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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3일 목요일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⑫…완상(玩賞)과 기호(嗜好)의 미학⑪/ 한정주 역사평론가

‘유희(遊戱)’ 삼아 조선 최초의 백과사전을 남겼다는 이수광의 철학은 150여년 후 또 다른 기념비적 백과사전인 『성호사설(星湖僿說)』에 이르러 절정에 도달한다.

성호(星湖) 이익(李瀷) 또한 이수광처럼 『성호사설』을 가리켜 ‘희필(戱筆)’, 곧 ‘놀이삼아 기록한 글’이라고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도 ‘학문과 지식은 곧 놀이’였다.

“『성호사설(星湖僿說)』은 성호옹(星湖翁)의 희필(戱筆)이다. 옹이 이 『사설』을 지은 것은 무슨 뜻인가? 아무런 뜻이 없다. 뜻이 없는데 어찌 이것을 지었는가? 옹은 한가한 사람이다. 독서하는 여가에 세속에 순응하여 전기(傳記)에서 얻기도 하고 자집(子集)에서 얻기도 하고 시가(詩家)에서 얻기도 하고 전문(傳聞)에서 얻기도 하고 회해(詼諧)에서 얻기도 하였는데 웃고 즐길 만한 것 중에서 보존하여 볼만한 것을 붓 가는 대로 어지럽게 기록하니 어느덧 글이 많이 쌓이게 되었다.

처음에는 잊지 않기 위하여 책에 기록하였는데 이미 책 끝에 제목을 나열하고 보니 제목을 또한 두루 살펴볼 수가 없었으므로 이에 부문(部門)을 나누고 유별(類別)로 넣어서 마침내 권질(卷帙)을 이루었다. 그리고 이름이 없을 수 없기에 『사설(僿說)』이라고 이름하였으니 부득이하여 붙인 것이지 의미를 부여한 것은 아니다.” 이익, 『성호사설(星湖僿說)』, ‘서문(序文)’

안경(眼鏡)을 뜻하는 ‘애체(靉靆)’와 서양화의 묘법(描法), 즉 원근법(遠近法)을 소개한 ‘화상요돌(畵像坳突)’이라는 항목이 나오는 『성호사설』의 「만물문(萬物門)」은 특히-벼슬에 대한 뜻을 접고 평생 포의(布衣)의 신분으로 살면서-오로지 조선과 중국은 물론이고 서양에 관한 모든 지식을 살피고 정보를 뒤져 글로 옮겨 적어 놓은 일만을 좋아하고 즐거워했던 이익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저작이다.

“애체(靉靆)란 것은 세속에서 이르는 안경(眼鏡)인데 『자서(字書)』에는 ‘서양서 생산된다.’ 하였으나 서양사람 이마두(利瑪竇)는 만력(萬曆) 9년, 즉 신사년(1581년·선조 14년)에 비로소 중국에 왔던 것이다.

나는 장영(張寧)이 쓴 『요저기문(遼邸記聞)』에 상고하니 ‘지난번 내가 경사(京師)에 있을 때 호농(胡豅)의 우소(寓所)에서 그의 아버지 종백공(宗伯公)이 선묘(宣廟)로부터 하사받았다는 안경을 보았다. 큰 돈짝만한 것이 두 개인데 형태는 운모(雲母)와 흡사하고 테는 금으로 만들었으며 자루와 끈도 있어서 사용할 때에 그 끝을 합치면 하나로 되고 가르면 둘로 된다.

노인들이 눈이 어두워 작은 글자를 분별하지 못할 때에 이 안경을 양쪽 눈에 걸면 작은 글자도 밝게 보인다’ 하였으니 대개 이 애체란 안경은 선종(宣宗) 때부터 벌써 중국에 들어왔던 것이다. 또 ‘서양이 비록 멀다 할지라도 서역(西域) 지대 천축(天竺) 모든 나라는 중국과 물화(物貨)를 서로 통한 지 오래고 천축은 또 서양과 거리가 멀지 않다. 지금 형세로 보아 이 애채란 안경이 장차 중국으로 전해 오게 될 것이고 가정에 있어서도 반드시 갖출 것이다’ 하였으니, 이는 서역 만리(滿利)라는 나라에서 생산된다.” 이익, 『성호사설』, 「만물문」, ‘애체(靉靆)’
“근세에 연경(燕京)에 사신 간 자는 대부분 서양화(西洋畫)를 사다가 마루 위에 걸어 놓게 된다. (그림을 볼 때에는) 한쪽 눈은 감고 한쪽 눈으로 오래 주시해야만 전각(殿角)과 궁원(宮垣)이 모두 진형(眞形) 그대로 우뚝하게 그려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묵묵히 연구한 자는 말하기를 ‘이는 화공(畵工)의 묘법이다. 원근·장단의 치수가 분명한 까닭에 한쪽 눈만으로 시력을 집중시켜야만 이와 같은 현실이 제대로 나타나게 된다’ 하는데, 이는 대개 중국에도 일찍이 없었던 것이다.

