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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 14일 목요일

김기협, 권력주의 국가와 권위주의 국가/프레시안 이재호 기자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26273&ref=fb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과 새정치민주연합 홍익표 의원실이 '문명 전환 시대, 한반도의 진로는?'을 주제로 마련한 역사학자 김기협 선생의 마지막 세 번째 강연이 지난 7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진행됐다. 

지난 4월 15일 '서세동점(西勢東漸, 서양의 세력이 동양을 점령하는) 현상의 퇴조'를 주제로 세계패권의 변화와 우리의 역할에 대해 살펴본 뒤 (☞관련 기사 : 서세동점의 퇴조, 중국은 미국과 다를까?) 22일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한계'를 주제로 자본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는 무엇이며 한국 사회가 어떤 가치를 지녀야 하는지 알아봤다.(☞관련 기사 : 자본주의, 더이상 지속가능한 체제 아니다 

마지막 강연으로는 '권력주의 국가와 권위주의 국가'를 준비했다. 지난 두 번의 강연이 대외적 변화에 우리가 어떻게 발맞춰갈 것인가에 대해 논의하는 시간이었다면, 이번 강연은 한국을 어떤 국가로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해 알아보는 자리였다.  

김기협 선생은 근대 국가가 이른바 '물질적 진보'에만 초점을 맞췄고 '도덕적인 권위'를 배제시켜왔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근대 국가의 기본적인 속성과 더불어, 근대화를 뒤늦게 따라갔던 한국은 선발주자들을 얼른 쫓아가야 한다는 조급함 때문에 기존에 한국 사회가 갖고 있던 전통이나 관습들을 억누르고 달려왔다. 이에 국가 통치에서 '도덕성'은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  

김기협 선생은 "물질적인 진보와 정신적인 측면을 잘 배합하고 활용해야 국가의 기본 목적에 충실할 수 있는 것인데, 계몽주의 사상을 배경으로 형성된 근대국가는 물질에만 집중하고 정신적인 측면은 소홀히"했지만 "인간 사회에서는 리더십과 신뢰, 공동체 등의 이야기들을 하게 되는 상황, 즉 정신적인 측면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 도래한다"면서 도덕적 권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대담자로 나선 김동춘 성공회대학교 교수는 한국이 쫓기는 근대화를 한 것과 더불어 '분단'이라는 특수 상황까지 겹치면서 남북 정부 모두 도덕성을 갖기 어려운 환경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분단체제라는 것이 끊임없이 전쟁의 이름으로 내부의 부도덕성을 덮어버릴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해주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적에 이겨야 하고 적의 위협이 있으니까 이 정도는 용서하고 넘어갈 수 있다는 과정이 있기 때문"이라며 "남북 간 긴장을 어떻게 하면 평화로운 상태로 전환시킬 수 있을지가 국가의 도덕성을 만드는 기초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날 강연은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 박인규 이사장의 사회로 진행됐다. 다음은 강연 주요 내용이다. 
▲ 역사학자 김기협 ⓒ홍익표의원실

[기조발제]  

김기협 : 오늘은 국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국가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현 정권을 지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커지고 있는 것 같은데, 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성향에 따라 나뉘는 것 같다.  

대체로 보수적인 사람들은 제도는 그대로 두고 운영만 잘하면 된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보다 개혁적인 사람들은 제도까지도 손을 볼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제도를 고치는 문제가 있다고 해도 '헌법'이라는 울타리, 즉 일종의 기준이 있기 마련이다. 보다 강도가 센 개혁파들은 우리 현실 자체가 헌법적 기준에서 너무 벗어나 있다고도 이야기한다.  

그런데 저는 오늘 울타리를 벗어나는 이야기를 좀 하려고 한다. 이런 이야기가 너무 과격한 것 아니냐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헌법 정신 안에서 제도를 고치는 것이라고 해도 헌법이라는 울타리 밖에 무엇이 있는지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기존 질서에 손을 대는 것에는 신중을 기해야 함은 분명하다. 

우선 우리 헌법 정신에는 도덕적 권위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다. 도덕적인 권위가 국가와 정치에 있어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한 생각을 갖고 있어야 이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헌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아무것도 명시돼있지 않다는 것에 일차적인 문제가 있다.

