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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8일 목요일

‘1987’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키워드 7

87년 6월 항쟁과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을 다룬 영화 '1987'이 27일 개봉했다.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1020세대에게 생소한 단어나 사건이 대거 등장한다. 영화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알아야 할 몇 가지 키워드를 소개한다.
Keyword 1. 호헌철폐
당시 헌법을 유지하려(호헌) 하지말고 개정하라는 뜻이다. 1987년 전두환 정권 당시엔 대통령 선거가 간접선거 형태였다. 유신헌법에 근거해 설치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이 대통령을 선출했다. 이 때문에 국민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군부정권이 이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민주화 세력을 포함한 다수 국민들은 대통령 직선제를 포함한 개헌을 요구했다. 전두환 정권은 1987년 4월 13일 이를 묵살하고 '4.13 호헌조치'를 발동한다. 대학생, 민주시민들은 이 조치를 거두라며 시위에 나선다. 6월 항쟁 당시 많은 사람들이 외친 구호가 '호헌철폐 독재타도', 영화에서도 이 장면을 볼 수 있다.

Keyword 2. 보도지침
전두환 정권 시절, 정부 부처인 문화공보부 홍보정책실에서 매일 각 언론사에 지시한 기사 작성 가이드라인. 정권은 보도지침을 어기는 언론사, 언론인을 심하게 탄압했다. 1986년 9월, 해직된 언론인들이 만든 단체인 민주언론운동협의회가 《말》지를 통해 폭로함으로써 처음 알려졌다. '1987' 영화 속 일간지 사회부장(고창석)이 박종철 사망사건의 취재를 지시하며, 칠판에서 지우는 내용이 바로 이 '보도지침'이다.

Keyword 3. 간선제
간접선거제도. 전두환 정권 시절에는 국민들이 직접 투표해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이 아니라, 선거인단의 투표를 통해 선출했다. 이 '선거인단'은 전두환 정권에 가까운 세력으로 채워져, 사실상 전두환의 의중에 따라 차기 대통령을 지목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선출 과정이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이루어져 일명 '체육관 선거'라고 불렸다. 국민들은 이에 반해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며 87년 6월 항쟁에 나섰다.

Keyword 4.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1974년 7월 23일 지학순(池學淳) 주교가 '유신헌법 무효'라는 양심선언을 발표하고 체포되어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은 뒤, 젊은 가톨릭 사제들이 중심이 되어 같은 해 9월 결성한 단체. 교회 안에서는 복음화 운동을, 사회에서는 민주화와 인간화를 위해 활동한다. 영화 속에서는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의 진범 명단이 정의구현사제단의 이름으로 서울 명동성당에서 공표된다.

Keyword 5. 백골단
1980~1990년대 학내 시위자들과 시위 군중들을 진압하고 체포하기 위해 구성된 사복경찰관들. 무술 유단자와 특전사 출신이 주류로 구성되었으며, 흰색 헬멧에 청자켓 복장 때문에 백골단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영화 속 연희(김태리) 모녀를 붙잡아 강제로 차에 태우는 흰색헬멧-청자켓 차림의 이들이 바로 백골단이다.

Keyword 6. 남영동 대공분실
군사독재시기 경찰청 산하의 기관으로, 민주화 운동 인사에 대한 고문이 빈번히 자행되었던 곳이다. 영화 속 투옥중인 민주인사가 적은 비밀서신을 몰래 외부로 전달하던 교도관 한병용(유해진)이 끌려가 고문당하던 장소가 바로 남영동 대공분실이다. 2005년까지 '보안분실'이라는 이름으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경찰청 남영동 인권센터로 운영되고 있다.

Keyword 7. 최루탄
최루제를 넣어 쏘는 화학무기. 최루제는 주로 눈을 따갑게 만들고 통증을 일으키며 심지어는 일시적인 실명 현상을 일으키는 화합물이다. 군사독재시기 시위 진압용으로 자주 사용되었다. 최루탄에서 분사되는 최루액이나 최루가스가 피부, 호흡기 등으로 들어가면 일시적으로 눈물과 콧물이 분비되며 극심한 통증을 느끼게 된다. 또 이 탄이 직접 사람을 가격하면 사망에 이르기도 한다. 영화 속 시위장면이나 언론사 사무실 안에서 하얀 가스를 일으키는 것이 바로 최루탄이다.

영화 '1987'은 1987년 스물두 살 대학생이 경찰 조사 중 사망하고 사건의 진상이 은폐되자, 진실을 밝히기 위해 용기를 낸 사람들의 가슴뛰는 이야기를 다뤘다. 27일 개봉해 전국 극장에서 상영중이다. 15세이상 관람가. 러닝타임 129분.
출처 http://www.vop.co.kr/A00001236801.html

되돌아본 2017 출판·문학계/ 김유진 김향미 경향신문 기자

출판 산업의 위축과 독자 감소라는 몇 년째 되풀이되는 현실은 올해도 출판계를 비켜가지 못했다. 새해 벽두에 도매상 송인서적이 부도를 낸 데 이어 출판계 블랙리스트의 실체가 밝혀지면서 출판을 둘러싼 환경을 더욱 암울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페미니즘과 과학, 소설을 중심으로 주목할 만한 흐름이 나타나고 출판인들 스스로 희망을 만들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등 내부적으로 결실 또한 적지 않은 한 해였다. 2017년 출판·문학계를 네 개의 키워드 중심으로 돌아본다.
■ 더 깊고 넓어진 페미니즘·과학 
페미니즘 관련 서적은 올해 78종이 출간되면서 지난해보다 2배 이상 늘었다. 지난 8월 방한한 ‘맨스플레인’의 작가 리베카 솔닛의 신작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를 비롯해 <페미니즘 리부트> <그런 남자는 없다> 등 국내 저자들이 쓴 페미니즘 관련서도 쏟아져 나왔다.
특히 문학 분야에서 페미니즘 바람이 거세게 일었다. 지난해 10월 출간된 조남주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올해 폭발적인 관심을 모으며 누적 판매 50만부를 기록했다. 이혼을 겪는 여성들이 등장하는 김숨의 <당신의 신>, 레즈비언 커플인 딸과 어머니를 다룬 김혜진의 <딸에 대하여>, 강화길의 <다른 사람> 등 국내 여성작가들의 작품도 잇따라 발표됐다. 조남주 등 7명의 젊은 여성 작가들은 페미니즘 소설집 <현남 오빠에게>를 냈다. 
과학도서 붐은 과학 전문 잡지 창간으로 이어졌다. 지난 9월 동아시아는 ‘메이커스: 어른의 과학’을, 이음은 과학비평잡지 ‘에피’(이음)를 창간했다. 김승섭의 <아픔이 길이 되려면> 등 과학과 사회의 접점을 모색하는 책도 큰 호응을 얻었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는 “페미니즘의 인기는 여성이 겪는 불평등이 해소될 때까지 계속될 것으로 본다”며 “과학책들이 사회 속으로 들어가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흐름이 눈에 띈다”고 말했다. 
■ 소설의 인기와 ‘나’에 집중한 독자들 
올해는 소설이 많이 읽혔다. 교보문고의 소설 분야 점유율은 10.1%(12월3일·판매 권수 기준)로, 최근 10년간 가장 높은 수치였다. 김영하, 김애란, 김훈, 황석영, 무라카미 하루키, 베르나르 베르베르 등 국내외 유명 작가들의 신간이 몰려 나와 소설 독자들의 관심을 끌어모았다.
현재의 삶을 즐기라는 ‘욜로’(Yolo)의 메시지가 출판계에서도 주목받았다. ‘나’와 삶, 그리고 사람 사이의 관계를 들여다보는 자세가 곧 독서로 이어졌다. 인간 내면과 삶을 사유하는 소설과 시의 인기가 곧 이를 증명한다. 에세이 분야에서도 <언어의 온도>를 비롯해 <자존감 수업>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등 삶에 관조적인 에세이가 인기를 끌었다. 
특히 일본 소설은 올해 역대 최대 판매량(80만부, 교보문고)을 기록했고, 소설 분야 전체에서 한국 소설이 차지하는 비중에 근접했다. 
■ 출판계 의미있는 실험들 
도서 시장의 장기침체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려는 시도가 곳곳에서 나타났다. 개성있는 큐레이션을 내세우는 독립서점이 올해도 100여개 문을 열었다. 지난 6월 서울국제도서전은 다양한 기획전을 열면서 할인행사 없이 역대 최다 관람객인 20만명을 끌어모았다. 위고, 제철소, 코난북스 등 1인출판사 세 곳이 함께 낸 ‘아무튼’ 시리즈는 새로운 협업 모델을 만들었다. 창비의 시 전문 애플리케이션 ‘시요일’, 커뮤니케이션북스의 오디오북 ‘100인의 배우, 우리 문학을 읽다’ 등은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시도였다. 민음사의 ‘쏜살문고’ 등 문고본과 리커버 재출간도 독자 저변 확대에 기여했다. 
그러나 대형 서점 매대 논란이 불거지는 등 자본을 앞세운 대형 서점 체인과 인터넷 서점이 여전히 시장에서 지배력을 행사했다. 백원근 책과사회연구소 대표는 “동네서점이나 독립출판의 문화적인 의미는 크지만 운영자의 상당수가 업계에서 밀려난 이들이라는 점에서 출판산업의 구조적 파행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 블랙리스트 이후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박근혜 정부 당시 ‘찾아가는 도서전’ ‘세종도서 선정·보급’ 등의 사업에서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적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기호의 <차남들의 세계사>, 김종배·조형근의 <사회를 구하는 경제학>, 장강명의 <한국이 싫어서> 등이 피해를 봤다. 또 한국문학번역원도 이시영, 김연수, 김애란, 박범신 등 을 지원사업에서 배제했다. 
올해 도종환 시인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으로, 황현산 문학평론가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으로 각각 취임했다. 문체부와 문예위의 우선 과제는 “블랙리스트 적폐청산”이다. 또 출판·독서 문화의 토대를 다시 쌓는 작업이 필요하는 지적도 나온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사서교사 임용이 신년엔 228명까지 늘어났다고 한다”면서 “결국엔 책 읽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정책의 방향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12272107015&code=960205#csidx100dc50cc66a7afa8a3272d8d0c1e88 

