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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 8일 금요일

가라타니 고진과 한나 아렌트의 ‘이소노미아’ 개념에 대한 고찰/이성민


http://www.dgugs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1388


  
   △ 고대 그리스 시대의 번영을 말해주는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아크로폴리스는 아크로acros(높은)와 폴리스polis(도시)의 결합으로 ‘높은 도시’란 뜻으로, 예로부터 신들의 성스러운 언덕으로 여겨졌던 곳이다.
 
  
   얼마 전 일본의 철학자 가라타니 고진의 『철학의 기원』이라는 책이 한국어로 출간되었다. 『세계사의 구조』에서 정점에 이른 가라타니 고진의 체계적 사상을 통해 이미 우리는 가라타니가 소망하는 세계의 모습을 최종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우리가 같이 소망해도 나쁘지 않을, 영구평화가 실현되는 세계공화국이다. 그런데 그러한 세계에서 함께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말년의 가라타니는 이제 이에 대한 답을 내놓는다. 이소노미아. 이 낱말은 “동등한”을 뜻하는 isos와 “법”을 뜻하는 nomos에서 온 말이다. “법 앞에서의 평등”으로 이해되는 이소노미아는 오늘날 민주주의의 핵심 원리로서 자리 잡고 있다. 최장집은 이렇게 말한다. “법의 지배가 실현되지 않는 민주주의 체제를 우리는 상상할 수 없다. 법 앞의 평등을 지칭하는 고대 그리스어 ‘이소노미아’는 민주주의의 근본 원리를 구성하는 시민의 평등을 전제로 한 것이기에, 당시에는 민주주의와 동의어로 사용될 정도였다.”⑴

   하지만 『혁명론』에서 한나 아렌트는 “이소노미아=민주주의”라는 등식을 과감하게 깨뜨린다. 아렌트는 헤로도토스를 따라 이소노미아의 핵심을 “무지배”로 파악했다. 군주정(nonarchy)과 과두정(obligarchy)에 “archy”라는 지배가 있듯이 민주정(democracy)에도 “cracy”라는 지배가 있다. 데모스=민중의 지배 말이다. 반면에 이소노미아는 지배자도 피지배자도 없는 무지배 상태의 정치조직 형태를 뜻한다. 아렌트는 바로 그것이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라고 보았다.

   가라타니는 데모크라시와 이소노미아에 대한 이러한 유일무이한 구별에 주목한다. “내가 아는 한 이 두 개념을 구별하고 그 차이에서 중요한 의미를 보려고 한 사람은 한나 아렌트뿐이다.”⑵ 그는 왜 이 구별에 주목하는 것일까? 철학의 기원과 이러한 구별은 도대체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철학의 기원에서 가라타니가 가장 먼저 주목하는 것은 기원전 6세기에 일어난 놀라운 “동시대적인 평행성”이다. 그것은 소크라테스-예수-붓다⑶의 평행성도 아니고 소크라테스-공자-붓다-예수-마호메트⑷의 평행성도 아니다. 알다시피 이것들은 동시대적인 평행성이 아니다. 예수와 마호메트는 나머지에 비해 훨씬 후대의 인물이다. 가라타니가 주목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평행성이다. “기원전 6세기 무렵, 에스겔로 대표되는 예언자가 바빌론의 포로 가운데서 등장하고, 이오니아에서는 현인 탈레스가, 인도에서는 붓다와 마하비라(자이나교 개조開祖)가, 그리고 중국에서는 노자와 공자가 등장했다”(21쪽). 다시 말해서 가라타니는 철학의 기원을 흔히들 그렇게 하듯 서양사의 맥락에서 이해하려고 하지 않으며, “세계사의 구조”라는 맥락에서 이해하려고 한다. 이 후자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만 비로소 분명하게 드러나는 세계사적 평행성이 있었던 것이다.⑸

   가라타니는 그것을 보편종교의 출현과 연관짓는다. “보편종교는 세계제국이 형성되던 시기, 즉 교환양식B와 C가 우월한 상태에서 씨족공동체가 해체되고 계급적 분해가 진행된 시기에 나타났다. 이런 현상은 기원전 5, 6세기경 서아시아와 동아시아에서 평행적으로 생겨났다”(246쪽). 그런데 바로 그러한 일이 기원전 6세기의 이오니아에서도 발생했다. 그곳에서 일군의 자연철학자들이 등장한 것이다. 그렇다면 가라타니는 왜 그들에게 특별히 주목하는가? “나는 『세계사의 구조』에서 교환양식D가 보편종교로서 나타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교환양식D가 종교라는 형태를 취하지 않고 나타난 적은 없는가 하는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나는 그 최초의 사례를 이오니아의 정치와 사상에서 발견했다”(247쪽). 

   그렇다면 “이오니아의 정치와 사상”이란 무엇일까? 이오니아의 사상은 철학의 기원으로서의 “자연철학”이며, 이오니아의 정치는 민주주의의 기원으로서의 이소노미아다. “이오니아의 사상가는 윤리나 인간에 대한 인식을 ‘자연학’의 관점에서 이야기했다. 그것은 인간과 세계를 일관되게 자연(physis)으로 보는 것이다. 그들은 그와 같은 보편적 시점을 처음으로 제기했다. 나는 바로 이런 태도를 ‘자연철학’이라고 부르고 싶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이오니아의 정치(이소노미아)와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78쪽).


