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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2월 10일 화요일

낙루

낙루(落淚), 눈물을 흘린다는 뜻이다.

눈물은 어느 때 나오는 것일까? 나는 언제 눈물을 흘렸던 것일까? 돌아보니, 선친께서 돌아가셨을 때, 또 벗이 죽었을 때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떠오른다.

장자(莊子)는 삶과 죽음을 동전의 양면처럼 여겼다 하지만, 어찌 한갓 어줍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나와 같은 사람이 선친이나 벗처럼 인연 깊은 사람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으랴.

하지만 나에게 인연이 그리 깊지 않은 사람의 죽음이나 아픔을 직면하고 눈물을 흘린 기억은 그리 많지 않다. 나는 오히려 무엇이 그 사람을 아프게 했는지, 어찌하면 그 아픔을 덜 수 있는지, 그런 쪽으로 생각을 기울여왔던 듯싶다.

그렇지만, 다른 이의 글에서 “눈물을 흘렸다”는 대목이 있으면, 거듭 그 대목을 곱씹어보게 된다. 눈물이야말로 사람을 움직이는 가장 큰 동력이 아닐까라는 생각 때문이다. 세상 만물을 따스한 연민의 눈을 바라볼 수 있는 이의 눈물은 진정 이슬처럼 맑을 것이다.

눈물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다름 아니라 조영래 변호사(1947년 3월 26일-1990년 12월 12일)가 남긴 글 모음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1991)를 다시금 뒤적여보면서 한참 동안 생각이 머문 대목 때문이다. 12월 12일은 조영래 변호사의 기일(忌日)이다.

조영래 변호사가 사법시험에 합격했던 것은 1971년(제13회)의 일이다. 당시 서울대 대학원생이었고 스무네 살 때의 일. 그리고 1980년 3월 사법연수원에 다시 들어가, 연수과정을 마친 때가 1982년 서른다섯 살 때이다.

그후 1990년 폐암으로 타계할 때까지 변호사로서 일했다. 정작 변호사로 일했던 시간보다 사법연수원을 마치기까지가 더 길었다.

이른바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1971년)으로 구속되고 징역형을 살고, 다시 민청학련 사건(1974년)으로 수배되고 도피 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도피 생활을 하는 가운데서도 훗날 ‘전태일 평전’으로 이름을 고쳐지게 되는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을 썼다.)

그러니까, 내가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한참 생각을 머문 곳은, 1981년 무렵 삼십대 중반의 나이에 사법연수원생 노릇을 하면서 써놓은 일기 가운데 한부분이다. 검찰청에서 연수를 받으면서 남겨 놓은 것인 듯싶다.

“강○주, 27세. 운전사. 내가 석방한 최초의 사람이다.

업과상(업무상 과실 치상, 인용자) 전과가 있어서 집유기간중. 게다가 면허정지 기간 중에 운전을 하여 사고를 냈다. 기준으로는 석방이 불가능에 가깝다고 하나 도저히 쉽사리 구속 기소할 수는 없다는 자책이 있어 몇차례 담당검사, 부장 차장 검사선에까지 절충을 하여 석방결재를 얻어냈다.

어젯밤에 석방되었을 것이다. 66세의 노부(老父)가 벌금 60만원을 들고 11일날 찾아왔는데 가슴앓이가 매우 심한 것 같았다. 낙루(落淚).”


낙루.
나는 이 단어 앞에서 그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면허정지 기간 중에 사고를 낸 젊은 운전사의 석방은, 이후 조영래 변호사가 변론을 맡은 갖가지 뜻깊은 사건--우리 나라의 공익 소송의 첫머리에 놓이는 망원동 수재사건(1984년)을 비롯해서 대우어패럴 사건(1985년), 여성의 조기 정년제를 철폐하게 된 계기가 된 이경숙 씨 사건(1985년), 부천경찰서 성고문사건의 권인숙 씨 변론(1986년), ‘말’ 보도지침 사건(1986년), 상봉동 진폐증 사건이라고도 일컬어지는 박길래 씨 사건(1987년) 등등에 비하면, 하찮은 것이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것이다. 10년 가까이, 징역형을 살고 또 도피 생활을 거쳐야만 했던 예비 변호사가 법조인으로서 첫걸음을 뗄 때 흘렸던 이 눈물에 담겨 있는 뜻은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이어졌던 것이리라. “나에게 대학생 친구 한 명만 있다면”이라고 말했던 전태일 열사의 곁에서 바로 그 대학생이 되었던 것은 바로 이 눈물 때문이 아니었을까.

조영래 변호사는 이렇게 적고 있다.


"석방 품신서에는 이런 등등의 가정 형편이나 본인의 성실성 등을 정상(情狀)란에 많이 썼으나 기실 그런 것 때문에 굳이 석방시키고자 뛰어다녔던 것은 아니다.

운전사들에 대해 지나치게 가혹한 형사책임을 부과하고 있는 사법관행. 또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운전사들 자신의 체념에 대하여 그대로 승복할 수 없다는 것.

한 젊은 인간의 장래와 그에 연관된 숱한 사람들의 생애가 기실은 그 한 인간만의 과오로 돌릴 수 없는 ‘재수 없는 사고’로 인하여 관료적 절차에 따라 간단히 아무렇게나 짓밟혀버려서는 아니 된다는 것.

그리고 또한 관행이나 사무처리상의 편의가 한 인간의 전생애보다도 우선 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의무감.

이런 것들이 나로 하여금 아직도 낯선 검찰청의 여러 방들을 쩔쩔매며 돌아다니게 만든 것 같다. 이 사람은 나에게 축복을 가져다주었다.”


'한 젊은 인간의 장래와 그에 연관된 숱한 사람들의 생애' '한 인간의 전생애'라는 구절이 '관료적 절차' '관행이나 사무처리상의 편의'와 대비되어 도드라져 보인다.

그이는 법조문을 보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인간의 삶과, 얽히고섥힌 인간관계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눈물을 머금은 눈으로.

살아 있다면, 올해(2002년)로 쉰다섯의 나이가 되었을 조영래 변호사. 그이는 이 땅에 큰 씨앗들을 뿌려놓았다.

자라나는 세대는 앞으로도 그이를 <전태일 평전>의 저자로 기억할 것이다. 법조인들은 공익적 개념의 집단 소송의 길을 열고, 오늘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으로 발전한 정법회를 만든 변호사, 인권과 노동 변론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변호사로 그이를 기억할 것이다.

이 땅의 진정한 민주화를 염원하는 이들은 그이를 민주화운동의 영원한 선배로서 기억할 것이다. 이런 기억들 속에서, 나는 그이의 서글서글한 얼굴에 흘러내렸을 눈물을 잠시 떠올려 보았을 뿐일 것이다. 단지 눈물을,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초발심의 눈물을.


-덧붙이는 글-

교토통신 특파원이었던 히라이 히사시(平井久志) 씨는 그이에 대한 추모의 글에서 “조영래 변호사라면 어떻게 했을까”라고 물었다. 이런 질문을 한번쯤 던져보고 싶은 이들이 적잖다. 그런 사람들이 이른바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으로 함께 고초를 겪었던, 심재권, 장기표, 이신범 씨들만이 있는 게 아닐 것이다.

과연, “조영래 변호사라면 어떻게 했을까?”

다만 오늘의 현실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일 한가지.

12월 10일에는 전태일기념사업회, 70년대민주노동운동동지회, 청우회(청계피복노동조합동우회) 등이 “전태일정신을 모독하는 민주화운동 보상을 거부한다!!”는 성명서를 냈다.

그리고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법률'에 따라 전태일 열사에 대한 보상금이 930만원이라는 데 대해(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인가) “전태일에 대한 보상을 거부할 것”과 함께 이 법의 합리적인 개정, “민주화운동 관련자의 범위 확대, 민주화운동 보상심의 위원회의 합리적 구성, 명예회복 조처 명시, 공정한 기준에 의한 보상금 지급의 현실화”를 주장했다.(2002년 12월 10일.)

2002년 6월 11일 화요일

'마들레느 아저씨' 를 마음속에 그린다

'마들레느 아저씨' 를 마음속에 그린다
6.13 지방선거를 맞아…


<모래시계 古今- 6.13> 1.
1789년 프랑스 시민들은 대혁명을 일으켰다. 이 혁명으로 왕정은 폐지되었고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공화국을 이끌던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쟁에서 패하자 공화정은 몰락하고 프랑스는 다시 왕정으로 돌아갔다. 19세기 프랑스의 역사는 공화파와 왕당파 사이의 대립과 투쟁으로 점철되어 있다. 공화파의 이념을 담은 '라 마르세예즈'는 혁명기인 1792년에 작곡되어 국민의회에 의해 국가(國歌)로 선포되었지만, 1879년이 되어서야 정식으로 프랑스 국가가 된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었다.

프랑스 대혁명으로부터 1830년 7월 혁명과 1832년의 폭동에 이르는 시기의 정치 사회적 격변을 무대로 하여, 빅토르 위고는 <레 미제라블>(1862년 간행)을 썼다.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이야기겠지만, 소설의 큰 줄기를 잠시 살펴본다.

주인공인 장 발장. 그이는 굶어 죽어 가는 조카들을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치는 잘못을 저질러 감옥을 가게 되고, 몇 차례에 걸쳐 탈옥하려 하지만 실패하여 무려 19년 만에야 가석방으로 풀려나게 된다.
  
 ▲ 뮤지컬로 만들어진 <레미제라블>의 포스터. ⓒ  
 
이때가 1815년. 디뉴(Digne)의 주교에게서 은촛대를 훔쳤지만 용서를 받음으로써 크게 회심(回心)하여 새로운 삶을 살아 나가게 된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1823년, 몽트뢰유-쉬르-메르(Montreuil-sur-Mer)라는 조그만 도시. 장 발장은 이곳에서 마들레느라는 이름으로 신분을 감추고 공장을 경영하며 전해져 내려오던 이 도시의 산업을 더욱 발전시켜 시장이 된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이 자신의 이름으로 체포된 사실을 알게 되어 자수를 한다. 하지만 여직공이었던 팡틴느와의 약속--사생아인 코제트를 죽을 때까지 맡아서 돌봐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도망친다.

