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30일 금요일
우리시대 왜 인문학인가
우리시대 왜 인문학인가
저는 인문학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누가 저에게 뭐하는 사람이냐고 물어오면 저는 당당하게 인문운동가라고 이야기합니다. 제가 말하는 인문운동이란 의식과 생활의 영역에서 인간화를 실천하려는 노력을 말합니다. 또 제가 말하는 인간화란 ‘물신(物神)의 지배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는 운동’이며, ‘자기중심성을 넘어서는 인간 의식의 진화를 이루려는 운동’을 의미합니다.
저는 우리 시대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사회적 실천과 인문운동의 결합과 삼투를 요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미력하나마 큰 산을 이루는데, 흙 한삽 보태는 심정으로 제 능력만큼 일하려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미숙하더라도 저와 함께 이런 이야기들을 나눠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1. 유연한 일관성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무겁지 않으면 위엄이 없고 배워도 완고하지 않다. 충(忠)과 신(信)을 중심으로 자신보다 못한 사람과 벗하지 말며, 허물이 있거든 거리낌 없이 고칠 일이다.” (제1편 학이 8장)
子曰, 君子不重則不威 學則不固. 主忠信 無友不如己者 過則勿憚改 (學而 第一)
무겁다는 것은 중심이 잡혀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흔들리지 않으려면 뿌리를 튼튼히 내려야 한다. 그렇다면 어디에 뿌리를 내릴 것인가? 공자는 그 뿌리를 충(忠)과 신(信)에 내려야 한다고 말한다. 이때 충과 신은 둘 다 자기중심성을 넘어서는 것이다.
군자의 위엄은 흔히 말하는 무게를 잡는다거나 권위주의적 태도와는 본질이 다른 것이다. 사람의 관념은 완고해지기 쉬운 경향이 있다. 인간이란 자신이 우연히 접한 지식이나 정보를 놓고도 얼마나 빨리 ‘이것이 옳다’, ‘이것이 분명하다’ 하고 자신도 모르게 확신하는 때가 많은가. 따라서 진실에 바탕을 둔 진정한 위엄은 완고해지기 쉬운 경향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비로소 세워질 수 있다.
흔히 ‘학즉불고(學則不固)’를 ‘배워도 견고하지 못하다’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은데, ‘무거움(重)’이나 ‘위엄(威)’과 이어지는 뜻에서 고(固)를 ‘견고함’으로 해석하기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논어》 전편에 흐르는 공자의 태도로 볼 때 이는 ‘배워도 완고하지 않다’로 풀이하는 것이 옳다. 무거움重과 완고하지 않음不固의 절묘한 조화야말로 공자가 한결같이 추구한 사상적 특징이기 때문이다. 이 조화를 읽어 낼 수 있을 때 비로소 《논어》가 우리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공자는 아집을 경계했고, 그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혹시 허물이 있더라도 아집이 없는 사람은 허물을 고칠 수 있지만, 완고한 사람은 허물을 고치기가 매우 어렵다. 완고한 사람의 경우 배우면 배울수록 오히려 그 완고함이 더해질 뿐이다.
‘무겁지 않으면 위엄이 없으며, 배워도 완고하지 않다.’
이 구절은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리더십과 관련해 많은 영감을 던져 준다.
과연 오늘날 필요로 하는 진정한 리더십이란 어떤 것일까?
우리는 반세기 만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시켰고, 이제는 우리 사회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야 하는 시점에 와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필요한 것이 리더십이다. 이러한 리더십은 부드럽고 유연한 권위에서 나온다.
근대 이전의 전체주의 사회에서 유연한 권위는 뛰어난 왕이나 지도자만이 실현할 수 있는 위정자 한 사람의 덕목이었다. 그러나 민주주의 사회에 이르러서는 제도와 부합하는 보편적 덕목이 되었다.
민주주의와 생산력의 확대를 통해 현대 사회는 공자와 같은 성현만이 펼쳐 보인 이상을 일반 시민에까지 보편화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동안 민주화와 탈권위주의의 세례를 받은 우리 국민에게 더 이상 고집스러운 일관성, 불도저식 추진력은 어울리지 않는다.
시대정신에 충직한 일관성과 자기중심성을 넘어 소통하는 유연성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오랫동안 기다려온 리더십의 요체라 할 수 있다.
만약 이런 시대정신에 부합하지 못할 때는 정치, 기업, 진보 운동 어느 하나도 성공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현재 권력이나 부를 누리고 있는 기득권층의 의식 변화는 일반 시민들의 의식 변화보다 뒤떨어질 수가 있다. 이들의 입장에서는 기득권을 지키는 것이 훨씬 더 유리할 테니 변화를 거부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성숙한 시민의식이야말로 새로운 리더십을 만들어 갈 수 있는 배경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아는 것이 있겠는가? 아는 것이 없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묻더라도, 텅 비어 있는 데서 출발하여 그 양 끝을 들추어내어 마침내 밝혀 보리라.” (제9편 자한 7장)
子曰, 吾有知乎哉? 無知也 有鄙夫問於我 空空如也 我叩其兩端而竭焉 (子罕 第九)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세상 모든 일에 옳다고 하는 것이 따로 없고 옳지 않다고 하는 것도 따로 없이, 오직 의를 좇을 뿐이다.” (제4편 이인 10장)
子曰, 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
# 원효의 화쟁사상
비연비불연(非然非不然), 이변비중(離邊非中), 비동비이이설(非同非異而設)
2. 통찰력
자로가 여쭈었다.
