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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4월 1일 수요일

남은 게 시라서…, 삶이 슬퍼서…, 그리워서… 40대에 첫 시집 낸 시인 3인방/경향신문 김여란 기자



ㆍ내가 만든 불안한 세계를 보면 공허… 그런데 행복합니다
ㆍ사회적 이름이 아닌 새 이름을 부르는 ‘새로운 삶’을 살 것
ㆍ질문도 많이 생겨… 시 통한 제2의 인생 생각해 보고 싶어

한 시인이 세상에 나오는 것은 하나의 세계가 태어나는 일이라고 했던가. 올봄, 첫 시집을 낸 시인 세 사람이 한자리에 모였다.

<아무도 모르게 어른이 되어>(문학동네)의 박은정씨(40), <스위치 백>(실천문학)의 박승씨(44), <에로틱한 찰리>(문학동네)의 여성민씨(48)다. 모두 40대지만 첫 시집을 떨리게 품은 시인에게 원숙함이나 중년 같은 수식어는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다. 남들보다 조금 뒤늦게 시를 만나 푹 빠진 이들은 ‘아무도 모르게 어른이 된’ 철부지고, 자신을 찾아가기를 멈추지 않은 사람들이다.

첫 시집에 대한 애정은 열렬하다. “시집 나오고 1주일쯤 지난 어느 새벽에는 간절히 죽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내가 만들어놓은 불완전한 세계를 보면서 공허한 거죠. 그런데 굉장히 행복합니다.”(여성민씨)

박승·박은정·여성민(왼쪽 부터) 시인이 31일 한자리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김영민 기자

비슷한 연배, 첫 시집이라는 인연으로 만났지만 세 시인의 색깔도, 삶도 확연히 다르다. 

박은정씨는 피아노를 오래 쳤다. 안개 같은 소녀가 등장하는 그의 시에는 음악과 소리의 흔적이 남아 있다. “네 무덤 같은 피아노가 여기 있고(…) 피아노가 녹는다 혀끝의 솜사탕처럼 끝없이 반복되는 전언들 너는 허공 위의 먼지가 되고 바닥에 닿는 허무가 된다 어떤 요구도 없이 슬픔의 끝까지 웅크리면 무거운 농담도 노래가 되었지”(‘피아노’ 중). 그는 30대 중반에 접어들어서야 시를 찾았고 썼다. “피아노 연주자로서는 별 가망이 없어 보였어요. 연애나 하다가 놀다가, 사는 게 지리멸렬했죠. 피아노도 연극도 실패했고 내가 좋아하는 것 중 남은 게 시였어요. 남들이 뭐라는 소리는 안 들어오고, 그냥 그런 마음이었어요.”

여씨는 그에게 “지금 시집에도 음악적 요소가 있지만, 앞으로 음악 자체에 주목하는 시를 써보라”며 “자기 삶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일일 것”이라고 말했다. 여씨 자신의 핑크빛 시집 <에로틱한 찰리>는 제목부터 농염하고 낯설다. 그의 시는 ‘내가 알지 못하는 내 안의 말과 문장’, 그 같은 불안과 슬픔을 좀 더 철저하고 처절하게 불러내는 여정이다. “브라운을 생각하지 방에 꽃과 브라운이 가득해지도록 하지만 브라운이란 뭘까 네가 물어서 나는 울며 너의 밖에서 생겨나는 방”(‘세 번의 방’ 중).

신학대학원을 나와 교회에서 오래 일했던 그는 불현듯 ‘너무 슬퍼서’ 마흔셋에 글쓰기를 시작했다. “어느 날 혼자 앉아 있는데 까닭을 알 수 없는 슬픔이 올라왔어요. 너무 슬퍼서 소리내서 엉엉, 사나흘간 계속 울었어요. 막연히, 내 안이나 밖이나 만져볼 수 없는 슬픔이 가득 차 있는 것 같았어요.” 이후로 글만 썼고 소설가가 됐고 시인이 됐다. 여씨는 ‘사회적인 이름 아닌 새로운 이름을 부르는 일이 시쓰기이고, 그게 앞으로의 새로운 삶’이라고 했다.

박승씨도 첫 시집을 매개로 새로운 제2의 인생 모양을 그려보고 있다. 그의 시의 뿌리는 시골인 고향, 그곳의 자연과 어머니다. 직장 생활 18년차, 매일 지하철에 2시간 몸을 싣고 출퇴근하는 대기업 부장이 그의 현실이다. 박씨의 시는 기억과 기원에 대한 향수, 지하철과 사무실에 사는 도시 생활인의 시선 사이를 오간다.

“날씨가 차가워지면 북쪽에서 반가운 소포가 온다(…) 낮은 해류를 지나온 가자미 식탁에 올라 붉게 아침을 토한다 달이 가까운 또 어머니의 눈이 내리는 이곳”(‘가자미’ 중). “지하 식당은 비린내 나는 생선조림 /순두부국 저녁 야근하고 /전철에 실려 집으로 간다 내일은 /(…)”(‘하얀 밤’ 중). 어릴 때부터 원숙한 세계를 그려왔던 박씨는 “제 시는 요즘 시류와는 동떨어진 스타일”이라며 “오래된 미래라는 말이 있는데 ‘오래된 오늘’이 있지 않을까 싶다. 내가 서 있는 곳은 거인의 어깨 위,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어깨 위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젊은’ 시인들은 계속 불확실한 것, 잡히지 않는 것으로 다가가 헤매려고 한다. 박은정씨는 “앞으로는 어둠 속의 것, 보이지는 않지만 만질 수 있는 것들을 찾아보고 싶다. 없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너무 가까이 있고 그게 우리 인생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박승씨는 “최근 질문이 많아진다”고 했다. “1+1=2가 아닌 것 같아요. 절대적 답이 있다는 사상, 사고방식이 회의적이라는 생각이 들고, 질문을 던지고 싶은 게 많습니다. 시를 통해서든, 어떤 형태로든 제2의 인생을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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