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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2월 18일 목요일

장정일, 국민, 인민, 시민, 싸가지 없는 진보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21922

2014년 12월 16일, 시사인 378호, 장정일 독서칼럼



‘신민의 시대’를 기억하라

제주도에는 80여 곳에 700여 개의 일본군 요새와 전투기 격납고, 동굴진지가 남아 있다. 이 ‘유적들’을 하나로 꿰어 이야기를 발굴하고 기억해야 한다. 인민주권 의식이 있어야만 내가 발 딛고 선 땅을 평화롭게 보존할 수 있다.


제주도 서남단 모슬포에 민박을 정해놓고, 집 앞에 있는 송악도서관에 가서 살았다. 거기서 여러 권의 제주 지역사를 쓴 이영권의 <새로 쓰는 제주사>(휴머니스트, 2005)를 읽었다. 아시아태평양전쟁 말기, 대본영(大本營:천황(일왕) 직속 육·해군 통합지휘부)은 미군의 일본 본토 상륙 예정지를 7개로 설정하고 거기에 맞는 대비책을 마련했다. 일본군은 유력한 미군 상륙 예정지로 특별히 홋카이도(결1호 작전)와 제주도(결7호 작전)를 꼽았는데, 그 가운데서도 후자에 더 무게를 두었다. 미군이 제주도를 발판으로 규슈 북부→도쿄로 곧바로 진격하리라 판단한 것이다. 미군 상륙을 1945년 9~10월로 내다본 대본영은 정예부대를 속속 제주도로 불러 모았다. 1945년 1월까지만 하더라도 1000명이 넘지 않던 제주 주둔군이 8월에는 무려 70배인 7만명으로 늘어났다. 한반도에 배치된 일본군 36만1481명 가운데 5분의 1이 제주도에 집결한 것이다.

결7호 작전이 구체화된 3월12일, 오키나와 남쪽의 이오지마에서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만든 두 편의 영화로 널리 알려진 이오지마 전투가 한창이었다. 2월19일에 시작된 이 전투는 3월25일, 미군의 승리로 끝났다. 면적이 고작 20여㎢인 화산섬을 차지하기 위해 미군 6000명이 전사하고, 2만2000명 넘는 일본군이 죽었다. 이어 벌어진 오키나와 전투에서는 미군 1만5000명, 일본군 6만5000명이 전사했고, 양쪽 군인을 합한 것보다 더 많은 12만명의 오키나와 주민이 사망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이지영 그림</font></div> 
ⓒ이지영 그림
일본군이 두 섬에서 구사한 전략은 총동원된 군·민이 결사항전 끝에 모두 전사하는 이른바 옥쇄작전이다. 역사학자 강만길에 따르면 대본영의 이처럼 무모한 작전은 “군·민을 총동원한 다 죽기 작전으로 미군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어 이른바 ‘본토 결전’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희생을 치러야 할 것임을 알게 함으로써 미국으로 하여금 ‘천황제’라는 체제를 인정하고라도 전쟁을 빨리 끝내는 게 상책이라고 보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천황제 밑에서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친 당시의 일본인과 조선인은 오늘날의 인민이거나 시민이기는커녕, 국민도 못 되는 신민(臣民)이었다. 

한자 문명권인 한국·중국·일본에서는 고릿적부터 국민(國民)·인민(人民)·시민(市民)이라는 단어가 있어왔으나, 크게 보아 ‘왕의 백성(臣民)’이라는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 단어들이 현재와 같은 변별력을 갖고 어떤 경우에는 서로 적대적인 용법이 되기까지 한 것은, 같은 단어에 대응하는 서양어 nation· people·citizen이 일본을 통해 들어오고부터다. 박명규의 <국민·인민·시민>(소화, 2009)은 이 사정을 자세히 밝히고 있다. 1948년 7월에 제정된 대한민국 헌법의 가장 주요한 두 원칙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제1조)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제2조)이다. 그런데 제2조의 ‘국민’이 원래의 헌법 초안에서는 ‘인민’이었으나, 우파 세력의 거부로 무산됐다. 