“위나라 임금께서 선생님께 정치를 맡기신다면 무엇을 가장 먼저 하시겠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반드시 명名을 바로 세울 것이다.”
자로가 말씀드렸다.
“현실과는 먼 말씀이 아니신지요. 어찌 명名을 먼저 세운다 하십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자로야, 너는 참 비속하구나. 군자는 자기가 알지 못하는 일에는 입을 다무는 법이다. 명이 바로 서지 않으면 말이 불순해지고, 말이 불순해지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예악이 일어나지 못하고, 예악이 일어나지 못하면 형벌이 적절하게 집행되지 못하고, 형벌이 잘 집행되지 않으면 백성들이 손발 둘 곳이 없게 된다. 따라서 군자가 명을 바로 세우면 반드시 말이 서고 말이 서면 반드시 행해지게 될 것이니, 군자는 말을 세움에 있어 조금도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 (제13편 자로 3장)
子路曰, 衛君 待子而爲政 子將奚先
子曰, 必也正名乎
子路曰, 有是哉 子之迂也 奚其正
子曰, 野哉 由也. 君子於其所不知 蓋闕如也 名不正 則言不順 言不順 則事不成 事不成 則禮樂不興 禮樂不興 則刑罰不中 刑罰不中 則民無所措手足 故 君子名之 必可言也 言之 必可行也 君子於其言 無所苟而已矣 (子路 第十三)
자로가 공자에게 “정치를 맡게 된다면 무엇부터 하시겠습니까?” 하고 묻자 공자는 “명을 바로 세우겠다[正名]”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자로는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생각이 아닙니까”라고 반문한다. 현실에서 풀어야 할 난제들이 얼마나 많은데 한가로이 명名이나 세우고 있느냐고 힐문하는 것이다. 이때 공자는 단호한 어조로 자로를 비속하다[野]고 나무란다.
중국 현대사에 큰 역할을 한 마오쩌뚱도 이 점에서는 공자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고난의 시절에 마오쩌뚱이 철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자 많은 사람들이 자로와 같은 반응을 보인 것이다. 그때 마오쩌뚱은 그에 대해 ‘바로 이런 때야말로 철학이 필요한 시기’라고 말한다.
정명의 중요성을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은 건국 이후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는데 또 한 사람의 걸출한 인물인 덩샤오핑에 의해 새로운 정명에 성공함으로써 개혁과 개방 그리고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정착시킬 수 있었다.
이제 G2로 부상한 중국은 그동안 새롭게 발생한 내부모순을 포함하여 세계 인류의 근본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21세기 인류적 정명에 직면하고 있다.
앞서 나눈 공자와 자로의 대화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어쩌면 오히려 현대사회에 훨씬 더 울림이 큰 대화라 할 수 있다. 현대 사회에 그만큼 풀어야 할 난제가 많은 탓이라 하겠다.
흔히 정명正名을 ‘명분을 바르게 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명분名分이라는 말은 과거 왕조시대나 전체주의나 독재 치하에서 집권자들이 그럴듯한 형식 논리로 견강부회牽强附會하며 스스로를 합리화하거나 권력을 획득하거나 유지하려 할 때 흔히 사용하는 말이었다. 그런 까닭에 지금에 와서는 좋은 의미로 들리지 않을 수도 있지만, 참뜻을 자세히 살펴보면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명’을 현대적 용어로 표현한다면 ‘시대정신의 구현을 위한 종합철학을 바로 세우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풀어야 할 난제가 많을수록 또 그런 문제들에 대한 해결방법이 서로 모순되어 보일수록 먼저 명분[名]을 바로 세워 방향을 잡아야 구체적인 행동지침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늘날과 같이 복잡다단하고 수많은 관계 속에서 갈등하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근원적인 해법이 아닐까 싶다.
과거의 진보니 보수니 좌니 우니 하는 고정된 시각으로는 지금의 시대적 요구를 종합적으로 파악하기가 힘들다.
지금까지의 관점에서 보면 모순 되게 보이는 요소들이 이제 상호보완하고 인간 진화를 위한 길에서 함께 나가야 할 동반자라는 관점이 우리가 세우고자 하는 종합철학이다. 민주화와 물질적 생산력의 향상 등은 과거에 비해 종합철학이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객관적 조건을 만들어 왔다. 다만 사람들의 의식이 이에 따르지 못하는 것이다. 과거의 좌우, 보수와 진보, 자본계와 노동계 등의 고정관념과 그에 기반을 둔 낡은 정치가 가장 큰 장애가 되고 있다.