“세상을 바꾸려면 글을 써라” /박보균 중앙일보 기자

한 해가 끝난다. 올해는 종교개혁 500주년. 마무리 주간에 ‘500주년 기념 교회’의 송길원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가짜 뉴스, 거짓 정보가 넘쳐난다. 왜곡된 사실, 상처투성이 진실로 세상은 어지럽다. 이를 바로잡으려면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정신으로 무장해야 한다. 루터의 개혁은 글과 말의 힘으로 시작했다.” 
  
루터는 “세상을 바꾸고 싶으면 펜을 들고 그리고 써라”고 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구텐베르크의 인쇄술로 뒷받침됐다. 1517년 루터의 인쇄된 반박문은 대중 속으로 퍼졌다. 루터의 글은 세상을 바꿨다. 
  
루터의 글쓰기는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why I write)』를 떠올린다. 오웰의 그 에세이는 집필 동기를 네 개로 분류했다. ‘순전한 이기주의, 미학적 열정, 역사적 충동(impulse), 정치적 목적’이다. ‘정치적 목적’은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욕구다. 그것은 그의 작가적 삶의 동력이다. 그의 갈망은 정치적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이었다. 
  
오웰의 『카탈루냐 찬가』는 르포소설이다. 그는 그 소설을 “솔직히(frankly) 정치적 책”이라고 했다. 오웰은 영국의 사회주의자다. 그는 스페인 내전(1936~39)에 뛰어들었다. 그는 인민전선의 통일노동자당 의용군이었다. 그는 저격수 총에 쓰러졌다. 기적적으로 목숨을 구했다. 
  
혁명의 속성은 타락과 배신이다. 인민전선 내부는 분열했다. 스페인 공산당은 통일노동자 당원도 숙청했다. 오웰은 수배자 신세로 탈출했다. 『카탈루냐 찬가』는 그런 경험과 환멸을 담았다. 그 시절 영국의 지식인 대다수는 오웰을 외면한다. 그것은 무지와 순진함의 발로였다. 알면서도 소련의 거짓 선동에 종사했다. 폭로의 용기가 부족하기도 했다.


오웰은 레닌 혁명의 환상을 깼다. 그는 공산주의식 공포정치와 인간성 말살, 대중조작의 속성을 간파했다. 그런 내용의 책들이 『동물농장』, 『1984년』이다. 그 글쓰기는 정치적 투쟁이었다. 가짜 뉴스, 편향된 시각, 강요된 이념에 맞선 고발과 저항이었다. 그것은 세상을 바꾸는 묵시록(黙示錄)으로 작동했다. 
  
오웰은 “좋은 산문은 유리창(window pane)과 같다”고 했다. 그 창은 세상을 제대로 보게 한다. 그의 글쓰기 동기의 경계는 뚜렷지 않다. 중앙일보 독자(정은호, 57세, 전직 금융인)가 쿠바여행기를 보내왔다. 그 여행기는 흥미롭고 사실적이다. “지난여름에 갔던 쿠바 수도 아바나는 깊숙이 들어갈수록 실망이었다. ‘의료 천국 쿠바’는 엉터리 정보였다. 쿠바의 의사 숫자는 중남미에서 상대적으로 많다. 그런데 보건소를 가 보니 의약품이 절대 부족했다. 기본적인 의료행위도 힘들다. 쿠바가 유기농을 한다는 이야기는 크게 과장된 뉴스다. 거의가 비료·농약이 부족하기 때문에 유기농을 한다. 혁명의 아이콘 체 게바라가 쿠바를 떠난 것은 피델 카스트와의 노선갈등 때문이었다. 그러나 카스트로는 체 게바라의 삶에 극적인 신화를 입혔다.” 
  
올해가 체 게바라 사망 50주년이다. 인터넷 속 쿠바의 정보는 낡았다. 독자의 그 글은 오웰식 정치적 파괴력을 갖고 있다. 조작된 신화의 위력은 끈질기다. 미국 대통령 시절 존 F. 케네디의 통찰은 유효하다. “진실의 가장 큰 적(敵)은 무엇인가. 그것은 의도적이고 인위적인 거짓이 아니라, 그럴듯하고 비현실적인 신화다”(1962년 예일대학 연설). 


자서전의 충동은 본능적이다. 거기에 따르는 비판이 있다. 집필자 시각으로 과거를 재구성했다는 것이다. 지난 8월 『이회창 회고록』이 나왔다. 그는 전 한나라당 총재다. 그는 “뒷날의 공평한 역사 평가를 위해서도 야당의 역사를 제대로 남겨야 한다는 의무감이 회고록을 쓰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그의 출판은 적절했다. 글을 써서 알려야 한다. 역사의 신(神)은 전지전능하지 않다. 축적된 기록으로 재평가할 뿐이다. 기록이 부실하면 역사에서 소외된다. 왜곡과 축소의 대상이 된다. 역사는 끊임없이 재해석된다. 정치의 본질은 역사투쟁이다. 적폐청산은 집단 기억의 정치화다. 
  
한국 사회의 쏠림은 심하다. 그 현상은 영화에서도 실감 난다. 원로 영화인 신성일은 이렇게 지적했다. “요즘 한국 영화는 한쪽에 치우쳐 있다. 사람 죽이고, 분노하고, 사회를 비판하고, 잔인한 복수만 한다”(10월 부산국제영화제). 소설가 헤밍웨이는 “산문은 건축이지 실내장식이 아니다”(『오후의 죽음』)고 했다. 글은 감정을 꾸미는 데 허비해선 안 된다. 집짓기는 균형의 미학을 중시한다. 그런 글들은 쏠림과 편향을 바로잡는다. 그런 자세는 가짜뉴스를 퇴출시킨다. 그런 글쓰기는 루터식 변혁의 용기와 투지를 담는다. 
  
박보균 칼럼니스트·대기자



[출처: 중앙일보] [박보균 칼럼] “세상을 바꾸려면 글을 써라”

2017년 12월 27일 수요일

불로소득 500조, 불평등은 세계 최악/이래경 다른백년 이사장

2016년 이전까지 한국정부가 발표한 불평등 상황에 대한 통계자료, 특히 지니계수를 접할 때 마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수치를 그대로 믿는다면 시장소득 기준으로는 0.35-0.36 수준이고, 세후 가처분소득에서는 0.31-0.32 수준으로 프랑스와 독일을 포함한 북유럽 몇 개 국가군을 제외하고는 OECD 국가 중에도 매우 양호한 그룹에 속하는 것으로 실제 생활 속에서 느끼는 심각한 한국사회의 불평등한 현실과는 너무나 동 떨어져 있었다.

통계청이 부패하고 무능했던 탓이었는지, 아니면 지난 정권들이 현실의 심각함을 감추고자 의도적으로 조작가공하고 잘못된 자료를 발표하도록 지시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현실 상황을 과학적으로 정확하게 표현해야 할 국가운용의 데이터를 의도적으로 왜곡한 채 발표함으로써, 정부의 공식적인 통계자료에 심각한 의문을 갖게 하였다.

때마침 지난 12월 21일 이데일리의 박종오 기자가 통계청이 새로운 방식으로 집계한 한국의 불평등 통계자료를 매우 상세하게 분석한 기사를 소개하였다 (☞관련기사 : 韓 소득불평등 OECD '최악'인데…대통령·장관도 피해간 증세) 

촛불시민혁명 이후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면서 비로소 신뢰할 만한 통계자료가 새롭게 발표된 데에는 김낙년 동국대 교수가 지난 십여 년 간 지난 정부의 엉터리 같은 통계자료를 치열하게 비판하고 집요하게 추적한 연구의 성과와 공로가 매우 지대하다고 할 것이다.

지난 정부에서는 대충대충 가계소득을 중심으로 불평등을 조사 분석하여 발표함으로써 음성적 탈루와 자산소득 등이 충분히 반영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부문에서 통계가 왜곡되고 미비된 상태에서 신뢰가 결여된 자료를 과감하게(?) 정부의 이름으로 공식적으로 발표해 왔다. 이러한 문제점을 잘 알고 있는 OECD는 아예 한국정부의 자료를 공식적인 비교의 대상에서 누락시켜온 저간의 사실이 부끄러울 뿐이다.. 

