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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16일 월요일

기능적 삭막함…예술로 채우다/ 김동훈

브랜드는 복합예술이다. 디자인의 획일성과 일상의 경시를 거부하고 현실에서 예술성을 드러내자는 것. 알레시는 기능성이 강박적으로 강조되었던 생활용품에 예술성의 반격을 꾀한 브랜드다. 모더니즘의 디자인 원칙이었던 ‘기능성’을 고수하느라 특히 주방용품 디자인(리빙디자인)은 단조롭고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알레시 브랜드는 이탈리아에서 모더니즘 디자인으로 대표되는 ‘벨디자인’을 거부했다. 그뿐만 아니라 ‘벨디자인’ 이후 등장한 ‘안티디자인’마저 거부한 채 새로운 ‘복합예술’ 디자인을 주장한다. 미술관 전시품에서나 볼 수 있는 아름다움을 주방용품에 구현한 것이다. 
■ 우리는 작가에게 무엇을 ‘더’ 원하는가 
작가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당신은 우선 꽤나 유명한 작가들을 부러워하여 자신과 끊임없이 비교할 것이고, 원고 마감 시간에 쫓겨 평범한 일상생활을 신경질적으로 멀리할 것이다. 더욱이 위대한 작가가 되어야 한다는 조급증에 시달린다면 당신은 갖은 수단을 동원해 현실을 철저히 차단하고 최적화된 글쓰기 공간을 확보하려 들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위대한 작가는 현실 적응 불능이 된다. 하지만 찰스 부코스키에게서는 이런 강박을 찾기 힘들다. 
그리고 대단히 잘 싸웠던 
노장들을 기억한다 
헤밍웨이, 셀린, 도스토예프스키, 함순. 
여자 없이 /음식 없이 /희망 없이 
그들이 골방에 처박혀 
딱 지금의 당신 꼴을 하고도 미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면 
당신은 준비가 덜 된 것이다. 
맥주를 더 마신다. /시간은 있다. 
없다고 해도 / 뭐 / 괜찮다. 
(찰스 부코스키, ‘위대한 작가가 되는 법’에서) 
시인은 ‘여자, 음식, 희망, 맥주’를 보란 듯이 나열한다. “시간은… 없다고 해도 뭐 괜찮다.” 이런 것들이 있다면 작업을 위해 “골방에 있어도 미치지 않을 것”이라며 자신을 다독거리기도 한다.
위대한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비교 강박과 현실 도피 강박, 그리고 시간 강박에서 벗어날 것. 강박의 원인은 대중의 인기와 예술적 작품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브랜드로 치자면 대중성이 있어야 이윤을, 예술성이 있어야 시대를 초월한 명품을 남길 것이다. 부코스키는 이 두 가지를 연결하고자 우리를 ‘골방’에서 끌어내 ‘여자, 음식, 희망, 맥주’라는 지극히 일상적인 공간으로 안내한다. ‘일상의 미’를 찾기 위해 모든 신경질적인 강박으로부터 ‘괜찮다’고 자위한다면 작가가 될 기본 소양을 갖춘 셈. 
■ 우리는 디자인에 무엇을 ‘더’ 원하는가 
알레시 브랜드는 일상, 그러니까 주방용품을 통한 대중화에 성공한다. 1921년 판금 장인이었던 조반니 알레시(Giovanni Alessi)가 이탈리아 북부 밀라노 근처 오메냐에서 금속 주방용품을 손수 만들면서 알레시 브랜드는 시작됐다.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장남 카를로 알레시가 가세하면서 명품 브랜드가 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경제적 어려움을 겪던 이탈리아가 1960년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풍요와 안정을 되찾았고, 디자인에는 모더니즘의 바람이 거세게 불어닥쳤다. 각종 생활용품의 대량생산이 가능케 된 것.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대량생산은 각자가 필요로 하는 용품들을 다 소유하게 만든다. 
