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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7일 월요일

북 디자이너 정병규의 한글연구소/ 정재숙 중앙일보 기자

창작의 산실은 내밀한 처소다. 한국 문화계 최전선에서 뛰는 이들이 어떤 공간에서 작업하는지 엿보는 일은 예술가의 비밀을 훔치듯 유쾌했다. 창조의 순간을 존중하고 그 생산 현장을 깊게 드러내려 사진기 대신 펜을 들었다. 화가인 안충기 기자는 짧은 시간 재빠른 스케치로 작가들의 아지트 풍경을 압축했다. 

이 연재물의 열일곱 번째 주인공은 북 디자이너 정병규(71)다. 책만큼 효율적인 문화 발명품은 아직 없었다는 신념으로 책의 수호자를 자임한다. 한국 디자인의 원형을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찾았다는 선언과 함께 한글 문자학으로 새로운 책 세상을 열어가는 실험 작업에 여생을 걸었다. 

책의 바다다. 아니 책의 방주(方舟)다. 50여 평 복도식 공간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책과 잡지로 채워져 있다. 서울 마포구 독막로 9길 윤디자인빌딩 지하 1층에 늘어선 서가에는 저마다 사연을 품은 책이 어깨를 기대고 정렬해 장관을 이뤘다. 그 앞에 서면 “책은 수저나 망치나 바퀴, 또는 가위 같은 것”이라 일갈했던 이탈리아 출신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의 말이 절로 떠오른다. 일단 한번 발명되고 나면 더 나은 것을 만들 수 없는 그런 물건들 중에 하나, 책을 사랑하는 이들은 말한다. “책은 죽지 않는다.” 
  
이 방의 주인 또한 에코 저리 가라 할 책 신봉주의자다. 한국에 북 디자인의 개념을 도입하고 1세대 북 디자이너의 맏형 노릇을 한 정병규(71)씨다. ‘정병규한글연구소’ 소장인 그는 아직 채 풀지 않은 귀중본 상자들을 둘러보며 “내 평생 사치이자 세계에 하나밖에 없는 북 컬렉션이지” 했다. 1977년 한수산의 장편소설 『부초』(민음사)를 시작으로 40년 동안 3000여 권의 북 디자인을 했는데 그중 겨우 1800여 권을 구해 정리를 시작한 참이다.
  
“『부초』는 글꼴과 거기서 떠오르는 이미지를 대화하는 관계로 병치시켰어요. 정병규 북 디자인의 핵심인 ‘일책일자(一冊一字)’의 시작이죠. 하나의 내용에는 그에 어울리는 단 하나의 고유한 글자꼴이 있다는 겁니다. 책은 손으로 보기도 하는 그런 겁니다. 사람에게 인격이 있듯이, 책에는 책격(冊格)이 있습니다. 나는 책 하나하나에 성격을 주고 싶어요.” 
  
북 디자이너란 이름 내밀기에 무심해서일까, 날밤을 밥 먹듯 세우던 바쁜 세월 탓일까. 여러 출판사를 거치고 ‘정디자인’을 운영하며 이사가 잦았고, ‘정병규 학교’에서 학생들 가르치느라 자료를 내돌려서인지 이제야 글과 자료의 컴퓨터 입력을 서두르고 있다. 
  
“더 미룰 수 없다는 걸 나이가 가르쳐주더군요. 늘 고객이 앞서던 상황에서 내 스스로 뭘 하겠다고 나선 게 10년쯤 됐어요. 한국 디자인의 자긍심과 정체성을 성찰하며 미래 에너지로 만들 수 있는 단초를 찾는 데 몇 십 년이 걸렸어요. 바로 한글입니다. 외국 디자인은 본이 없는 데 반해 우리는 텍스트가 있어요. 『훈민정음』 해례본이 있죠. 한글을 쓰는 이상 훈민정음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한국 디자인의 숙명이지요. 뼈에 살이 붙어야 하는데 우리 한글 문화는 자꾸 뼈만 봐요.” 
  
그는 내년 초부터 ‘정병규 학교’에 한글을 중심으로 한 디자인 실천 과정을 개설하고 책의 세계에 대한 새로운 가치를 세울 생각이다. 손(Hand), 머리(Head), 마음(Heart) 세 가지 H를 근간으로 한글문자학의 다양한 자료 수집과 실험을 진행한다. 
  
“앞으로 인간의 삶은 컴퓨터에서 손으로 옮겨갈 겁니다. 손은 소우주입니다. 인문학적으로 보면 우주가 다 손에 있어요. 디자이너가 지닌 감수성이 좋은 건 늘 뭘 만들면서 직관이 오는 거죠. 예술은 현실 너머 세계를 상상하고 탐구하지만 디자인은 현실 속에서 그걸 깨우치는 굉장한 덕목을 지녔어요. 디자이너로서 나는 한글이 한국인과 한국 문화의 공기라는 걸 온몸으로 통각(統覺)한 겁니다.” 
  