워털루 전쟁의 패잔병인 테나르디에의 여관에서 노예처럼 혹사당하고 있던 팡틴느의 딸 코제트를 구해낸 장 발장은 파리(Paris)의 어느 수녀원에 몸을 숨긴다. 장 발장은 정원사로 일하면서 코제트를 키운다. 코제트는 아름답게 성장하고, 혁명을 꿈꾸는 젊은이 마리우스와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1832년 왕정에 항거하는 공화파의 폭동이 일어난다. 마리우스가 동지들과 함께 싸우고 있는 바리케이드로 간 장발장은 마리우스를 구출하여 하수도로 도망친다.
그때 폭도들에게 붙잡혀서 처형을 기다리던 자베르를 보고, 장 발장은 집행을 자원하고 자베르를 풀어준다.
법과 제도를 신봉하며 범죄자를 단죄해야만 한다는 원칙주의자 자베르는 자신의 원칙과 장 발장이 자신에게 베풀어준 '사랑' 앞에 가치관의 혼란을 느끼며 세느 강에 투신, 자살한다.
부상을 입었던 마리우스가 다 나은 뒤 코제트와 결혼식을 거행한다. 장 발장은 마리우스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힌 뒤 코제트와 마리우스가 행복하기를 기원한다. 그리고 장 발장은 조용히 죽음을 맞이한다.

프로타고니스트인 장 발장과 안타고니스트인 자베르, 이 두 사람의 대립적인 인물 형상은 공화파와 왕당파의 대립과 갈등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낡은 시대를 대표하는 자베르의 죽음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계기는, 디뉴의 주교에 의해 촉발되었고, 코제트를 키우고 코제트와 마리우스 사이의 사랑을 지켜보면서 성숙하게 되었던 장 발장의 연민과 사랑이었다. 이런 소설적 결말은 인간의 행복과 인류의 진보란, 19세기 '혁명가'들이 주장했던 것과는 달리 자비심(慈悲心)에 의해 이루어질 거라는 휴머니스트 빅토르 위고다운 생각이 밑받침되어 있는 것이다.

위고가 그려놓은 '아름다운 시장'을 만날 수 있을지…
2.
<레미제라블>의 내용을 언급하느라 서두가 길어졌지만, 이렇게 <레미제라블>의 내용을 살펴본 까닭은 '마들레느 아저씨'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마들레느란 장 발장이 몽트뢰유-쉬르-메르 시에서 자신을 숨기기 위해서 사용했던 이름이었다. 일종의 '위장 취업'을 위해 사용했던 '가명(假名)'이라고 할까.

'마들레느 아저씨'를 떠올리게 된 까닭은 6월 13일 지방자치 선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완성은 지방자치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나라의 지방자치의 현실을 보면 기대보다는 걱정이 앞서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월드컵의 열기에도 불구하고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러 투표장에 가자는 캠페인조차 조금 부끄러운 노릇이 된 것도 사실이다. 우리가 뽑은 사람이 우리가 낸 세금으로 우리를 위해 일해 줄 거라는 생각보다는, 그놈이 그놈, 다 똑같은 '도둑놈'처럼 보이고 누굴 찍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심정이 드니 문제인 것이다.

  
 ▲ 들라크로와의 작품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0년 7월 28일>.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포스터에 나타난 코제트의 모습은 바로 이 그림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  
 
실제로 비리 사건으로 구속된 자치단체장의 수도 적지 않다. 또한 지역 주민의 이익과 의사를 대변한다는 미명 아래 아무런 원칙 없이 무분별하게 개발 계획을 남발함으로써 오히려 주민들의 삶의 질만 나쁘게 만드는 일도 많았다.

전시적인 행정과 개발 만능주의가 지배하고 있지만, 이를 견제하고 감시해야 할 지방의회도 제 몫을 다하지 못함으로써 주민투표제와 주민소환제, 주민감사청구제 등 주민들이 직접 나설 수 있는 제도를 하루빨리 도입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 청렴하고 정직하고 겸손할 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애쓰는 '아름다운' 시장과 군수를 만나볼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위고가 그려놓은 시장님 '마들레느 아저씨'의 모습을 조금 살펴보려고 하는 것이다.

그가 몽트뢰유-쉬르-메르에 온 것은 은혜였고, 섭리였다
3.
"어쨌든 그가 거기에 온 것은 하나의 은혜요, 그가 거기에 있는 것은 하나의 섭리였다. 마들레느 아저씨가 오기 전까지는, 그 지방은 모든 것이 위축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것이 노동의 신성한 생명으로 살아 오르고 있었다. 왕성한 활기가 모든 것을 따습게 만들고 모든 것에 스며들고 있었다. 실업과 빈궁은 자취를 감추었다. 아무리 못난이의 지갑에도 돈이 없는 일이 없고, 아무리 가난한 집안에도 낙이 없는 일이 없었다."(이휘영, 정기수, 방곤 역, 정음사, 1979년)

마드레느가 몽트뢰유-쉬르-메르에 온 것은 은혜요 섭리였다고 위고는 소설 속에서 말한다. 마들레느가 이 도시에 와서 한 일은 침체에 빠져 있던 흑 구술 제조업에 새로운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일대 혁명을 초래한 것이었다. 그이는 그렇게 함으로써 스스로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 처음에는 그 지방의 '입싼 양반'들이 "작자는 장사치야", "작자는 야심가야" "작자는 사기꿈이야" "작자는 상놈이야"라고 비난하고 질시하였다.

하지만 "1820년, 그가 몽트뢰유-쉬르-메르에 와서 5년이 되던 해, 지방에 대한 그의 공헌이 실로 혁혁했고 그야말로 지방민 전체가 희망했기 때문에" 그는 시장이 된다.

"마들레느 아저씨는 자기 자신이 그 근원이고 중심이었던 그 활기 속에서 재산을 이룩한 것이었으나, 단순한 상인으로서는 좀체로 있을 없는 일이었지만, 그는 돈벌이를 하는 것이 주된 관심사인 것같이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남들만을 주로 생각하고 자기 일은 별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1820년에 그는 라피뜨 은행에 자기 명의로 6십3만 프랑의 금액을 예금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 6십3만 프랑을 저축하기 전에 그는 이미 시와 빈민을 위하여 백만 프랑도 더 썼던 것이다."

시와 빈민을 위해 백만 프랑도 더 썼던 마드레느가 했던 일들을 살펴보자.

"시내의 병원이 설비가 나빴기 때문에, 그는 침대 열 개를 기부했다. 몽트뢰유-쉬르-메르는 웃녘 시와 아랫녘 시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가 살고 있던 아랫녘 시에는 학교가 하나밖에 없었는데, 그것도 쓰러져 가는 허술한 파옥이었다. 그래서 그는 학교 둘을 세웠다. 하나는 계집아이를 위하여, 또 하나는 사내아이를 위하여. 그리고 그는 그 양쪽 선생에게 관(官)에서 주는 박봉의 2배의 수당을 자기 돈에서 지급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것을 보고 놀란 사람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국가 제일의 관리는 보모와 학교 선생의 둘입니다' 그는 또 자기 돈으로, 당시 불란서에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던 유치원을 세우고, 늙고 병든 노동자를 위하여 구제 기금을 세웠다.
그의 공장은 한 중심으로 이루었기 때문에 수많은 세궁민 가족이 사는 새로운 주택가가 그의 주변에 급속히 형성되었다. 그는 또 거기에다 무료 약국을 세웠다."

병원과 학교와 새로운 유치원 제도, 새로운 의료를 포함한 복지 정책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차차 때가 흐름에 따라 반대는 모두 사그라져 버렸다. 마들레느 씨는 처음에, 입신출세한 사람들이 으레 받기가 예사인 저 중상 모략을 받고 있었으나, 다음에는 그것이 험구에 불과해지고, 그 다음에는 빈정댐에 불과해지더니, 그 다음에는 완전히 스러져버렸다. 그는 완전무결하고도 진정한 만인의 존경을 받았다.
그리하여 1821년 무렵에는, 몽트뢰유-쉬르-메르에서 시장이라고 하는 말은, 1815년에 디뉴에서 주교 각하라고 하던 말과 똑같은 어조로 불리게 되었다. 그 부근에서는 백 리 밖에서까지 그에게 상의하러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는 분쟁을 종결시키고, 소송을 미연에 방지하고, 원수지간을 화해시키고 있었다. 누구나 그를 자기의 정당한 권리의 심판자로 받들고 있었다. 그는 자연법칙의 책을 가지고서 자기의 마음으로 삼고 있는 것 같았다. 그에 대한 존경은, 마친 전염인 듯 6, 7년 동안 차츰차츰 그 지방 전체에 퍼졌다."

"세상에는 나쁜 풀도, 나쁜 사람도 없을 것이오"
4.
빅토르 위고가 그리고 있는 마들레느 시장님의 모습에는 우리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현명한 자치단체장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물론 '시대적 한계'도 있다. 마들레느가 기존의 산업에 새로운 기술을 접목한 자본가(부르주아) 형이라는 점을 언급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부르주아 혁명기'라는 시대적 배경을 생각한다면, 위고의 의도를 지금의 시점에 맞게 해석해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마들레느 시장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

첫 번째로는 신뢰와 존경의 회복이다. 전염병처럼 퍼지는 존경심은 아니더라도 믿고 따를 수 있는 시장님, 군수님이 되시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뽑아야 한다는 것이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우리의 격언처럼 맑은 윗물이 되라는 것이다. 반드시 깨끗한 사람을 뽑아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이는 모름지기 우리의 정당한 권리의 대변자가 되라는 것이다. 완전무결하고 진정한 만인의 존경을 받기는 무척 힘들겠지만 주민들의 권리의 대변자로서 나선다면 리더십을 일부러 만들어내려고 애쓰지 않아도 리더십은 생겨날 것이다. 괜히 정당을 주도하는 인물들의 찬조 연설이나 들으면서 그들과 함께 손을 드는 것으로서 리더십이 생긴다고 생각한다면 천만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세 번째로는 뭔가 색다르게 눈에 보이는 정책을 만들어내기보다는 기존의 산업을 발전시키는 지역 발전 전략을 세우라는 것이다. 몽트뢰유-쉬르-메르 시에 번영을 가져다 준 것은 새로운 관광지를 개발하는 것도 아니었으며, 첨단 산업 벨트를 만드는 것도 아니었으며, 지역의 역사에서 작은 꼬투리를 찾아내서 새로운 축제를 만드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원래 있었던 흑 구슬 제조 기술을 개량함으로써 지역의 부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지금 자치단체장으로 나서는 이들 가운데 태반이 자기 지역을 발전시키기 위해 외부의 자본을 끌어들이고 그 자본의 힘을 바탕으로 뭔가 새롭고 획기적인 산업을 만들어낼 것처럼 말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지역 발전 전략이란 지역에서 출발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네 번째로는 공부하고 연구하라는 것이다. 앞서 마들레느 아저씨의 이야기에서 빠진 이야기로는 '쐐기풀' 이야기가 있는데, 그 이야기는 이렇다. 어느 날 마을 사람들이 쐐기풀을 뽑고 있는 것을 보고는 쐐기풀의 이용에 대해 아주 자세하게 설명해준다.

