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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월 30일 월요일
['책과 출판의 문화사'] 종이가 바꾼 세상, 세상을 바꾼 책 /전성원
['책과 출판의 문화사']
종이가 바꾼 세상, 세상을 바꾼 책
세상을 바꾼 한 권의 책에 관해 묻거나 생각하게 되는 일이 있다. 세상의 모든 책이 그에 해당하지만, 동서양 문명의 경로를 역전시킨 출발점이 된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1299년)을 빼놓을 수 없다. 이 책은 서구인들에게 동방에 대한 호기심과 탐험 욕구를 한껏 부추겼다. 1492년 신항로 개척을 위한 항해에 나선 콜럼버스의 선장실에 놓여 있던 책도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었다.
747년 고선지 장군이 탈라스 전투에서 패배한 뒤 중국은 서진 정책을 펼칠 여유가 없었다. 황소의 난으로 당나라가 멸망한 이후 중국이 다시 서역 개척에 나설 수 있게 된 것은 칭기즈칸이 중원을 차지한 뒤부터였다. 몽골제국이 등장하기 전(7세기부터 13세기 중반)까지 이슬람 세력은 동서교통로를 독점하며 황금시대를 구가했다. 이슬람 세력에게 동서무역의 교통로를 차단당한 로마교황청에 동방으로부터 이슬람교도를 물리치는 크리스트교 군주 '프레스터 요한'이 출현했다는 시리아교회 주교의 보고가 전해진 것은 1145년의 일이었다. 프레스터 요한의 전설이란 예수의 탄생을 전한 동방박사의 후손 중 하나가 동방에 크리스트교 왕국을 세웠다는 것이었는데, 초기에는 인도, 몽골, 아프리카로 그 대상이 점차 달라졌다.
서방의 크리스트교 형제들을 구원하기 위해 동방 군주가 이슬람 군대를 물리치며 다가온다는 구원의 소식을 확인하기 위해 1245년 로마교황청은 몽골의 3대 칸의 즉위식에 사절단을 파견했다. 11세기 말에 시작된 십자군 원정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지만, 초원의 몽골 기병들은 1258년 사막을 가로질러 단숨에 바그다드를 함락시켰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얼마 뒤 전해진 몽골제국의 잔인한 정복 소식은 전 유럽을 충격으로 벌벌 떨게 하였다.
13~14세기 몽골제국은 유라시아 대륙의 대부분을 정복하고,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를 구축했다. 역참과 패자(牌子) 제도를 통해 초원길과 실크로드를 재건하는 한편 항만시설마다 시박사를 설치하는 등 문물교류를 장려했다. 특히 서구와 이슬람이 종교 갈등을 빚고 있던 당시에 이미 종교적 관용으로 교역의 장애물을 제거하였고, 그 덕분에 크리스트교도인 마르코 폴로의 뒤를 이어 이슬람교도 이븐 바투타가 몽골제국을 여행할 수 있었다. 몽골제국에 의해 동서교류가 활성화되면서 중국에서 화약과 도자기가 아랍에서 수시력을 비롯한 과학기술이 중국으로 전해졌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이런 역사적 배경 속에 저술된 책으로 서양 중세에 <성경> 이래로 가장 많이 팔린 베스트셀러로 손꼽힌다. 당시엔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출현(1450년대)하기도 전이었기 때문에 일일이 필경사의 손을 거쳐야만 했지만, 오늘날까지 이탈리아, 라틴, 프랑스 어 등 유럽 각국 언어로 번역된 140여개의 필사본이 남아 있을 정도로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이것이 가능했던 배경엔 탈라스 전투 이후 서방에 전해진 값싸고 질 좋은 '종이'라는 새로운 매체의 출현 덕분이었다. 종이는 이집트에서만 구할 수 있었던 파피루스나 책 한 권을 만들기 위해 200여마리의 가죽이 필요했던 값비싼 양피지와 달리 값싸고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질 좋은 매체였던 것이다.
/전성원 계간 황해문화 편집장·성공회대 교양학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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