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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 10일 일요일

진태원의 다시, 변혁을 꿈꾸다-정치적인 것의 사상사10--좌우를 넘어 20세기 정치사상의 신기원이 되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641336.html


아렌트(사진)는 나치를 피해 가까스로 미국으로 건너간 1941년 이후 출판사 편집자로 근무하면서 <전체주의의 기원>을 집필한다.
진태원의 다시, 변혁을 꿈꾸다-정치적인 것의 사상사
3부. 냉전과 자유주의의 재구성
7. 존 메이너드 케인스: 수정자본주의
8.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 국가에 대한 공포에서 신자유주의로
9. 이사야 벌린: 자유 민주주의
10.한나 아렌트: 근대적 인간 조건 속에서의 자유
11.존 롤스: 자유주의의 철학적 정당성
지금은 국내에서도 20세기의 대표적인 정치이론가 중 한 사람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지만, 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한나 아렌트(1906~1975)는 국내 독자들에게 꽤 생소한 인물이었다. 아렌트가 낯설게 느껴진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기존의 정치 이론의 틀에 따라 분류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는 정치를 개인적 선호의 만족을 위한 수단으로 간주하는 자유주의자가 아니었으며 전통적인 공동체적 유대와 가치를 옹호하려는 공동체주의자도 아니었다. 아렌트가 혁명 전통을 찬양하고 대의 민주주의를 비판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사회주의 전통의 사상가로 분류하기도 어렵다. 또한 그가 시민 공화주의 전통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매우 독특한 형태의 공화주의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아렌트 스스로 자신의 입장이 독특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당신의 정치적 입장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 좌파는 제가 보수주의자라고 생각하고, 보수주의자들은 때로 제가 좌파라고 또는 괴짜라고 아니면 도대체 알 수 없는 인물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저는 제가 여기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다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이런 종류의 분류법을 통해 이 세기의 진정한 질문들이 조금이나마 해명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해를 위한 에세이들>)
그럼에도 오늘날 아렌트가 널리 읽히고 많은 연구의 대상이 되는 이유 중 하나는 역설적이게도 바로 여기서 찾을 수 있다. 그의 사상은 기존의 정치 이론이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여러 가지 현상과 문제를 독자적으로 해명하려는 시도들 속에서 형성되었고, 그 고투의 흔적은 오늘날의 철학과 정치 이론, 인문학 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 전체주의, 이주, 쓸모없는 인간, 시민불복종, 악의 평범성 등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진보 사상이 됐든 보수 사상이 됐든 그녀가 제기한 질문들을 우회할 수 없다는 점, 그것이 그를 하나의 상징적 기점으로, 새로운 시작(beginning)으로 만드는 이유다.
아렌트의 대표작을 하나 고르라면 대개의 연구자들이나 독자들은 <인간의 조건>을 선택할 것이다. <인간의 조건>이 아렌트 정치철학의 체계적인 면모를 가장 잘 보여주는 저작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당연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필자라면 <전체주의의 기원>을 선택할 것이다. 이는 마치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읽기 위해서 <인간불평등기원론>을 읽어야 하듯이, 또한 스피노자의 <윤리학>을 읽기 위해서는 <신학정치론>에 대한 독서가 필요하듯이, 아렌트 정치철학의 체계를 이끌어가는 실천적 관심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체주의의 기원>을 읽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더 나아가 이 책은 그 영향사라는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아렌트가 전체주의 지배의 핵심에 존재한다고 고발한 “쓸모없는 인간의 생산”을 염두에 두지 않고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를 이해할 수 없으며, 에티엔 발리바르의 극단적 폭력 개념을 해명할 수 없다. 또한 권리들을 가질 권리라는 개념을 무시하고 현대의 인권 정치 사상을 논하기 어렵다. 이런 의미에서 <전체주의의 기원>은 비단 아렌트만이 아니라 20세기 후반 정치 사상의 한 기원이 된다.
전체주의 사상의 뿌리가 된 스탈린(왼쪽)과 히틀러.
전체주의 체제에서
테러는 목적 그 자체가 된다
전체주의는 인간이 무용지물이 되는
체계를 갖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전체주의 통치가 근대적 인간의
삶의 조건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인간의 자유는 어떻게 가능한가?
1951년 출간되자마자 아렌트를 단숨에 저명한 사상가의 반열에 오르게 만든 이 책은 당시까지 아렌트의 삶의 경험과 분리될 수 없는 저작이다.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하이데거와 야스퍼스의 영향 아래 아우구스티누스에 관한 박사논문을 쓴 아렌트는 당시만 해도 정치에 거의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1920년대 말~30년대 초 독일에서 유대인으로 살아간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정치와 무관한 삶을 산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다. 그녀는 반유대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나치의 권력 장악이 진행되면서 유대인의 정체성에 대해 더 깊이 고민하게 됐으며, 유대 저항 단체들과 유대를 맺었다. 그리고 나치를 피해 가까스로 미국으로 건너간 1941년 이후 출판사 편집자로 근무하면서 <전체주의의 기원>을 집필한다.
