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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월 30일 월요일

세계책의수도 인천] 고려 목판인쇄술 집대성 … 제작·이운 과정 미스터리 인천, 활자의 시대를 열다 - 12.합천으로 간 대장경의 불가사의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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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51년부터 150년 간 강화도 대장경판당에 보관돼 있던 '팔만대장경'은 조선 태조 7년인 1398년 서울 용산강을 거쳐 합천 해인사로 이운된다. 당시 팔만대장경을 떠나보냈을 것으로 추정되는 외포리선착장이 검붉은 노을에 물들고 있다.
<제작 ~ 완성 16년> 
나무 1만5000개·종이 60만장·옻액 400㎏ 
글 5000만자 … 연 5만명 필생·125만명 각수 

<1398년 강화도 → 합천 해인사> 
2.5t 트럭 100대·높이 3200m 분량 
엄청난 양 훼손없이 옮긴 점 경이 
바닷길·내륙 '이동경로' 안밝혀져  



1398년(조선 태조 7년) 5월 어느 날. 강화도 외포리선착장에 비가 내렸다. 빗줄기 속에서 수천명의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는 모습이었다. 얼핏 보면 불규칙해 보였으나 사람들은 한 줄로 겹겹이 서서 질서정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사람들의 머리 위엔 나무판 한 장 씩이 얹혀져 있었다. '팔만대장경'이었다. '대장경판당'에서 시작한 팔만대장경 이운 행렬이 외포리선착장까지 이어진 것이었다. 소가 끄는 수레에 실려오는 대장경함도 눈에 띄었다. 팔만대장경이 배에 실려지는 동안 사람들은 기도를 올렸다. 눈물인가, 빗물인가. 사람들의 얼굴을 타고 물줄기가 쉼 없이 흘러내렸다. 

강화도에 150년 간 보관하던 팔만대장경이 합천 해인사로 옮겨진 건 1398년이다. <조선왕조실록>은 '태조 7년(1398) 5월 임금이 용산강에 행차해 강화 선원에서 운반해온 대장경판을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만 당시 '해인사'로 옮겼다는 기록은 나와 있지 않으며 왜 강화도에 있던 것을 해인사로 옮겼는 지도 알 수 없다. <조선왕조실록>은 이듬해인 정종 원년 '경상감사에게 명해 해인사의 대장경을 인쇄하는 승려들에게 공양했다'고만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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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의 경판 8만여장을 옮기려면 2.5t 트럭 100대, 4t 트럭 70대가 필요하다. 이런 엄청난 양을 어떻게 훼손하지 않고 해인사까지 옮겼을까. 내륙을 통해 옮긴 것인지, 아니면 바닷길로 옮긴 것인지도 밝혀지지 않았으며 무슨 이유로 옮겼는가에 대한 것도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확실한 것은, 당시 옮겨지지 않았다면 우린 2015년 강화도에서 팔만대장경을 볼 수 있었을 것이란 사실이다. 

대장경판 한 장의 두께는 마구리를 포함해 4㎝ 정도다. 모두 8만1258장인 대장경을 땅에서부터 쌓으면 높이가 3200m에 이른다. 한라산 1950m, 백두산 2744m 보다도 높다는 얘기다. 경판은 한 면이 아닌 앞뒷면에 모두 글씨가 새겨져 있다. 한 면에 새겨진 글자는 약 300자 정도. 따라서 글자를 모두 합하면 무려 5000만여자에 달한다. 한문을 아는 사람이 읽는다고 가정할 때 하루에 읽을 수 있는 양은 4000자에서 5000자 정도이다. 그렇게 경판을 모두 읽으려면 30년이 걸린다는 계산이 나온다.  

팔만대장경 제작에서부터 완성까지 걸린 시간은 16년이었다. 16년 만에 8만여장을 판각할 수 있었다는 얘기는 고려가 이미 상당한 불교지식과 인쇄기술을 축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물리적인 시각으로 봤을 때 어마어마한 인원이 필요했을 것이다. 사학자들은 이때문에 팔만대장경이 강화도나 남해 두 곳에서만 제작된 것이 아니라 전국 방방곡곡의 사찰과 사람들이 참여했을 것이라 보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16년 만에 우리나라는 물론 동아시아 불교지식을 집대성하면서 8만여장이나 판각하려면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참여하기 전에는 사실상 판각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팔만대장경을 판각한 중요한 이유가 몽골의 침입을 불력의 힘으로 물리치고, 전쟁으로 황폐해진 고려인들의 민심을 수습하고 결집하기 위한 것인만큼 가능한 많은 백성들을 참여시켰을 것이란 추론도 가능하다.  

경판을 만들 수 있는 나무 역시 최소한 길이가 1m가 넘고, 굵기는 40㎝ 이상 돼야 한다. 그렇다고 해도 1m 길이에 40㎝ 굵기의 통나무를 가공해 생산할 수 있는 경판의 양은 7장 정도이다. 더욱이 옹이가 박혀 있거나 갈라진 나무를 버리고 나면 경판으로 사용할 수 있는 양은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 8만여장의 경판을 만들려면 통나무 1만5000개 이상이 필요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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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인사의 대장경 판당.
5000만자에 달하는 경판의 글씨쓰기(원본쓰기)를 담당한 사람들은 필생들이었다. 이들은 불교경전을 일일이 베껴쓰되, 글자체가 비슷해야 했다. 그렇다 쳐도 하루 한 사람이 1000자 정도 글씨를 썼다고 볼 때 원본쓰기에만 연인원 5만여명이 참여했다고 봐야 한다.

필사에 들어간 고려지(한지)의 양 역시 엄청났다. 앞뒤로 경판을 새겼으므로 8만여개의 경판에 붙일 종이는 2배인 16만장이 필요했다. 그러나 글씨를 잘못 쓰는 경우가 있으므로 서너배의 종이가 들어갔다고 봐야 한다. 따라서 50만~60만장의 종이가 소요됐으며 원료인 닥나무를 삶고 빻아서 만드는 고려지는 한 사람이 하루 50장 정도를 생산할 수 있었다. 고려지 제작에만 연인원 1만여명이 들어갔다고 추정하는 이유다. 

판각은 더우기 고난도의 기술과 엄청난 시간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하루 한 사람이 새길 수 있는 글씨는 30~40자 정도에 불과하다. 5000만자를 새길 각수를 연인원으로 환산하면 125만명이 각수로 참여한 셈이다.  

마지막 작업은 옻칠이었다. 경판 한 장에 필요한 옻액은 5g 정도이다. 하루 채취량을 150그루 400g이라고 볼 때 대장경판 전체에 필요한 옻액의 양은 400㎏에 이른다. 연인원 1000여명이 동원돼야 가능하며 마구리인 구리장식에 참여한 사람을 더할 때 그 수는 더욱 늘어난다.

2015년 3월 어느 날의 늦은 오후 외포리선착장. 617년 전 팔만대장경을 떠나 보낸 선착장엔 무심히 오가는 배들과 그 위를 맴도는 바닷새들 뿐이다. 갈매기들의 날개 위로도, 카페리호의 마스터 위로도 외포리의 낙조가 내려 앉는다. 글자처럼 새겨지는 석양의 그림자들. 

/글·사진 김진국 기자 freebird@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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