다행히 김낙년 교수의 노력 덕분에 OECD 기준에 근거하여 국세청 소득자료를 중심으로 분석한 정부의 최근 자료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한국의 시장지니계수가 최우량 국가인 스위스와 근접한다는 것은 여전히 통계수치에 결함이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판단된다. 지난 20년간 진행되어 온 한국의 신자유주의적 범위와 내용으로 비추어 볼 때, 시장지니계수가 대략 OECD 평균수치인 0.47 주변에 있어야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따라서 무엇이 미진하고 탈락되었는지 살펴보는 일이 여전히 전문가들의 연구 과제로 남아 있는 셈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국가의 역할로서 재분배효과인데 이 분야에 있어서는 한국이 멕시코, 칠레 그리고 터어키 등과 더불어 가장 불량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는 한국이 현대적 시민국가로서 제 역할을 못하는 미성숙함과 후진성을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것으로 뒤에 별도로 다시 언급하고자 한다. 

소득의 5배율, 즉 상위 20%의 소득과 하위 20% 소득의 상대 배율은 전통적 자본제 사회의 소위 20:80 이론에 기초한 것으로, 2017년 현재에는 단순한 비교수치라는 것 외에는 사실상 별 의미가 없다. 바닥으로의 질주(rush to the bottom)로 극빈층이 광범위하게 형성되고, 부의 대부분을 소수가 장악하게 된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는, 이를 10:90 또는 1:99의 실상을 분석하는 데이터로 대치하여야 한다. 

소득10배율, 즉 상위 10%의 소득과 하위 10% 소득 배율을 표현할 때도 노동소득과 자산소득 분야 그리고 종합적 소득 등으로 분리하고 세분화하여 분석할 때만이 한국사회의 구체적 실상에 접근할 수 있다고 본다. 필자의 감으로는 종합소득을 기준으로 소득 10배율을 산정한다면 ‘12’를 넘어설 정도로 매우 심각할 것으로 추정한다.

불평등을 파악하는 더욱 생생한 자료는 상위 1.0 %가 차지하는 자산 소득의 비중을 파악하고 분석하는 데 있다. 현재로써는 이에 대한 자료가 매우 빈약하여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려우나, 예건데 공식화된 자본시장의 배당소득을 개인의 1.0%가 80-90%를 차지한다거나, 역시 거래가 가능한 양질의 부동산의 대부분을 1.0%의 개인과 법인이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향후 이에 대한 집중적인 조사와 분석이 요구된다.

모든 불평등의 현상이 집약된 상대적 빈곤층의 비중, 즉 가처분 평균소득의 50% 수준에도 못 미치는 시민들의 비중에 있어서, 한국이 단연 세계 최악의 일등국가라는 것이 이번 발표 내용의 핵심이다. 앞에 제시한 모든 자료는 이 점을 확인하고 조명하는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셈이다. 

단순히 상대 빈곤율이 세계 최고의 수준이라는 사실을 넘어서서, 일하는 가난 즉 아무리 뼈 빠지게 일하고, 일년에 2150 시간이 넘도록 세계 최장의 살인적인 노동을 하여도 가난을 벗어날 수 없다는, 카스트화로 고착된 한국사회 빈곤의 형태와 현실을 이제 우리 스스로 고백하고 고발해야 한다. 

이러한 빈곤을 해결하기 위하여, 동시대를 살아가는 가난한 이웃 시민들의 인간적 존엄과 연대의 과정으로 최저임금을 1만원대로 개선하자는 정책에 대하여 수구적 언론과 못된 지식인들이 보여준 광기적 패악에 대하여 필자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

최저임금의 현실화에 들어가는 사회 총비용이 20-25조 수준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한국사회가일 년에 생산하는 순부가가치의 1.0%를 조금 넘는 수준이다. 1.0% 정도의 사회적 부를 천애의 가난속에 갇혀 신음하는 이웃에게 배분하자는 사회연대적 정책에 대하여, 더구나 위에서 보여준 한국 불평등 자료가 세계 최악의 수준임을 명명백백히 증언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반대하는 인간들에게 시민국가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추악한 모습을 깊이 되돌아 보도록 준엄하게 충고한다. 

물론 급격하게 시행하는 정책이 가져올 역작용과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정부는 최저임금의 일만 원 시대를 맞이하면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어려움과 부작용에 대해서 철저하게 분석하고 대비하여야 한다. 예건데 최저임금의 적용범위를 상여금과 보조금을 포함한 (OT는 제외) 포괄적 임금 총액으로 규정해야 하며, 임금이 주목적이 아닌 특수고용, 예를 들자면 65세가 넘은 고령인구의 취업 등에서는 예외를 인정하는 규정을 분명하고 명쾌하게 설정해야 한다. 

문제가 되는 영세 중소기업과 자영업 부문에 관해서는 당연히 부담액의 상당부분을 정부가 지원해 주는 일정의 유예기간과 범위를 분명히 하되, 최저임금의 인상이 당연히 산업의 생산성 제고를 위한 혁신적 기제로 작동하도록 채찍의 기능도 함께 지녀야 하며, 시민사회는 노동의 대가를 정당하게 지불한다는 관점에서 적정한 서비스 비용의 인상을 수용하여야 한다.   

이 모든 정책의 최상위 정점에는 공리적 시장의 논리를 넘어선 인간존엄의 실현과 시민연대라는 가치개념이 위치하여야 한다. 당장에 발생하는 어려움과 혼란을 핑계로 시급 일만 원의 선순환적 정책을 비난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평균임금의 두 배가 넘는 보수 및 임금을 향후 십 년간 동결하는 시민연대적 결의를 통해 최저임금의 인상에 따른 국민경제적 부담을 완화시키는 것을 검토하는 것이 동시대인으로서 도리이자 순서일 것이다.

이제 현대적 국가의 가장 중요한 역할로서 재분배 기능에 대해서 다시 살펴 보고자 한다. 신뢰하기는 어렵지만 OECD 기준에 의거하여 수정 보완된 시장지니계수인 0.396 수준을 그나마 가처분계수인 0.354으로 낮추는 사회이전소득 효과를 내는데 투입된 정부의 종합예산은 2016년 기준으로 순부가가치 생산 1,600조의 10.0 % 수준인 160조 정도이다. 과거 군사정권 시절, 복지라는 개념조차 없던 것에 비하면 매우 비약적인 발전을 보인 셈이다.

이 배경에는 지난 시절 IMF 위기를 극복하고자 혼신의 노력을 하면서 세계가 칭송할 만큼 가장 단시일 내 종합적인 사회안전망을 구축해낸 국민정부 시절의 노력을 높이 평가할 만 하다. 그러나 이후 15년간 3번의 정부를 교체하면서도 질적인 비약 없이 국민의 정부가 설정한 정책의 단순한 양적 팽창과 퇴행을 되풀이 하여 오면서 불평등 재분배효과가 OECD 평균인 0.155의 4분의 일인 0.042으로 세계최저 수준에 머물게 되었다. 세계 10위권의 경제 산업대국으로 참으로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이다. 

재분배 효과를 향상시키는 수단과 정책으로 조세를 포함한 국민분담율을 향상시키는 것이 핵심적 과제이다. 물론 국민분담율을 높이기 전에, 선행적으로 음성 탈루의 조세 재원을 투명하게 발굴하는 노력과 매년 제로베이스 예산편성정책 개념을 도입하여 불요불급한 정부재정 수요를 줄이고 사회복지성 예산의 가용 지출액을 높여가야 한다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내부적 노력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는 것으로 OECD 국가들과 객관적인 비교를 통하여 보아도, 불평등 해소를 위해 사회안전망에 투입되는 공공적 지출 규모를 현재의 순부가가치 생산액의 10.0 % 수준에서 20% 이상으로 확대하는 방향으로 설정하고 단계적이고 점진적인 정책을 수립해 가는 것이 요구된다. 

2016년 기준으로 말하면 위에 언급한 160조 수준인 공공성 지출을 두 배인 320조 이상 확대해 가야 한다. 다른 표현으로 말하자면, 국민부담율을 현재의 26% 수준에서 35% 이상 수준으로 확대하여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조세 부담율을 현재 17-8% 수준에서 25% 이상 수준으로 올려야 한다. 

한편에서는 현실적 필요에 의해서 제기되는 법인세와 소득세의 미세조정 조차도 수구적 정치집단의 극심한 반대로 인해 감당해 내지 못할 만큼 현재의 한국 정치구조가 퇴행적 원시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세정의 현실을 떠나 단순히 평가하는 법인세와 소득세의 세율 수준이 그 자체로는 국제적으로 비교하여도 대체로 합리적 수준에 머물고 있다.

그러면 어디에서 추가로 연간 160조가 넘는 사회안전망의 재원 수요을 충당해 나갈 것 인가 ? 

