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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월 30일 월요일

세계책의수도 인천] 필생·각수·승려 … 수백명 '혼연일체' 동아시아 '最高 대장경' 꿈 새기다 인천, 활자의 시대를 열다 - 11.강화의 고려왕조 팔만대장경 이렇게 만들었다(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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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만대장경 실제 경판.
▲ 팔만대장경은 강화도 대장도감에서 1236년~1251년 판각해 150년 간 보관하다 1398년 지금의 합천 해인사로 이운됐다. 800년이 다 됐음에도 제작기법과 보존방법이 놀라도록 과학적이어서 지금까지 경판을 꺼내어 인쇄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하게 남아 있다. 사진은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당'에 있는 팔만대장경의 모습. /인천일보 자료사진
<필생·교정> 초조대장경·북송관판대장경거란대장경 비교·대조 '고증'
수십명이 균질하게 필경인쇄·원본 한장씩 대조하며 교정…교정 기록 책자 '30권' 별도 제작
<판각·보관> 한줄에 14자씩 23줄 앞뒤로 새겨3장씩 인쇄
완성판 마구리·옻칠… 인본, 석모도 보문사 보관 예정
<판목>30~50년생 나무 3년 갯벌에 담갔다 소금물에 쪄서 1년간 바람 건조 

"쓱 쓱, 써걱 써걱" 
1240년 어느 날 강화도 '대장도감'. 수백명의 고려인들이 모여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이들은 몇 개의 무리로 나뉘어 일을 하는 중이다. 한 무리는 고려지에 글씨를 쓰고, 다른 무리는 그렇게 쓰여진 글씨 원본을 나무판에 붙인 뒤 글씨를 새기는 중이다. 또다른 무리는 판각한 판에 송연먹이나 유연먹을 뭍히는 모습이다. 인쇄를 해 오탈자를 잡아내기 위함이다. 금속활자는 기름기가 있는 유연먹을 써야 했으나 목판인쇄엔 송연먹을 사용하기도 했다. 오탈자가 발견되면 잘못 새긴 글씨를 도려내고 새 글씨를 새겨 아교로 붙였다. 대장도감엔 그렇게 필생과 각수, 일반인과 승려들이 뒤섞여 일을 하고 있었다.  

교정을 담당한 승려들이 인본을 펼쳐놓고 위 아래로 살펴보는데 수기(守其)대사가 다가왔다. 팔만대장경 판각의 총 지휘를 맡은 그는 논산 개태사의 승통이었으나 이규보 등과의 인연으로 강화에 거주하며 '대불사'를 총책임지고 있었다. 인본을 보던 승려들이 벌떡 일어나 합장을 하며 머리를 숙였다. 수기대사가 손을 모으며 답례를 했다. 수기대사가 승려들을 향해 말했다.

"최초의 인본 3질은 여기서 가까운 보문사에 보관해야 할 것이오. 스님들께서는 먹을 아끼지 말고 선명하게 인쇄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잘 알겠습니다, 스님" 

승려들이 합창을 하듯 대답했다. 첫번째 인쇄엔 먹이 많이 들어갔다. 마른 나무가 먹물을 최초로 흡수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완성된 경판은 3장씩 인쇄를 해서 따로 보관했다. 팔만대장경은 강화도에 보관할 예정이지만, 인본은 가까운 석모도의 '보문사'에 보관하기로 예정돼 있었다. 

수기대사는 해박한 불교지식에 꼼꼼하고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기존에 인출한 '초조대장경본'과 송나라 대장경인 '북송관판대장경본', '거란대장경본'을 비교 대조하며 팔만대장경을 판각해 나갔다. 그런 과정에서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고 빠진 부분을 보완하며 한 장 한 장 판각을 해 나갔다. 그의 마음속엔 동아시아 '최고, 최대'의 대장경을 제작하겠다는 신념이 있었다. '개원석교록'이나 '정원석교록'과 같은 1급 불전목록을 참고하거나 팔만대장경 교정의 엄밀한 과정을 기록한 '고려국신조대장교정별록' 30권을 따로 만든 것은 이같은 이유에서였다.

팔만대장경은 3년 간 바닷가 갯벌에 담갔다가 1년 간 소금물에 삶고 쪄서 말린 나무를 재료로 삼았다. 강화도 갯벌과 남해의 갯벌은 재목을 담가놓기에 적합했으며 나무를 찌고 삶는 과정에서 나무진액이 빠져나가고 대신 소금기가 배었다. 소금물에 삶은 나무는 바람이 잘 통하는 장소에서 1년 정도 건조시켰다. 경판으로 쓰는 나무는 30~50년의 나이에 굵기가 40㎝ 이상 되는 '산벚나무'와 '돌베나무' 등 10여 종이었다. 이 나무는 가로 69㎝, 세로 24㎝, 두께 3㎝ 정도의 크기의 경판으로 다듬었다.  

이 나무판엔 한 줄에 14자씩, 모두 23줄의 경전이 앞뒤로 새겨졌다. 경판을 수십 명이 동시에 새기고 있었음에도 필체가 균질한 것은 일정 기간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목수들의 작업인 나무경판 준비가 끝나면 관료와 문인, 승려들로 구성된 필생들이 면밀한 고증을 거친 글을 고려지에 써 내려갔다. 이렇게 쓴인 뒤 다시 그 위에 풀칠을 하고 식물성기름을 발랐는데 이는 글씨가 선명하게 드러나 판각하기에 좋았기 때문이다. 각수들은 이렇게 드러난 글씨를 '돋을새김'(양각)으로 한 자 한 자 정성스레 파냈다. 

판각이 완성되면 수정작업이 이어졌다. 잘못 쓰거나 비뚤어진 글자를 제거하는 과정이다. 교정은 한 장씩 찍은 인쇄본과 원본을 대조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보통 잘못된 글자를 파내고 새로 새긴 글자를 아교로 붙였는데 많은 글자가 틀릴 경우엔 아예 행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었다. 

완성된 경판은 '마구리 작업'에 들어갔다. 마구리는 경판 양쪽 끝에 경판보다 두꺼운 각목을 붙인 뒤 네 귀퉁이에 구리판을 장식하는 재료였다. 경판끼리 부딪히는 것을 막아 손상을 방지하고 보관할 때 바람이 잘 통해 변형을 방지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 마구리였다. 

팔만대장경 경판의 화룡점정은 '옻칠'이었다. 하나의 경판엔 보통 세 번의 옻칠이 입혀졌는데 1251년 완성된 팔만대장경이 지금까지 800년 가까이 뒤틀림이나 손상없이 보존될 수 있었던 핵심적인 이유가 바로 이 옻칠에 있었다.  

옻칠까지 마친 경판은 송나라에 수출까지 한 한지인 '고려지'에 인쇄를 해 보관했다. 보통 3질 정도 인쇄를 했는데 <사고전서> '천하동문' 편은 팔만대장경 인본 3질이 '보문사'에 있었다고 전한다. 팔만대장경판이 강화도 '대장경판당'에 있었으므로 인본을 가능한 대장경판당에서 가까운 '보문사'에 보관했던 것이다.  

입춘이 지났음에도 2015년 3월 강화도와 석모도의 바람은 여전히 매섭기만 하다. 이 염하의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고려인들은 손끝이 갈라져 터지고 그 사이로 뜨거운 피가 흘러나오도록 경판을 새기고 또 새기었으리라. 그렇게 1232년부터 1251년까지 판각한 고려인의 영혼은 지금, '세계의 유산'으로 피어났다. 

/글·사진 김진국 기자 freebird@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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