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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 10일 일요일

진태원의 다시, 변혁을 꿈꾸다-정치적인 것의 사상사11-소수 자본가의 통제 막아내는 ‘재산 소유 민주주의’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643494.html


존 롤스는 평생 정의 문제 하나만을 다룬 철학자였다. 롤스는 넓은 의미에서 복지국가 자본주의의 철학적 옹호자로 알려져 있었지만 1990년대 중반 이후 복지국가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분명히 하면서 자신이 옹호하는 체제는 “재산 소유 민주주의”라고 밝힌다.
진태원의 다시, 변혁을 꿈꾸다-정치적인 것의 사상사
3부. 냉전과 자유주의의 재구성
7. 존 메이너드 케인스: 수정자본주의
8.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 국가에 대한 공포에서 신자유주의로
9. 이사야 벌린: 자유 민주주의
10.한나 아렌트: 근대적 인간 조건 속에서의 자유
11.존 롤스: 자유주의의 철학적 정당성
몇 년 전 국내에서는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베스트셀러를 기록하면서 큰 화제를 모은 바 있다. 평이한 개론서라고는 하지만 철학책이 100만부 넘게 팔렸다는 것은 대단히 징후적인 일이다. 여기에는 하버드 대학의 교수가 저술한 책이라는 점도 영향을 미쳤을 테지만, 우리 사회가 정의롭지 못한 사회라는 독자들의 암묵적인 인식과 불만을 감안하지 않고서는 이 현상을 제대로 설명하기 어렵다. 사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장의 노동시간과 가장 높은 자살률, 극심한 빈부격차, 민간인 사찰, 국가정보기관의 부당한 대통령 선거 개입 등으로 얼룩진 나라에서 정의에 관한 높은 관심이 생겨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존 롤스(1921~2002)야말로 오늘날 다시 읽어야 할 철학자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롤스는 20세기 미국의 대표적인 철학자 중 한 사람이며, 현대 정치철학의 근간을 마련한 철학자 중 한 사람이다. 중요한 것은 그가 평생 정의 문제 하나만을 다룬 단일 문제의 철학자라는 점이다. 롤스는 <정의론> 첫머리에서 다음과 같이 단언했다. “사상 체계의 제1덕목을 진리라고 한다면 정의는 사회 제도의 제1덕목이다.” 이러한 주장 하나만으로도 롤스는 우리가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철학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롤스는 일찍부터 국내 학계에 소개되고 널리 연구되어 왔다. 이미 1980년대에 그의 대표작인 <정의론>(1971)이 번역·소개된 바 있으며, <공정으로서의 정의> <정치적 자유주의> <만민법> <정의론 개정판> 등과 같은 그의 주요 저작들도 번역된 바 있다. 아울러 그의 철학에 기반을 두고 정치철학 및 사회윤리학을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그의 철학은 과연 한국 사회의 부정의를 설명하고 그에 대한 대안을 마련하는 데 적합한 이론적 기반을 제공해줄 수 있을까?
이글에서 이 질문에 대해 충분한 답변을 제시하지는 못하겠지만, 한 가지 문제를 중심으로 간략히 검토해볼 수는 있다. 그것은 바로 신자유주의라는 문제다. 지난 2008년 경제 위기 이후 다시 한 번 드러난 것처럼 오늘날 한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들이 겪고 있는 부정의의 핵심에는 신자유주의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에 대한 엄정한 비판과 그에 대한 적절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정의론은 그 자격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롤스는 구체적인 사회·정치 현상을 분석하기보다 정의로운 사회의 일반 원리를 규범적 차원에서 정당화하는 데 주력한 철학자이기 때문에, 신자유주의 문제를 기준으로 그의 이론을 평가하는 것은 부당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의 일반적인 정의론이 신자유주의에 대해 어떤 비판적 함의를 지니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은 가능하며, 이는 그의 이론의 현실 적합성을 따져보는 데도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닐 것이다.
롤스 정의론의 두 가지 기본 원칙은 잘 알려져 있다. “첫째, 각자는 다른 사람들의 유사한 자유의 체계와 양립할 수 있는 가장 광범위한 기본적 자유에 대하여 평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 둘째,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은 다음과 같은 두 조건을 만족시키도록 조정되어야 한다. (1)그 불평등이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되리라는 것이 합당하게 기대되고, (2)그 불평등이 모든 사람에게 개방된 직위와 직책이 결부되게끔 편성되어야 한다.” <정의론> 첫 번째 원칙은 “평등한 자유”의 원칙이라고 할 수 있고, 두 번째 원칙 중 (1)은 차등의 원칙이며 (2)는 공정한 기회 균등의 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1946년부터 무상급식을 시작한 스웨덴 한 초등학교 점심시간 장면.