그는 “내가 왜 디자이너야? 내가 책 만드는 걸 얼마나 동경했는데. 내게 출판은 일종의 독립운동 같은 거였어”라고 말한다. 문화생산자로서의 자긍심이 묻어난다. 일본 디자이너들이 “정병규 선생은 무서워. 정 선생 디자인은 유교적이야”라고 말하는 까닭인지 모른다. 
  
지금 전북 완주군 삼례읍 삼례책마을(이사장 박대헌)에서는 ‘정병규 책박물관디자인 17년’전(내년 4월 15일까지)이 열리고 있다. 2000년 한국 최초의 책박물관인 ‘영월책 박물관’에 이어 삼례에 책마을을 연 박대헌 이사장이 17년 인연을 쌓아온 정병규 디자이너의 한글 타이포그래피 실험을 한자리에 모았다. 일절 돈을 주지 않는 대신 “모든 걸 알아서 해달라”고 부탁한 고객 덕택에 그는 새로운 한글 타이포그래피의 가능성을 실험할 수 있었다. 훈민정음으로 가는 길을 찾은 것이다. 
  
“신문 디자인을 포함해 활자와 이미지를 가지고 놀고 실험하고 꿈꾼 내 개인사의 마지막 도달 영역이 아닌가 싶어요. 남들은 내가 한글에 너무 빠져 있다고 뭐라 하지만 지금으로선 ‘훈민정음으로 돌아가자’고 다시금 주장합니다. ‘동명사로서의 디자인’을 하고 싶어 ‘정병규 에디션’이란 독립출판도 시작했어요. 명사, 즉 결과물로서 디자인과 사유행위, 즉 동사로서의 디자인을 아우른 개념이죠.” 
  
그는 ‘책의 종말’이 결코 올 수 없다는 걸 책의 방주에 들어앉아 연구한다. 새로운 책의 세계를 향한 그의 항해는 오늘도 밤을 타고 넘는다.  
동생이 대신 이룬 화가의 꿈
소년 정병규는 야구를 좋아했다. 1960년대 초 경북중·고교 시절에 야구반에서 활동했는데 그의 그림 솜씨를 눈여겨본 미술반 지도교사 소삼녕 선생이 그를 불러세웠다. “엉뚱한 데서 놀지 말고 미술반으로 와라.” 그는 두말없이 미술반으로 옮겼다. 한때 미술대학을 갈 생각도 했으나 결국 고려대 불문학과로 방향을 틀었다. 
  
화가의 꿈은 3년 터울인 동생 정재규(68)씨가 이뤘다. 역시 경북중·고교에 진학한 그는 형을 좇아 야구반에 들어갔다. 어느 날 미술반을 맡은 서창완 선생이 정재규에게 물었다. “너 혹시 형이 정병규냐?” 그렇다는 대답에 바로 한마디가 떨어졌다. “미술반으로 와라.” 
  
결국 형의 꿈을 이은 정재규씨는 서울대 미대 회화과를 나와 1978년 프랑스로 떠난 뒤 조형사진작가로 일가를 이뤘다. 파리에 사는 동생이 요즘도 아침 8시면 도시락 싸들고 종일 아틀리에에서 작업에 매달려 산다는 소식에 형은 부럽다는 듯 한마디 던진다. “다 내 덕이지.” 

  
정병규 
1946년 대구생.  
75년 월간 소설문예 편집부장으로 출판계에 입문한 뒤 민음사 편집부장·아트디렉터, 홍성사 주간 등을 거치며 한국 출판에 북 디자인의 개념을 도입한 1세대 북 디자이너.  
77년 『부초』를 시작으로 40년 동안 3000여 권의 책과 출판물을 디자인했다.  
고려대 불문학과 시절 고대신문사 편집국장을 지내며 신문 편집의 새 흐름을 주도했다.  
제13회 도쿄 유네스코 편집자 트레이닝코스와 프랑스 파리 ‘에콜 에스티엔느’ 타이포그래피 과정을 수료한 이후로 정디자인을 운영하며 정병규학교를 세워 한국 북 디자인의 다양한 실험을 해왔다.  
한국 시각정보디자인협회 회장, 중앙일보 아트디렉터를 지냈으며 제1회 교보북디자인 대상, 대한민국문화 예술상 디자인부문을 수상했다. 

  
  
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출처 http://news.joins.com/article/22148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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