"이 쐐기풀은 아직 여릴 때에는 잎사귀는 훌륭한 야채가 되고, 쇠었을 때에는 삼이나 어저귀처럼 줄기와 섬유가 생기는데, 이 쐐기풀로 짠 베는 삼베와 마찬가지요. 잘게 베어 놓으면 쐐기풀은 가금의 모이가 되고, 찧어 놓으면, 뿔 달린 짐승의 밥이 되오." 등등.

자기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든 책을 보고 얻은 지식이든 공부하고 연구함으로써 지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가지고도 지역 발전의 토대로 삼을 것은 무궁무진할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여러분도 잘 알아두시오. 세상에는 나쁜 풀도 나쁜 사람도 없는 것이오. 다만 가꾸는 사람이 나쁠 뿐이오."라고 마들레느 아저씨의 입을 통해 위고는 말한다.

소설 속 인물이지만, 그를 마음에 그리며 투표장에 갈까 한다
5.
뭐, 특별한 것 없는 생각거리인가?
하지만 우리의 지방자치 현실을 되돌아보면, 이 몇 가지 요구조건을 충족시키는 시장님, 군수님이나 지방 의회 의원님들을 만나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마들레느 아저씨와 같은 분이 시장님이 되고 군수님이 되었으면 좋겠다.
마들레느 아저씨가 주민들에게 요구한 것은 딱 한 가지, 정직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직!
나도 시장님이 되고 군수님이 되고자 하는 이들에게 딱 한 가지만 요구하겠다.
제발 좀 정직하라고!
어린이들도 소탈한 마들레느 아저씨를 좋아했다고 위고는 적고 있다. 그래서 주민들은 '마들레느 씨'나 '마들레느 시장님'이 아니라 '마들레느 아저씨'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비록 소설 속의 인물이지만, 나는 '마들레느 아저씨'를 마음속에 그리며 투표장에 가볼까 한다.
그런데, 과연 그런 이가 있을지...

2002년 6월 4일 화요일

"축구는 축구일 뿐이다"…과연 그런가?

"축구는 축구일 뿐이다"…과연 그런가? 한국-폴란드 경기를 몇 시간 앞두고 던져 보는 질문

1.
2002년 6월 4일, 세상 사람들의 눈이 온통 월드컵에 쏠려 있는 듯하다. 2002년 한일 월드컵, 한국의 첫 경기가 열리는 날이다. 과연 한국의 축구 대표팀이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가 하고 기대와 열망에 찬 눈들이 부산의 아시아드 주경기장에 몰리고 있다.

주요 언론들도 '첫 승의 아침이 밝았다'는 제목으로 기대감을 한껏 드러내고 있다. 48년간 6번 본선에 출전해 4무 10패, 단 한번도 이기지 못했지만, 이번만은 다르리라고 다들 생각하고 있다. '홈'에서 열리니 '붉은 악마'를 비롯해서 온 국민의 열화와 같은 응원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지난 1년여 동안 한국 대표팀을 이끌어 온 히딩크 감독에 대한 신뢰감도 그 어느 때보다도 높고 선수들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내비치고 있다. 한국팀의 1승, 그리고 16강, 더 나아가 8강, 4강에도 진출하기를 바란다.

2.
그렇지만 축구는 축구일 뿐이다.
이 말은 한국과 폴란드의 경기에서 어느 팀이 이길 거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제프 플래터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이 한 말이다.
축구는 축구일 뿐이다, 이 말은 나에게 묘한 느낌을 던져 준다.

월드컵의 역사를 들추어보면, 축구는 단지 축구만은 아니었다. 처음으로 열린 1930년 우루과이 대회 결승전에서 맞붙은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는 이 결승전을 계기로 국교를 단절하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1970년 멕시코 월드컵 예선에서 맞붙은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가 전쟁을 벌였던 일은 '축구 전쟁'이라는 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국가 단위로 맞붙어 싸우는 축구는 그 어느 경기보다도 '민족성(nationality)'을 자극한다. 한국과 일본, 잉글랜드와 독일이 경기를 벌이면, 축구는 축구가 아니라 '전쟁'이 된다. 이번 2002년 한일 월드컵의 개막전에서 세네갈이 프랑스를 제압하자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세네갈은 '한(恨)'을 푼 듯 승리의 날을 국경일로 삼겠다고 하였다.

월드컵이 거대한 산업이라는 것도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그 자체로 거대한 스포츠 산업이기도 하지만, 월드컵을 계기로 자사의 브랜드 이미지를 높이려고 하거나 새로운 사업 개발의 기회로 삼고자 하는 대기업들의 발빠른 움직임이 심심찮게 전해진다. 그러나 거대한 스포츠 산업의 이면에는 우리가 외면해서는 안 될 일들도 있다. <다른 월드컵, 축구공 만드는 아이들--그라운드의 함성 뒤엔 '작은 손'의 혹독한 노동>(지오리포트 5월 4일자)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스포츠 용품 생산업체에서는 어린이 노동 착취가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다. 축구는 축구만은 아닌 것이다.

3.
그런데 개막전뿐만 아니라 연이어 열리는 경기마다 관중석 공석 때문에 입장권 수입에 차질이 있을 뿐만 아니라 대회의 이미지에도 큰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걱정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미 지난 4월 30일, 한국의 관광호텔 예약 숙박권 전체를 독점 판매해주기로 하는 협약을 한국 월드컵조직위와 체결했던 영국의 바이롬사가 계약을 해지하는 통고를 했지만, "2002년 4월 30일까지 해약하면 위약금을 물지 않는다"라고 계약했기 때문에 월드컵 특수만을 노리던 숙박업계는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어버린 바 있다.

그런데, 바이롬이라는 회사는 월드컵 티켓 해외판매분 판매대행까지 맡고 있는 회사다. 정식 직원이 3명에 불과하다는 이 회사에서는 해외판매량을 일일이 수작업으로 확인하고 이것도 제대로 알려주지 않아 경기가 열리기까지 과연 어느 정도 관중석이 찰지도 파악하기 힘든 실정이 되고 있는 것이다. 오늘도 "월드컵축구대회 대구 첫 경기(6일)를 앞두고 해외입장권판매 대행사인 영국 바이롬사의 해외판매량이 공개되지 않아 대구시가 경기장 관람석의 무더기 공석을 우려하고 있다.(연합뉴스, 윤대복 기자)"는 보도가 있었다. '관중석 공석 사태'는 2002년 한일 월드컵의 치명적인 '불명예'로 남을 듯싶다. 어찌하여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바이롬사가 한국의 관광호텔 예약 숙박권을 독점 판매하고, 월드컵 티켓 해외판매분을 판매대행할 수 있었던 것은 알려진 바에 따르면 단지 제프 플래터 국제축구연맹 회장과 친척이라는 끈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플래터 회장이 말한, '축구는 축구일 뿐이다'라는 말은 그러니까 그라운드 안에서 뛰는 선수들, 관중석에서 열띤 응원을 펼치거나 텔레비전 앞에서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는 이들의 환희와 탄식에는 상관없이 '축구는 축구, 돈벌이는 돈벌이다'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4.
'축구는 축구일 뿐이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라운드에서 뛰는 선수들이나, 응원에 열을 올리는 '국민'이나, 그 열의를 자사의 브랜드 이미지를 제고하려는 기회로 삼으려는 기업이나, 무언가 월드컵을 계기로 한몫 잡으려는 이들 모두에게 '축구는 축구만은 아니다'. 그라운드에서 뛰는 선수들은 개인적으로 더 큰 스포츠 시장으로 도약하려고 하고, '국민'들은 월드컵을 무언가 '한'을 푸는 계기로 삼으려 하며, 대기업들은 자사의 브랜드 이미지를 제고하려고 애를 쓰고, 또 어떤 이들은 큰 사업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축구는 축구여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앞서 말한 아동착취를 금지하라는 목소리는 말할 것도 없고, 파업을 하던 노동자의 권리도 축구 열기에 묻혔으며, 6·13 지방선거도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있다.

축구를 구경하는 것은 재미 있고, 우리 팀을 응원하면 신이 난다.
하지만 축구가 점점 더 우리의 일상을 '점령'해나갈 때, 눈에 보이지 않는 사이 우리 삶의 밑바탕은 조금 더 끔찍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드는 까닭은 무엇 때문인가.

2002년 5월 27일 월요일

아이히만, 그리고 한국의 보통 가장들

아이히만, 그리고 한국의 보통 가장들-<악의 평범성에 관한 보고서>는 아직도 유효하다

<모래시계 古今- 5.31> 1962년 5월 31일 '어느 평범한 가장(家長)'이 처형당한다. 이름은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

아이히만은 1906년생. 그가 오스트리아 나치당에 입당한 것은 1932년. 오스트리아
에서 나치당이 불법화하자 독일로 가서 계속 활동하였다.

아이히만은 유대인의 언어인 이디시어에 능통했기 때문에 유대인이주국 책임자가 되었다가 계속 출세 가도를 달려 나중에는 국가안보경찰본부의 유대임 담당 책임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독일 점령 하의 유럽에서 유대인 탄압과 학살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 아이히만이 1942년 나치에서 복무할 당시의 모습(왼쪽)과 이스라엘에서 재판을 받을 무렵인 1961년 모습.
사진 출처: http://www.dhm.de ⓒ
독일이 패전할 무렵, 진주한 미군에게 체포되었으나 탈출하였다 그 후 아내와 세 아들을 데리고 아르헨티나로 도주, 리카르도 클레멘트라는 가명을 쓰며 부에노스 아이레스 근처의 자동차공장에서 기계공으로 숨어 살았다.
그러다가 1960년 5월, 유대인 학살의 책임자를 끈질기게 추적하던 이스라엘의 비밀정보부 모사드의 요원들에게 체포되어 이스라엘로 강제 연행되었다.