이탈리아 디자이너들은 모더니즘과 함께 시작된 디자인을 약간 변화시킨 ‘벨디자인’을 창조했다. 이것은 20세기 모더니즘에서 표현되는 기능주의에 대한 이탈리아적 적용이다. ‘벨’은 ‘아름다운’이란 뜻으로, ‘벨디자인’이란 장식성을 줄여 심미성을 최소화하고 단순성을 높여 기능성을 극대화한 것이다. 이들은 이탈리아 특유의 실험 정신을 살려 생활용품 각각에 기능성을 극대화한다. 이탈리아는 벨디자인 운동을 통해 새로운 디자인 발전을 주도하는 국가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디자인이 대중화되면 될수록 디자이너의 창의성은 더욱 부족해져 갔다. 게다가 이제 소비사회는 모든 사람이 똑같은 물건을 사용한다는 평등사회를 넘어서서 너도나도 동일한 제품을 사용하는 획일사회로 변모했다. 거기에 걷잡을 수 없는 모방(짝퉁)의 폭력이 난무하게 된다. 벨디자인도 역시 산업디자인에서 대중화라는 강박을 드러내면서 그 예술성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알레시를 맡게 된 조반니가의 3대손 알베르토가 의미심장한 물음을 던졌다. “우리는 디자인에 무엇을 더 원하는가?” 알베르토 알레시는 법학을 전공하고 가업에 뛰어들면서 알레시 제품에 자신의 디자인철학을 담기 원한다. 알베르토의 이 질문 이후 알레시 브랜드는 단순히 대중적인 주방용품이 아니라 예술성을 지닌 감성적인 제품들을 선보이게 된다.

■ 예술성의 반격 
“우리는 디자인에 무엇을 더 원하는가?”라는 알베르토의 질문은 포스트모던 예술의 근본 물음과 맞닿아 있다. 왜 그럴까?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는 포스트모던에서는 모던에서 드러날 수 없었던 것이 드러난다고 말한다. 
포스트모던한 것은, 모던한 것 내에서, 현재 드러낼 수 없는 것(the unpresentable)을 현재 자체에 내놓는다. (…) 그것들을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재 드러낼 수 없는 것에 대한 보다 강렬한 감각을 주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포스트모던의 조건>에서)
알베르토가 대량생산 위주의 디자인에 더 원하는 것은 바로 ‘일상의 미’였다. 모던 디자이너들이 대중화하면서 강박적으로 기능성만을 높이느라 예술성을 금기시했던 생활용품에 알베르토는 예술성을 드러내고자 ‘강렬한 감각’을 주기 원했던 것. 알베르토 알레시는 말한다. “진정한 디자인 작업이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마음을 움직이고 기억을 불러일으키며 놀라게 하고 본질에 역행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는 “현재 드러낼 수 없는 것에 대한 보다 강렬한 감각을 주기 위해서” 모던적인 본질, 그러니까 기능성을 위한 디자인을 역행했다. 그런 이유에서 알레시의 ‘일상의 미’는 포스트모던적이다. 
앞서 ‘위대한 작가가 되는 법’이란 시에서 부코스키가 말한 것도 ‘일상의 미’와 맥을 같이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알베르토 알레시의 디자인 철학과 부코스키의 작가론이 포스트모던 미학과 맞닿아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일상을 기능화하거나 일상을 금지하려는 강박의 결과는 자아분열에 이르기 때문에, 그 결과는 당연히 그 속에 폭력성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이다. 포스트모던에 와서 디자인에 비로소 일상성, 기능성, 예술성이 결합된다. 
이탈리아의 포스트모던 디자인은 모더니즘과 일상의 미, 그러니까 기능성과 예술성의 구분을 폐기하면서 생활용품을 미적으로 끌어올렸다. 일상의 디자인, 즉 ‘리빙디자인’은 생활공간에서 기능성과 함께 예술성을 추구한다. 
■ 알베르토의 복합예술 
알레시의 제품 중에서 돋보이는 것은 주전자 ‘9093’과 ‘주시 살리프’, 와인오프너 ‘안나G’ 등을 꼽을 수 있다. 알베르토는 이런 제품을 만들기 위해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과 협업했다. 마이클 그레이브스, 알렉산드로 멘디니, 에토레 소트사스, 필립 스탁 등 세계적인 예술가들이 알레시의 리빙디자인에 참여했다. 이로써 알레시는 독창적인 제품을 개발해 세계적인 브랜드가 되었는데, 여기에는 알베르토의 특별한 디자인 개념인 ‘복합예술(Multiplied Art)’이 자리 잡고 있다.