 <인민이란 무엇인가>알랭 바디우 외 지음서용순 외 옮김현실문화 펴냄 
<인민이란 무엇인가>알랭 바디우 외 지음서용순 외 옮김현실문화 펴냄
헌법을 초안한 유진오는 훗날 자신의 회고록에 이런 아쉬움을 드러냈다. “미국 헌법에 있어서도 인민(people·person)은 국가의 구성원으로서의 시민(citizen)과는 구별되고 있다. ‘국민’은 국가의 구성원으로서의 인민을 의미하므로, 국가 우월의 냄새를 풍기어 국가라 할지라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자유와 권리의 주체로서의 사람을 표현하기에는 반드시 적절하지 못하다. 결국 우리는 좋은 단어 하나를 공산주의자에게 빼앗긴 셈이다.”
같은 해 9월에 공표된 북한 헌법 제1·2조 “우리나라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다”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주권은 인민에게 있다”는 대한민국 헌법과 단어 하나만 바뀐 형태다. 이후로 인민이라는 단어는 북한에서 애용된다는 이유만으로 꺼림칙하게 변한 ‘동무’처럼 불온한 어휘가 되었다. 
하지만 남과 북이 체제를 달리하며 분단을 맞기 이전부터, 우파와 좌파가 선호하는 어휘가 서로 달랐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국민(nation)은 국가라는 법인체에 귀속되어 관리를 받아야 하는 피통치자의 인상을 주는 반면, 자유로운 개인의 합이 국가를 결정하는 정치적 주체로서의 인민은 혁명의 담당자이기도 하다. ‘국민’과 ‘인민’ 개념의 각축은 한·중·일 근대사에서 공평히 찾아볼 수 있다. 일본은 ‘국민은 곧 신민’이라는 국체론에 따라 인민을 불온시했으며, 마오쩌둥의 공산당과 일전을 벌였던 장제스도 국민당을 간판으로 내걸었다.

알랭 바디우 외 다섯 필자가 한 꼭지씩 글을 보탠 <인민이란 무엇인가>(현실문화, 2014)는 인민의 발생지인 프랑스에서 인민의 사망선고를 알리고 있다. 이 개념의 발명자인 루소는 경제적 이해관계에 종속된 사적인 존재로서의 사인(私人)을 견제하고 공동선을 추구하는 공적 시민(公民)에게 인민주권을 부여했다. 그러나 중간계급이 자본주의적 과두정의 주력이 되고 우파 민족주의 공세에 압박당한 좌파가 ‘정체성의 정치’에 가담하기 시작하면서, 하층민과 이민자는 무기력하고 허울뿐인 인민이 되었다.  

<싸가지 없는 진보>에는 ‘인민’이 없다


프랑스에서 날아온 비보는 진보의 집권 전략을 위해 강준만이 헌책했다는 <싸가지 없는 진보>(인물과사상사, 2014)의 조야한 성격을 더욱 또렷하게 해준다. 흔히 그의 ‘싸가지론’은 진보 진영의 도덕적 우월의식·선악 이분법·선명성 경쟁을 비판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무기력하고 허울뿐인 인민은 죽게 내버려두라고 채근한다. 싸가지론의 중심에는 ‘중산층 표심’이 자리 잡고 있는바, 이 전략은 자본주의 과두정의 조력자인 중산층만 갖고도 얼마든지 선거라는 게임이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중산층의 입맛에 맞춘 의제와 정책만으로도 선거에서 이길 수 있고 정치가 굴러갈 수 있다면 잡다한 인민 따위는 배제되어도 좋다. 바로 이런 주장이 도덕적 우월의식·선악 이분법·선명성 경쟁을 내팽개치라는 주문으로 나타난 것이다.   

핵폭탄 두 개가 전쟁을 일찍 끝마쳤기에 망정이지 만약 한 달만 더 지속되었더라면 25만명이나 되는 제주도민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소년대·소녀대·부녀대·청년대·장년대로 나뉘어 죽창 훈련에 동원되었던 제주도민 역시 오키나와 주민처럼 옥쇄를 강요받았을 것이다. 

현재 제주도에는 80여 곳에 700여 개의 일본군 요새와 전투기 격납고·동굴진지가 남아 있다. 제주도는 하루빨리 이 유적을 하나로 꿰어 이야기의 성벽을 만들어야 한다. 신민의 시대를 기억할 수 있는 이야기의 성채와 함께, 국가가 아닌 내가 주권자라는 인민주권 의식이 있어야만 내 고향을 평화의 섬으로 보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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