역사발전 단계로 볼 때 지금 우리 사회는 과거의 패러다임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하고 있는 과도기라 하겠다.
이 시기를 살아가는 당사자들에게는 극심한 혼돈 과정 속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역사의 흐름 속에서 보면 새로운 시대정신이 출현하기 위한 필연적인 모습이라고 하겠다.
공자는 정명이 안 되면 언言이 불순해진다고 했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정합성이 약해지고 그러다 보면 실행력을 갖기 어렵다. 실행력이 약하면 문화[禮樂]가 발달하기 힘들고, 도덕이 땅에 떨어져 사람들이 법망을 피하는 데 급급하게 되며, 대중들이 삶의 지표를 잃고 방황하게 된다.
세계화는 인류역사가 나아가는 방향이다. 이제 정명正名도 세계적 범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전쟁, 양극화, 지구환경 문제를 포함해서 전체 인류의 복지와 자유를 위해서는 인류적 차원에서 정명이 이루어져야 한다.
신생독립국에서 출발하여 선진국의 문턱에 진입하려는 우리나라야말로 어떤 측면에서 보면 이런 인류적 정명正名을 하는 데 가장 적격일 수 있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상생, 성장과 지구환경, 세계화와 나라의 자주성, 전쟁과 평화, 세계자본주의의 변화에 대한 요구, 세계열강의 새로운 질서 등 지금의 세계가 제기하는 문제의 한복판에 있는 이 땅에서 이런 일을 우리가 빛나게 이룰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지금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정명과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주체의 형성이 간절히 요청되는 때라 하겠다.
3. 덕(德)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덕德으로써 정치를 한다면 마치 북극성이 그 제자리에 있어도 여러 별들이 이를 향하여 도는 것과 같다.”
(제2편 위정 1장)
子曰, 爲政以德 譬如北辰 居其所 而衆星 共之 (爲政 第二)
위정편에서 위 구절을 읽다 보면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된다.
지금의 세상은 무엇을 향하여 돌고 있는가?
지금의 정치는 무엇을 향하여 돌고 있는가?
당신의 북극성은 무엇인가?
인간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북극성은 무엇일까? 아마도 행복일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지만 사람이 모여 사회를 이루다 보면 대립, 갈등, 투쟁이 끊이질 않는다. 이 근본모순을 해결하는 것이 정치의 이상일 것이다. 근대혁명을 거치면서 사회제도나 물질적 조건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발전했지만, 진정한 이상 정치의 실현은 멀게만 보인다.
공자 시대의 덕치德治는 제왕의 길, 치자治者의 도일지 모르지만, 치자와 피치자의 동질성을 바탕으로 하는 오늘날의 민주주의에서 덕의 주체는 주권자인 국민이다. 따라서 자각과 자율이 핵심을 이룬다. 아무리 제도를 잘 갖춰 놓아도 그것을 제대로 운용할 수 있는 사람이 준비되지 않으면 이상적인 세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여러 가지 왜곡된 형태로 변질되기 쉽다.
지금의 실정을 보면 제도에 비해 사람의 의식이 뒤처지는 불균형 현상이 그 어느 때보다 두드러진다. 물론 제도도 계속 발전시켜가야 하겠지만, 이 불균형을 시정하는 것이 이상 정치실현의 중심 과제라 하겠다. 이런 이유로 이 시대에 가장 절실한 숙제는 의식의 진보이고, 이때 진보 의식이란 공자가 말한 덕을 가리킨다. 덕으로써 정치를 한다면 주변의 흐름이 덕을 향해 움직이게 되어 있다. 이것이 순리다.
공자는 덕(德)이 무엇이라고 정의하듯이 말하고 있지 않다. 다만 미루어 생각하건데 인(仁)을 체득한 사람의 향기(香氣)라고나 할까...
인(仁)에 대해서도 정의하지 않고 있지만, 대체로 극기복례(克己復禮), 충서(忠恕), 애인(愛人), 박시제중(博施濟衆)을 실천함으로서 자신을 비롯한 모두의 생명력을 신장시키는 작용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해도 될 듯하다.
안연 편 22장을 보면 번지라는 제자가 공자께 인仁에 대해 묻는다. 그때 공자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愛人]”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인에 대해 물을 때마다 공자의 대답은 달랐다. 묻는 사람의 수준과 당시 정황에 따라 다양하게 답변한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인을 극기복례克己復禮라 하고, 어떤 이에게는 충서忠恕라고 하고, 또 다른 이에게는 박시제중博施濟衆이라고 답했다. 그리고 번지의 물음에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간단명료하게 대답했다. 이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성현이 공통적으로 이야기 하는 것이고, 세계 인류가 궁극적으로 진화해야 할 목표라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시대와 사회, 문화에 따라 대답이 다를 수 있다.