잠시 역사학자의 이야기를 빌려오고자 한다. <역사란 무엇인가>를 집필한 E. H 카는 역사학의 탐구와 서술에서 도덕성을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도덕성의 원리가 보편성을 갖지 못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로빈슨이라는 사람이 밤에 담배를 사러 나왔다가 존스라는 사람의 차에 치였다고 가정해보자. 당시 존스라는 사람이 음주 상태였고 차량도 정비 불량이었고 도로 상태도 좋지 않았다고 한다면, 사고의 원인으로 존스 씨의 상태와 존스 씨의 차량 상태, 도로 상태 등을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로빈슨 씨가 담배를 사러 나간 행위 같은, 어쩌다 한 번 발생한 일을 원인으로 꼽기는 어렵다.

카는 도덕성이라는 것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일반화를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도덕성은 소위 '엿장수 맘대로'라는 것이다. 그래서 카는 역사 서술에 있어 물질적 진보를 기준으로 삼는다. 세상이 진보해나가는 과정을 읽어내서, 그 과정에 도움이 되는 것은 훌륭한 행동이고 방해가 되는 것은 반동이라고 규정한다. 즉 카는 역사의 탐구와 서술에서 도덕성을 배제하고 물질적 진보만을 기준으로 삼은 것이다.

그런데 카는 스스로가 반동적인 위치에 빠졌다는 딜레마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19세기 물질지상주의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칼 포퍼, 이사야 벌린과 같은 당대의 유명 역사학자들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그런데 세상은 물질지상주의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역사학자들이 바라는 방향으로 변화해왔다. 카의 기준에 따르면 그는 세상의 변화에 맞추지 못한 '반동'인 셈이다. 

카가 이 책에서 한 말 중에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끝없는 대화'라는 구절이다. '대화'라는 말을 꺼낸 것은 카의 입장에서 일종의 '양보'였다고 생각된다. 19세기 합리주의는 현재가 과거를 지배하는 형태였다. 그게 20세기 들어와서 바뀌는 과정에 들어서니까 카는 자신의 입장으로 버틸 수가 없어서 결국은 '대화하는 것'이라고 양보한 셈이다.  

▲ 역사학자 김기협 ⓒ홍익표의원실
그는 또 그동안 써왔던 보잘것없는 속임수를 고백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는 "저는 현재를 운운하면서도 지금까지 과거와 현재라는 편리한 말을 끊임없이 사용해왔습니다. 그런데 주지하다시피 현재란 과거와 미래를 갈라놓는 가공의 선이라는 관념적인 존재에 불과합니다. 현재를 운운하면서도 저는 이미 현재와는 다른 시간적인 차원을 머릿속에 몰래 집어넣었습니다. 과거와 미래는 모두 동일한 시간개념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과거에 대한 관심과 미래에 대한 관심이 서로 연결돼있다는 것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대화의 주체로 현재라는 말을 썼지만 사실 카의 속셈은 그게 아니었다. 과거와의 대화에 나서는 주체는 미래였던 것이다. 현재는 대역으로 나온 것이다. 미래는 아직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라는 대역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간판으로 현재를 내놓고, 실제로는 미래와 과거를 대화하게 했다. 그리고 미래를 대변하는 것은 본인과 같은 역사학자라고 주장했다.

이는 '뉴턴'적인 세계관인데 시간을 하나의 직선으로 보는 것이다. 하나의 직선에서 과거와 미래는 길이를 가진 선분이지만 현재는 그 두 개의 선분을 갈라놓는 점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에는 내용이 담길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기계론적인 세계관은 현재의 의미를 축소시키는 것이고, 이는 곧 물질적인 조건(진보)에 의해서만 세계와 역사를 바라보고 인간적인 조건(도덕성)이 개입할 길을 가로막는 것이다.  

이는 유럽 근대문명 속에 태어난 근대국가의 특성으로, 유럽 근대국가는 국가 운영에 권력만을 사용하고 권위의 역할을 부정하는 기본 경향이 있다. 계몽주의 시대 분위기가 반영된 것으로 이성에만 의존하고 감성을 배척하는 근대정신의 한 측면이다. 권력에만 의존하는 국가를 권력주의 국가, 도덕성에 의한 통치를 지향하는 국가를 권위주의 국가라 할 수 있다. 유럽 근대국가가 권력주의 국가였다면 유교 전통 등에 의한 옛 동아시아 국가를 권위주의 국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권위는 도덕성 위에 서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의 대한민국은 도덕적 권위를 무시하는 권력주의 성격이 극심한 국가다. 고위공직자 청문회 때마다 기막힌 꼴을 보게 되는 까닭이다.

