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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1월 27일 토요일

부락마다 문화 '센터'를

부락마다 문화 '센터'를

경향신문 1962. 03. 12 기사(칼럼/논단)

 

부락마다 문화 '센터'를

김익달

 

자매결연을 하기 위하여 경부고가 충북의 접경인 상주군 모서면 병산리에 다녀왔다. 이곳은 읍내에서 '뻐스'로 60리 또 도보로 30리나 되는 벽촌이었다. 1백4호나 되는 이 마을은 높이 9백80미터인 소백산맥인 백화산을 등지고 좋은 자연환경이었으나 아직은 완전 문맹이 91명이었고 농우가 35두, 돼지 40두, 닭 1백25수라는 보잘것없는 가축을 가지고 있을 뿐 문자 그대로 원시적인 가난과 무지의 생활이었다. 신문 한 장, 잡지 한 권 '라디오' 한 대도 없었으니 말이다. 혁명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이 마을 사람들도 이제는 고리체 정리를 이해하기 시작했으며 동민의 유일한 오락이던 도박도 일제 지양되었고 음주도 최근에는 줄어졌다고 한다. 이나마의 성과도 군과 면의 행정당국자들의 대단한 열과 노력의 소산으로 엿보였다. 그러나 과거 5.6차의 국회의원 선거로 술 사주고 돈 주어가며 표를 찍어달라던 인습과 타성이 농후해서 영농자금 등 물질적으로 도와주는 데 있어서는 잘못하면 의타심만 조장하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하며 이러한 것을 근본적으로 시정하여 국가의 지상사명인 농촌부흥을 이룩하는 데는 첫째로 문맹퇴치와 계몽이 선행하여야 한다. 농촌문고니 뭐니 하고 신문에 떠들어댔지만 고작해야 '새나라신문'이 오고 있을 뿐이었다. 문제는 지금까지의 그들의 오락과 취미였던 도박과 음주에 대치하여 '라디오'를 듣고 신문과 잡지, 서적을 보게 함으로써 그들이 자가한 국민이 될 때 비로소 국가재건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되며 그러므로 농촌계몽운동은 구호에만 그치지 말고 근본적으로 국가가 예산 조치를 해서 부락마다 문화 '센터'를 만들어 적어도 '라디오' 1대와 4,5종의 신문, 7,8종의 잡지, 2,3백권의 서적을 구비해서 동민이 자유롭게 문화혜택을 입도록 해야 하겠다. 그러자면 한 마을에 15평 정도(10평은 청년회 회의실, 5평은 도서실)의 동사를 짓게 하되 노력은 동민의 근로동원으로 하면 자재비 약 50만환이면 될 것이고 서적구입비 30-40만환과 신문, 잡지 1개년분에 10-20만환이면 충분하니 전국이 2만4천여 개 리라면 총예산 2백40억환이 되며 이것은 우리나라 국가 전체 예산의 4% 정도가 되는 것이다. (학원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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