번지가 이어서 “지知는 무엇입니까?” 하고 묻자, 공자는 “사람을 알아보는 것이다[知人]”라고 말한다. 전후 문맥으로 보아 인仁과 지知를 결부하여 답한 것으로 보인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사람을 알아보는 데서부터 실현된다고 말한 것이다. 번지가 이를 잘 이해하지 못하자, 공자가 “인은 바른 정치의 요체인 인사人事다”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곧은 사람을 등용하여 굽은 사람 위에 놓으면 굽은 사람도 능히 곧게 할 수 있는 것이다擧直錯諸枉 能使枉者直”라고 말한다. 즉 인이란 사람들 간의 관계 속에서 실현되는 것인데, 그 관계 속에서 사람들이 올바르게 배치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위정 편 21장에는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효도하라. 오직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라. 그러면 거기에 늘 정치가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뒤이어 ‘이것이 정치를 하는 것이니, 어찌 정치를 따로 할 것이 있겠는가’라는 문장이 나온다. 이와 같이 공자에게 정치란 모든 인간관계에 통용되는 원리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번지라는 제자가 그다지 총명한 사람이 못 되어 공자가 말한 바를 바로 깨닫지 못하고 자하에게 그 뜻을 되물었다. 그러자 자하는 “뜻이 넓고 큰 말씀이오. 옛날 순임금이 천하를 차지하고 여러 사람 중에서 고요皐陶를 등용하자 어질지 아니한 자들이 멀리 사라졌으며, 또 탕 임금이 천하를 차지하고 여러 사람 중에서 이윤伊尹을 골라 등용하시자 어질지 아니한 자들이 멀리 사라졌소”라고 부연 설명한다. 자하는 인을 정치의 요체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즉 ‘정치란 사람을 사랑하는 구체적 기술技術이다’라는 공자의 이상을 나름대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선어중거고요(選於衆 擧皐陶, 여러 사람 가운데 고요를 골라 등용)라는 말에서 ‘선거選擧’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자못 흥미롭다. 과거에는 군주가 주체가 되어 ‘선거’했지만 지금은 국민이 주체가 되어 ‘선거’를 치른다. 예전에는 성군聖君이라야 ‘선거’가 제대로 되었다면 지금은 국민의 수준이 좌우한다.
요즘 여러 가지 사건들을 통해 우리 사회의 부패가 얼마나 심각한가를 보면서 좌절감을 느끼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수록 정치적 허무주의나 냉소주의에 흐르는 대신 공자의 이상처럼 ‘정치야말로 사람을 사랑하는 가장 중요한 기술이다’라는 생각으로 선거에 임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라는 것은 체제와 시대를 넘어서는 보편적 진리라고 할 수 있다.
정치가 이익을 중심으로 권력을 쟁탈하는 이전투구의 장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도록 돕는 조화의 예술이 되기 위해서는 성숙한 시민의식이 중요하다. 밝고 성숙한 시민의식이야말로 선거를 ‘인간화를 위한 정치 변혁의 강력한 도구’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시대를 초월해 공자가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이자 우리의 신인문운동이 정치 분야에서 이루어야 할 목표가 아닐까 싶다.
#어떤 사람이 자산子産에 대하여 여쭈니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자애로운 사람이다.”
자서子西에 대하여 여쭈니 공자가 말씀하셨다.
“그저 그런 사람이다.”
관중에 대하여 여쭙자 공자가 말씀하셨다.
“훌륭한 사람이다. 백씨의 병읍 300호를 빼앗았으되, 백씨는 거친 밥을 먹으며 살다 죽었지만 결코 관중을 원망하지 않았다.” (헌문 10장)
或 問子産. 子曰, 惠人也 問子西 曰, 彼哉彼哉
問管仲. 曰, 人也 奪伯氏騈邑三百 飯疏食沒齒 無怨言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가장 큰 과제는 양극화 해소가 아닐까 싶다. 근래 복지문제가 정치적 화두가 된 것은 이러한 시대적 요구가 반영된 것이다. 시기적으로는 2012년 양대 선거와도 맞물려 있어 이 기회에 우리 사회의 공론이 제대로 형성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진보 진영의 이른바 보편적 복지론은 보수 진영이 우려하는 재정의 위기에 대한 대책이 함께할 때 비로소 현실성 있는 주장이 될 것이다.
복지의 확대는 재정의 확대를 의미하고, 재정의 확대는 세수 확대를 말하는데, 이때 세금을 더 내야 하는 생산 주체의 의욕이 떨어지지 않아야 한다.
결국 가진 사람들의 실질적 동의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진보진영의 일각에서 잘 뿌리내리기를 바라는 사회민주주의제도도 이런 중산층 이상의 의식이 얼마나 진화하느냐에 성패가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대목에서 공자가 말한 관중의 인仁을 생각해 보자. 자신에게 또는 자기가 속해 있는 집단에게는 불리하지만, 전체 구성원을 위해서는 반드시 개혁이 필요하다고 가정해 보자. 이때 어떻게 하면 저항 없이 개혁안을 수용하도록 할 수 있을까?
이때 개혁 주체는 기득권을 가진 사람이나 집단이 큰 저항과 거부감 없이 기득권의 일부를 포기하거나 양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한 개혁 주체를 어떻게 하면 형성해 낼 수 있을까?
