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루(落淚), 눈물을 흘린다는 뜻이다.
눈물은 어느 때 나오는 것일까? 나는 언제 눈물을 흘렸던 것일까? 돌아보니, 선친께서 돌아가셨을 때, 또 벗이 죽었을 때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떠오른다.
장자(莊子)는 삶과 죽음을 동전의 양면처럼 여겼다 하지만, 어찌 한갓 어줍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나와 같은 사람이 선친이나 벗처럼 인연 깊은 사람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으랴.
하지만 나에게 인연이 그리 깊지 않은 사람의 죽음이나 아픔을 직면하고 눈물을 흘린 기억은 그리 많지 않다. 나는 오히려 무엇이 그 사람을 아프게 했는지, 어찌하면 그 아픔을 덜 수 있는지, 그런 쪽으로 생각을 기울여왔던 듯싶다.
그렇지만, 다른 이의 글에서 “눈물을 흘렸다”는 대목이 있으면, 거듭 그 대목을 곱씹어보게 된다. 눈물이야말로 사람을 움직이는 가장 큰 동력이 아닐까라는 생각 때문이다. 세상 만물을 따스한 연민의 눈을 바라볼 수 있는 이의 눈물은 진정 이슬처럼 맑을 것이다.
눈물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다름 아니라 조영래 변호사(1947년 3월 26일-1990년 12월 12일)가 남긴 글 모음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1991)를 다시금 뒤적여보면서 한참 동안 생각이 머문 대목 때문이다. 12월 12일은 조영래 변호사의 기일(忌日)이다.
조영래 변호사가 사법시험에 합격했던 것은 1971년(제13회)의 일이다. 당시 서울대 대학원생이었고 스무네 살 때의 일. 그리고 1980년 3월 사법연수원에 다시 들어가, 연수과정을 마친 때가 1982년 서른다섯 살 때이다.
그후 1990년 폐암으로 타계할 때까지 변호사로서 일했다. 정작 변호사로 일했던 시간보다 사법연수원을 마치기까지가 더 길었다.
이른바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1971년)으로 구속되고 징역형을 살고, 다시 민청학련 사건(1974년)으로 수배되고 도피 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도피 생활을 하는 가운데서도 훗날 ‘전태일 평전’으로 이름을 고쳐지게 되는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을 썼다.)
그러니까, 내가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한참 생각을 머문 곳은, 1981년 무렵 삼십대 중반의 나이에 사법연수원생 노릇을 하면서 써놓은 일기 가운데 한부분이다. 검찰청에서 연수를 받으면서 남겨 놓은 것인 듯싶다.
“강○주, 27세. 운전사. 내가 석방한 최초의 사람이다.
업과상(업무상 과실 치상, 인용자) 전과가 있어서 집유기간중. 게다가 면허정지 기간 중에 운전을 하여 사고를 냈다. 기준으로는 석방이 불가능에 가깝다고 하나 도저히 쉽사리 구속 기소할 수는 없다는 자책이 있어 몇차례 담당검사, 부장 차장 검사선에까지 절충을 하여 석방결재를 얻어냈다.
어젯밤에 석방되었을 것이다. 66세의 노부(老父)가 벌금 60만원을 들고 11일날 찾아왔는데 가슴앓이가 매우 심한 것 같았다. 낙루(落淚).”
낙루.
나는 이 단어 앞에서 그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면허정지 기간 중에 사고를 낸 젊은 운전사의 석방은, 이후 조영래 변호사가 변론을 맡은 갖가지 뜻깊은 사건--우리 나라의 공익 소송의 첫머리에 놓이는 망원동 수재사건(1984년)을 비롯해서 대우어패럴 사건(1985년), 여성의 조기 정년제를 철폐하게 된 계기가 된 이경숙 씨 사건(1985년), 부천경찰서 성고문사건의 권인숙 씨 변론(1986년), ‘말’ 보도지침 사건(1986년), 상봉동 진폐증 사건이라고도 일컬어지는 박길래 씨 사건(1987년) 등등에 비하면, 하찮은 것이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것이다. 10년 가까이, 징역형을 살고 또 도피 생활을 거쳐야만 했던 예비 변호사가 법조인으로서 첫걸음을 뗄 때 흘렸던 이 눈물에 담겨 있는 뜻은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이어졌던 것이리라. “나에게 대학생 친구 한 명만 있다면”이라고 말했던 전태일 열사의 곁에서 바로 그 대학생이 되었던 것은 바로 이 눈물 때문이 아니었을까.