요즘 이마두(利瑪竇)가 지은 『기하원본(幾何原本)』 서문을 보니 거기에 “그림 그리는 방법은 눈으로 보는 데에 있다. 멀고 가까운 것과 바르고 기운 것과 높고 낮은 것이 차이가 있음에 따라 시력을 경수해야만 무슨 물건이건 제대로 그릴 수 있고 둥글게 만들고 모나게 만드는 척도(尺度)도 화판(畵板) 위에다 셈수를 틀림없이 해야만 물도(物度)와 진형(眞形)을 멀리 헤아릴 수 있다. 작은 것을 그릴 때는 시력을 크게 보이도록 하고 가까운 것을 그릴 때는 시력을 멀리 보이도록 쓰며 둥근 것을 그릴 때는 시력을 공[球] 보는 것처럼 써야 한다. 그리고 상(像)을 그리는 데에는 오목[坳]한 것과 우뚝[突]한 것이 있어야 하고 집을 그리는 데에는 밝은 곳과 어두운 곳이 있어야 한다” 하였다.

그런즉 이 그림은 곧 그 ‘오목하게 하고 우뚝하게 한다’라는 한 부분일 뿐이다. 그러나 ‘크게 보이고 멀리 보이도록 해야 한다’는 따위는 무슨 방법으로 하는지 알지 못하겠다.” 이익, 『성호사설』, 「만물문」, ‘화상요돌(畵像坳突)’

이렇듯 놀이삼아 지식을 다루는 독특하고도 개성 넘치는 철학은 이덕무의 저술 가운에서도 등장하는데 대표적인 저작이 『앙엽기(盎葉記)』이다.

『앙엽기』는 이덕무가 옛날부터 당시까지의 일에 대해 각종 문헌과 서적을 뒤져 고증하고 변증한 글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지식은 곧 놀이다’라는 철학의 한 사례로 『앙엽기(盎葉記)』에 실려 있는 ‘광대놀이’에 관해 살펴보자.

이덕무는 광대들이 근두(筋斗:땅 재주·몸을 거꾸로 뒤집는 재주) 놀이를 할 때 손가락을 구부려 입술에 대고 휘파람을 부는 모습을 본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냥 재미있게 보고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을 광경이지만 이덕무는 지적 호기심이 발동한다. 그래서 각종 문헌과 서적을 뒤져서 마침내 그 행동의 기원을 고증해낸다.

“우리나라의 광대들이 근두(筋斗)놀이를 할 때에는 반드시 손가락을 구부려 입술에 대고 휘파람을 부는데 그 소리가 뚜렷하다. 그것은 대개 중국의 옛날 풍속이다. 《급취편(急就篇)》(한(漢)나라 사유(史游)가 지었다)에 ‘피리와 퉁소[箛篍]로 기거(起居)의 신호를 하여 행동의 선후(先後)를 과(課)한다’ 하였는데 안사고(顔師古)의 주(注)에 ‘고(菰)는 부는 채찍[吹鞭]이요, 추(萩)는 부는 대통[吹筩]이다. 이를테면 일을 감독하는 유사가 채찍과 대통을 불어 기거의 절도(節度)로 삼고 또 그들의 성적을 비교하여 앞선 자는 벌을 면하고 뒤떨어진 자는 징계하여 꾸짖는다는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 지금의 광대들이 서로 호령(號令)하려 할 때는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불어서 절도를 삼으니, 이것은 대개 중국에서 채찍을 불던 데서 유래된 것이다.” 『청장관전서』, 「앙엽기 3(盎葉記三)」

사대부의 전통적인 기준에서 볼 때 미천한 신분인 광대들의 재주 따위가 학문과 지식 그리고 글쓰기의 대상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이덕무에게는 ‘세상사 모든 것’이 지적 호기심의 원천이고 지식 탐구의 대상이요 글쓰기의 소재였다. 이때 학문과 지식과 글쓰기는 더 이상 공경하고 우러러보아야 할 ‘무엇’이 아니라 단지 ‘재미있는 놀이’일 따름이다.

이수광에서 이익 그리고 이덕무에 이르기까지 놀이삼아 지식과 글쓰기를 다루었던 이들의 철학은 오랜 세월 학문과 지식과 글쓰기를 독점한 권력과 지배 계급이 만들어낸 ‘학문과 지식과 글쓰기는 숭고하고 고결해 공경과 존경의 대상이다’는 관념을 해체해버린 ‘유쾌한 반란이자 전복’이었다.

또한 지식과 글쓰기를 놀이처럼 다룬 이들의 철학은 지식과 글쓰기의 영역을 무한정으로 확장시켰다. 즉 세상의 ‘모든 것’이 지식의 원천이자 글쓰기의 대상이 되는 지성사와 문학사의 대혁신을 일으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출처 http://www.iheadline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8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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