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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요일

나오시라, 양심수인 열아홉/ 김인국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대표

무는 외롭다. 아니 외롭겠다. 알몸으로 지내는 겨울뿐 아니라 꽃피우는 봄날에도, 이파리 무성하고 그늘 좋은 여름에도, 보란 듯이 주렁주렁 열매 여는 가을에도 나무는 외로울 것만 같다. 평생을 살아봐도 늘 한 자리요 넓은 세상 얘기도 바람이 아니면 들을 수 없는 신세가 그렇지만 나무와 나무 사이의 운명적인 ‘양팔 간격’ 때문에 더욱 그렇다. 직립해서 수직으로 살아가는 한 어쩔 수 없다.

쓸쓸하기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나무야/ 나무야/ 겨울나무야/ 눈 쌓인 응달에 외로이 서서/ 아무도 찾지 않는 추운 겨울을/ 바람 따라 휘파람만 불고 있느냐”는 노래는 사실 사람의 이야기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사이’가 있어서 누구나 외롭다. 그래서 힘들지만 그래야 인간이다.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바짝 좁히기도 하고 멀찌감치 벌리기도 한다마는 마냥 좋다고 해서 사이를 없애서도 안되고, 이것저것 다 싫다고 간을 칸막이 삼아 그 안에 숨어서도 안된다. 자기를 버리고 자기를 잃어도 탈이고, 남을 외면하고 남과 끊어져도 문제다. 인(人)의 간(間)을 어떻게 유지하느냐에 따라 인간은 더불어 큰 숲을 이루는 조화로운 나무가 되기도 하고, 저만 알고 저만 위하는 고사목이었다가 한순간에 자빠지는 사상누각의 기둥이 되기도 한다. 
미국 캘리포니아 삼나무는 하늘로 백미터까지 솟구치는 엄청난 키다리다. 바람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깊은 뿌리가 필수일 텐데, 지표면의 물을 빨아들이려다 보니 형편이 그렇지 못하다고 한다.
그러면 무슨 힘으로 잦은 강풍에 맞서 어마어마한 키와 무게를 유지할까. 비결은 각자 뿌리를 내리는 대신 사방팔방으로 뿌리를 넓혀가며 서로에게 기대고 서로를 지탱하여 주는 어깨동무에 있다. 한 그루의 삼나무를 쓰러뜨리려면 숲 전체를 쓰러뜨려야 한다는 말은 그래서 나왔다.
아직 소비에트연방이던 시절, 시베리아에서 사목하다가 돌아온 신부가 들려준 이야기다. 무시무시한 추위와 폭설의 유형지에 사람들이 살기는 살더냐고, 산다면 어떻게 살더냐고 물었더니 ‘밧줄’ 하나로 지루하고 삭막한 겨울을 견딘다고 하였다. 월동준비 가운데 빠뜨릴 수 없는 하나가 옆집과 우리 집을 이어주는 튼튼한 밧줄이란다. 한번 내렸다 하면 지붕을 덮고 마는 폭설은 길부터 끊어놓는데 그럴 때면 이웃과 밧줄을 맞잡고 흔들거나 빙빙 돌려서 길을 만든다고 한다. 고립과 죽음이 한 낱말인 겨울나라의 사람들은 밧줄 하나로 간밤의 안부를 묻고, 부르면 언제나 달려갈 테니 아무 걱정하지 말라는 확인을 그렇게 주고받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한 칸 사이에 존재한다. 한 칸의 용도는 쓰기 나름이다. 물론 이웃의 곤란과 아픔을 살피는 창이면서 세상을 만나러 나가는 대문이어야 하지만 저 혼자만으로 만족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분리장벽으로도 손색이 없다. 나와 너 사이의 그 한 칸을 어떻게 쓸지는 각자 알아서 할 일이나 두루 어우러질 때 사람은 비로소 사람이 된다. 
머잖아 예수성탄이다. 하늘의 아드님은 어째서 사람이 되고 싶었을까? 일찌감치 높은 하늘에 거처를 정하고 홀로 하늘의 궁창을 돌아다니시던 하느님이 마침내 찾아낸 안식처가 하필 사람들 한가운데였을까? 사람이 좋아서다. 뭐니 뭐니 해도 사람이 좋아서다.
“빽빽한 시내버스 속이 이다지도 좋을 수 있으랴/ 가난한 마음들이 서로 옷을 부비며 살갗을 부비며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는/ 시내버스 속은 좋고도 정말 좋아라/ 땀 냄새를 섞으며 함께 흔들리는 때론 하느님을 함께 나누어 갖는 한 시대의 슬픈 살덩이들/ 정말로 아름답고 좋아라/ 손잡이 하나에 몇 명씩 매달려도 이웃의 발등을 쬐끔이라도 밟지 않으려고 벌컥벌컥 숨을 쉬는 사람들”(김준태)
지금 사는 대로 죽어서도 똑같이 살 것이다. 천당이든 지옥이든 현재의 연장이기 때문이다. 이승에서 하느님과 이웃과 어울려 사는 게 좋았던 사람은 죽어서도 오순도순 그렇게 살아갈 것이고, 하늘도 모르고 이웃도 모르고 저 혼자만으로 만족했던 사람은 저승에서도 영영 자아도취와 고독의 방에서 지내게 될 것이다. 
문득 감방을 생각한다. 거기는 본시 저만 아는 바보들을 위해 마련된 자리. 자신이 처한 오늘의 고립과 단절은 스스로 벽을 둘러치고 살아온 이기심의 결과임을 몸서리치게 실감하며 오래오래 사람을 그리워하고, 사람이 얼마나 좋은지 깨닫는 정진의 도량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좋아서 사람을 위하던 사람들은 그만 나와야 하고, 그곳은 사람을 멀리하고 사람을 괴롭히던 자들로 채워져야 한다. 양심수석방추진위원회가 선정한 열아홉 분의 사면을 손꼽아 기다린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12082049005&code=990100#csidx0d556d0097adfa8aa345b65dcd38f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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