우선적으로 단호한 세정개혁이 요구된다고 할 것이다. 일차적으로 다양한 이유와 정책적 근거로 설정된 일체의 사전적 세금감면 정책을 철폐하여 실효세율을 명목세율과 일치시키고, 이를 투명한 사후적 정책지원과 명분이 분명한 공공적 지출이라는 형식으로 재구성해야 하며, 최저 생계비 이상의 소득이 있는 모든 시민 개개인들은 예외없이 조세부담에 참여하여야 한다. 복지의 보편성 확보에는 반드시 중간계층의 보편적 세금부담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OECD 평균적 수준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복지재원은 여전히 요원하게 부족할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사회경제 정책의 핵심에 있는 분이 한국의 불평등의 주요 원인은 경제활동의 소득, 즉 보수와 임금 등 격차에 있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반쪽만 맞는 이야기이다. 기업규모와 산업간의 격차, 재벌과 공공분야의 조직 노동자와 미조직 노동자, 그리고 정규직과 비정규직 등 차별적 요소가 분명 한국사회의 불평등의 일부 주요 요인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위에서 보았듯이 시장지니계수는 오히려 OECD 평균보다 매우 우수한 것으로 나타났고, 다시 언급하지만 법인세와 소득세의 미세조정으로는 필요한 정부재원을 마련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여기서 한국사회의 소득의 원천으로서 자산의 구성과 분포를 상세하고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2016년 기준하여 민간의 순자산 규모는 1경2,000조 수준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중에 금융자산 규모가 3,000조, 다양한 형태의 부동산 총합이 9,000조에 달한다고 한다. 여기에 금융자산이던, 부동산 자산이던 극소수의 상류층 시민과 재벌급 법인의 1.0%가 매매가 가능한 민간 순자산규모의 과반을 소유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1경2000조의 자산 수익율이 연평균 4.0%라고 추정하여 보면, 약 500조에 달한다. 즉 1,600조의 국민생산 순부가가치 중에 대략 1,100조는 경제활동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보수와 임금으로 이루어지고, 30%가 넘는 비중의 500조에 해당하는 금액이 불로소득인 자산소득 형태로 배분되고 있다고 추정되는 것이다. 물론 부동산 소유의 경우, 상당 비중이 비영리적 성격을 가진다고 항변할 수 있으나, 첫째는 비영리적이라고 해도 대체적인 수익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둘째는 다분히 유동적 투기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셋째 분포상 극소수의 손에 편재되어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한국사회는 지난 200여 년간의 서구사회를 연구해온 피켓트의 주장을 매우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야 하는 근거가 위에 언급한 현실조건에 있다. 피켓트는 자산규모 100만유로(약 13억원) 이상에는 연간 1.0%, 그리고 200만 유로 이상의 자산에는 연갼 2.0%의 세금을 부과하여야 세습적 불평등을 방지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의 이야기를 당장 시행할 수는 없다고 해도 그의 제안 내용은 불평등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는 한국사회에 매우 중요한 암시와 전망을 제시한다. 

현실적으로는 금융과 부동산의 자산은 서로 분리하여 분석하여야 하며, 금융시장이 경제 현실에 갖는 주요한 순기능을 감안하여 기존의 금융시장에 충격을 최소화하는 범위에서 금융자산에 대한 추가적인 과세를 조정이 가능한 수준에서 점차적으로 확대해 가는 것을 연구해야 한다. 

부동산의 경우는 이미 널리 회자되고 있듯이 서민생활에 지장이 없는 일정 규모이상(예로서 5억원)에 대해 추가적인 보유세를 적용하되 무리없이 감당 가능한 수준인 0.5 %에서 시작하여 10년을 목표 기간으로 점차 세율을 미세적으로 누진적으로 확대하여 일정규모 이상의 보유자산에 대해 실효세율이 1.0% 이상 올라가도록 장기적으로 설계해야 한다.

이를 효과적으로 실시하면 사회안전망 구축과 보편적 복지정책에 필요한 재원을 상당 수준으로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토지에서 발생하는 지대에 대해 강력한 조세를 주장하는 전문가 그룹에서는 토지를 별도로 분류하여 접근할 것을 조언하고 있다. 경청할 만한 이야기이다. 

부동산 보유세를 단지 아파트 등 부동산 폭등을 규제하는 정책수단으로만 판단하는 청와대 참모의 일부에서, 부동산 보유세는 부동산 보유 자체가 당장 수익을 실현하지 못하기에 이를 적용하는데 어려움이 있다고 한다. 참으로 한가하고 한심한 소리이다.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의 한국 자동차세는 자동차 보유가 수익을 실현해서 부과했는지 반문하고 싶다.  환경분담의 중과세 역시 환경악화가 개별적 영역에 손실을 가져오기 때문에 실시했는지 진지하게 검토해 보길 요청한다. 

부동산 보유세의 적용은 단순히 부동산 가격의 통제를 위한 정책수단을 넘어서 한국사회의 지속적 조건을 위협하는 불평등의 해소를 위하여 필요한 연대와 포용의 재원적 기초를 닦으려는 사회공학적 의지와 관점에서 검토해야 마땅하다. 

자동차 보유 여부와 환경 개선의 과제보다 우선하여 한국사회의 불평등 수준은 가히 폭동을 불러올 만큼 위험한 수위에 처해 있다. 수백만 명이 동시에 몰려나온 촛불시민혁명의 저류에 깔려 있는 사회경제적 배경이기도 하다. 다만 분단이라는 한국의 특수한 현실 기제가 사회폭동으로 발전할 수 있는 내부적 폭발 압력을 강제로 억누르고 있을 뿐이다. 언제라도 가변적인 한국의 불평등한 현실이 가까운 미래에 미국의 협박과 북한의 핵무기보다 훨씬 위험한 상황으로 폭발할 수 있다. 

이를 사전에 예방하기 위한 사회안전망 구축을 위해서는 중간층 시민들의 조세 참여를 광범위하게 확대하는 한편, 피켓트의 조언대로 일정한 수준이상의 자산소득과 보유에 대하여 합당한 수준의 세금을 누진적으로 과세할 필요가 긴급히 요구되는 시점에 서있다. 다른 대안이 정말 없다면 복지세라는 특목세를 부가가치세 형식을 빌어 점진적으로 높여가는 것도 연구해야 한다. 

현재의 수구적 정치구조가 장애물이 된다면 시민사회는 다시 수십만 수백만 명 단위로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여 정치구조의 변화와 사회개혁을 요구하여야 한다.

다른백년은 한국의 불평등한 현실을 혁파하기 위해, 가용 가능한 연구인력 네트워크와 자원을 동원하여 현실 고발과 대안 마련에 노력을 다할 것이다.

"하늘에는 영광이, 땅 위에는 평화가" 