이 두 가지가 현 시점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사회 진보와 인간 진화의 가장 핵심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개혁을 하자면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불만을 줄이고 소기의 목적대로 개혁을 이루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우선 개혁 주체가 공평무사하고 합리적으로 개혁을 진행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갖추어야 한다.
개혁에는 필연적으로 저항이 따른다. 과거에는 정권 차원에서 힘으로 저항을 잠재우려 했다. 그런데 더 이상 그런 방식은 통하지 않을 뿐 아니라 마땅히 버려야 할 구시대의 폐습이 되었다. 이제 개혁의 성패는 기득권을 가진 사람이나 집단이 개혁에 동참하도록 얼마나 합리적으로 설득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그런 의미에서 개혁주체의 권위는 대단히 중요하다. 싫든 좋든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권위가 있어야 한다. 이것을 바탕으로 비전을 제시하고 리더십을 보여 줄 수 있을 때 비로소 원활하게 개혁을 수행해 갈 수 있다.
우리 민족의 최대 과제는 남북통일이다. 통일은 남과 북에서 기득권 세력의 저항이 크기 때문에 최대의 개혁 과제일 수 있다. 이러한 난제를 해결하는 데는 관중이 보여 준 큰 덕이 요구된다.
통일은 단순한 물리적 통합이 아니다. 새로운 사회, 새로운 국가를 이루는 과정이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사람들의 불만이 쌓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남북한 양쪽에서 통일을 이끌 주체가 고르게 배출되어야 한다. 어떤 제도로 통일할 것인가도 중요하지만 새로운 통합력의 바탕에는 큰 덕德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상생과 화해의 바탕 위에서 통합을 이루는 통일된 나라의 미래를 그려본다.
인문학을 살리는 꿈
인문학을 살리는 꿈
여성국 (경희대 경영학과 3학년) 한겨레 2012년 11월 26일
난 경영학과 학생이다. 학교에선 회계나 재무, 마케팅 따위를 배우지만 전공보다는 시나 소설을 더 좋아한다. 스티브 잡스의 자서전보다 스테판 에셀의 책을 더 감명 깊게 읽었다. 원하는 사람과 점심식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워런 버핏이나 이건희 회장이 아니라 심보선 시인과 장정일 작가를 놓고 고민할 것 같다.
서점에 가 보면, 재미있게 포장된 인문학 책이 즐비하다. 이런 인문학 열풍은 아마도 스티브 잡스가 인문학 예찬론을 펼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기업들도 요즘은 인문학적 상상력을 가진 인재를 원한다고 공공연하게 말한다. 인간의 실존에 관한 수많은 물음, 나와 타인, 사회와 세상에 관해 끊임없이 물음을 던지고 답을 찾아가는 인문학은 기업의 창의성과 다양성을 위한, 좀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기업이 경쟁우위의 확보를 통해 이윤을 추구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난 인문학의 도구화를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모든 학문과 마찬가지로 인문학도 수단이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정신적 갈증과 결핍의 해소를 위한 도구, ‘인간다움’이 실현된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도구라고 생각한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지, ‘인간’이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물음은 인문학과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물음이다. 나는 인문학의 본질이 가려진 ‘그릇된 도구화’를 이야기하려고 한다.
점점 더 많은 대학들이 시장의 요구와 입맛에 맞추기 위해 취업률이 떨어지는 인문학과들을 통폐합하고 회계 원리를 의무 수강하도록 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우리 학교는 ‘후마니타스 칼리지’를 통해 인문교육 강화를 선택했다. 학교는 참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기대를 안고 들어간 인문학 수업 시간, 독일에서 철학을 공부했다는 교수님은 스티브 잡스를 이야기하며 인문학의 중요성을 말씀하셨다. 이 사회와 기업은 이제 인문학적 사고를 통한 상상력과 창의력이 풍부한 인재를 원한다고.
교수님의 말씀은 분명 일리가 있지만 수업을 마치고 강의실을 나오며 왠지 모를 불편한 생각이 들었다. 다른 학교가 인문학과를 통폐합하고 경영 관련 과목을 필수로 들어야 하는 것이나, 인문학 수업을 강화하는 것이나 시장의 요구에 맞춘다는 점에선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어쩌면 그것은 시장에 등을 돌릴 수 없는, 인문학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일지도 모르겠다.