1961년 4월부터 시작된 재판 과정은 다른 무엇보다도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Eichman in Jerusalem: 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 1963년)로 널리 알려진 바 있다.(몇 해 전, 출판 일을 하고 있을 때 이 책을 번역 출간하고자 하였으나 끝내 출간하지 못했다. 하루 빨리 출간되기를 기대한다)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을 통해 이스라엘 측 검사 기데온 하우스너와 아이히만의 독일인 변호사 로베르트 세르바티우스의 논전은 국제법(이스라엘 정보부의 아이히만 납치는 국제법 위반이다)과 재판 관할권(예루살렘 법정의 편파적 구성 문제), 집단 살해와 관련한 이들을 처벌하는 것에 대한 시효문제 등 다양한 문제가 제기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논란이 있었지만, 1961년 12월 15일, 예루살렘의 법정은 아돌프 아이히만에게 인도에 대한 죄를 적용하여 사형을 언도하였고, 1962년 5월 31일 마침내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대량학살의 토양을 들춰 낸, 한나 아렌트의 문제 제기

아이히만이 대량 학살(genocide)의 책임자라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겠지만, 아이히만이 문제적 인물이 되었던 까닭은 한나 아렌트의 문제 제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 옳은 듯싶다.

일종의 방청기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통해 아렌트가 제기한 문제는 부제에서 보듯이 '악의 평범성'이라는 것이었다.

아이히만은 단지 당과 조국에 대해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평범한 관료였을 뿐이라는 게 아렌트의 관찰이었다.

악의 평범성!
이 문제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악한(惡漢)들이 괴물처럼 생겼거나 악마의 형상을 한 인간이 아니며, 실은 아주 평범한 인간들이라는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에게서, 자기에게 주어진 일이 이 세계에 어떤 공적인 의미가 있는 것인가 하는 반성적 사고를 전혀 하지 않은 채 단지 맡은 일만 열심히 하면 된다는 식으로 생활하는 이들의 면모를 보았던 것이다.
집단 학살의 책임자였던 아이히만이 악마적인 존재가 아니라, 아내와 아이들에게도 충실했던 아주 평범한 가장이었다는 것은 우리도 곱씹어 보아야 할 듯싶다.

자기 중심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개인들이 전체주의를 만들어낸다는 것, 맹목적인 충성과 아무런 반성적 사고 없이 일에 몰두하는 것이 사회와 역사에 크나 큰 죄악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정치철학적인 문제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맹목적인 관료, 지시에 따라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는 기계적인 인간인 아이히만은 바로 우리의 이웃일 수도 있고, 바로 나 자신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아이히만에 대해 이야기하면, 흔히들 고문기술자 이근안과 같은 존재를 떠올려 왔다. 그러나 과연 이근안과 같은 존재만이 아이히만과 닮아 있을까.

오늘 우리는 이 '게이트'가 바로 저 '게이트' 같은, 게이트들이 계속해서 터져 나오는 것을 보고 있다. 이른바 권력 비리라는 것이다. 권력 비리가 계속되는 것은 분명 비리를 저지르는 사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비리가 가능하도록 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바로 비리를 저지르고 있는 사람들의 청탁과 압력에 굴복하는 '평범한 가장들'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가족 중에 무슨 교통사고라도 나면, 누구 '힘있는 사람'을 찾아 나서는 우리들 평범한 시민들 때문이 아닐까. '힘있는 사람'들의 전화 한 통화에 혹시 눈에 보이지 않는 불이익이라도 당하지 않을까 마음졸이며 알게 모르게 힘을 써주고 다른 곳으로 전화를 돌리는 아주 평범한 가장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위에서 내려온 지시이니까 그것이 부당하다 하더라도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은 채 그냥 사무적으로 빈틈없이 처리하기만 된다고 생각하는 인간, '아이히만'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 사회 내부의 '아이히만', 그 악의 평범성에 종지부를 찍지 않는 한, 권력 비리는 계속될 것이고, 부정 부패는 근절되지 않을 것이다.

내 마음속 초모룽마, 눈앞의 북한산…

  
 ▲ 초모룽마.
사진 출처: www.project-himalaya.com ⓒ
 
 

<모래시계 古今- 5.29> 1953년 5월 29일 당시 서른세 살의 에드먼드 힐러리와 네팔인 세르파 텐징 노르가이가 세계의 최고봉 에베레스트를 '정복'하였다. 이를 기념하는 갖가지 행사가 네팔에서 열리고 있다.

최근의 외신 보도에 따르면 힐러리의 아들 피터 힐러리와 텐징 노르가이의 손자 타쉬 왕축 텐징이 다른 이들과 함께 줄지어 에베레스트에 올랐으며, 미국의 내셔널 지오그래픽 방송이 이들의 등정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소식을 접하면서 웬일인지 내 가슴 깊숙한 곳에서는 눈물이 흘러나온다. 슬픔의 눈물이!

단독산행으로 유명한 등반가인 라인홀트 매스너는 <산은 내게 말한다>에서 이렇게 말했다. "더 높이 오를수록 나 자신을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된다. ……나는 에베레스트 산이든 어떤 산이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산에 올라야겠다는 야망 때문에 산에 오르는 것은 아니다"라고.

순수한 열정에 사로잡힌 인간의 말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자신을 더 깊이 들여다본다는 선적인 혹은 영적인 목적이라면 굳이 에베레스트를 택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우리는 매스너보다 더 깊이 자신을 들여다본 이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또한 1924년에 에베레스트 정상을 향해 떠난 뒤 행방불명된 산악인 조지 멀로리는 "산이 거기에 있으니까"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과연 에베레스트가 거기 있기 때문에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것일까.

나는 묻는다. 왜 사람들은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에 오르려 했는가. 왜 오르려 하는가 하고.

우선 오늘날 우리가 일상 용어로 쓰고 있는 등산(登山)이라는 말에 대해서 생각해보아야 한다.
등산은 산에 오르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행위를 말한다. 이 말은 물론 이전부터 쓰인 용례가 있지만, 지금 우리가 쓰는 뜻의 등산이라는 말은 서양의 알피니즘(영어의 alpinism 프랑스어의 alpinisme, 독일어의 alpinismus 등)을 번역한 말이다.

알피니즘이란 유럽의 지붕인 알프스산을 '정복'한 역사와 관련이 있으며 그것은 철저하게 근대적인 자연관, 즉 자연이 정복의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현재와 같은 의미를 가진 등산이 이루어진 것은 1760년 스위스의 자연과학자 H.B.소쉬르가 프랑스의 샤모니를 방문하고, 알프스의 최고봉 몽블랑의 첫 등정에 현상금을 걸었고 1786년 의사인 M. 파카르와 J.발마가 몽블랑 등정에 성공함으로써 알프스 등산의 막이 올랐다고 한다.

'알피니즘'의 기원은 이렇듯 현상금과 관련이 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순수한 목적으로'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사람은 없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정상에 선 산악인들은 깃발을 흔든다. 그 깃발은 국기이거나 혹은 자신을 후원해준 기업과 언론 매체의 깃발이다.

세계 최고봉에 에베레스트라는 이름을 붙이고 여기를 경쟁적으로 오르고자 했던 이들은 영국인들이었다. 에베레스트를 '정복'하고자 했던 그들의 의식은 다름 아닌 식민지를 개척하려고 하는 제국주의자의 모험심이며 도전의식일 것이다.

에베레스트의 원래 이름은 '초모룽마(Chomolungma)'이다.
초모룽마라는 말은 초모(Chomo)는 여신, 룽마(Lungma)는 산골짜기. 우리말로 하자면 '대지의 여신'이라고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노자가 <도덕경> 제6장에서 말한 "곡신불사, 시위현빈(谷神不死, 是謂玄牝 골짜기 신은 영원불멸하여, 이를 신령스러운 암컷이라 이르고) 현빈지문, 시위천지문(玄牝之門, 是謂天地根 신령스러운 암컷의 문을 하늘과 땅의 근원이라 이른다)"고 했을 때의 그 '곡신'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해도 좋을 듯싶다.

이런 뜻을 가진 초모룽마가 에베레스트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인도를 지배하던 영국이 히말라야를 측량하면서 세계 최고봉에 당시 식민지 인도의 측량 담당관이었던 조지 에베레스트(George Everest)의 이름을 붙이면서부터다.

사실 이것은 우리의 고유한 지리 개념인 '백두대간'에 일본인들이 태백산맥과 같은 '산맥'의 이름을 붙인 것과 마찬가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아직도 우리의 교과서에 실려 있는 여러 산맥이 우리가 우리 나름으로 우리의 국토를 바라보던 시각을 표현하던 <산경표>다운 이름을 되찾아야 하듯이 에베레스트는 대지의 여신 '초모룽마'라는 이름을 되찾아야 한다.

이것은 단지 이름을 되찾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름을 바꾸어 부른다는 것은 세계관의 변화를 의미한다. 그것은, 자연이 정복의 대상이라는 서구의 근대 합리주의적인 자연관, 기계적 자연관, 일직선의 자연관에서 자연이 우리들 삶의 근원을 이룬다는 자연관으로의 회복을 의미한다.
단지 산꼭대기에 한번 발을 디딘다고 해서 그것을 정복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은 자연을 정복할 수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인간은 자연 속의 인간이다.

자연 속의 인간은 산을 정복하지 않는다. 산에 들어간다. 산에 들어가 속세의 온갖 때를 벗고 산을 닮기 위해 마음을 닦는다. 등산이 아니라 입산(入山)이다. 하지만 산에 오르며 나는 본다. 펄럭이고 있는 플래카드, '입산금지'라고 씌어져 있는 플래카드를. 산사에 몸을 담고 있는 스님들조차도 등산은 할 수 있어도 입산은 안 된다. 등산과 입산의 뜻이 뒤집어져 있는 것이다.

올해는 국제연합(UN)이 정한 '세계 산의 해'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두 산 사람이다(We are all mountain people)", 이것이 '세계 산의 해'의 표어이기도 하다. 산이 높든 낮든, 우리는 모두 산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산 사람인 우리들이, 세계 최고봉을 에베레스트가 아니라 초모룽마로 바라보는 시각은 이 땅의 현실에서도 중요하다.
지금 서울 외곽순환도로를 뚫으면서 북한산 관통도로를 내려고 하고 있다. 직선적 자연관, 개발 우선의 자연관과 인간의 삶을 품고 있는 존재로서 자연을 대하는 자연관이 충돌하고 있다. 북한산을 지켜내려고 하는 시민단체의 시각은 바로 에베레스트를 초모룽마로 바라보는 시각인 것이다.
북한산은 서울 시민의 '초모룽마'이다.

내 마음속의 초모룽마여, 눈앞의 북한산이여,
부디 우리의 눈물을 거두어 주시길!