정상적 사회에서는 무력이든 재력이든 학력이든 힘을 가진 사람들이 사회의 안보를 위해 노력한다. 자기네 우월한 위치를 보장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형성되는 엘리트 계층은 지배력(권력)보다 지도력(권위)의 형태로 힘을 행사한다. 

한국 사회의 지도력 부재는 일본 식민통치에 의해 구조화된 것이다. 일본에 붙어 자기가 속한 사회를 등지는 친일파에게 재력과 학력이 집중되었다. 이 집단을 발판으로 해방 후에는 미국에 붙어 민족사회를 등지는 세력이 형성되었다. 한국의 국가가 극심한 권력주의 성격을 띠게 된 까닭이다.
현재가 의미를 갖는 것은 우리가 현재에 속해있기 때문이다. 이걸 마치 어떤 객관적이고 초월적인 이성이 내려 보는 것과 같은 입장에서 판단할 때 현재에 충실해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럼 도덕성의 원리에는 보편성이 없고 진보성의 원리에는 보편성이 있을까? 역사의 진행방향에 대해서는 보는 사람마다 의견이 다를 수 있다. 19세기 사람들은 진보가 어떤 방향인지에 대해 거의 같은 공감대를 가지고 있었다. 즉 물질적 조건의 개선을 진보로 보았다. 카는 그런 공감대가 지켜지길 바랐다. 그리고 그것이 지켜진다는 가정하에서 도덕성을 배제하고 물질적 진보만을 기준으로 역사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50여 년이 지난 지금, 이러한 진보를 회의적으로 보는 시각이 대세가 됐다. 카가 보편성이 담보된다고 주장했던 진보성이 의심을 받게 된 것이다.  

한편 도덕성 문제를 짚어보자면, 공자의 역할이 바로 도덕성을 보편적인 (국가 운영의)원리로 발전시키는 데 있었다. 도덕성이 보편적 원리를 갖기 위해서, 즉 시대 변화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지켜지기 위해 많은 학자와 통치자, 지식인들이 노력했던 것이 중국 동아시아 문명의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근대 문명에 들어와서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물질적인 것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데 왜 그러한 정신적인 요소를 들고나오느냐는 반박이 제기됐다. 특히 계몽주의 시대부터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요소들만 가지고 세상을 구성하고 조직하고 운영하는 방향이 세워졌다.

국가의 첫 번째 목적은 사회가 대형화되면서 대규모 사회 조직의 질서를 지키는 데 있다. 그런데 질서 유지에는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물질자원을 활용한 권력도 쓰임새가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는 않으나 마음에 느껴지는 도덕성이나 감성 등도 중요한 역할을 맡을 수 있다.

결국 이 두 측면을 잘 배합해서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질서유지라는 국가의 기본 목적에 충실할 수 있는 것인데, 계몽주의 사상을 배경으로 형성된 근대국가는 물질에만 집중하고 정신적인 측면은 소홀히 했다.

인간 사회에서는 정신적 측면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한다. 리더십과 신뢰, 공동체 등의 이야기들을 하게 되는 상황이 도래한다. 계몽주의 이후 형성된 근대국가에서는 도덕성을 필두로 한 정신적인 측면이 필요 없는 것처럼 여겨졌지만, 사실문제는 이러한 측면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제도화돼있지 못했다는 데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 내에서 일정한 역할을 맡는 데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즉 도덕적 권위라는 것이 근대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제도화되지 못했고, 설사 제도화된다고 해도 주변 요소에 그치게 됐다.

