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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31일 수요일

[구혜영의 이면]박용진, 과감한 전환/ 경향신문2018.10.30

요즘 정치권 인사들을 만나면 더불어민주당 박용진 의원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대박’을 터뜨렸다는, 대체로 비슷한 평가였다. 10월5일 ‘유치원 비리 근절을 위한 정책 토론회’ 이후 비리 유치원 명단 공개(12일), 유치원 공공성 강화를 위한 정부 종합대책 발표(25일). 국회의원의 문제 제기 이후 정부가 20여일 만에 제도로 응답한 보기 드문 경우다. 
‘박용진현상’은 사안 자체부터 인화성이 높았다. 기득권과의 정면 승부였다는 점에서 많은 박수를 받았다. 유치원 문제는 육아, 교육, 복지를 포괄하는 ‘헬조선 프레임’과 맥이 닿아 있다. 여성들의 삶을 옥죄는 핵심고리이기도 했다. 내 아이를 위해 ‘을’을 자처했던 부모들의 분노는 또 얼마나 컸나. 이런 문제를 다뤄야 할 교육위원회는 유난히 높은 전문성을 요구받는다. 그만큼 이해관계가 엉켜 있는 상임위다. 민주당 지도부는 박 의원의 문제 제기 후 사흘이 지나서야 입장을 발표했다. 박 의원의 고군분투를 ‘똘끼’ 정치인의 무모한 돌파로 해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이슈의 파괴력, 분노의 조직화, 기득권과의 싸움이 정치적 성공으로 이어졌다면 좀 더 정교한 해석이 필요하지 않을까. 국정감사 기간 내내 ‘박용진현상’을 들여다봤던 까닭이다. 그 자리엔 정당과 국회의 전환이 꿈틀대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박 의원의 첫 자서전 제목은 ‘과감한 전환’이다. 
국회의원들은 시민(국민), 정의를 외친다. 정작 이런 소명이 정당을 통해 어떻게 실현되는지는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다. 한국 정당의 언어는 ‘계파’ ‘진영’으로 통할 뿐이다. 정당을 배타적 권력 쟁취의 도구로 삼아 온 후과다. 박 의원은 ‘진짜 권력’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을 상대로 차등과세 부과를 끌어냈지만 정무위에서 밀려났다. 스스로 “무계파, 비주류 출신인 죄”라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일부 주류 쪽 의원들은 “다 알고 있는 문제다. 운이 좋았지 뭐”라며 박 의원의 성과를 깎아내리는 데 급급했다. 
정당은 정권획득을 위한 결사체지만 평소엔 갈등해결을 위한 조정기관이다. 전 세계적으로 이념보다 사회경제적 균열이 정당 정체성을 결정하는 변수가 된 지 오래다. 그러나 범진보의 맏형을 자처해 온 민주당조차 기득권 앞에선 자유한국당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박 의원은 “민주당 소속 진보교육감들도 유치원연합회 위력 앞에 무너지더라. 최근 2년간 아예 감사를 포기한 곳도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박 의원의 질주로 정당이 변하고 있다. 계파와 진영이 난무했던 자리에 시민(정치하는엄마들, 시민감사관 등)들이 올라섰다. 표를 의식할 수밖에 없다지만 유권자의 약 30~40%는 투표에 불참한다. 이번을 계기로 이들 중 상당수가 정치 안으로 들어왔을 거라 짐작된다. 사립유치원의 폐원 압박에 공동육아로 대응하는 학부모들이 많아졌다. 정당이 사회적 기반을 구축하게 된 것만 해도 반가운 일이다. 여기에 “삶과 밀착된 문제를 해결하면 새 질서가 만들어지고 지지도 받게 된다”는 공식까지 추가된다면 정당정치의 ‘전환’이라 할 만하다. 
정권교체 후에도 국회는 청와대와 행정부에 종속된 ‘반응 정치’로 일관했다. 소득주도성장, 개헌, 최저임금 등 굵직한 현안은 청와대와 정부가 주도했다. 국회는 직접민주주의와 대의민주주의를 놓고 추상적 담론 경쟁에 빠졌고, 양당제와 다당제의 선악을 매기느라 바빴다. ‘국회=비생산적’이라는 인식이 커지면서 “여의도에서 차기 대선 후보가 나오기 어려울 것”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들린다.
국회가 박 의원의 질주로 달라지고 있다. 국회발 의제가 나온 지 20여일 만에 온 나라가 움직였다. 2013년 누리과정이 실시된 이후 교육관료들의 직무유기, 짬짜미 감사 등 묵은 적폐가 민낯을 드러냈다. 국회는 유아교육이라는 공적 가치에 관한 한 대표성을 인정받게 됐다. 촛불 이후 주요 의제에 직접 참여하는 게 낫다는 시민들이 늘었지만, 살다 보면 내 권리를 위임하는 간접 참여도 괜찮겠다는 시민들도 많아지는 추세다. 선거제 개편 논의도 사회적 신뢰가 뒷받침된다면 속도가 빨라질지 모를 일이다. 이 정도면 국회 정치의 전환이 시작됐다고 할 수 있겠다.
박 의원은 2000년 이후 10여년 동안 진보정당 깃발을 펄럭이며 세상을 바꾸겠다고 외쳤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2011년 진보정당 울타리를 넘어 거대 정당 광장으로 건너왔다. 한쪽은 배신자, 또 한쪽은 비주류로 낙인찍었다. 진보정당 시절 모두가 독자집권을 외칠 때 홀로 연립정부를 주장했고, 민주당에 와선 배후세력 없는 설움 속에 끊임없이 자기 존재를 증명해야 했다. 늘 “1회초 등판만 하고 내려오는 것 아닌가” 가슴 졸여야 했다. 
하지만 생각대로 안되는 삶이란, 생각지도 못한 삶이 다가올 수도 있다는 것. 정치라고 다르겠는가. 진보정당은 지금 선거제도 개혁을 주도하고 있고, 민주당은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주류가 주류로 올라선 역사라며 자랑스러워하지 않나. 박용진, ‘과감한 전환’을 응원한다.
원문보기: 
https://goo.gl/vKcuN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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