2002년 5월 25일 토요일

꽃밭에 물을 주는 마음을…

<모래시계 古今- 5.28> 1989년 5월 28일 오후 1시 30분 경, 장소는 연세대 도서관 앞. 건너편의 학생회관 안쪽에 있던 사람들이 플래카드를 펼치면서 밖으로 뛰쳐나왔다. 바로 그 때 핸드마이크를 든 한 사람이 선언문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겨레의 교육성업을 수임 받은 우리 전국의 40만 교직원은 오늘 역사적인 전국교직원 노동조합의 결성을 선포한다. 오늘의 이 쾌거는 학생, 학부모와 함께 우리 교직원이 교육의 주체로 우뚝 서겠다는 엄숙한 선언이며 민족 민주 인간화 교육 실천을 위한 참교육 운동을 더욱 뜨겁게 전개해 나가겠다는 굳은 의지를 민족과 역사 앞에 밝히는 것이다."

핸드 마이크를 든 채 선언문을 낭독하고 있던 이는 윤영규 당시 전교조 위원장.
서울의 주요 대학이 전경들에 의해 이미 봉쇄된 상황에서 기습적으로 거행할 수밖에 없었던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결성식 장면이다.

  
 ▲ 지난 89년 전교조 강원지부 속초지회 개소식 장면.
사진 출처: 전교조 속초.고성.양양지회 홈페이지.
www.ktu-sokcho.or.kr ⓒ
 
 
한국의 교육노동운동은 1980년 광주민중항쟁 이후 본격화되었다. 숱한 해고와 투옥의 탄압이 있었지만 이것을 이겨내고 마침내 노조를 결성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노태우 정권은 전교조를 불법으로 규정하였고, 노조에 가입한 교사들에게 탈퇴를 요구했다. 그리하여 1500여 명의 '선생님'들이 해직의 길을 택했다.

이후 김영삼 정권 때인 1994년 1491명의 선생님들이 복직했고, 1999년 7월 합법화되었다.

그리고 2002년 4월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는 전교조 해직교사들을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인정함으로써 전교조 해직교사에 대한 역사적인 명예회복도 이루어졌다.

전교조의 역사를 이렇게 몇 줄로 줄일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몇 줄로 줄여 쓰게 된 기록이지만, 이 기록 속에는 선생님들과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전교조가 결성된 지 오늘로써 13돌.

십여 년의 시간을 거치면서 전교조가 교육 개혁과 사회 개혁을 위해 이루어낸 것도 적지 않다. 그러나, 오늘 전교조 앞에 놓인 과제도 결코 만만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교육 현장에도 불어닥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물결은 선생님들을 더욱 힘들게 만들고 있다. 교육 현장은 교육의 민주화를 이룸으로써 공교육을 지켜내고자 하는 선생님들과 이런 선생님들의 열망과는 상관없이 교육 시장화의 정책을 추진하려고 하는 이들 간의 치열한 대결장인 것처럼 느껴진다. 오늘도 계속해서 '선생님'의 피와 땀과 눈물 그리고 투쟁의 행진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묻는다. 아, 언제 우리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려나 하고. 언제 조기 유학, 교육 이민이라는 광풍(狂風)이 잠잠해질 수 있겠는가 하고. 언제 교육재정이 충분하게 마련되고, 언제 사학비리를 근절시킬 수 있는 사립학교법이 만들어지려나 하고. 언제 자라나는 아이들이 입시 경쟁에서 벗어나 더불어 사는 삶의 지혜를 맘껏 배울 수 있게 되느냐고.

아주 오래 전에 읽었던 시집 한 권을 다시 꺼내어 읽는다. 1989년 12월 당시 전교조 광주시지부 편집실의 손동연, 최승권 두 분이 펴낸 <교과서와 휴전선>이라는 시집이다.
이 시집에 실린 시 가운데 김시천 선생님의 '아이들을 위한 기도'를 읽어본다.



당신이 이 세상을 있게 한 것처럼
아이들이 나를 그처럼 있게 해주소서
불러 있게 하지 마시고
내가 먼저 찾아가 아이들 앞에
겸허히 서게 해주소서
열을 가르치려는 욕심보다
하나를 바르게 가르치는 소박함을
알게 하소서
위선으로 아름답기보다는
진실로써 추하기를 차라리 바라오며
아이들의 앞에 서는 자 되기보다
아이들의 뒤에 서는 자 되기를
바라나이다
당신에게 바치는 기도보다도
아이들에게 바치는 사랑이 더 크게 해주시고
소리로 요란하지 않고
마음으로 말하는 법을 깨우쳐 주소서
당신이 비를 내리는 일처럼
꽃밭에 물을 주는 마음을 일러주시고
아이들의 이름을 꽃처럼 가꾸는 기쁨을
남 몰래 키워 가는 비밀 하나를
끝내 지키도록 해주소서
흙먼지로 돌아가는 날까지
그들을 결코 배반하지 않게 해주시고
그리고 마침내 다시 돌아와
그들 곁에 순한 마음으로
머물게 하소서
저 들판에 나무가 자라는 것처럼
우리 또한 착하고 바르게 살고자 할 뿐입니다
저 들판에 바람이 그치지 않는 것처럼
우리 또한 우리들의 믿음을 지키고자 할 뿐입니다

2002년 5월 24일 금요일

독일 통일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독일 통일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1999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독일 작가, 귄터 그라스(Gunter Grass)가 5월 27일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게 된다. 중앙대 한독문화연구소와 주한독일문화원이 공동으로 주최하는 학술 심포지엄(5월 29~5월 30일, 중앙대 아트센터 대강당)에서 '독일통일의 교훈'이라는 제목으로 주제 발표를 할 예정이다.

지난 5월 8일자 프랑스 일간지 리베라시옹은 귄터 그라스가 황석영 씨와 함께 방북하리라는 보도를 했었고 국내 언론에서도 이 기사를 인용 보도한 바 있지만, 이 방북계획은 무산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이번 심포지엄 기간 중에 황석영 씨 등과의 대담은 이루어질 예정이다.

귄터 그라스라고 하면 독일의 현대문학사에서 전후 청년문학의 대표적인 집단인 '47그룹'의 멤버이며 , 무엇보다도 세 살에 성장이 멈춰버린 오스카의 눈을 통해 현실을 그리고 있는 <양철북 Die Blechtrommel>(1959)의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은 1979년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영화에 나온, 자폐증에 걸린 한 어린이의 형상은 지금도 내 뇌리에 뚜렷하게 남아 있다.
괴성을 지름으로써 유리창을 깨뜨린다. 그렇게 함으로써 일그러져 있는 성인들의 윤리, 그리고 '나치가 등장하고 패배하는 정치 현실'에 개입하는 어린이였다.

귄터 그라스는 위르겐 하버마스 등과 함께 독일 통일을 적극적으로 비판해온 작가로도 유명하다.

피해자의 민족주의, 가해자의 민족주의…그 경험의 차이는?

통일에 대한 비판! 우리처럼 '민족주의'의 틀이 강하고 거의 무조건적인 통일 지상주의가 횡행하는 나라에서는 무슨 일인가 싶지만, 권터 그라스를 비롯한 지식인들의 통일 비판에는 귀를 기울여야 할 점이 적지 않다고 생각된다.

귄터 그라스의 통일 비판의 논리는 독일이 과거 제1차,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제국, 배타적인 민족국가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마틴 발저와 논쟁 과정에서, 귄터 그라스는 독일 민족의 정체성을 강조했던 발저와는 반대로 아우슈비츠와 불가불의 관계에 있는 민족 감정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민족 감정에 바탕을 둔 통일은 비이성적인 불행을 재생산할 거라고 우려했던 것이다.

과연 독일이 통일하는 과정에서 민족 감정이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면밀하게 더 검토해야 하겠지만(민족 감정 없이 민족 통일이 가능한가라는 문제), 분명 현실은 귄터 그라스가 의도하고 주장했던 바와는 반대로 흘러갔다. 동독에서는 '우리가 인민이다'라는 자유에 대한 의지가 '우리는 한 민족이다'라는 자본주의에 대한 열망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그러나 독일이 통일한 지 벌써 십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 동안 독일 내부에서도 통일을 바라보는 시각이 많이 바뀐 듯하다. 왜냐하면 급속한 통일 과정을 겪으면서 원치 않았던 통일 후유증을 아주 심하게 앓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세계화 정보화로 말미암아 민족주의의 경계가 무너지는 시기에 살고 있다.
또한 한국 경제의 발전에 따라 저항적 민족주의의 긍정성보다는 민족주의의 배타성을 우려하는 상황에 이름으로써 민족주의 자체를 새롭게 받아들여야 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래서 지난 시기 한국인을 결속시켰던 민족공동체적인 의식이 갖는 편협성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여기 저기서 들리고 있는 것이다.

민족주의의 폐해를 '피해자'로서 경험했던 한국인과, 민족주의의 폐해를 '가해자'로서 경험했던 독일인의 현실은 다르다.

그러나 '피해자'의 민족주의가 '가해자'의 민족주의와 얼마나 다른 것일까 하는 점도 생각해보아야 할 시점에 이른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귄터 그라스가 우리에게 들려줄 '독일통일의 교훈'이 어떤 것일지 더욱 궁금해지는 것이다.

2002년 5월 23일 목요일

노동자의 권리, 월드컵에 묻혀야 하나

민주노총은 월드컵 개최에도 '굴하지 않고' 파업을 강행할 태세다.

5월 23일, 수도권에서는 종묘공원에서 명동성당까지, 충남에서는 천안역, 전북에서는 전북 코아 백화점 등에서 '총력투쟁승리 지역별 결의대회'를 가질 예정이다. 또 25일에는 부산시청 앞에서 지역별 파업집회를 연다고 한다.

이미 지난 20일 오전 11시, 민주노총은 집중파업과 대규모 집회를 열겠다는 기자회견을 한 바 있다.

노동탄압 중단, 노동조건 후퇴 없는 주 5일 근무제 도입, 국가기간산업 사유화 중단, 산별 교섭 수용 등을 요구하고 주장하기 위해서이다.

민주노총의 기자회견이 있던 다음날인 5월 21일,김대중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 월드컵은 어느 정권이나 정당의 차원에서 볼 것이 아니라 민족적 차원에서 봐야 한다”"100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기회인 월드컵 기간 중에는 단합하는 자세를 보여줘야 한다”
김 대통령은 또 "노동단체는 지금 해결되지 않는 것은 월드컵 대회가 끝난 후 해결하면 된다”며 국민은 정쟁, 노사분규를 중단하고 월드컵 성공에 힘을 모아주기를 바라고 있다고 덧붙였다.