그런데 비공식적으로라도 그러한 정신적 요소, 즉 도덕적 요소가 비교적 큰 역할을 맡는 사회가 있는가 하면 거의 아무런 역할도 맡지 못하는 사회도 있다. 사회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어제 박상옥 대법관이 국회 인준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건 아무리 물질적인 측면만으로 구성된 근대 국가라고 할지라도 참 일어나기 힘든 일이다. 그럼에도 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한국 사회가 제도 외적인 측면에서도 도덕적 요소에 취약한 면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가 도덕적인 요소를 중시하지 않게 된 것은 근대화 시점과 연관이 있다. 영국은 내적인 조건에 의해 근대화의 깃발을 제일 먼저 들게 됐는데, 선발 주자로 여유 있게 근대화를 추진하다 보니 여기에 저항을 일으키는 기존 제도나 관습이 상당한 수준까지 허용됐다. 근대적 기준에서 보면 비합리적인 관습과 제도들이 많이 남아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러한 비합리적인 관습과 제도들이 권위주의 국가(도덕성에 의한 통치)의 요소를 이뤘다고 볼 수 있다. 

반면 후발주자들은 어떻게 하면 선발 주자를 빨리 따라잡을 수 있을까만 생각했다. 그런 와중에 기존의 제도나 관습이 저항을 일으키면 이를 억누르는 데 급급했다. 근대화를 늦게 실행한 곳일수록 철저하게 이런 경향을 보였다. 한국의 경우 근대화를 쫓기는 마음으로 하다 보니까 관습과 제도 등을 아주 쉽게 깔아뭉개 버리고 새로운 기준만 추구하게 됐다. 여기에 근대화 과업이 본격적으로 떠오른 시점 이후에는 식민지를 겪었다. 그러다 보니 예속과 종속의 주체인 국가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예민하게 스스로를 맞추는 작업들이 이뤄졌다. 즉 후발 근대화 국가일수록 국가 통치에서 권위(도덕성)가 차지하는 역할이 줄어들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제 앞으로 세계는 세계정부를 세워나가는 과제를 남겨두고 있다. 근대 국민국가는 원래의 국가 개념인 질서유지보다 대외적인 경쟁을 더 앞세우는 경향을 가지고 있었는데 세계정부는 그래서는 안 된다. 경쟁보다는 협력, 발전보다는 질서 등을 원리로 삼는 세계정부가 돼야 한다.  

여기에 기존의 국가들도 기존 근대 국가의 성격과 다르게 나타나는 세계정부의 모습과 호응하는 변화가 필요하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의 헌법 정신은 여전히 계몽주의의 바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앞으로는 계몽주의적인 이념을 벗어나서라도 국가가 어떻게 더 훌륭한 기능과 역할을 수행할지 고민해야 한다.

[대담] 한국 사회, 불법을 해야만 구차하게 '빌어먹을' 수 있는 곳? 

김동춘 : 국가와 지도세력이 도덕성을 유지할 수 있으려면 세 가지 전제가 있어야 한다. 첫 번째는 전쟁 상태가 아니어야 한다는 점이다. 도덕 정치에서 맹자가 강조한 가장 기본적인 것은 전쟁상태에서는 국가 도덕성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전쟁 중에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를 제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세계는 어떠한가. 한반도는 6.25 이후 65년째 극단적 대치 상태에 있고, 세계적으로는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서양 근대국가 주도에 의한 영토전쟁, 식민지전쟁 등이 아직도 그치지 않고 있다. 한마디로 천하 대란의 시대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 성공회대학교 김동춘 교수 ⓒ홍익표의원실

두 번째, 재산권의 정당성이다. 사회학자 뒤르켐은 재산을 획득하는 과정이 정당하지 않거나 합법적이지 않으면 경제 질서를 유지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부가 획득되는 방법으로 노동, 상속, 양도 등이 있는데 노동이나 증여·상속 과정이 공정하거나 투명하지 않고 강탈 또는 불법적으로 형성된다면, 그러한 국가에서는 시민윤리와 직업윤리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특정한 집단이 특정한 재산을 획득했을 때 그것이 절차적·법적 정당성을 가지지 못하고 나머지 사람들을 설득할 수 없다면 그건 강탈이나 다름없다. 한편으로는 100년 전에 제기됐던 이런 이야기가 지금 한국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세 번째는 사법 정의가 서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법이 그 사회의 도덕성을 표현해야만 사람들이 법에 승복한다. 여기에는 법의 조항뿐만 아니라 해석과 집행의 문제도 포함된다. 
법의 기본 원리는 정의이고 정의의 원리는 '신상필벌'이다. 죄지은 사람에게는 벌을 주고 좋은 일을 한 사람에게는 칭찬을 주는 것이 원칙인데 한국에서는 과거 청산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다. 과거에 범죄를 저질렀던 공무원이나 국가가 처벌받지 않는다면 누가 국가를 신뢰하겠나? 이렇게 되면 국가 자체가 범죄 집단이 될 수 있고 실세 공무원이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면 그 국가에서의 도덕성을 물어볼 것도 없는 문제가 된다.  