   두 개의 이소노미아
  
   아렌트는 이소노미아를 아테네 같은 그리스 폴리스의 특징으로 본다. 반면에 가라타니는 이러한 “아테네중심주의적 관점”을 의심한다(36쪽). 그는 철학의 기원을 아테네에서 이오니아로 옮겨놓듯이 이소노미아를 아테네에서 이오니아 도시국가로 옮겨놓는다. 그리고는 데모크라시를 다시 아네테에게 돌려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할 때, 이소노미아 그 자체에 대한 이해는 어떨까? 아렌트를 따라 가라타니도 그것을 “무지배”로 이해하므로 두 사람은 이소노미아를 동일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두 개의 이소노미아가, 아렌트의 이소노미아와 가라타니의 이소노미아가 있다. 이 두 철학자는 이소노미아=무지배의 가능성의 조건을 달리 이해한다. 가라타니는 그것을 자유로운 이동이라고 보며 아렌트는 폴리스라는 정치적 집단이라고 본다.

   아렌트가 무지배로서의 이소노미아를 다루는 부분을 읽어보면 가라타니가 주목하지 않는 내용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이소노미아와 또래집단의 관계다. 아렌트는 이소노미아를 “또래집단을 형성하는 자들의 평등”이라고 규정한다.⑹ 현대인들은 인간의 평등을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것으로, 즉 자연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이소노미아는 그러한 평등이 아니다. “이소노미아는 평등을 보장했다. 하지만 이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태어나거나 창조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인간은 자연적으로는 평등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을 평등하게 만들어줄 인공적인 제도, 즉 폴리스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아렌트는 폴리스를 우정의 정치체로 보고 있다. 우정이란 물론 지배자와 피지배의 수직적 관계가 아니라 또래나 친구들의 측면 관계를 가리킨다. “그리스인들은 또래들 속에서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렌트가 평등(=또래집단)에 의해 가능해지는 자유로서 이소노미아를 제시한다면 가라타니는 자유(=이동)에 의해 가능해지는 평등으로서 이소노미아를 제시한다. “이오니아 도시들의 구성원은 이동해온 자들로, 그들은 또 언제든지 다시 이동할 수 있었다. 그와 같은 조건이 자유롭기 때문에 평등하다는 이소노미아(무지배)를 가능하게 한 것이었다”(128쪽).

   이오니아 도시들의 구성원에게 이동이 가능했다는 것은 다만 우연적인 조건에 불과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결국 지리적인 자유의 공간은 언젠가 사라질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것에 이소노미아를 걸어놓을 수 있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에서 우리는 가라타니의 이소노미아 개념을 내버릴 수도 있고, 아니면 “이동”의 개념을 지리적 이동의 한계 너머로 근본적으로 재규정할 수도 있다. 실제로 가라타니는 광장=아고라를 바로 그러한 이소노미아적 공간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이보다 더 풍요로운 함축을 갖는 개념이라고 보고 있다. 

   이소노미아는 아렌트적이건 가라타니적이건 자유와 평등이 긴밀하게 연동된 상태를 가리킨다. 그것은 마치 자유와 평등이 연결된 큐브와도 같아서, 우리는 그 둘을 이렇게도 돌려보고 저렇게도 돌려보면서 그것들의 위상을 조정해볼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가운데 그 둘을 모순적이거나 이율배반적인 관계로 바라보는 습관을 버리고 자유-평등 단일체의 잠재력을 조사할 수 있다.

   이러한 흥미로운 추후 탐구를 위해 나는 다음과 같은 용어들을 정해놓겠다.

· 아렌트적 이소노미아 = 평등에 의해 가능해지는 자유 = 구심적 이소노미아
· 가라타니적 이소노미아 = 자유에 의해 가능해지는 평등 = 원심적 이소노미아

   한편으로 우리는 친구들 사이에서 자유로움을 획득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자유는 개인적 자유가 아니라 정치적 자유가 되어야 하며, 공화국의 구심력이 되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개인으로서 떠날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관계에 종속되며, 불평등을 감수하게 된다.

⑴ 최장집, 「법의 지배와 민주주의」, 아담 쉐보르스키 외 지음, 송호창 외 옮김,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 후마니타스, 2008, 10쪽.
⑵ 가라타니 고진, 『철학의 기원』,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 b, 2015, 39쪽. 앞으로 이 책을 인용할 때는 본문에서 괄호 안에 쪽수를 표시한다.
⑶ 프레데릭 르누아르, 『소크라테스 예수 붓다』, 장석훈 옮김, 판미동, 2014.
⑷ 카를 야스퍼스, 『소크라테스, 공자, 석가, 예수, 모하메드』, 황필호 옮김, 강남대학교출판부, 2000.
⑸ 세계사의 구조가 어떻게 철학의 기원을 이해하기 위한 맥락과 관점을 구성하는지와 관련해서는 가라타니가 『철학의 기원』 부록으로 실은 「『세계사의 구조』에서 『철학의 기원』으로」이라는 글을 볼 것. 
⑹ 한나 아렌트, 『혁명론』, 홍원표 옮김, 한길사, 2004, 98쪽. 재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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