출처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80607

"페이스북은 이제 우리의 적이다. 당장 계정을 삭제해야 한다."/스트래트포드 셔먼

거대 인터넷 기업은 사회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 불안정한 스타트업이었던 글로벌 테크놀로지 슈퍼 엘리트 기업들은 이제 주요 국가급의 영향력을 가졌지만, 그에 대한 의무와 대중적 영향에 대한 책임, 투명성, 견제와 균형, 자신들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인식 등은 가지고 있지 않다. 페이스북, 구글, 트위터를 보라. 이들에 대한 규제는 지극히 부족하다. 그들은 우리의 개인적 정보를 소상히 가지고 있다. 그들은 팩트에 기반한 전통적인 저널리즘을 뒤흔들었다. 그들은 시장 가치로 1조 2천억 달러에 달하는 엄청난 돈과 그에 수반되는 권력을 가지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로비 활동을 활발히 펼치는데, 우리의 이익과는 상반되는 경우도 많다. 미 국가 안보국까지 해킹되는 지금 이 시대에, 그들은 여러 국가의 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위협할 수 있는 데이터를 가지고 있다.
20년 전 웹이 상업화되며 인터넷의 귀족들이 뜨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실리콘 밸리의 리더들에게 있어 20년 전이란 고대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인간의 사회 및 정치적 문화 진화에 있어서 20년은 정말 짧은 시간이다. 이들의 테크놀로지는 위험할 수도 있으며, 예전과의 단절을 의도적으로 꾀한다. 우리는 스마트폰에 중독되었다. 우리는 개인 정보 상당 부분의 통제권을 잃었다. 우리의 비밀을 게걸스레 모으는 기업과 정부 기관들은 개인 정보 보호에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우리의 지문이나 홍채 등의 생체 정보는 해킹당할 것이다. 근거없이 ‘가짜’라고 비난하면 우리 문명의 기반이 부식된다.
12월 페이스북은 ‘소셜 미디어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우리에게 해로운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올렸다. 미국 역학 저널(American Journal of Epidemiology)에는 “우리의 연구 결과 전반적으로 페이스북 사용은 우리의 행복에 부정적인 연관이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페이스북 사용의 부정적 연관은 오프라인 교류의 긍정적 영향과 비슷하거나 더 컸다. 즉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인간 관계에는 트레이드오프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는 연구가 실린 적이 있다. 이는 상업화된 인터넷 테크놀로지가 의도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결과다.
테크놀로지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우리의 약점은 상업에서 생겨난다. 특히 테크놀로지로 인해 가능해진, 기업의 개인 정보 착취가 그렇다.
1950년대에 미국 우정국이 모든 편지를 뜯어서 내용을 기록했다고 생각해 보라. 전화 회사가 통화 내용을 전부 녹음했다고 생각해 보라. 지금 일어나는 일이 그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토록 많은 데이터를 분석할 계산력, 디지털 데이터 저장 공간, 알고리즘을 아무도 갖고 있지 않았지만 지금은 쉽다. 또한 당시 사람들은 우정국이나 전화회사가 프라이버시를 침범했다면 난리를 피웠을 것이다. 지금 우리들은 프라이버시를 떠넘기고 있다. 그래서 소수의 기업들이 우리의 공적인 토론장으로 자리 잡았다. 경쟁이 아닌 데이터 수집과 착취를 통해서다.
주로 물건을 팔아 돈을 버는 기업들과는 달리, 페이스북, 구글, 트위터는 ‘공짜’로 서비스를 제공한다. 비즈니스에서 ‘공짜’라는 말은 거의 언제나 거짓말이다. 옛날에 한 임원은 내게 “당신이 서비스의 비용을 내지 않는다면 팔리고 있는 것은 바로 당신”이라고 가르쳐주었다. 무료 모델 기업들은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우리를 염탐한다. 우리의 데이터를 기억하고, 우리 관심사를 알아내고, 우리가 키보드에 입력하는 것을 잡아내고, 우리가 온라인에서 어딜 가든 따라다닌다. 그리고 달러든 루블이든, 돈을 내는 누구에게나 개인에게 특화된 광고를 팔아 우리를 착취한다. 최소 20억 명 이상의 사용자에 대한 정보를 지닌 페이스북과 구글은 고래가 크릴 새우를 먹듯 소비자들을 소비한다. 리서치 기업 이마케터에 의하면 이 두 기업은 미국 내  디지털 광고의 60%를 조종한다.
디지털 광고를 판매하는 기업들은 두 가지 가치에 의존한다. 개인에 대한 정보, 그리고 참여다. 우리가 페이스북에서 시간을 많이 쓸수록 우리의 참여도는 깊어지고 광고를 더 많이 보게 된다. 그게 페이스북의 비즈니스의 본질이다. “이런 어플리케이션을 만들게 한 사고의 과정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당신의 시간과 의식적 관심을 최대한 많이 소비할 수 있을까?’이다.” 페이스북의 초대 사장 숀 파커가 최근 한 말이다. “그러려면 우리는 당신에게 도파민을 계속 조금씩 주어야 한다는 뜻이다… 인간 심리의 취약함을 이용한 것이다. 개발자들은 이것을 의식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린 그렇게 해버렸다.”
엘리베이션 파트너스의 공동 설립자 로저 맥나미는 페이스북 초기에 투자했던 벤처 투자가다. 지금 그는 페이스북을 두려워하고 있으며 실망한 상태다. “그들은 수백 년간 있던 테크닉을 가져다 침입적인 테크닉과 합쳤다. 그 결과 우리의 뇌를 그들이 쥐고 흔들게 되었다. 사람들은 자주성을 잃고 있으면서도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문명에 영향을 미친다.”
매체가 소비자들의 참여를 유도하는 건 일반적이다. 센세이션을 이용하여 관심을 끌려하는 곳도 많다. 하지만 페이스북과 같은 플랫폼에서는 센세이션에 대한 인간의 편향 때문에 이성적이고 팩트에 기반한 담론이 음모 이론가들, 봇과 트롤들이 마음대로 펼쳐놓는 미친 넌센스에 비해 불리한 입장이 된다. 사회에 대한 파괴적 메시지가 건설적 메시지보다 더 쉽게, 더 널리 퍼진다. 인류 전체의 4분의 1이 접하는 페이스북의 영향력은 위험도를 크게 높인다.
소셜 네트워크 전문가이자 싱크 탱크 ‘데이터 & 소사이어티’의 설립자인 다나 보이드는 “테크 기업들은 사람들의 분산화된 네트워크가 재미, 이윤, 정치, 이념의 체계를 어떻게 조작하는지에 대해 준비가 잘 되어 있지 않다. 그들은 적들이 얼마나 민첩한지 깨닫지 못하고, 자신들이 문제 해결을 위한 더 나은 테크놀로지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곤 한다.”고 경고한다.
그런 맥락에서 페이스북은 공적 제 1호가 된다. 트위터의 35배에 달하는, 최대 규모의 소셜 네트워크다. 구글은 지메일, 구글 닥스, 구글 홈과 같은 침입성 서비스를 제공한다. 그러나 구글의 핵심 서비스는 검색과 지도 같은 현실에 기반한 것들이다. 그래서 페이스북을 성공하게 만든 알고리즘을 이용하는 악의적 남용에 대한 페이스북의 취약성은 아주 깊은 반면, 구글의 경제적 이익은 객관적 진실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우리는 보다 순진한 입장이다.” 구글의 모회사 알파벳 전 대표 에릭 슈미트의 말이다. “하지만 이런 데이터, 2016년에 우리가 목격한 러시아와의 일, 전세계 다른 세력들과의 일을 보게 된 지금은 우리는 행동해야 한다.”
이런 생각들이 마크 저커버그를 막지는 않을 것 같다. 페이스북의 CEO인 그는 이런 사실들을 부정하고 있다는 모든 징후를 보이고 있다. 트럼프 당선 이틀 뒤에 열린 테코노미 컨퍼런스에서 저커버그는 페이스북이 대선에 영향을 주었다는 생각은 ‘미친 것’이라고 말했다. 페이스북, 구글, 트위터가 러시아 대선 개입에 대해 증언하기 위해 국회에 소환되었을 때, CEO들은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다. 저커버그는 북경에 가서 시진핑에게 경의를 표했다. 세상에서 다섯 번째로 부자이자 지칠줄 모르고 새로운 기획을 내놓는 저커버그는 대선 출마 야욕도 있다고 전해진다. 그는 자선 활동 명목의 ‘찬 저커버그 이니셔티브’를 로비에 투자할 수 있는 유한책임 영리기업으로 만들기까지 했다. 그가 러시아 개입을 페이스북의 핵심 사업 기능이 아닌 보안 문제로 프레임하는 것은 부정직한 일일 수도 있다. “우리는 우리 플랫폼 오용 방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우리는 보안에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어 수익성에 영향이 있을 정도다. 우리 커뮤니티 보호는 이윤 최대화보다 더 중요하다.”
맥나미는 2016년에 저커버그에게 저커버그와 페이스북의 COO 셰릴 샌드버그에게 이메일로 경고를 했다고 한다. 누군가 페이스북을 악용하여 힘없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 사례 7건을 들었다. “짐 크로우 법[주: 미국에 있었던 인종차별법]과 같다. 그들이 한 번 살펴보길 바랐다.” 맥나미는 4개월을 기다렸다. 그동안 트럼프는 당선되었다. 그는 자신의 우려를 대중에게 밝히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걸 PR 문제로 다룬다. 한 번도 심각하게 다룬 적이 없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를 지키려고 미친듯이 로비를 벌이고 있다.” (페이스북은 맥나미의 제안 중 하나를 도입하겠다고 뒤늦게 밝혔다. 유저들에게 러시아 요원들과의 관계를 알리기로 한 것이다.)
페이스북에서 사용자 성장 담당 부사장을 지냈던 차마스 팔리하피티야는 지난 달에 스탠포드 강연에서 “우리는 ‘정말, 나쁜 의도하지 않은 결과는 아마 없을 거야’라는 척을 해왔지만, 나는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사회가 기능하는 구조를 해체하는 도구를 만들었다.” 페이스북의 PR 부서는 반박했다. “차마스가 페이스북을 퇴사한지 6년이 넘었다. 차마스가 있었을 때 우리는 새로운 소셜 미디어 경험을 만들고 페이스북을 전세계로 키우는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때의 페이스북은 지금과는 아주 다른 회사였고, 우리는 성장하며 우리의 책임감 역시 커졌음을 깨달았다. 우리는 우리 역할을 아주 진지하게 생각하며, 개선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CEO들, 알고리즘 제작자들, 그외 우리의 미래를 만드는 다른 사람들이 책임을 져야 할 때가 됐다. 이제까지 그들은 자신의 이익에 눈이 멀어 우리에게 회복 불가능한 정도의 해를 끼쳤다. 불길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AI가 큐브릭의 거대한 돌 기둥처럼 서있다. 여러 복잡한 디지털 제품들과 마찬가지로, AI는 데이터와 알고리즘을 따르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블랙 박스다. 작동시키고 나면 AI는 제작자들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을 내린다. 현재 대형 항공사들이 컴퓨터가 좌석마다 값을 어떻게 매기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AI가 우리 종과 지구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날이 멀지 않았다.
그러나 현명한 CEO들도 이 상황을 바꾸기 힘들지 모른다고 마크 로텐버그는 경고한다. 로텐버그는 디지털 위협에서 민주주의를 보호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단체 전자 프라이버시 정보 센터장이다. “우리는 테크계가 스스로를 규제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테크놀로지가 일으키는 모든 문제에 대한 테크놀로지 해결책이 있다는 잘못된 믿음을 없애야 한다. 사회적, 정치적 해결책이 필요하다.”
우리의 궁극적인 대변자는 우리 자신이어야 한다. 페이스북을 끊는 것부터 시작하자. 당신의 데이터를 다운로드 받은 다음 여기에 가서 파란색 ‘계정 삭제’ 버튼을 눌러라. 나는 방금 계정을 삭제했는데, 벌써 기분이 나아졌다. 이 권고를 널리 퍼뜨려 달라.

이 글을 쓴 스트래트포드 셔먼은 비즈니스와 테크놀로지 분야에 대해 20년 동안 보도를 해왔던 경제전문지 ‘포춘’의 전 에디터다. 그는 또한 ‘당신의 운명을 지배하라(Control Your Own Destiny or Someone Else Will)’의 공동 저자이기도 하다. 최근 그는 실리콘밸리의 CEO를 대상으로 리더십 연구와 코칭을 하고 있다. 그는 또한 구글과 ‘오픈AI(OpenAI)’등에 컨설팅을 해왔다.