조영래 변호사는 이렇게 적고 있다.
"석방 품신서에는 이런 등등의 가정 형편이나 본인의 성실성 등을 정상(情狀)란에 많이 썼으나 기실 그런 것 때문에 굳이 석방시키고자 뛰어다녔던 것은 아니다.
운전사들에 대해 지나치게 가혹한 형사책임을 부과하고 있는 사법관행. 또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운전사들 자신의 체념에 대하여 그대로 승복할 수 없다는 것.
한 젊은 인간의 장래와 그에 연관된 숱한 사람들의 생애가 기실은 그 한 인간만의 과오로 돌릴 수 없는 ‘재수 없는 사고’로 인하여 관료적 절차에 따라 간단히 아무렇게나 짓밟혀버려서는 아니 된다는 것.
그리고 또한 관행이나 사무처리상의 편의가 한 인간의 전생애보다도 우선 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의무감.
이런 것들이 나로 하여금 아직도 낯선 검찰청의 여러 방들을 쩔쩔매며 돌아다니게 만든 것 같다. 이 사람은 나에게 축복을 가져다주었다.”
'한 젊은 인간의 장래와 그에 연관된 숱한 사람들의 생애' '한 인간의 전생애'라는 구절이 '관료적 절차' '관행이나 사무처리상의 편의'와 대비되어 도드라져 보인다.
그이는 법조문을 보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인간의 삶과, 얽히고섥힌 인간관계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눈물을 머금은 눈으로.
살아 있다면, 올해(2002년)로 쉰다섯의 나이가 되었을 조영래 변호사. 그이는 이 땅에 큰 씨앗들을 뿌려놓았다.
자라나는 세대는 앞으로도 그이를 <전태일 평전>의 저자로 기억할 것이다. 법조인들은 공익적 개념의 집단 소송의 길을 열고, 오늘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으로 발전한 정법회를 만든 변호사, 인권과 노동 변론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변호사로 그이를 기억할 것이다.
이 땅의 진정한 민주화를 염원하는 이들은 그이를 민주화운동의 영원한 선배로서 기억할 것이다. 이런 기억들 속에서, 나는 그이의 서글서글한 얼굴에 흘러내렸을 눈물을 잠시 떠올려 보았을 뿐일 것이다. 단지 눈물을,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초발심의 눈물을.
-덧붙이는 글-
교토통신 특파원이었던 히라이 히사시(平井久志) 씨는 그이에 대한 추모의 글에서 “조영래 변호사라면 어떻게 했을까”라고 물었다. 이런 질문을 한번쯤 던져보고 싶은 이들이 적잖다. 그런 사람들이 이른바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으로 함께 고초를 겪었던, 심재권, 장기표, 이신범 씨들만이 있는 게 아닐 것이다.
과연, “조영래 변호사라면 어떻게 했을까?”
다만 오늘의 현실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일 한가지.
12월 10일에는 전태일기념사업회, 70년대민주노동운동동지회, 청우회(청계피복노동조합동우회) 등이 “전태일정신을 모독하는 민주화운동 보상을 거부한다!!”는 성명서를 냈다.
그리고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법률'에 따라 전태일 열사에 대한 보상금이 930만원이라는 데 대해(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인가) “전태일에 대한 보상을 거부할 것”과 함께 이 법의 합리적인 개정, “민주화운동 관련자의 범위 확대, 민주화운동 보상심의 위원회의 합리적 구성, 명예회복 조처 명시, 공정한 기준에 의한 보상금 지급의 현실화”를 주장했다.(2002년 12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