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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월 30일 월요일
['책과 출판의 문화사']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꾸란 /전성원
['책과 출판의 문화사']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꾸란
이슬람교는 성립(610년)한 지 불과 100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지금의 중동은 물론 북아프리카로부터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인도, 중국을 비롯해 스페인을 위시한 유럽까지 점령했다. 이슬람교의 놀라운 전파 속도에 대해 서구 사회는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꾸란'이란 말로 폄하해 왔지만, 이것은 자신들의 문명과 문화가 우월하다고 여긴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오만에서 비롯된 것이다. 실제로 이슬람교가 그토록 빨리 전파될 수 있었던 까닭은 당시 이 지역을 통치하던 비잔틴과 페르시아의 가혹한 수탈과 착취에 시달리던 민중들이 이슬람의 평등주의를 환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슬람교의 교리는 어떻게 그처럼 빨리 전파될 수 있었을까?
<성경>은 대략 850여년에 걸쳐 여러 사람들이 각기 다른 언어로 서술한 내용을 결집한 것이고, 비슷한 시대 소아시아 일대부터 인도, 중국에 이르기까지 이슬람과 경쟁했던 마니교는 여러 언어로 경전이 번역되는 것을 장려했다. 그에 비해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는 <꾸란>의 번역을 엄격히 금지시켰다. <꾸란>은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신의 가르침이 예언자 무함마드에게 전해진 것이므로, 이것을 아랍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번역한 것은 경전으로서의 권위를 상실하기 때문에 해설서란 의미에서 '타프시르'라 부른다. 종이 이전에 <꾸란>은 암송으로 구전되거나 양피지, 가죽조각, 돌판, 대추야자 잎이나 나무껍질, 낙타의 골편 등에 기록돼 왔다.
탈라스 전투(751년)에서 승리한 이븐 살리흐는 당나라 포로들 가운데 제지기술자가 여러 명 있는 것을 알고 현지인들에게 제지술을 가르치게 했다. 당시만 해도 이슬람 상인들은 중국에서 비단과 함께 종이를 비싸게 수입해야 했지만, 탈라스 전투 이후 6년여가 흐른 757년경이 되자 사마르칸트는 제지업의 중심도시가 됐다. 사마르칸트 종이는 중국의 기술로 만들어 중국 종이와 품질 차이가 거의 없었기에 이른바 '서역한지(西域漢紙)'라 불렸다. 사마르칸트 종이의 생산은 단순히 수입 물품 대체 정도의 효과만 거둔 것이 아니었다. 종이와 <꾸란>이 만나면서 구전문학 중심이었던 이슬람문학이 아랍어를 중심으로 한 문자문학으로 전환됐고, 저렴한 가격에 종이가 공급되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꾸란>을 손쉽게 접할 수 있게 됐다.
8세기부터 13세기까지 이슬람문명이 세계의 질서를 주도했고 이슬람은 세계무대의 주인공이었다. 이슬람의 황금시대를 이끈 지도자들은 다마스쿠스와 이스탄불 등 곳곳에 제지공장을 세웠고, 서적의 발행이 활발해지면서 개인도 책을 소지할 수 있었다. 이 무렵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책이 발간되고, 가장 많은 서점이 즐비한 곳은 바그다드였다. 이슬람의 지식인들은 게르만족의 대이동과 로마제국의 멸망으로 사라질 위험에 처했던 인류 문명의 고전들을 보존해주었다. 아랍어와 <꾸란>을 중심으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등 희랍철학의 고전은 물론 유클리드의 기하학을 인도의 수학과 접목시켰고, 근대의 의학과 화학, 천문학 역시 이슬람의 과학과 연구에 힘입은 것들이었다. 십자군 전쟁 이후 서구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부활하고 르네상스가 시작될 수 있었던 배경에 이슬람이 있었고, 그 배후에 종이가 있었다.
/전성원 계간 황해문화 편집장·성공회대 교양학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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