아렌트에게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통해 파괴된 유럽 문명의 참상의 경험이 얼마나 심각한 것이었는지는 이 책 제1판 서론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아렌트에게 그것은 “모든 희망이 사라진 후의 적막과 비슷한 것”이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잃고 뿌리 뽑히는 사건이 전례 없이 대대적인 규모와 가늠할 수 없는 깊이로 전개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또한 그것은 “역사 인식과 정치사상의 수준에서 모든 문명의 본질적인 구조가 한계점에 달했다는 불명확한 일반적 합의가 팽배해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렌트는 “무모한 낙관주의에도 또 분별없는 절망에도 반대”하면서 당시 그의 세대 전체를 짓누르던 질문, 곧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왜 일어났는가?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설명하기 위한 기획에 착수한다. 그녀에게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의 세기가 우리 어깨에 지운 짐을 검토하고 의식적으로 떠맡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1부 반유대주의와 2부 제국주의, 3부 전체주의로 이루어진 이 책에서 앞의 두 부분이 전체주의 지배의 “기원과 요소”를 형성한다면, 후자는 그 “구체화의 형태”를 구성하는 것이다. 1930년대에 시작되어 1957년 출간된 카를 요아힘 프리드리히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의 <전체주의적 독재와 전제정치>에서 고전적인 형태를 획득한 초기 전체주의 연구의 맥락에서 본다면 아렌트의 저작은 매우 독특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우선 이 책은 다른 책들과 달리 역사학이나 사회과학의 방법론적 입장이나 연구 방식을 거의 준수하지 않고 있다. 전체주의의 기원에 반유대주의와 제국주의를 위치시킨다는 점도 그렇고, 비교정치학 방법론이나 역사적 인과관계에 대한 실증적 분석을 수행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경험적인 자료들이나 다양한 2차 문헌들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의 독특성은 전체주의에 대한 철저하게 철학적인 해석에서 찾을 수 있다. 아렌트의 사상에 가장 깊은 영향을 미친 철학은 <존재와 시간>에서 전개된 하이데거의 현상학이라고 할 수 있다. 하이데거가 세인(世人)의 비본래적인 삶의 경험 구조를 분석함으로써 본래적인 실존의 가능성을 찾았다면, 아렌트는 “인간성의 파괴와 일치하는” 전체주의에서 오늘날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비본래적인 삶의 가장 뚜렷한 모습을 발견했다.
아렌트에게 전체주의는 20세기 이전에 존재하던 독재체제나 전제정치의 후예가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통치” 체제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과거의 전제정치에서는 권력을 달성하거나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 테러를 사용했던 것에 비해 전체주의 체제는 이러한 도구적 합리성에 따라 테러를 자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체주의 체제에서 테러는 목적 그 자체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테러의 필연성은 계급 없는 사회로 나아가는 역사의 필연적인 법칙(스탈린주의)이나 선택된 인종과 퇴락한 인종들 사이의 전쟁의 숙명(나치즘)에 의해 정당화된다. 전체주의는 “인간에 대한 전제적 지배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완전히 무용지물이 되는 체계를 갖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을 예비하는 듯한 논의로 책을 마무리한다. 그에 따르면 고립(isolation)은 테러의 가장 비옥한 토양이자 결과다. 권력은 함께 행동하는 사람들로부터 나오는 반면, 고립은 무기력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고립은 인간의 제작 능력까지 침해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가장 기초적인 형태의 창의성, 즉 공동 세상에 자기 자신만의 것을 더할 수 있는 능력이 파괴될 때” 이러한 고립이 완전히 참을 수 없는 것이 된다는 점이다. 아렌트는 “노동이 그 주요 가치를 규정하는 세상, 즉 모든 인간의 활동이 노동으로 전환된” 세상, 따라서 인간이 제작인(homo faber)이 아니라 노동하는 동물(animal laborans)이 된 세상이 바로 그곳이라고 본다. 아렌트는 전체주의 통치가 이제 “항존하는 위험”으로, 근대적인 인간의 삶의 조건으로 존재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조건에서 인간의 자유는 어떻게 가능한가? 이것은 아렌트 정치 사상의 주도적인 물음이 되었으며, 오늘날 여전히 우리의 물음이 되고 있다.
진태원 고려대민족문화연구원 인문한국 연구교수, 사진 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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