위에서 언급한 이 세 가지의 원칙이 지켜졌을 때 도덕적 국가가 가능하다. 이를 기준으로 우리가 어떻게 도덕적인 국가를 만들 수 있느냐를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단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근대 국가는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측면에서 조금씩 결격사유가 있다. 완벽한 도덕성을 가진 국가는 없다.

특히 서구 제국주의는 식민지 침략의 폭력성과 불법성 측면에서 죄가 있다. 서구의 어떤 제국주의 국가도 이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어느 정도 범죄성을 가지고 있었고 이후 이를 떨쳐버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충분하진 않았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세계질서가 패권을 가진 자에 의해 움직이고 있고, 도덕적이어야 할 패권국가가 너무나 많은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이 오늘날 세계질서의 혼돈과 테러에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된 것이다.  

이렇듯 근대 국가 성립 과정에도 도덕적 결함이 있었는데 근대화 후발 국가는 식민 경험에 후발 주자 콤플렉스까지 결합됐다. 그래서 이런 국가의 지도층은 충분한 도덕적 권위를 발휘하기 어려워진다. 독일 학자인 한스-울리히 벨러의 표현에 따르면 이는 '방어적 근대화'다. '쫓기는 근대화'라고도 할 수 있는데 전쟁의 위협과 하루빨리 서구를 따라가야 한다는 조급함, 또 자신의 도덕적 결함을 수습하려는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다. 

한국의 근대화가 이러한 경우에 속하는데, 친일파들은 해방 이후 자신의 도덕적 결함을 덮기 위해 극우 반공주의를 내걸었다. 박정희의 근대화 역시 마찬가지다. 친일 콤플렉스와 쿠데타로 집권했다는 정권의 정통성 문제 때문에 아주 제한된 기간 동안 가시적인 성과를 내야 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지도자나 지도 세력은 국민들을 설득할 수 있는 도덕적 권위가 결핍돼있었다. 그러다 보니 한국은 불법을 해야만 먹고 살 수 있는 상황에 처했다. 작가 김훈 씨가 <중앙일보>에 이렇게 썼다. '불법을 해야만 구차스럽게 먹고 살 수 있는 이 세상이다'라고.  

국가가 국민들에게 도덕적 권위를 갖기가 어려운 한국의 상황에서는, 그래서 헌법의 내용이나 정신이 매우 중요하다. 헌법의 원리 원칙에 따라 운영된다면 아주 이상적인 국가 운영이 가능할 수 있는데, 문제는 헌법의 해석 과정에서 힘의 원리가 작동한다는 것이다.  

실제 박근혜 정부는 헌법 전문에 나와 있는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라는 문구 하나로 통합진보당을 해산시켰다. 그런데 헌법 119조 2항에 나와 있는 '국민 생활의 균등을 기하고 기회의 균등을 기한다'는 내용으로는 재벌 해체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고, 할 생각도 없다. 어떤 조항을 가지고는 정당 하나를 해산시킬 수 있는데, 헌법(119조 2항)에 분명히 있는 내용에도 불구하고 재벌 해체는커녕 공정한 거래를 확립시키거나 재벌에 대한 제재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결국 헌법의 내용을 가지고 도덕성을 이야기하기는 어렵고 법의 해석, 적용 문제가 따라 들어갈 수밖에 없다.  

여기에 한국은 분단이라는 특수 상황도 있다. 남북 모두 국가가 도덕성을 갖기 위해서는 분단을 넘어 평화체제를 수립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물론 평화체제 수립이 모든 것에 우선되는 사항은 아니지만, 분단체제라는 것이 끊임없이 전쟁의 이름으로 내부의 부도덕성을 덮어버릴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해주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적에 이겨야 하고 적의 위협이 있으니까 이 정도는 용서하고 넘어갈 수 있다는 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북 간 긴장을 어떻게 하면 평화로운 상태로 전환시킬 수 있을지가 국가의 도덕성을 만드는 기초가 될 수 있다.  