노동자들이 파업할 수 있는 나라, 그런 나라가 선진국 아닌가

이미 '월드컵 파업'은 사회적 이슈로 각종 언론의 '뜨거운'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

<대한매일>은 5월 9일자 사설에서 '월드컵 앞두고 파업 안된다'는 제목 아래, "노조가 목적달성을 위해 파업을 선택할 수는 있지만 월드컵을 전후한 기간에는 자제해 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중앙일보>는 5월 13일자 "노동계, 월드컵 볼모 삼지 말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올림픽이 해외에 한국을 알리는 계기였다면 월드컵이야말로 선진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고 대외신인도를 제고할 수 있는 더 없는 기회다. 그런데도 노동계가 이처럼 엇나간다면 이는 집단이기주의의 발로가 아닌가"라고 비난했다.

<동아일보>는 5월 15일자 칼럼난에 예종석 한양대 교수(경영학)의 "월드컵을 볼모 삼지 마라"는 시론을 실었다. 예 교수는 이 시론에서 "요즈음 대한민국의 국위 선양은 최경주 박세리 박찬호 김미현 같은 젊은 스포츠 스타들이 도맡아하고 있다. 이 젊은 아들,딸들은 낯선 이국 땅의 온갖 악조건 속에서도 나라를 빛내고 있는데 우리는 안방에서 하는 큰 잔치를 가족의 이기심 때문에 망칠 지경에 와 있다. 그럴 수는 없지 않은가."라고 일갈했다.

<조선일보>는 5월 18일 사설에서 "월드컵 파업 최선의 자제력을"이라는 제목 아래, " 월드컵 개막을 앞두고 노동계 일부가 ‘총파업 불사(不辭)’를 선언하며 강경투쟁 노선으로 치닫고 있어 걱정스럽다. 전 세계인이 주시하는 월드컵 대회운영이 노·사의 물리적 충돌로 차질을 빚고, 축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 벌어지지나 않을까 우려된다. 손님을 맞는 주인의 도리가 아닐 뿐 아니라 그렇게 해서 형편없이 구겨진 나라의 체면은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라는 논리를 폈다.

월드컵을 통해 '성숙한 한국'의 얼굴을 보여주기 원한다면…

<한겨레신문>에서는 월드컵 파업과 관련한 눈에 띄는 사설을 싣지 않고 있다.

다만 2002년 5월 9일자의 '취재파일'에서 박민희 기자는 '어이없는 월드컵 노사평화선언'이라는 제목 아래, 월드컵을 앞두고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는 월드컵 노사평화선언이라는 행사를 소개하면서 노동부의 전시행정을 이렇게 꼬집었다.

"정말 사이가 좋다면 정말 서로를 존중하는 노사관계라면 정부까지 나서서 '선언'을 하도록 할 필요가 있을까. 발전파업에 참여했던 노조원들이 매달 월급의 절반 이상을 가압류 당하고 있고, 공무원노조를 결성했다는 이유로 징계, 수배당하는 공무원들이 있다. 감옥에는 단병호 민주노총 위원장을 비롯해 50명의 노동자가 갇혀 있고 같은 일자리에서 10년 넘게 근무하고도 '계약 해지, 재계약 안함'이라는 회사의 통보 한마디로 아무런 법의 보호도 받지 못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한숨도 끊이지 않는다. 이런 동원식 행사는 월드컵을 앞두고 서둘러 멀쩡한 보도블록을 바꾸고, 노점상들을 몰아내느라 부산을 떠는 것과 똑같은 전시행정의 표본이다. 노동부는 노사갈등이 이런 전시성 행사로 극복될 수 있다고 정말로 믿는 것일까?"

그런데, 기억을 되살리자면 지난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이 열릴 즈음 프랑스에서도 파업은 있었다.

그 해 6월 초의 각 일간지에는 연봉 삭감을 반대하여 월드컵 보이콧을 공약해온 프랑스 국영 항공사 에어프랑스 조종사들의 파업 강행 소식이 실려 있다.

당시 우리 나라의 언론들은 이들 조종사들의 파업 때문에 월드컵에 큰 차질이라도 생길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지만, 다 아시다시피 월드컵을 개최한 프랑스는 그들이 원하는 여러 가지 효과를 모두 거두었으며, 프랑스 축구 대표팀은 '아트 사커'라는 명칭까지 얻으며 우승을 차지했다.

프랑스 월드컵, 에어프랑스 조종사의 파업, 그리고 프랑스 축구팀의 우승….
이런 사실을 생각해보면 "월드컵 경기가 열리니까 파업은 안 된다"는 주장에는 뭔가 억지스러움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진정 프랑스의 힘은 월드컵의 성공적 개최, 그리고 우승에 있는 게 아니라, 월드컵과 노동자의 권리를 분리해서 받아들일 줄 아는 성숙한 시민의식에 있을 터이다.

노동을 하는 이들, 즉 노동자들이 마지막 수단으로 자신의 힘을 드러내는 방법은 역설적이지만 '노동을 하지 않는 것'이다.

노동자는 노동을 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 없는 존재다. 그래서 파업 즉 일에서 손을 놓는다는 것은 자신의 마지막 생존 수단을 걸고 싸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자들이 파업을 강행할 때에는 뭔가 절실한 요구와 주장이 있는 것이다.

나도 어지간히 축구를 좋아한다. 우리 나라 경기가 있으면, '코리아 팀 화이팅'을 외친다. 그러나 그 '코리아 팀'에는 파업을 할 수밖에 없다는 절박한 심정의 노동자들도 포함되어 있다.

축구장 안의 응원 소리로, 축구장 밖에서 울려퍼지는 노동자의 목소리를 억누르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노동자는 월드컵이 열리든 열리지 않든, 자신의 생존과 인간 존엄성을 위해 싸울 권리가 있다.

월드컵이 아니라 그보다 더 크고 중요한 대회가 열리더라도 노동자들이 파업을 할 수 있는 나라, 그런 나라가 선진국이 아닌가.

월드컵을 통해 성숙한 '한국의 얼굴'을 보여주기를 원한다고 말하면서 "월드컵 경기가 열리니까 파업은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이율배반이다.

2002년 5월 22일 수요일

방콕의 5·18… 광주의 5·18

2002년 5월 18일.
광주의 5·18묘지에는 `5·18민주화운동 22주년 기념식`이 거행되었다. 유명한 정치인들이 5·18 유족들과 함께 이 기념식에 참석했다는 보도가 전해진다.

17일엔 1980년 당시의 시위와 무력진압을 재연하는 횃불시위와 차량행진, 주먹밥 나누어 먹기와 함께 노래극 공연과 통일해원 상생굿도 열렸으며 5·18을 되새기는 각종 문화행사가 이어졌다.

이런 기념식과 행사를 보면, 5·18민주화운동은 이제 한국민주화 운동사의 한 장으로 조용히 그러면서도 확고하게 자리잡아 나가고 있는 듯이 보인다.

1995년 5·18특별법이 제정되었고, 1997년에는 5·18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무엇보다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주인공`이었던 김대중이 1998년 대선에서 승리하여 대통령이 되었고 벌써 임기 말년을 맏고 있다.

광주의 망월동 묘역은 깔끔하게 단장되어 추모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5월의 그날을 기억하려던 대학생과 청년들이 참으로 힘들게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찾아가야만 했던 망월동 묘역. 그곳에 여야의 유명 정치인들이 모여들어 추모식을 거행하는 모습을 보면 분명 달라졌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5·18 기념식과 문화행사에 대한 소식만으로 충분한 것일까.

"5·18을 왜곡한 그 언론인들이 변함없이 언론을 지배"

한겨레 신문 손석춘 기자가 몇 해 전에 쓴 칼럼에 이런 지적이 있었다.

"무엇보다 오월이 제기한 두 핵심적 과제는 미완으로 남아 있다. 먼저 미국의 존재다. 미국이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오월은 온몸으로 드러냈다. 분단체제와 독재정권 쪽에 미국이 서 있다는 역사적 진실을 피투성이로 증언했다. ……또 하나는 실질적 민주화다. 오월의 무장항쟁이 없었다면 6월 대항쟁은 불가능했다.……우리는 그해 오월의 민중들이 열망하던 민주주의를, 그날의 정의를, 오늘 구현하고 있는가. 아니다. 단적으로 5·18을 왜곡한 그 언론, 그 언론인들이 변함없이 언론을 지배하고 있지 않은가."(<5월의 고독>에서)

이런 지적을 되새겨 보면, 아직도 5·18은 광주의 오월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 부산의 광주, 대전의 오월, 서울의 꽃잎, 대한민국의 민주영령이어야 할 터인데 말이다.

1919년의 3·1운동이 중국의 5·4운동, 인도의 제1차 사티아그라하운동, 이집트의 반영자주운동, 터키의 민족운동 등 아시아와 중동의 민족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듯이, 5·18광주민주화운동(광주항쟁)은 태국, 필리핀, 미얀마, 인도네시아, 동티모르, 중국(천안문사태) 등 아시아 여러 지역의 민주화에 직간접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오늘 우리는 광주민주화운동 22돌이지만 태국에서는 방콕의 5·18 십주기였다. 방콕의 5·18,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태국은 오랜 왕권 국가였다. 그러던 것이 1932년 인민당이 무혈 쿠데타를 일으킴으로써 입헌군주제로 바뀌었다. 1932년의 개혁은 인권이나 민주주의와 같은 서구적 개념을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태국인들이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기존의 반동적인 세력 때문에 새로이 제기된 이념은 철저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입헌군주제`라는 절충적인 제도로 개혁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인민당 내부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에 정권 교체가 계속되었다.

입헌군주국가임에도 전통적으로 군부독재가 실시되어 온 상황에서 1988년 차티차이 춘하반(Chartchai Choonhavon)이 총리에 취임하자, 위상저하를 두려워하는 군부와 정부 간에 갈등이 계속되었다.

아무리 선거에 의해 문민정부가 들어선다 해도 권위주의적 문화가 존재하는 한, 지식인 계급과 중간계급의 눈에는 정부의 여러 정책이 부패와 부정행위의 결과로 드러나기 때문에 정부는 계속해서 정통성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던 것이다.
타티차이 춘하반의 문민정부도 혹독한 비판에 직면했으며 총체적인 부패 때문에 비판을 받았다. 정부의 부패는 군부에게 쿠데타를 일으킬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

1990년 11월 각군 사령관들이 개각에 불만을 품고 전원 국방회의에 불참함으로써 정부와 군부 간의 긴장이 고조되었는데 1991년 2월 순톤 군(軍)최고사령관이 1932년 이래 17번째의 쿠데타를 일으키고 아난드(Anand)를 총리로 하는 과도정부를 수립하였다.
아난드의 문민정부가 행정을 이양받은 후 여러 분야에서 다소 신임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1991년 10월에는 신군부의 실세인 수친다(Suchinda Kraprayoon)가 군최고사령관에 취임하였고, 1992년 4월에는 총리에 올랐다. 그는 총선에서 당선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총리에 올랐던 것이다.

