레비전을 보거나 자동차 경주를 보러 가거나 놀이 공원 가는 일은 좋아하지 않는다. 모든 것들이 바쁘고 신속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그야말로 '미친' 생각을 하는 아이다.

몬태그는 그런 소녀를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소녀에게서 떨쳐버릴 수 없는 그 무엇을 발견한다. 그가 언제나 생각하고 있었을 그 무엇. 세상 사람들 모두가 간과하고 무시하고 애써 멀리하는 그 무엇. 그는 그것을 클라리세와의 갑작스러운 만남과 헤어짐, 책과 함께 불에 타 기꺼이 죽음을 맞이하는 어느 여자의 마지막 모습, 그리고 매일 같이 벽면 텔레비전과 귀마개 라디오를 끼고 살아가는 아내 밀드레그 때문에 깨닫게 된다. 불에 타 없어진 책들마다 제작기 한 사람씩의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을.

그의 이런 변화를 알아차린 방화서 서장 비티는 그에게 말해준다. 왜 우리는 책을 태울 수 밖에 없이 되었는가? 그 과정은 소름 끼치도록 현재 우리 세상의 모습과 닮았다. 대중 매체의 변화, 점점 단순하고 말초적으로 일회용 비슷하게 전락하는 책, 점점 빨라지는 화면과 얇아지는 책, 쓸데 없는 것에 시간을 낭비할 수 없게 되는 세상. 마침내 모든 것이 완벽하게 탈바꿈한다. 일은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일을 끝내고 나면 그때부터 마냥 놀고 즐기는 시간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것이 곧 행복, 머리 아프고 오랜 시간이 걸리는 책, 행복한 현실을 비판하려는 책은 모조리 태워버려야 한다. 이는 곧 검열이다.

일정 부분은 지금과 닮아 있고 일정 부분은 얼마 되지 않는 과거의 그때와 닮아 있다. '점점 빨라지는 화면과 얇아지는 책'은 지금, '눈 깜짝할 사이에 일을 끝내고 나면 그때부터 마냥 놀고 즐기는 시간이 시작되는' 건 마치 전두환 군부 독재 정권이 시행한 일명 '3S 정책'이 생각나게 한다. 스크린(Screen), 스포츠(Sports), 성(Sex) 또는 속도(Speed)로 국민들의 시선을 정치에서 떠나게 하려는 '우민화 정책' 말이다.

책이 없는 세상은 곧 파멸에 이른다

몬태그는 점점 덮쳐 오는 참을 수 없는 죄의식과 자괴감으로 이대로는 삶을 계속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 첫 번째 행위로 '책'을 훔치고 읽는다. 아내인 밀드레드와 같이 읽게 되는데, 밀드레드는 책을 왜 읽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알겠어요? 내 친척들은 사람이라고요. 그들은 나한테 얘기를 하고, 나는 웃고, 또 그들도 같이 웃어요. 그리고 색깔이 있어요, 색깔이! 책에는 없지요." (본문 중에서)

밀드레그가 말하는 '친척'은 당연하게도 벽면 텔레비전에서 비춰지는 얼굴들이다. 형체는 없고 만질 수도 없다. 그러나 그녀는 얘기를 하고 같이 웃고, 무엇보다 '색깔'이 있다는 이유로 그따위 벽면 텔레비전을 책보다 선호하는 것이다. 아니 신봉한다.

그는 집을 박차고 파버라는 노인을 찾아간다. 언젠가 몬태그가 공원에서 방황하고 있을 때 몬태그 손에 들린 책을 발견하곤 놀라움을 금치 못했던 노인이다. 파버와 몬태그는 일을 벌리기로 작정하고 몬태그로 하여금 방화서로 돌아가 스파이 노릇을 할 것을 권한다. 하지만 곧이어 울린 경보로 출동한 곳은 다름 아닌 몬태그의 집. 밀드레드가 몬태그를 신고한 것이다. 책을 읽었다는 혐의. 자신의 집과 책을 직접 불태운 후 꼼짝 없이 체포될 처지였다.

그렇지만 그는 이미 알아버렸다. 이 세계가 어떻게 이렇게 바뀌었는지. 왜 책을 불태울 수밖에 없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일은 결국 세계를 파멸로 이끌게 될 것이라는 것까지도. 그는 어떻게 해서든 책과 함께 여기서 탈출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눈 앞에 있는 방화수들을 죽여야 했다. 그는 곧 온 세계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만다. 과연 그에게 미래가 있을까? 그가 책과 함께 살아 남는다면 결국 세계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 소설이 말하려는 바는 보여주려 하는 바는 명확하다. 책이 없는 세상, 생각이 없는 세상, 속도와 실용만을 추구하는 세상은 파멸에 이른다는 것. 하지만 그 세상은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 그야말로 망치로 대못을 박듯 작금 세계를 뒤흔들어 놓기에 충분하다. '종이책'이 사라져 가는 이 시대에, '종이책' 만을 고수하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희망의 메시지이자 완벽한 절망의 메시지이다.

꽤 설득력 있는 책의 공허함

반면 저자가 비티 방화서장의 입을 통해 말하는 책의 공허함은 꽤 설득력을 가진다. 도대체 책이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하다 못해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바꿀 수 있는가? 그것을 지금 내 눈앞에 보여줄 수 있는가?

"...세상 모든 것에, 그 어떤 것에도 증오로 가득 찬 자를, 난 저주의 말을 내뱉으며 내 소중한 서가의 책들을 꺼내 펼쳤지. 그랬더니 거기엔, 거기엔? 완전히 공백이었지! 오오, 물론 글자는 그대로 있지만 죄다 내 눈 앞을 뜨거운 기름처럼 흘러 지나가 버렸어. 아무런 의미도 없이. 어떤 도움도, 위안도, 평화도, 안식처도, 진정한 사랑도, 아늑한 침대도, 빛도 없었다네." (본문 중에서)

<화씨 451>이 더욱 가슴 깊이 와 닿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책이 갖는 역설적인 공허함, 책 속에 길이 있다는 상징적인 명제가 지니고 있는 비실체성, 책을 읽으면 풍요로워질 수 있다는 믿음이 주는 비물질성. 이는 모두 책이 가지는 잘못된 신화일 수 있다. 저자는 이런 위험성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그러하기에 그가 보여주는 책이 없는 세계의 무서움이 더욱 더 현실감 있게 그리고 믿을 수 있게 다가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대로 가다가는 저자가 예견한 미래가 반드시 도래하고 말 것인데.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지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고 말 것인데. 그 삶이 '행복'한 것인 양 믿고. 하지만 죽음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마침내 깨닫게 되는...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singenv.tistory.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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