나도 곧 취업전선에 뛰어들 것이다. 자기소개서를 내고 시장이 원하는 스펙을 하나라도 더 보여주기 위해 안간힘을 쓸 것이다. 어쩌면 운 좋게 대기업의 면접 자리에 갈지도 모르겠다. 확률은 매우 낮겠지만 혹시나 그곳에서 대법원이 불법파견을 인정한 그 회사의 비정규직 노동자에 관한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하는가. 혹사당하다 불치병에 걸려 죽음에 이르게 된 노동자에 대해 묻는다면 나는 어떻게 답할 것인가.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세상이 이윤 추구보다 중요하다고 인문학은 가르치지만, 나는 이런 배움을 배반한 대답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서점가에 넘쳐나는 직장인들을 위한 인문학 책, 대기업 임원들을 위한 각종 인문학 강의가 즐비한 세태에서 시장은 인문학을 통해 무엇을 얻고자 하는 것일까. 인문정신이라는 알맹이는 쏙 빼놓은 채 최대의 효율성과 이윤 추구를 위한 인문학적 상상력과 창의력이라는 껍데기만 취하려는 것은 아닐까. 인간의 실존에 대한 물음은 시장에 넘겨준 채 수단으로서만 존재하는 인문학은 과연 인문학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
대선을 코앞에 두고 나는 꿈꾼다. 시장이 아니라 인간을 먼저 생각하는 이가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기를. 그렇게 서서히 인문학이 알맹이를 되찾아가기를. 다수의 인간이 소수의 탐욕에 희생되는 일들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기를. 동시에 인간다운 일자리가 더 늘어날 수 있길 나는 꿈꾼다.
여성국
절필과 책읽기 혁명
절필과 책읽기 혁명
조운찬 기자, 경향신문 2012년 11월 26일자
현대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 필립 로스가 최근 절필을 선언했다. 지난달 그가 프랑스 주간지 ‘레 인록’을 통해 처음 절필 의사를 밝혔을 때만 해도 파장은 크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주 들어 뉴욕타임스, AP, 워싱턴포스트, 더 타임스 등이 다투어 절필 소식을 전하자 서방 문화계가 술렁이고 있다.
로스는 “쓸 만큼 썼다고 판단해” 집필을 그만둔다고 사유를 밝혔다. “매일매일의 절망과 굴욕을 견뎌낼 힘이 더 이상 없다”고도 했다. 뉴욕타임스는 로스가 자신의 컴퓨터에 “쓰는 것과의 투쟁은 끝났다”라고 쓰인 포스트잇을 붙여놓았다며 그가 오랜 글쓰기에서 오는 중압감과 절망 때문에 괴로워했다고 전했다.
로스는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오르는 세계적인 작가다. 1959년 데뷔한 뒤 모두 31권의 소설을 냈다. 이 가운데 <울분> <휴먼 스테인> 등 몇 권은 국내에 번역됐다. 올해 나이 79세. 그의 말대로 은퇴할 때도 됐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언론들은 로스가 최근까지 왕성하게 집필해온 점을 들어 노년에서 오는 육체적 피로가 절필의 직접적인 원인이 아닐 것이라고 전했다. 로스는 언론 인터뷰에서 “나는 지금까지 ‘소설이 죽고 있다’고 말해왔는데, 이제는 ‘독서력이 죽고 있다’고 정정해야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독서력을 사장시킨 장본인으로 스크린을 꼽았다. “처음에는 영화 스크린이, 다음에는 텔레비전 스크린이,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컴퓨터 스크린이 독자들을 앗아갔다.”
로스의 절필 선언은 앞서 절필 의사를 밝힌 칼럼니스트 고종석을 떠올리게 한다. 고종석은 지난 9월 자신의 책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며 직업적 글쓰기를 접었다.
문제는 책읽기다. 독자들이 스크린으로 시선을 돌릴 때 작가들은 죽어간다. 스마트폰이 확산되면서 지하철에서 책을 보는 모습은 사라졌다. 언제부터인가 일간지의 출판면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책이 사라진 지면에는 돈 버는 이야기, 잘 먹고 잘 노는 방법을 알려주는 기사들로 채워지고 있다.
국내의 책 판매부수는 올들어 8월까지 전년동기 대비 11% 이상 줄어들었다고 한다. 동네서점도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 얼마 전에는 서울시의 817개 행정동 가운데 30%에 달하는 246개 동에 서점이 하나도 없다는 조사결과가 발표됐다. 영업실적이 괜찮았던 중대형 서점들도 문을 닫고 있다. 지난 6월 강남 영풍문고는 영업 10년 만에 폐업했다. 그 자리에는 의류매장이 들어섰다. 53년 역사를 지닌 신촌 홍익문고는 재개발로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출판계의 불황이 깊어지자 출판인들이 나서고 있다. 출판·독서 관련 33개 단체들은 최근 대선을 앞두고 ‘책 읽는 나라 만들기 국민연대회의’를 결성하고 대선 후보들에게 완전 도서정가제 정착을 위한 제도 정비, 출판문화진흥기금 5000억원 조성, 공공도서관 3000개 설립 등을 요구했다. 일부 출판·문화인들은 ‘책나라 FM 방송’ 설립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서명작업을 벌이고 있다. ‘책나라 방송’은 60년 넘게 책 관련 소식을 전문적으로 전하고 있는 프랑스 국영 퀼티르방송을 모델로 삼고 있다.