허프포스트US의 'Facebook Is The Enemy Now'를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
출처 http://www.huffingtonpost.kr/2017/12/26/story_n_18908022.html

호주 공공도서관 통계

2017년 12월 6일, 호주 국립도서관과 주립도서관 협회 'National and State Libraries Australia'(NSLA)가 호주 공공도서관 통계 보고서 2015-2016년판 <AUSTRALIAN PUBLIC LIBRARIES STATISTICAL REPORT 2015 -2016>를 공개.
이 보고서는 각 주와 특별구 공공도서관의 서비스 인프라 세입 · 세출을 개관한 것.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1,408 건물, 이동도서관 차량 78대 등 모두 1,656의 공공도서관 서비스 포인트 
· 930만명의 공공도서관 이용자, 약 1억 6,530만 점의 자료 대출 
· 연간 약 1억 1,300만명 도서관 방문(월평균 940만명) 
· 약 3,690만점의 장서 (1인당 1.5점), 컬렉션을 최신의 것으로 유지하기 위해 약 1억 2,600만 달러 지출 
· 세출 총액은 11억 8,000만 달러, 2011년 · 2012년도에 비해 17.3% 증가 1인당 세출액은 같은 기간 동안 10.2% 증가 
· 도서관에서 실시된 프로그램은 21만 1,000건으로, 참가 인원은 약 610만명

2017년 12월 20일 수요일

인문학자들을 위한 집과 밥을 짓자 / 천정환 성균관대 국문학 교수

얼마 전 인문학을 공부하는 후배들과 함께 저녁밥을 먹다 화제가 어둡고 답답한 데로 흘렀다. 누군가에겐 이제 별로 신선하지도 설득력 있지 않을지도 모를, 한국 인문학자들의 고용불안과 가난 문제였다. 
모 대학 연구교수로 있다가 국책 사업이 종료된 후 이번 가을부터 본격적으로 실업자 신세가 된 후배는 이제 40대 중반이다. 그는, ‘퇴직금 덕분에 통장 잔액이 오랜만에 몇 백 만원이라 기쁘다’(?)면서, 이제 인생을 완전히 리셋해야 할지 모른다는 사실을 두렵게 깨닫고 있다 했다.
내가 아는 그는 성실하고 재능 있는 학자로서 독보적인 연구업적도 많이 쌓아왔다. 그러나 그가 연구하고 글 쓸 자리는 오늘날 한국 대학에는 없다. 동석한 다른 30대 연구자들도 아직은 공부하고 아이들을 가르치며 살아갈 희망을 포기하진 않았지만, ‘무슨 일이든 한다’는 각오를 갖고 있다 했다.
그래서 이미 다른 길을 가고 있는 인문학자들 이야기도 자연스레 화제가 되었다. 대리 운전기사를 하고 있는 박사수료생,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한다는 박사, 동네에 구멍가게를 열었던 모 교수 등.
아마 앞으로 우리는, ‘인구절벽’이 수도권 대학에도 들이닥친다는 몇 년 사이에, 인문학 석·박사 출신의 대리기사·일용직 노동자·서비스 노동자·영세 자영업자들을 흔하게 보게 될 것이다. 이미 ‘알바’로는 많은 젊은 인문학자가 험한 일에 뛰어들었을 것이다. 
물론 그런 일들을 ‘인문학 하기’에 대비시키려거나 폄하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연구자나 석·박사 학위 소지자라 해서 육체노동에 종사하지 말라는 법이 없고, 그들도 세상의 평범한 사람들처럼 가진 몸뚱이와 재주를 다 활용하여 어떤 일이라도 해서 먹고살아야 한다.
그럼에도 대규모 대학 구조조정을 겪고 있는 우리 사회는 이들이 가진 능력이나 쌓은 많은 지식이 어떻게 쓰이는 게 사회적으로 더 의미 있는지를 다시 물어야 할 때를 만났다. 어떤 생계를 택하는 것은 개인적 차원의 일이지만, 개인들이 가진 능력을 효과적으로 배치하는 것은 사회 전체의 문제다. 
이 나라는 여전히 낮고 부족한 인문·사회과학 수준을 올리고, 사회적으로 필요한 앎을 생산하는 일이 필요하지 않은가? 신자유주의 양극화와 디지털 문화의 고도화가 야기하는 새로운 인간 소외에 대처하여, 아이들이 ‘일베’가 되지 않도록 ‘마음’이라는 것에 대해 가르치고, 나이 든 어른들은 ‘태극기부대’를 멀리하도록 하는 일은 중요하지 않은가? 세계적이라는 한국의 문학·음악·영화 산업을 근저에서 더 단단하게 만들고, 더 좋고 많은 외국의 책과 이론을 번역하는 일들은 누가 어떻게 해야 할까? 
세상 전반에 대한 지식과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진 인재는 어떤 학문 분야와 기관에서 길러낼 수 있는가? 여전히 개혁과 ‘인간 안보’가 절실한 이 한반도에서 필요한 담론과 철학은 어디서 생산되어야 할까? 
인문학적 능력은 한 사회의 근본적인 자유·평등의 수준, 즉 민주주의와 품격에 관련된다. 기술과학과 자본주의의 ‘고삐 없는’ 발전에 대처할 개별자들의 실존과 사회적 힘도 인문학에서 나올 터이다.
그런 역량을 제대로 기르고 배치해서 쓰이게 하는 것은 우선은 국가와 대학이 할 일이다. 하지만 동시에 인문학 연구자들 스스로의 반성과 자기 구제 노력이 필요하다.
한국 인문학은 고답적인 주제로부터 나와 다수의 생명과 인간이 필요로 하는 새롭고 실천적인 학문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인문학자들이 반드시 대학 안에서만 가르치고 공부하란 법도 없고, 논문 쓰기에만 매몰된 태도도 고쳐야 한다. 
그러니 발상의 전환은 교육부와 대학 당국자들은 물론 모든 인문학 연구자와 연구자 조직에 필요하다. 학술지 논문을 생산하는 일 외에는 사실상 존재의미를 잃어버린 학회를 넘고, 생계와 학자로서의 자존감이 동시에 급박하게 악화되고 있는 연구자들을 위해 다양한 활동과 사업이 가능한 조직체가 필요하다. 수유+너머, 철학아카데미, 인문학협동조합 등 자율적 인문학 조직의 경험과 철학을 발전적으로 계승하여 규모 있고 안정적인 새로운 집(플랫폼)을 만들 필요가 있다.
이런 일에 그동안 큰 기득권을 누린 70·80년대 학번(특히 정규직 교수)들이 후속세대와 자기 분야 학문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나서야 한다. 교수가 된 지 오래됐을수록, 그리고 소위 주요 대학 출신들일수록 더 많은 책임이 있다. 즉 서울대, 연·고대의 70년대 학번들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고, 다음으로 80년대 초반 학번들 그 다음으로 80년대 후반 학번들 순서다. 맹성과 행동을 요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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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딱지/ 김홍표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신호 대기 중인 차 안에 홀로 있는 남성은 주로 코를 파면서 짧은 시간을 요긴하게 보낸다고 한다. 여기서 방점은 아무래도 ‘홀로 있는’과 ‘남성’에 찍힐 것 같다. 혼자 있을 때 코를 파는 일이 흔하고 그런 행위가 성별에 따라 다소 차이가 난다는 연구 결과는 이미 알려져 있다. 그러나 내가 알기로 중인환시(衆人環視) 중에 코를 파는 행동을 권장하는 사회는 없다. 그렇다면 들켰을 때 창피할 수도 있는 코 파는 행위가 사라지지 않고 인간 사회에 만연하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최근 여러 국가의 과학자들이 모여 코 파기와 관련된 인간의 유전자가 있지 않을까 연구한 적이 있었다. 국민의 세금을 가지고 별 쓸데없는 연구를 다 한다고 지청구 먹기 딱 좋은 실험 소재다. 하지만 ‘우리 피부는 왜 밤에 더 가려울까?’와 같은 궁금증을 파헤쳐가는 동안 가려움을 매개하는 새로운 신경세포가 발견되기도 했으니 코딱지를 연구하다가 지금껏 알려지지 않은 미생물 세계의 장관을 접하지 말란 법도 없다. 유전자가 코를 파는 행위와 같은 형질을 결정한다고 하면 늘 그렇듯 ‘유전자 만능’에 관한 찬반 논쟁이 불거진다. 해석에 유의해야 한다면서 다국적 연구진은 코 파는 일이 콧구멍을 청결하게 유지하기 위해 ‘자연 선택된’ 행동이라고 말했다. 인류의 생존에 뭔가 이점이 있었다는 뜻이다. 가느다란 인간의 손가락과 마디가 코 파기에 적합하다는 따위의 다소 허무맹랑한 주장도 있지만 이는 논외로 치자. 그러나 콧구멍을 청결하게 하는 일이 카나비노이드(cannabinoid) 신호체계와 관련이 있다는 데 대해선 솔깃한 느낌이 든다. 소량이나마 초콜릿에도 들어 있는 카나비노이드는 대마초의 주성분이며 우리 인간의 뇌에서도 작동하는 신경전달 물질이다. 우리 뇌 안의 보상 회로는 마약성 식물인 대마나 아편에서 발견되는 물질과 흡사한 화합물을 사용한다. 이런 연구 결과를 접하면 코 파는 행위가 탐닉적인 성격을 띨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아닌 게 아니라 코 파기의 즐거움을 논한 책이 시중에 회자되기도 한다.