우리가 오늘 찾아야 할 유골은 어떤 것인가…

마침내 1992년 5월 17일 수친다의 퇴진을 요구하는 대규모의 시위가 일어났다.

이 봉기에 각계각층의 수십만 국민들이 참여하였으나 군부는 시위대를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피의 오월(Bloody May)` 사건이 일어난 것이었다.

1992년 5월 17일부터 5월 20일까지의 `피의 오월`사태는 부미폴(Bhumipol)왕의 중재와 수친다 장군의 총리직 사임 후 망명으로 진정되었다. 그리고, 9월에 있었던 총선에서 반군부세력인 민주당이 승리하여 추안 리크파이가 총리로 선출되었다.

딱 10년이 지난 태국 `피의 오월` 사태를 22돌을 맞은 우리 나라의 `5·18광주민주화운동`의 경과와 비교해보면 한가지 뚜렷하게 대조되는 것이 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실패`했으나 방콕의 5·18은 `성공`했다는 점이다. 이 차이의 원인이 무엇인지, 우리는 똑바로 응시해야 한다.

당시 방콕에 특파되었던 한국일보의 최해운 기자는 1992년 5월 25일자 칼럼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언론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국민들에게 제대로 알려야 사태는 국민이 원하는 해결점을 찾을 수 있다. 소련사태에서는 군부가 언론을 통제하지 않아 정권탈취에 실패했고 광주사태 천안문사태 버마민중봉기는 언론이 입을 다물었기 때문에 민주화 요구는 군대에 비참하게 무릎을 꿇어야 했다. 태국사태는 언론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다시 한번 인식케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래서 우리의 언론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한다."

외신은 방콕의 5·18 십주기를 맞아 유골을 찾고 있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우리가 오늘 찾아야 할 유골은 무엇일까.

2002년 5월 21일 화요일

행복한 아라비아로 가는 길

모카커피로 우리에게 더 친숙한 나라, 전설과 같은 시바왕국의 역사를 간직한 나라 예멘, 오랜 분단의 아픔을 간직한 남북예멘이 1990년 5월 20일 통일했다.

남북 예멘의 통일은 거시적으로 보면 탈냉전이라는 세계사적인 흐름 속에서 이루어진 통일이지만, 예멘 나름의 특수성도 없지 않았던 통일이었다.
그 특수성을 잘 들여다보면, 동∙서독 통일 과정보다도 훨씬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을 터인데, 우리는 아직 남북예멘의 통일에 대한 탐구는 활발하지 않은 듯싶다.

우선 예멘이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를 잇는 매우 중요한 지정학적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 대륙과 해양을 잇는 반도 국가인 우리와 닮아 있다.

예멘은 해상 실크로드의 중요한 거점 국가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 나라의 역사에는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과 그에 대한 응전이 있었다. 오랫동안, 이 나라는 아라비아 지역의 패권국가였던 오스만투르크의 지배를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투르크가 패전했을 때, 승전국 영국의 분리정책에 따라 북예멘만 독립하였던 것이 분단의 씨앗이었다.

영국 총독의 지배를 받던 남예멘이 반영투쟁을 전개하던 남예멘해방전선과 인민해방전선 등의 세력의 힘으로 독립한 것이 1967년.
아랍민족주의를 지향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북예멘과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표방하는 사회주의 체제의 남예멘은 남북한, 동서독, 남북베트남과 같은 분단국이었던 것이다.

각기 정통성을 주장하며 상대방을 통합하려는 시도가 계속되어 1979년에는 전쟁을 치를 정도로 관계가 악화되기도 했지만 주변 아랍 국가의 중재로 평화 협상도 계속되었다.
되풀이되는 갈등 속에서도 통일의 노력이 지속될 수 있었던 까닭은 언어, 종교의 동일성이라는 밑바탕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직도 이 문제의 정답을 찾고 있는 과정에 있다

남북전쟁 이후 1980년 남예멘에 온건파인 나세르 모하메드가 집권하면서 통일 무드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1981년에는 북예멘 살레하 대통령이 남예멘을 처음으로 방문하였고 남북을 통합하는 것을 밝힌 '아덴협정'이 체결되었다.
1986년에는 남예멘에서 체제를 고수하려는 강경파가 쿠데타를 일으키기도 했지만 탈냉전의 세계사적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마침내 1989년 정상회담을 통해 통일 헌법을 승인하였고, 1990년 5월 22일에는 남북예멘이 통일했다는 것을 전세계에 알렸다.

그러나 남북예멘은 1994년 5월 내전에 휩싸이고 만다.

내전의 원인은 정치적인 통합만을 우선시하면서도 정치적인 불안정이 계속되었다는 점, 국유화되었던 기업과 토지를 사유화하는 과정에서 옛 소유자들이 소유권을 주장하는 등 경제적인 문제가 표출되었다는 점, 이슬람 문화를 사회적 문화적 통합의 기초로 삼으려는 북예멘 주민과 사회주의 실험을 통해 전통문화의 한계를 넘어선 남예멘 주민 사이의 사회문화적 갈등, 형식적으로만 군사적 통합을 이룸으로써 통수권이 일원화되지 못했던 점 등이었다.

또한 통일된 에멘은 석유개발로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1990년 8월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는 걸프전 발발이라는 국제 정세도 작용했다.
이라크를 지지했던 예멘은 걸프전 이후 경제가 악화된 이라크로부터도 원조를 받지 못하였고, 미국, 사우디 아라비아, 쿠웨이트 등 연합군의 경제적 보복도 받았던 것이다.

1994년 7월 7일, 북예멘군이 남예멘군의 최후 거점 아덴을 함락하여 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무력 재통일이 이루어진다. 지금 통일된 예멘의 주민들은 '행복한 아라비아(Arabia Felix)'라는 옛 명성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불완전한 통일에서 비롯된 유혈 내전까지 겪은 예멘은 이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인 우리에게 숱한 교훈을 일러주고 있다.

우선 언뜻 떠오르는 것으로 사회 문화적 교류와 통합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생각해볼 수 있다. 누가 통일 이후의 대통령이 될 것인가 따위의 형식적이고 외형적인 것보다 주민과 주민이 서로 손을 맞잡고 만나 이해하는 실질적인 통일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다음은 어느 인터넷 사이트에서 찾은 윤리 문제 가운데 하나다. 우리는 아직도 이 문제의 정답을 찾고 있는 과정에 있다.

<문제> 예멘의 통일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① 정치 제도적인 통합이 가장 중요하다.
② 북한보다 우월한 경제력을 확보해야 한다.
③ 남한과 북한주민들간의 스포츠 교류가 우선되어야 한다.
④ 정치, 경제, 사회 등 전반적인 통일이 될 수 있어야 한다.
⑤ 군사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어야 불리해도 통합되지 않을 수 있다.

'생리대로 만든 드레스'가 묻는다

1957년 5월 19일, 한국에서 처음으로 미스코리아 선발대회가 열렸다. 장소는 서울 시립극장.

올해도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는 5월 19일 오후 6시 30분부터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렸다. 그러나 올해 열린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는 특별한 점이 있었다.

미스코리아 선발대회가 공중파 방송에서 '퇴출'되었다는 점이다. 1972년부터 2001년까지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는 지상파 방송의 붙박이 프로그램이었다.

그러나 올해부터는 케이블 텔레비전과 인터넷을 통해서만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미스코리아 선발대회가 공중파에서 '퇴출'된 것은 한국사회에서 여성의 힘이 커졌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여성계는 여성의 성을 상품화하는 데 공중파가 나서지 말 것을 주장해왔는데, 이것이 받아들여진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바버라 크루거의 작품 <무제(너의 몸은 전쟁터다)>,1989. 여성의 성 상품화 등의 문제를 담은 작품이다.
사진 출처: <미술로 보는 20세기>(이주헌 지음, 학고재 펴냄) ⓒ
1999년부터 여성단체는 '안티미스코리아 페스티벌'을 개최하였다.
'안티미스코리아 페스티벌'을 통해 여성 자신의 시각으로 본 여성의 아름다움을 말하겠다는 의지를 표출하였다.

사실,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라고 하면 33-24-33이라는 수치가 떠오르게 마련인데, 이런 식으로 여성의 아름다움이 획일화될 수는 없다는 점에 대해서 안티미스코리아 페스티벌은 문제를 제기했던 것이다.


4회째를 맞은 '안티미스코리아 페스티벌'.
지난 5월 11일 남대문 메사 팝콘 홀에서 열렸다. 이번 페스티벌에서는 월드컵에 즈음하여 '운동하는 여자가 아름답다'는 것을 기치로 내걸었다.
시각장애우들의 스포츠댄스와 철인3종 경기를 하는 할머니, 아마추어 복싱을 즐기는 여대생 등 다양한 이들이 이번 페스티벌에 참가했다.

여성신문 5월 17일자에는 안티미스코리아 페스티벌에 참가한 이들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것은 생리대로 드레스를 만들었다는 성미광 씨의 인터뷰였다.

성미광 씨는 행사장 한가운데 여성의 자궁이 연상되는 미술 작품을 설치했다. 일견 불결한 느낌을 줄 수 있는 생리대로 여성이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욕망의 상징물인 드레스를 만듦으로써 여성, 몸, 아름다움, 생리에 대해 새로운 의미를 드러내 보이고자 하였던 것이다.

미스코리아 선발대회가 획일화된 남성의 시각, 자본의 시각에서 바라본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대회라면 안티미스코리아 페스티벌은 여성 자신의 시각에서 여성의 아름다움은 어떤 것인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하고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생리대로 만든 드레스를 보면서, 우리는 생리는 불결한 것이 아니고, 드레스라는 '상징물에 붙어 있는 욕망'이 추하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이 심각한 미학적 질문 앞에 노출되어 있다.

간디가 쥐어 준 `허공을 가르는 무기`

잘록한 허리의 유리병 속에 모래가 흘러내리고 있다.
모래를 흘러내리게 하는 것은
이 세상의 중심에서 작용하는 중력,
그리고 천천히 흘러가는 시간이다.
중력이나 시간은 보이지 않지만
모래시계는 이것들을 눈앞에 보여준다
다 흘러내린 모래시계는 뒤집어놓아야 한다
그러면 오래된 미래와 다시올 과거가 흘러내린다.
'모래시계 고금'에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 속에서 옛일의 뜻을 되새기면서,
과거 속에 숨겨져 있는 미래를 만나고자 한다. <편집자주>


  
 ▲ 마하트마 간디의 미소.
ⓒ nuvs.com
 
 
1991년 5월 21일 당시 인도 총리였던 라지브 간디가 암살 사건으로 사망했다.