그러나 출판과 독서활동이 캠페인으로 진흥될 수 있는 것인가에는 회의적이다. 책읽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왜 해야 하느냐고 설명하는 것만큼이나 부질없다. 흔히 책은 ‘사고의 기계’라고 한다. 중요한 점은 작가에게 글의 오묘함을 느끼게 하고 글쓰기가 숨쉬기처럼 자연스러운 일이 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해줘야 한다. 이를 위해선 책읽기를 통해 정서적·지적으로 즐거움을 느끼는 독자층이 먼저 형성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필립 로스와 고종석의 절필은 본인들의 해명과 달리 글쓰기에 대한 개인의 절망과 피로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책 읽는 문화가 더 이상 숨쉴 수 없는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고 예고하는 ‘잠수함의 토끼’들이다. 로스는 한 인터뷰에서 “작가에게 글쓰기는 숨쉬기와 같다”고 말했다. 독자들에게는 책읽기가 숨쉬기다. 작가가 쓰기를 멈추고 독자가 읽기를 그만둘 때 책은 죽음을 맞는다.
지금은 왜 읽어야 하는지, 책의 유익함이 무엇인지와 같은 당위를 얘기할 때가 아니다. 개인, 기관, 단체를 막론하고 각자가 책읽기와 관련해 할 일을 찾아가는 게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지난달 개관한 서울도서관은 독서문화를 어떻게 만들어가야 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서울의 옛시청을 리모델링한 서울도서관에는 하루 1만여명의 시민이 찾는다고 한다. 왜일까. 사람이 모이는 곳에 도서관을 세웠기 때문이다. 지난 주말 경향신문과 인터뷰한 이용훈 서울도서관장은 “서울도서관을 찾은 시민들은 우리 동네에도 좋은 자리, 땅값 비싼 곳에 도서관을 지으면 더 행복해지겠구나 하는 인식을 가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장의 말에 독서문화를 일으켜세울 비결이 있다. 그것은 자본에 맞서고 사회적 통념에 거역할 때 가능하다. 이제 책읽기 운동은 혁명이 되어야 한다.
2012년 11월 29일 목요일
불황일수록 불붙는 프랑스의 책 사랑
[목수정의 파리통신]불황일수록 불붙는 프랑스의 책 사랑
프랑스에서 가장 큰 명절은 단연 크리스마스다. 문화가 종교를 대신하기 시작한 지 오래인 이곳에서 예수의 탄생에 큰 의미가 담기진 않지만, 여전히 크리스마스는 우리의 추석처럼 흩어진 가족들을 모이게 해주는 중요한 날이다. 아이들에게만이 아니라, 함께 모인 모든 사람들 사이에 선물이 오고 가기 때문에 어른들에게도 마음 설레는 날이기도 하다. 11월부터 사람들은 선물 마련을 위해 엄청난 시간과 정성, 예산을 바친다. 프랑스인들이 밝힌 올해 1인당 크리스마스 선물 평균 예산은 378유로(약 52만원). 금년에 프랑스인들이 첫손에 꼽은 선물 품목은 단연 책이다. 그 뒤를 초콜릿, 향수, CD가 잇는다.
5년째 이어지는 경제위기. 여기에 이은 정부의 긴축예산은 일상의 삶을 바짝 조여오지만, 그와 무관하게 프랑스의 도서시장은 날로 성장해 왔다. 프랑스 문화부에 따르면 2010년 프랑스 도서판매는 2억6800만부다. 금액으로 치면 28억3800만유로(약 4조원)로 10년 전에 비해 약 23% 성장한 규모다. 이 중 인터넷을 통한 구입은 9%에 그친다. 여전히 프랑스의 크고 작은 도시 한구석에는 주인의 개성을 담은 서점들이 등대처럼 불을 밝히고 있다. 성탄절뿐 아니라 생일에도 열이면 다섯은 책을 선물로 들고 온다. 서점들도 수동적으로 가만히 손님을 기다리지만은 않는다. 동네 콩알만한 서점들도 끊임없이 작가 초청 행사를 마련, 손님들의 볼이 장밋빛으로 물드는 기쁨을 선사한다.
올해 초, 트리플A 그룹에서 탈락되는 국가적 충격을 겪은 프랑스. 지난주, AA1으로 다시 한 계단 강등되었으나 이번에는 차분하게 신용평가기관들이 내린 평가를 귓등으로 넘겨듣는 분위기다. 묵묵히 책장을 넘기며.
경제위기와 도서 구입의 증가. 이 어딘가 맞지 않는 조합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책을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로 꼽은 사람들의 이유를 들어보자면 그 원인을 조금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이 꼽은 책선물의 첫 번째 장점은 실용성이다. 책은 다른 선물들에 비해 저렴하면서, 교육적인 의미가 있고, 주는 사람의 신실한 마음이 잘 담긴다는 점도 장점으로 꼽았다.
책이 실용적이다? 이 점에선 한 사회가 공유하는 가치에 따라 평가가 엇갈릴 수 있다. 프랑스에서도 도서시장의 왕자는 문학(26%), 그중에서도 소설이다. 기껏해야 여행서적(6%)이 그나마 실용서 가운데 순위에 있을 뿐. 이들이 말하는 실용의 의미는 다른 곳에 있다.