많지는 않지만 코 파기에 대해 진지하게 연구하는 학자들도 있다. 2001년 “흉내 낼 수 없거나 흉내 내면 안 되는” 연구 결과로 이그(Ig) 노벨상을 받은 인도의 안드라데와 스리하리는 청소년과 아이들 200명을 대상으로 코 파는 행위에 대해 조사했다. 결과에 따르면 코 파는 일은 애 어른 할 것 없이 누구나 수행하는 매우 보편적인 인간의 특성에 속한다. 하지만 누구나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을 연구하고 논문으로 발표하는 과학자들이 그리 많지는 않다. 코 파는 행위가 즐거움을 준다거나 가려운 데를 긁는 행위가 뇌의 행복 중추를 자극한다는 연구도 극히 최근에 수행된 일이다. 임상 정신의학 저널에 소개된 안드라데와 스리하리의 연구 결과 중 흥미로운 사실은 심지어 코딱지가 맛있다고 답했던 아이들이 4.5퍼센트나 된다고 꼭 집어 숫자를 제시했다는 점이다. 맛있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나도 코딱지의 짭조름한 맛을 기억한다.

올해 초 동료로부터 코딱지를 먹는 일이 나쁜 게 아니라 오히려 건강에 좋을 수도 있다는 투의 얘기를 들었다. 얘기의 출처는 네이처에 나온 논문이었다. 내용은 방대하지만 결론은 으레 그렇듯 지극히 단순했다. 우리 코딱지에 사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생물이 항생물질을 만든다는 것이다. 이 연구 결과는 토양에 사는 미생물이 항생물질을 만든다는 기존의 통념을 흔들어 놓았다. 흔히 우리는 인간 질병의 원인이라며, 눈에 보이지 않게 작은 미생물을 싸잡아 ‘공공의 적’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알고 보면 대부분의 미생물은 인간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다. 오히려 일부 미생물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유익한 생명체들이다. 요즘 들어 이들 미생물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늘고 있다. 서점에 가면 10퍼센트 인간이니 우리 몸에 미생물이 너무 많다느니 하는 내용의 책을 쉽게 볼 수 있다.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세포 전체의 열 배 정도가 세균이고 그 무게는 무려 고기 ‘두 근 반’인 1.5킬로그램에 이른다. 이들 미생물 대부분은 대장(大腸)의 ‘주민’들이고 인간의 소화기관이 처리하지 못한 섬유질 등을 먹고 살면서 인간 영양소의 약 10퍼센트를 보상으로 제공한다. 그러나 북적거리는 그곳이 아니라도 우리 몸 곳곳에서 미생물은 꿋꿋이 살아간다. 한 올의 머리카락을 분간하지만 우리 눈이 세균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얼마나 다행인가?

입속처럼 콧속에도 90종류가 넘는 미생물이 상주한다. 사람마다 얼굴 생김이 다르듯 이들 미생물의 구성도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어떤 사람들의 코에는 루그더닌이라는 무척 생소한 이름의 항생제를 만드는 미생물이 산다고 한다. 여러 개의 아미노산으로 구성된 이 물질은 항생제 내성을 가진 고약한 세균의 생육을 저지할 수 있다. 그렇다면 루그더닌을 만드는 미생물을 보유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하여 병원성 세균에 대한 무기 하나를 더 가진 것이 아닐까? 혹시 우리 몸에 상주하는 세균은 우리 면역계의 일부일까? 질문은 계속되어야 하고 그 답을 얻기 위한 연구도 지속되어야 한다. 사소해 보이는 코딱지라고 예외는 아니다. 그렇게 물음을 거듭하다 보면 우리 안 작디작은 세계가 시나브로 그 참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12192114005&code=990100

화천군과 인기작가 이외수 점입가경 싸움 진짜 이유/ 박혁진 시사저널 기자

강원도 화천의 온도가 영하 15도 밑으로 떨어졌던 12월12일. 화천군으로 진입하는 도로 곳곳에 인기작가 이외수씨를 비난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군내가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인 이날, 빨간색 현수막은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감성마을 이외수는 군민에게 폭언 협박 즉각 사과하라’.
화천군청 1층 로비 한쪽에는 시민들을 위한 휴게실이 마련돼 있다. 이 공간에 관광책자 및 소설, 월간지 등이 수십 권 비치돼 있는데 작가 이외수씨의 책은 보이지 않았다. 화천 하면 떠오르는 작가를 꼽는다면 단연 이 작가일 텐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의 책은 단 한 권도 없었다.

폭언 있은 지 3개월 만에 군의원이 폭로

화천군 읍내에서 차로 40분 정도 더 들어가면 이 작가가 살고 있는 상서면 다목리가 나온다. 이 작가는 2004년 강원도 춘천에서 화천군 상서면 다목리로 거주지를 옮겨 현재까지 살고 있다. 화천군은 다목리 한쪽 산비탈을 깎아 이 작가의 집을 지었다. 이후 국고 지원을 받아 문학관을 비롯한 각종 부대시설도 건축했다. 이 작가가 거주하는 집과 문학관 등 시설의 정식명칭은 ‘감성마을테마문학공원’, 사람들은 이를 줄여 ‘감성마을’로 부른다. 감성마을은 현재는 연 2만 명이 찾는 화천군 대표적 관광명소로 자리 잡았다. 군사도시로만 사람들에게 알려졌던 화천이 ‘이외수’란 이름 석 자로 인해 이미지 변신을 한 것은 군민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런 그가 왜 화천군 의회와 시민단체들의 집중포화를 맞게 됐을까.

발단이 된 사건은 지난 8월초에 일어났다. 이 작가는 8월6일 감성마을테마문학공원에서 열린 세계평화안보문학축전 시상식에서 술을 마시고 최문순 화천군수에게 ‘문화예술인들을 이렇게 대접해도 되나?’ ‘박근혜나 이명박이나 최문순, 니들 다 똑같은 놈들 아냐’ ‘감성마을을 폭파하고 떠나겠다’는 등의 말과 함께 10여 분간 욕설을 퍼부었다고 한다.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후 이 작가는 최 군수에게 사과했고, 자신의 SNS 계정을 통해서도 유감의 뜻을 표명했다. 이 작가 역시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이를 통해 일단락된 줄 알았던 사건이 약 3개월 만인 10월27일 한 화천군의원에 의해 외부로 알려졌다. 자유한국당 소속 이흥일 화천군의원은 10월27일 화천군의회 본회의 발언에서 이날 소동을 언급했다. 이 의원은 “이 작가가 주요 기관장, 내·외빈들이 있는 가운데 군수에게 육두문자를 써가면서 욕설을 한 것은 화천군민 모두를 모독한 것”이라며 공식 사과를 촉구했다. 이 의원은 “감성마을은 매년 1억원의 인건비와 운영비 5000만원 등 2억원의 혈세가 지원되지만 경제활성화는 기대에 못 미친다”고 주장했다. 이 의원의 발언은 지역언론을 통해 보도됐고, 포털사이트를 통해 전국적 주목을 받았다.

이 의원의 발언이 있은 지 정확히 이틀 뒤 화천군 20개 시민단체에서는 이 작가를 비난하는 현수막 80여 장을 군내 곳곳에 내걸었다.

‘군민에게 폭언·협박 130억원에 대한 보답인가?’
‘국민혈세 받쳤더니(‘바쳤더니’를 오기함) 돌아온 건 육두문자’.
이후 군수와 군의회 입장이 주로 지역언론을 통해 중계됐고, 이 작가는 SNS를 통해 이를 반박하는 식으로 확전됐다. 결국 화천군의회는 사실상 이 작가를 표적으로 한 특별위원회 행정사무조사를 12월8일부터 진행했다.

그런데 양측 갈등의 원인이 된 8월6일 폭행 논란과 관련해 언론보도나 이 작가의 SNS,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은 내용이 있다. 과연 그날 소란이 우발적이었던 것인지, 아니면 두 사람 간 구원(舊怨)이 이날 불거져 나온 것인지 여부다. 전자였다면 사과로 끝날 수도 있는 문제로 볼 수 있지만, 후자라면 단순 사과로 마무리될 문제는 아닐 가능성이 크다.

화천군수 바뀌면서 갈등 폭발

이날 기자는 논란의 중심에 있는 화천군수와 이 작가를 직접 만났다. 두 당사자의 말을 종합해 보면 그날 우발적 사건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 작가는 “투병기간 3년 동안 술을 입에도 대지 않다가 이날 처음 술을 마셔서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욕설을 한 것은 분명 내 잘못이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사과했다”고 말했다.

다만 두 사람은 서로에게 쌓인 게 있었음을 암시하는 말은 했다.