두 번째는 재벌이 부를 획득하는 과정이 합법적이고 정당했는가를 따져봐야 한다. 대법원에서 하청업체 직원으로 근무하다가 해고된 최병승 씨가 부당해고를 당한 것이고 이에 따라 중앙노동위원회가 현대자동차에 복직 명령을 내렸는데도 현대자동차는 이를 외면하고 있다. 이렇게 법을 어기는 상황에서도 재벌 사주를 처벌할 수 없는 나라에서 어떻게 경제 정의를 말할 수 있겠는가? 또 경제 정의가 없는데 어떤 도덕성을 기대할 수 있겠으며 전문가들이 어떻게 양심에 따라 행동하기를 기대할 수 있겠나?

우리나라에는 전문직의 직업윤리라는 것이 없다. 모든 것이 힘으로 통하는 나라에서 타협하지 않고 소신을 지킬 수 있는 전문가가 몇이나 되겠나? 만약 그런 전문가가 많았다면 세월호 참사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엉터리 운항을 하는 과정에 수많은 전문가들이 개입돼 있었을 텐데, 그 중 누구도 운항하면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다. 

▲ 2014년 4월 16일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한 세월호 ⓒ연합뉴스
    
전문가들은 왜 'No'라고 말하지 못했을까? 정부로부터 프로젝트 받고 기업 용역을 받으려면 조용히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대학교수의 경우 괜히 튀는 짓을 했다가 학계에서 자기 동료들한테 소위 '왕따'를 당할 수도 있고 심한 경우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 이런 나라에서 국민들에게 직업윤리를 기대할 수 있겠나?

상황이 이렇다 보니 관료와 전문가, 심지어는 국민들까지 같이 썩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금의 현실은 구한말과 비슷하다. 나라가 망해가고 있는데, 어떻게 도덕성을 세울 것이며 어떻게 공정한 자본주의를 만들 수 있을지 명확한 청사진이 보이지 않는다. 

김기협 : 망하기 직전이라고 하셨는데, 아직은 아닌 것 같다. 우리 사회가 다른 건 잘하는 것이 없어도 맷집 하나는 좋지 않나.(웃음) 망할까봐 걱정하면서 방어적인 입장에서 사회를 바꾸기보다는, 좋은 기회가 모처럼 닥쳤는데 이 기회를 잘 살리자는 태도로 변화에 임했으면 좋겠다.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평화 상태가 도덕성의 성립과 발현을 위한 필요조건인 것처럼, 그래서 남북관계가 국내 정치의 개선을 위해서도 필요조건이라는 관점을 피력하셨는데 여기에는 좀 이의가 있다. 선후관계에 대해 너무 확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국내문제라도 국가 차원의 문제와 더 좁은 범위, 낮은 층위의 문제도 있지 않나. 여러 방향의 노력을 나란히 진행해야 한다. 이 방면의 노력이 저 방면의 간접적인 효과를 끼치면서 서로 주고받는 과정이 필요하다. "정답은 이거다" 라면서 너무 목표에 기울어지기보다는 과정의 타당성을 생각해야 한다. 목표의 정당성보다 과정의 타당성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  

특히 민족문제를 이야기할 때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통일이라는 말을 가급적 쓰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너무 앞질러 생각하면 그에 따르는 반발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과정을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다.

민족주의자의 관점에서 통일을 바람직한 목표로 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것은 마음속의 소원으로 품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현실적인 목표로 내거는 것은 자제해야 한다. 그 방향을 뒷받침하기 위해 구체적인 목적의식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여러 일들을 하고, 그러면서 그 과정에서 악셀과 브레이크를 적절히 밟아야 한다.  

김동춘 : 통일이 안 되면 도덕성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국가의 도덕성이 평화의 문제와 연동돼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드린 말씀이었다.  

적극적 평화는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갈등이 없는 상태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갈등은 기본적으로 이해관계가 충돌에서 생기는 문제다. 그렇다면 과연 정당한 전쟁이 있을 수 있겠느냐는 논란이 있을 수 있는데, 정당한 전쟁은 대개 '방어전쟁'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실제로 전쟁을 벌이는 모든 국가는 자기들이 방어적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실질적으로는 방어가 아닌 공격을 한다. 북한도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 핵 개발한다고 이야기하지 않나?  