복지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자본이 소수의 자본가에 집중돼
정치적 자유의 공정한 가치를
모든 이들에 보장하는 게 불가능하다
불평등을 바로잡을 충분한 과세를
시행할 수 있는 가능성도 제약돼 있다
롤스의 재산 소유 민주주의 핵심은
부와 자본의 소유권을 분산해
소수 집단의 통제를 방지하는 것이다
첫 번째 원칙에는 시민의 기본적 자유, 곧 정치적 자유 및 언론·집회·양심·사상의 자유, 재산권 및 신체의 자유, 부당한 체포 및 구금을 당하지 않는 자유 등이 속한다. 두 번째 원칙은 소득 및 재산의 분배의 문제와 관련된다. 롤스는 재산 및 소득의 분배가 반드시 균등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불평등이 존재할 수 있으며 그것 자체가 부정의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러한 불평등이 정의로운 불평등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에게 이득을 보상해주는 것으로 귀결되는” 것, 특히 “최소 수혜자 계층에게” 이득을 보상해주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롤스 정의론은 최소 수혜자 계층의 이익을 원칙적으로 보장한다는 점에서, 1%의 소수가 사회의 부 대부분을 전유하는 체계를 구조화하는 신자유주의적 체제에 대해 근본적으로 비판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롤스는 최소 수혜자 계층이 겪는 불평등에 대하여 보상적 이득을 보장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사회의 구조적 불평등 자체를 개조하거나 제거하려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는 비판이 가능하다.(셸던 월린, <정치와 비전>) 이러한 비판이 어느 정도 타당하다 해도 롤스의 이야기에 좀 더 귀기울여볼 필요가 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롤스가 자신의 이전 작업들을 개정하고 확장하면서 롤스가 옹호하는 사회경제 체제의 성격이 무엇인지 좀 더 잘 알게 되었다. 이전까지 롤스는 넓은 의미에서 복지국가 자본주의의 철학적 옹호자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정의론 개정판>(1999)과 <공정으로서의 정의: 재진술>(2001) 같은 저술에서는 복지국가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분명히 하면서 자신이 옹호하는 체제는 “재산 소유 민주주의”라고 밝히고 있다.
재산 소유 민주주의는 20세기 초 영국 정치가들이 제안한 것으로, 처음에는 보수당의 정치적 이념으로 발전되었다가 1950년대 이후에는 영국 노동당이 제안하는 새로운 사회주의 모델 중 하나로 변형되었다. 그 대표적인 이론가 중 한 사람이 경제학자인 제임스 미드(1907~1995)였는데, 롤스는 바로 미드에게서 이 개념을 가져온다. 롤스는 재산 소유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공정으로서의 정의: 재진술>)이라고 지적한다. 어떤 점에서 이것이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일까?
미드에게 재산 소유 민주주의는 복지 자본주의의 구조적 결함을 해결하기 위한 대안이었다. 부자들에게 높은 세금을 거두어 가난한 이들에게 직·간접적인 소득 보전을 해주려는 복지 자본주의는 이중적 측면에서 결함을 지니고 있다. 우선 그것은 높은 과세로 인해 경제체제상의 비효율성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또한 그것은 물적·인적 자본의 측면에서 계급적 불평등을 구조적으로 허용하는 체계이며, 사후적인 소득 재분배를 통해 이를 완화하려고 할 뿐이다. 이에 대하여 미드는 재산이 모든 시민에게 거의 평등하게 분배되는 재산 소유 민주주의 또는 “자유주의적 사회주의”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롤스가 복지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이유는 세 가지다.(<공정으로서의 정의: 재진술>) 첫째, 복지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자본이 소수의 자본가 수중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정치적 자유의 공정한 가치”를 모든 이들에게 보장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는 곧 복지국가에서도 소수의 부자들이 대다수 시민들에 비해 정치 과정에 훨씬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기는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둘째, 따라서 이 체제 아래에서는 시장이 산출한 광범위한 불평등을 바로잡기 위해 충분한 과세를 시행할 수 있는 가능성이 구조적으로 제약되어 있다. 셋째, 복지 자본주의에서는 정부에 일차적인 수입 및 자원을 의존하는 이들과 시장을 통해 자원을 획득하는 이들 사이에 간극이 생겨남으로 인해 시민들 사이에서 호혜성 원리에 기반을 둔 평등한 관계를 창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줄어든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롤스는 복지 자본주의에 대해 두 가지 가능한 대안을 제시한다. 하나는 미드가 옹호했던 자유민주주의적 사회주의이며, 하나는 이와 구별되는 재산 소유 민주주의다. 롤스는 전자에 비해 후자를 택하는데, 이는 전자가 구조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한 사회의 역사적 여건이나 관행, 전통에 따른 개인적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롤스가 선택한 재산 소유 민주주의의 핵심은 부와 자본의 소유권을 분산함으로써 인구 중 소수 집단이 경제적·정치적 삶을 통제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다.
롤스의 제안이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인지 아니면 자본주의 내의 구조 개혁안인지는 여전히 논란거리이다. 하지만 롤스의 정의론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적 분석과 대안 모색을 위해서도 여전히 가치를 지니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진태원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인문한국 연구교수, 사진 길 제공,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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