‘벨디자인’을 거부한 ‘안티디자인’은 1960년대 후반 이탈리아의 신세대 디자이너들에 의해 탄생했다. 이들은 그동안 모더니즘에서 보여 왔던 소비사회의 디자인 과정을 새롭게 재고해 보았다. 그들의 분석에 따르면, ‘벨디자인’은 생활용품의 대중화에는 성공했지만 각각을 기능적으로만 디자인하면서 부분과 개체에만 편중되는 과오를 범했다는 것. 신세대 디자이너들은 이런 개별 디자인을 거부하고 전체를 고려하는 디자인, 전 세계에서 긍정적으로 인정받는 미적인 디자인을 창조하자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경향을 ‘래디컬디자인’ 또는 ‘안티디자인’이라 부른다.
하지만 신세대 디자이너들의 급진적인 비판은 차츰 문화 전반에까지 영역을 넓히더니 처음 주장과는 달리 나중에는 모든 일상용품을 거부하는 태도로 휩쓸리게 된다. 결국 1970년대 중반에 이르자 이탈리아 대부분의 저항 디자인 운동은 소멸되었고 이탈리아의 아방가르드 디자인 전체가 침체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바로 이런 디자인의 침체 속에서 알베르토 알레시는 ‘복합예술’이라는 자신의 디자인 철학을 전개한다. ‘복합예술’은 각기 다른 분야를 모아 시너지 효과를 창출한다는 새로운 예술 개념이다. 이전에는 대량 소비재가 기능성만 갖춘 제품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을 통해 진정한 심미성을 지닌 저렴한 제품을 창조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이를 통해 알베르토는 새로운 소비문화를 창출했고 알레시 브랜드는 명실상부하게 대중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기업으로 자리매김된다. 알레시는 디자인은 기능적이어야 한다는 입장과 예술적이어야 한다는 입장으로 분리되는 논쟁의 중심에서 두 가지를 모두 결합한 것이다. 
■ 기다림의 미학 
알레시 디자인은 일상을 치열하게 관찰한 장인정신의 산물이다. 관찰뿐만 아니라 그 일상마저 치열할 때 디자인은 깔끔해진다. 군더더기 없이 불편함도 없이 ‘됐다’ 싶은 순간 만족에 이를 것 같지만, 뭔가 부족한 것이 있다. 대중들은 그 부족함 때문에 디자인의 치열한 몸부림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때 그 부족을 메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당신은 무엇을 ‘더’ 원하는가?
군더더기 없이 그렇다고 불편하지도 않은 듯 적나라하게 현실을 노래한 찰스 부코스키의 해답은 이렇다. 
심지어 /최고의 / 순간에도 
태평한 / 시절에도 / 깨닫게 되는 그것 
그 어느 때보다 더 절절히 깨닫게 되는 그것 
가슴속 한켠에는 
결코 채워지지 않는 자리가 있다 
그래서 / 우리는 기다리고 
또 / 기다린다 
그 공간에서. 
(찰스 부코스키, ‘어쩔 수 없는 것’에서) 
시인은 자기 나름으로 최고의 순간에 문득 깨닫는다. “가슴속 한켠에는/ 결코 채워지지 않는 자리가 있다”는 것을. “그래서/ 우리는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도대체 또 뭘 기다리는 것일까? 알베르토의 버전으로 바꾼다면 “우리는 무엇을 더 원하는가?” 
알레시는 말한다. “그건 아름다움, 바로 예술성”이라고. 군더더기와 불편함 없는 기능성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자리. 그래서 기다리고 기다리게 되는 그것, 바로 예술성. 그러니까 고대 그리스에서 동일한 하나의 개념이었다가 ‘기술’과 ‘예술’로 분화되었다던 희랍어 ‘테크네’가 다시 하나로 결합되는 지점이 필요하다. 그 지점은 시에서처럼 ‘그 공간’이라는 현실이다. 위대한 작가는, 위대한 디자이너는 기술적이면서도 예술적이다, 일상에서. 그러니까 강박적으로 기능성을 높이기 위해 예술적 감성을 금기시했던 현실에서 우리는 “가슴속 한켠”을 채워줄 그 아름다움을 끌어올리기 위해 오늘도 기다린다. 
단순한 일상 속 우리가 무엇을 ‘더’ 원하는가라는 물음은 주방용품이 미술관에도 전시될 수 있는 브랜드를 만들었다. “당신은 무엇을 더 원하는가?” 아니 이렇게 바꿔 보자. “원하는 것을 당신은 일상의 공간에서 기다릴 수 있는가?” 알레시는 이런 물음을 던지고 일상에서 그 해답을 찾은 최초의 브랜드였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10132059005&code=960100#csidxa69b4722b781790b5b2557480798f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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