라지브 간디는 인디라 간디의 아들, 그리고 인디라 간디는 인도 초대 총리였던 네루의 딸이었다. 네루는 국부인 간디에 대한 존경의 마음에서 자신의 딸에게 간디라는 이름을 붙였다.

인도의 국부 마하트마 간디도 암살 사건으로 죽었으니, 암살로 죽은 간디라는 이만 모두 3명인 셈이다. 라지브 간디의 죽음으로 네루가(家)의 인도 통치도 끝났다.

1948년 1월 30일 마하트마 간디는 암살당했다.
암살자 나투람 고두세는 소송이 진행될 때 철저히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다.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의 화해를 주장한 간디의 정신을 고두세처럼 편협한 종교적 울타리에 갇힌 이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리라.

인도의 파키스탄의 영토 분할은 간디가 바란 것이 아니었다.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의 반목과 갈등과 분쟁도 간디가 바란 것은 아니었다.

마하트마 간디는 <힌두 스와라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태를 제대로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코란>을 읽어도 좋을 겁니다.
<코란>에서는 힌두교도들이 기꺼이 받아들일 만한 구절들을 수없이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또한 <바가바드 기타>에는 이슬람교도라 하더라도 이의를 달 수 없을 만한 구절이 많이 있습니다.
<코란>에 내가 이해하지 못하거나 좋아하지 않는 구절이 있다고 해서 이슬람교도를 싫어해야 할까요?
싸움을 벌일 때는 두 가지 요건이 필요합니다. 내가 싸우려 하지 않는다면 이슬람교가 내게 은근히 싸움을 걸려고 해도 싸움은 일어나지 않을것도, 마찬가지로 이슬람교도가 나와 싸우려고 하지 않는다면 나 또한 싸움을 벌일 수 없을 것입니다.
허공을 가르는 무기는 아무것도 벨 수 없습니다."

"인도의 망국병은 분열과 대립" …과연 그럴까?

간디가 말한 종교는 우리가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힌두교 등과 같은 개별 종교를 말할 때의 그 범주를 뛰어넘은 종교다.
우리는 각기 다른 종교를 믿고 다른 언어를 쓰지만, 한 가지,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동일성을 지니고 있다고 간디는 믿었다. 그리고 간디에게 하느님이란 진리(Truth)를 말하는 것이었다.

진리가 하느님이다, 이것은 간디의 아주 중요한 테제였다.

하지만 인도의 현실을 마하트마 간디의 신념과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고, 인디라 간디가 그리고 라지브 간디까지 암살을 당했다. 라지브 간디가 폭사를 당했을 때 사람들은 시크교도에 의해 저질러진 일이라고 말했다.
과연 종교적 차이가 만들어낸 끔찍한 사건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최근에 나는 어느 외국인이 쓴 칼럼을 읽었다. <세계일보> 2002년 3월 15일자 7면에 실린 "인도의 망국병은 '분열과 대립'이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글을 쓴 이는 토마스 소웰이라는 미국의 칼럼니스트. <워싱턴 타임스>에 실린 글을 권화섭 객원편집위원이 정리한 것이었다.

토마스 소웰이라는 사람은 인도의 구자라트 주에서 일어난 처참한 폭력사태--이삼일 사이에 사망자가 489명이 일어난 사태로 이슬람 사원 터에 힌두 사원을 지으려는 힌두 과격분자들이 피살되자 폭도들이 이슬람교도를 보복 살해한 사건이었다--를 보면서 인도의 근원을 이루는 다양성에 대해서 새로운 시각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 마하트마 간디가 암살당했던 장소. ⓒ nuvs.com 
 
그리고 언어와 문화, 종교, 계급에 의해 분열된 세계 여러 나라의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과거 미국으로 건너온 이민자들이 외국인으로 남아 있기보다는 미국인이 되었지만, 오늘날에는 한사코 이민자들이 집단적 정체성과 지위 보장을 요구하며 외국인이나 소수 인종으로 남으려 한다는 데 대해 우려를 표시했다.

그러니까 토마스 소웰은 미국이 인도처럼 다양성을 인정하는 이민자 정책을 편다면, 인도와 같은 분열과 대립상을 보게 될 거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이런 칼럼을 싣고 있는 국내 언론의 저의를 모르겠다.
외국인 이주노동자에 대해서 다양성을 인정하는 정책을 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종교나 문화의 다양성보다는 우리의 단일한 민족적 정체성을 더욱 강조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내 생각은 토마스 소웰과는 다르다.
비록 인도의 현실이 마하트마 간디의 생각과는 다른 길로 나아갔지만, 간디의 생각은 옳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간디는 이렇게 지적한 바 있다.
"당신이 언급한 잔인한 행위들이 비록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졌다 하더라도 종교의 책임은 아니라는 사실을 다들 이해하고 있다."

그러니까 실제로 폭력사태가 일어나고, 암살행위가 자행될 때 표면적으로는 종교의 차이 때문에 일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2001년 9월 11일 뉴욕의 테러 사건이 일어난 것이 과연 종교의 차이에 기반한 증오심 때문이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미국의 패권적 세계 정책이 더 직접적인 원인이 아니었을까?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고, 비슷하고 같은 것에 더욱 친화력을 보이는 것이 인간의 정서이고 태도이다.
그러나 지구촌이 점점 더 좁아질수록 우리는 다른 것, 차이가 나는 것을 인정하고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평화롭게 살 수가 없다. 자기와 다른 것을 무력으로 억지로 자기와 같은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

그렇게 하면 불행은 싹튼다. 간디의 죽음을 생각하며, 아무것도 베지 않는, 허공을 가르는 무기를 상상해본다.

새로운 독립국가 탄생을 보며

" 우리는 긴 세월 동안 독립을 위해 투쟁했다. 아무리 적은 수의 사람들일지라도 자신들의 '목소리'가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 - 동티모르 지도자, 마리 알카티리 -


  
 ▲ 동티모르 국기를 흔들며 기뻐하는 어린이. 사진 출처 : www.etan.org ⓒ  
 

포르투갈의 식민지, 일본군 점령, 인도네시아의 군사지배.
무려 478년에 걸쳐 외세의 지배를 받아온 티모르인들에게 2002년 5월 20일은 잊을 수 없는 날이 되었다.
동티모르인들은 수도인 딜리 인근 타시톨로 광장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21세기 새로운 독립국가의 탄생을 전세계에 알렸다.

독립선포식에는 약 2십만 명의 군중이 운집하여 역사적인 날이 밝아오는 것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1998년의 인구가 88만여 명이니 전국민의 4분의 1정도가 모인 셈이다.
여기에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과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인도네시아 대통령, 그리고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등이 참석했으며, 한국에서는 이홍구 씨가 특사로 파견되었다.

코피 아난 유엔사무총장이 독립을 축하하는 연설을 한 뒤에 통치권을 넘겨주었고, 프란시스코 구테레스 동티모르 제헌의회 의장이 공용어인 포르투갈어로 독립국가의 탄생을 알렸으며, 사나나 구스마오 대통령 당선자의 취임 연설이 이어졌다.
독립선포식이 끝난 뒤 동티모르인들은 횃불행진을 벌이며 독립을 자축했다 한다.

고난을 상징하는 검은색, 피를 상징하는 붉은색, 희망을 상징하는 노란색으로 이루어진 동티모르 국기가 유엔기 대신에 게양대에 걸릴 때, 운집한 동티모르 국민의 가슴에는 갖가지 감회와 환희의 감정이 넘치는 것처럼 보였다.

고난과 피와 희망, 이것은 여느 신생국과 마찬가지로 동티모르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 즉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앞으로 걸어갈 길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리라.

  
 ▲ 동티모르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다 희생된 이들을 기리는 촛불.
사진 출처: www.easttimor.com ⓒ Rusty Stewart
 
 
신생국의 앞날이 반드시 밝지만은 않다고 외신은 전하고 있다.

우선 동티모르는 빈국 가운데서도 최빈국이다. 파탄 직전의 상태에 몰려 있는 경제를 어떻게 살려 나갈 것인가.

또한 정치적으로는 인도네시아로부터의 독립이냐 아니면 합병이냐를 놓고 오랫동안 갈등을 빚어온 '분단'의 갈등이 남아 있다.
서티모르에는 6만여 명의 티모르 난민이 있다. 이들은 독립을 반대하는 활동을 했던 이들이다.

비록 동티모르 정부가 화해의 메시지를 던지고는 있지만 '분단'의 갈등이 쉽게 아물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을 우리의 역사를 반추해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유엔평화유지군도 국경수비와 치안을 위해 2004년까지 계속 주둔하기로 하였다고 하는데, 독립국이라면 국경수비와 치안을 자주적으로 해나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동티모르가 인도네시아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을, 신생국 동티모르가 껴안고 있는 과제를 잘 해결해 나가기를 멀리서나마 기원하게 된다.

사실, 동티모르가 인도네시아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게 된 과정을 살펴보면 단순히 티모르인들의 독립 열망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전세계 인권사회단체의 활동가들과 양심적인 시민의 연대가 있었다. 우리나라에도 동티모르 연대모임(동연모, Korea-East Timor Solidarity)라는 단체가 있었다.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주민에 대한 만행을 알리고 동티모르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세계 각국의 사회단체의 도움은 이 나라의 탄생에 커다란 도움이 된 것이 사실이다.
앞으로도 동티모르의 평화와 건설에 세계인들의 연대와 지원이 계속해서 이어져야 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덧붙여서 이 지구상에는 아직도 독립을 쟁취하지 못한 나라가 있다는 사실도, 동티모르의 독립을 지켜보며 생각하게 된다. 21세기 첫 독립국 동티모르, 그렇다면 21세기 마지막 독립국은 어느 나라가 될 것인가. 이런 생각도 해보게 되는 것이다.
'동연모'의 사이트에서 만나게 된 짤막한 시구절을 읽는다.


시냇물이 모여서 강이 되고,
강물이 모여서 또 하나될 때,
그 흐름은 아무도 막을 수 없다.
그러기에 티모르 사람들이여, 하나 되어라.
하나가 되어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에 맞서거라.

--동티모르 민족시인 다 코스타의 <시냇물>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