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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 4일 월요일

귄터 그라스의 나라 / 김누리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89549.html

지난 4월13일 독일의 노벨상 수상 작가 귄터 그라스가 세상을 떠났다. 독일 제1국영방송(ARD)은 이날 저녁 8시부터 11시까지 그라스 추모 방송을 긴급 편성했고, 독일의 지성을 대표하는 주간지 <디 차이트>는 무려 일곱 쪽의 지면을 ‘그라스 추모’에 할애했다. 독일의 모든 방송, 모든 신문이 그라스의 죽음을 애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한 작가에게 독일 사회가 바치는 성대한 이별 의식이 놀라웠고, 부러웠다.
귄터 그라스는 분명 위대한 작가다. 그에게 ‘세기의 작가’, 그의 소설 <양철북>에 ‘세기의 작품’이라는 찬사가 따라다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실적이면서 몽환적이고, 알레고리적이면서 변증법적인 그의 소설은 현대소설이 닿을 수 있는 미학적 가능성의 정점을 보여준다. 그라스는 제임스 조이스, 프란츠 카프카, 가브리엘 마르케스와 함께 20세기 문학의 고원에 우뚝 선 거봉이다.
그러나 그라스의 진정한 위대함은 ‘문학 너머’에 있다. 그는 ‘좋은 작품’을 썼을 뿐만 아니라 ‘좋은 독일’을 만들었다. 그는 오늘의 독일이 나치즘이 남긴 정신적 물질적 폐허 속에서 성숙한 민주공화국으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귄터 그라스의 역사가 독일의 역사이고, 독일의 역사가 귄터 그라스의 역사”(<슈피겔>)라는 평가는 입에 발린 찬사가 아니다.
그라스는 위대한 ‘시민’이었다. 그는 선거 때마다 자원봉사자들로 유권자연합을 결성하여 선거운동에 뛰어들었다. 1969년 선거에서는 190회, 1972년 선거에서는 130회 이상의 유세를 직접 펼쳤고, 1999년 노벨상을 받고 나서 제일 먼저 한 일도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의회 선거에 지원유세를 나선 것이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아주 일상적인 말로 맥주잔을 앞에 놓고” 대중들과 토론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그라스에게 정치 참여의 이유를 물으면 간단한 대답이 돌아왔다. “저는 시민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실로 1960년대 이후 독일 현대사의 정치적 굽이마다 그라스의 자취가 배어 있지 않은 곳은 거의 없다. 1966년 나치 전력을 가진 쿠르트 키징거가 총리로 내정되자, 그라스는 취임 전날 사임을 촉구하는 공개편지를 보낸다. “심각한 전력을 가진 당신이 총리 자리에 앉게 된다면, 학생들에게 역사 교육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입니까? 당신은 책임만 감수하면 되지만, 우리는 그 결과와 치욕을 감수해야 합니다.”
1989년 통일공간에서는 “아우슈비츠가 있는 한 독일통일의 도덕적 정당성은 없다”며 “민족통일보다 유럽통합이 우선한다”는 주장을 펼쳐 독일인들을 경악하게 했고, 불안해하던 유럽인들을 안심시켰다. 부채탕감론으로 서독인들의 ‘통일세’ 논란을 잠재운 것도 그라스였다.
그라스는 이런 거침없는 터부 파괴로 ‘둥지를 더럽히는 자’, ‘조국이 없는 놈’이라는 등 온갖 비난을 한 몸에 받았지만, 동시에 독일이 나치즘에 의해 실추된 도덕적 권위를 회복하고 유럽연합의 중심국으로 도약하는 데 정신적인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그러니 그라스가 “독일 정체성의 생산공장”, “독일 민주주의의 교사”, “독일의 비공식적 양심”이라고 불리는 것도 그다지 어색할 것이 없다. 오늘의 독일은 귄터 그라스의 정신에서 탄생한 나라인 것이다.
김누리 중앙대 교수·독문학
김누리 중앙대 교수·독문학
그라스는 필자와의 대담에서 “작가는 승자의 자리에 앉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역사가는 승자의 이야기를 쓰지만, 작가는 패자의 이야기를 써야 한다”는 그의 말이 지금도 귓전에 어른거린다.
치욕의 역사를 가진 독일 사회에 끊임없이 경종을 울린 ‘양철북 고수’여, 이제 편히 잠드시라. 당신의 북소리로 깨어난 독일은 다시는 나치즘의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으리니!
김누리 중앙대 교수·독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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