도덕성은 문화적인 태도나 가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첨예한 이해 충돌이라는 현실 속에서 고민돼야 한다. 첨예한 이해 충돌 속에서 전쟁이 발생하는 것이고, 전쟁과 같은 노사 갈등이 발생하는 것 아닌가? 그런 속에서 서로 자제하고 공통분모를 찾아보자는 것은 굉장히 그럴듯한 '설교'일수는 있겠으나, 패배자가 승복하지 않고 무력을 써서라도 저항하려 하고, 힘 있는 사람이 무력을 써서라도 패배자를 굴복시키려고 하는 상태에서는 도덕성을 이야기하기 어렵다.  

다음으로 한국이 곧 망할 것 같다는 말은 도덕성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너무나 많이 망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도덕적 권위를 인정할 수 있는 세력을 이 사회에서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는 것이다.

어떤 세력에게 신뢰를 주고 그 세력을 국가를 이끌어갈 수 있는 집단으로 인정하기가 상당히 어려운 상황이다. 그래서 그런 세력을 어떻게 만들 수 있겠느냐는 관점에서의 접근이 필요한데, 이 문제는 역시 평화의 가치나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공정성, 사법정의 문제 등을 실제로 실천하고 그렇게 해왔던 사람들에게 힘을 몰아주는 방식이어야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그런 사람들의 대부분은 우리 사회 내에서 패배자가 돼왔다. 그냥 패배자가 된 정도가 아니라 박살, 학살당했다. 박살 난 사람들이 정상적으로 살아가면 다행인 사회 정도까지 왔다는 것이다.  

김기협 : 조금 다른 문제인데, 대한민국 헌법 체계에도 좀 문제가 있다고 본다. 헌법에는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보호할 대상을 명시한 것은 반대로 명시되지 않은 대상은 보호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을 품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은 좋은데, 명예와 사랑, 행복과 같은 가치들은 언급돼있지 않다. 인간적인 가치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또 헌법 차원에서 중시하고 있는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해야 한다는 부분에도 의문이 있다. 일단 '국민을 위한', 이 부분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국민을 위하지 않고 왜 국가가 존재하나? '국민의', 이 부분은 어떤 식으로 구체적인 제도가 나오느냐에 따라 해석의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국민에 의한', 이게 과연 절대적인 원리로 받들어야 하는 가치인지는 의문이다. 실제로 한국에서는 이 원칙에 너무 집착해서 없는 문제가 만들어지거나 있는 문제가 키워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또 이러한 원리에 따라 공산당이 통치하는 국가는 민주정부가 아니라고 손가락질을 하기도 하고, 실제 중국이나 베트남의 경우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 그런데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한다는 기준에서 보면 이것이 그렇게 잘못된 일인지 의문이 든다.  

10여 년 전 중국에 처음 갔을 때 들었던 우스갯소리가 하나 있다. 누군가 물에 빠졌는데 누가 뛰어들겠느냐는 건데, 공산당원은 안 뛰어들고 인민군은 뛰어들 것이라고 하더라. 공산당원은 제복을 안 입고 있으니까 표시가 나지 않아서 시치미를 부릴 것이고, 인민군은 제복 입었으니 뛰어들 것이라는 이유였다.

여기서 몇 가지 의미를 찾을 수 있었는데 우선 당이나 인민해방군이 국가를 지키고 유지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곳이라는 점이다. 또 당보다는 군에 대한 신뢰가 더 높다는 점이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의미가 있다. 이런 이야기가 우스갯소리로 나오는 것은 그만큼 당과 군에 대한 기대감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중국 공산당은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거나 마오쩌둥을 따르는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라기보다는, 사회의 엘리트 계층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말하자면 우리나라에서 양반계층이 존재했고 이들이 엘리트로서 기능했던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  

그리고 중국에는 엘리트로서의 책임감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 이런 국가는 종편에서 하는 말을 듣고 좋다고 하는 사람들이 국가를 운영하겠다고 달려드는 것보다는 비교적 덜 해괴한 결과를 얻기 좋은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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