“서운한 게 있을 수 있지. 전(前) 군수님과 비교해 나한테 쌓인 게 있었을 수도 있고,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난 몰라. 본인의 생각이니까. 뭔가 그런 게 있으니까 나한테 주정을 했겠지. 그것도 그냥 자리가 아니라 공식적인 자리에서 그랬을 정도면.”
(최문순 화천군수)
“이 양반은 어쨌든 자기 방침이 복지랑 교육이라 해서 문화예술에 대해선 관심 거의 안 기울였다. 그래서 어느 정도 섭섭한 맘이 나한테 쌓여 있었겠지. 그런데 군수 방침이니 그럴 수 있다 생각했고, 크게 뭐….” (이외수 작가)
두 사람의 말대로라면 2016년 최문순 화천군수가 취임하면서 이전 군수와 비교했을 때 이 작가와 감성마을에 관심을 덜 기울였던 것이 앙금이 쌓인 계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상대적으로 문화예술보다는 교육복지에 비중을 뒀던 최 군수 입장에서는 전임 군수의 감성마을 운영이나 지원 방식이 마음에 안 들었을 수 있다. 실제로 춘천에 사는 이 작가를 다른 지자체와 경쟁 끝에 화천군에 정착시킨 것은 전임 정갑철 군수였다. 정 전 군수는 2002년부터 2014년까지 내리 3선 군수를 지냈고, 재임 기간 이 작가를 화천으로 데려왔다. 그는 이 작가를 내세워 국고를 지원받아 지금의 감성마을테마문학공원을 조성했다. 전임 군수 시절에는 이 작가로 인해 지역경제가 활성화됐다는 기사도 간혹 보도됐다. 최문순 현 군수는 2016년 처음 당선됐다. 이 작가는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지만, 전임 군수와는 달라진 최 군수의 정책이 서운했을 수도 있다. 이 작가는 시사저널에 “정 전 군수가 문화예술 가치를 굉장히 높게 생각했다”며 “작가한테는 작품 이외에 더 이상 바라면 안 된다고 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이처럼 양측이 지향하는 바가 달랐으니 갈등은 예고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수면 밑 갈등이 표면화된 것은 8월 폭언 사건이 아닌 2월초다. 최 군수가 아닌 소속 군의회 의원들이 전방에 나섰다. 올 2월 화천군의회록을 보면 이미 이 작가에 대한 문제제기가 거세게 이뤄지고 있고, 군청 측 담당자가 의원들의 문제의식에 동조하는 답변 내용이 나와 있다.

“저희가 개인적으로도 만나서 그랬습니다. ‘우리가 화천군에서 한 100억이라는 돈을 쓰고 있는데 당신 혼자는 성공했지만 화천군에서 문학하는 사람 뭐야, 소설 쓰는 사람이 하나도 등단된 것이 없다. 그렇다면 여기 와서 한 일이 무엇인가.’ 이렇게 따져본 적도 있어요. 그래서 그 부분을 좀 우리 화천군민들이 잘 활용할 수 있도록 하고….” (최남선 화천군의원)

“감성테마파크공원, 문학공원 여기에도 보면 매년 방문자 수가 줄어들고 있고 수익도 줄어들고 있는데 이 부분에서 지금 우리 다른 쪽으로 생각을 해야 되지 않을까. 왜냐하면 이외수 작가님도 이제 나이가 들고 또 활동도 왕성하지 않고 그러다 보니까 거기에 대한 자꾸 잊혀지는 그런 면에서 방문객 수가 자꾸 줄어드는 그런 추세거든요.” (길종수 의원)

“전시실에 있는 물품은 기증을 받진 않았죠? 그거를 기증을 하려고 우리가 요청을 했는데 거기가 안 된다고 합니까? 아니면 우리가 요청을 해 보지 않고 그냥, 그냥 지나간 겁니까?” (이흥일 의원)

군의회 “이외수가 미치는 경제효과 적다”

군의회가 이때 제기한 문제들은 현재 시민단체들이 이 작가를 공격하는 근거로 사용되고 있다. 시민단체의 의견을 군의회가 대변한 것인지, 군의회의 주장을 시민단체가 그대로 차용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양측의 주장이 거의 비슷하다는 점은 분명하다. 양측이 비판하는 내용의 골자는 이 작가가 군의 전폭적 지원을 받음에도 지역활성화에 미치는 영향과 경제효과가 적다는 것이다. 화천군의회에서 이 작가에게 일종의 방세를 내라는 것도 이런 주장과 같은 맥락에서 언급됐다. 감성마을이 위치한 다목리에서는 이 작가가 문학관 내에 커피자판기를 설치해 관람객들에게 커피를 무료로 나눠주는 것도 문제를 삼고 있다. 심지어 이 작가가 화천이 아닌 춘천에 가서 물건을 샀다는 내용까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 작가를 비판하는 군민이나 군청 관계자들은 혈세가 들어가고 있기 때문에 이런 비판은 일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군청 입구에서 만난 한 공무원은 “실제 장사가 됐는지 안 됐는지, 감성마을에 선생님 오기 전이랑 후가 얼마나 다른지는 상인들이 제일 잘 안다”며 “그렇게 주민들이 느끼는 것도 일리는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결국 양측 갈등의 쟁점은 과연 이 작가가 화천군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이것이 주민들이 느낄 만큼 경제적 효과를 가져왔는지 정도로 요약된다. 이 부분에서 양측의 주장이 완전히 엇갈리고 있다.

이흥일 의원은 이와 관련해 10월27일 군의회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감성마을은 2004년부터 2013년까지 9년 동안에 걸쳐 조성되었고, 사업비는 그동안 133억3300만원이 소요됐으며, 그중에 군비가 67억300만원 투입됐습니다. 이 감성마을을 무슨 근거로 짓게 되었는지 우리 주민들은 아직도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중략) 공증이나 의회 동의 없이 이 한 페이지짜리 협약서에 의해 추진되었고, 이 행정행위는 행정절차상 하자와 법률상 어떠한 권리도 주장할 수 없는 종이에 불과하였습니다. 이 협약 한 장에 의해 133억이라는 돈이 투자됐다는 사실입니다. 현재에도 감성마을 관련 운영비로만 매년 2억 이상이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인건비가 5명에 1억 정도가 매년 지출되고 있고, 공공운영비에서는 전기료만 1년에 5000만원 정도 지출되고 있습니다. 특히 올해는 세계문학축전 행사비로 도비 1억, 군비 1억 해서 총사업비 2억이 책정되어 추진하는 가운데 이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 의원뿐만 아니라 다른 군의원들이 본회의를 통해 한 발언이나 군청 공무원의 답변을 보면 어떻게 하면 이 작가를 더 잘 ‘활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여과 없이 드러나고 있다. 군청 관계자는 “군청이나 군의회 입장에서는 당연히 이 작가를 통해 지역사회를 발전시키는 방안을 모색한다”며 “이것이 나쁜 일은 아니라고 본다”고 주장했다.

지방선거와 연관 짓는 시선도

돈 문제와 관련해서는 이 작가 역시 목소리 높여 반박했다. 

“2004년 여기 왔을 때 사택도 없었다. 군에서 사택은 지어준 거다. 나머지는 거의 다 사실 정부에서 지원받았다. 그리고 내 이름 팔아서 군이 지원받은 거지, 화천군수 이름 보고 줬겠나. 아니면 군의원 얼굴 보고 줬겠는가. 다 내 이름 걸고 온 거 아니겠나. 어쨌든 내 예술적 활동을 빙자해 다 타다가 자기네들이 잘못 쓴 거, 왜 나한테 이제 와서 뒤집어씌우고 그러나. 내가 문학관을 운영하나? 내 이름 걸고 군에서 운영하는 거 아닌가. 그동안 몇 차례 있었던 감사에서 단 한 번도 돈 문제로 지적받은 적도 없다. 오히려 군에서 고용한 여기 직원들 월급이 너무 적어 내 돈 50만원씩을 매달 지원하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화천에 기여한 가치를 돈으로 환산할 수 있나?”
화천군은 2004년부터 무료로 운영돼 온 이외수 문학관을 올해 6월부터 유료로 전환했다. 전환 과정에서 이 작가와의 논의는 없었다고 한다. 현재 이외수 문학관에서 팔고 있는 이 작가의 그림과 머그컵(1만5000원)은 모두 군의 수입으로 잡힌다. 이외수 작가의 폭언과 방세 납부 논란으로 양측의 갈등이 외부에 알려졌지만, 결국 기저에는 문화적 가치를 경제적 가치로 환산하는 과정에서 오는 갈등이 깔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화천군과 이 작가의 싸움을 내년 지방선거와 연관 짓는 시선도 적지 않다. 화천에 살고 있는 한 주민은 “한 번 정도로는 일을 제대로 할 수 없고, 두세 번은 뽑아줘야 한다는 것이 시골 분위기인데 내년 지방선거에서는 자유한국당이 어렵다는 얘기가 나오다 보니 군수나 군의회 입장에서는 난감한 측면이 있을 것”이라며 “이 작가를 때림으로써 보수 세력이 결집하는 효과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최 군수는 이런 주장에 대해 “내 중심만 잡고 가면 되는 것”이라고만 말했다. 반면 이 작가는 “사실 시골 사람들은 이외수 혼자 어마어마한 나랏돈을 다 쓰고 우리한테 한 푼도 안 줬다 이런 식으로 선동하면 다 믿는다”며 “이는 명백한 정치적 물타기”라고 주장했다.  

출처 http://m.sisapress.com/journal/article/172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