초등학교 2학년인 딸아이는 매일 3가지의 숙제를 받아오는데, 그중 늘 빠지지 않는 게 ‘오늘 빌린 책 읽기’다. 학교에 큰 도서관이 있어서, 아이들은 매일 책을 한 권 빌리고, 전날 읽은 책을 반납한다. 교장이 이 도서관이야말로 우리 학교의 심장부라고 소개할 만큼, 독서습관을 길러주는 건 이 학교의 첫 번째 교육목표다. 그 숙제를 하는 동안 아이의 어휘와 사고력, 세상에 대한 인식이 나날이 확장되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여기서 내 실용의 알맹이를 발견한다. “좋은 책을 읽는 순간들이 인생에 축적되면, 뜻하지 않은 시련과 고통에 빠졌을 때 그 순간들을 견딜 힘과 앞으로 나아갈 힘을 동시에 준다”고 말한 작가 신경숙처럼, 프랑스인들은 이 고통의 시간을 이겨낼 힘과 지혜를 책 속에서 찾고 있는 건 아닐까? 이들이 말한 실용은 바로 이런, 길게 계획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찾아지는 실용이 아니었을까?
독서의 해를 지정해 놓고 인구당 10원의 예산을 책정하는 허탈한 문화부, OECD 최저 수준의 공공도서관 수, 독서를 방해하는 입시정책. 이 모든 조건 속에 빈사상태에 이른 한국출판계는 도서정가제를 핵심적인 회생책으로 꼽고 있다. 그러나 보다 더 시급한 건, 책을 통해 우리 속에 녹아드는 자산이야말로, 곤궁한 시절 우리가 행할 수 있는 미래를 위한 가장 실용적인 투자임을 아는 안목이다.
프랑스에서 가장 큰 명절은 단연 크리스마스다. 문화가 종교를 대신하기 시작한 지 오래인 이곳에서 예수의 탄생에 큰 의미가 담기진 않지만, 여전히 크리스마스는 우리의 추석처럼 흩어진 가족들을 모이게 해주는 중요한 날이다. 아이들에게만이 아니라, 함께 모인 모든 사람들 사이에 선물이 오고 가기 때문에 어른들에게도 마음 설레는 날이기도 하다. 11월부터 사람들은 선물 마련을 위해 엄청난 시간과 정성, 예산을 바친다. 프랑스인들이 밝힌 올해 1인당 크리스마스 선물 평균 예산은 378유로(약 52만원). 금년에 프랑스인들이 첫손에 꼽은 선물 품목은 단연 책이다. 그 뒤를 초콜릿, 향수, CD가 잇는다.
5년째 이어지는 경제위기. 여기에 이은 정부의 긴축예산은 일상의 삶을 바짝 조여오지만, 그와 무관하게 프랑스의 도서시장은 날로 성장해 왔다. 프랑스 문화부에 따르면 2010년 프랑스 도서판매는 2억6800만부다. 금액으로 치면 28억3800만유로(약 4조원)로 10년 전에 비해 약 23% 성장한 규모다. 이 중 인터넷을 통한 구입은 9%에 그친다. 여전히 프랑스의 크고 작은 도시 한구석에는 주인의 개성을 담은 서점들이 등대처럼 불을 밝히고 있다. 성탄절뿐 아니라 생일에도 열이면 다섯은 책을 선물로 들고 온다. 서점들도 수동적으로 가만히 손님을 기다리지만은 않는다. 동네 콩알만한 서점들도 끊임없이 작가 초청 행사를 마련, 손님들의 볼이 장밋빛으로 물드는 기쁨을 선사한다.
올해 초, 트리플A 그룹에서 탈락되는 국가적 충격을 겪은 프랑스. 지난주, AA1으로 다시 한 계단 강등되었으나 이번에는 차분하게 신용평가기관들이 내린 평가를 귓등으로 넘겨듣는 분위기다. 묵묵히 책장을 넘기며.
경제위기와 도서 구입의 증가. 이 어딘가 맞지 않는 조합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책을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로 꼽은 사람들의 이유를 들어보자면 그 원인을 조금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이 꼽은 책선물의 첫 번째 장점은 실용성이다. 책은 다른 선물들에 비해 저렴하면서, 교육적인 의미가 있고, 주는 사람의 신실한 마음이 잘 담긴다는 점도 장점으로 꼽았다.
책이 실용적이다? 이 점에선 한 사회가 공유하는 가치에 따라 평가가 엇갈릴 수 있다. 프랑스에서도 도서시장의 왕자는 문학(26%), 그중에서도 소설이다. 기껏해야 여행서적(6%)이 그나마 실용서 가운데 순위에 있을 뿐. 이들이 말하는 실용의 의미는 다른 곳에 있다.
초등학교 2학년인 딸아이는 매일 3가지의 숙제를 받아오는데, 그중 늘 빠지지 않는 게 ‘오늘 빌린 책 읽기’다. 학교에 큰 도서관이 있어서, 아이들은 매일 책을 한 권 빌리고, 전날 읽은 책을 반납한다. 교장이 이 도서관이야말로 우리 학교의 심장부라고 소개할 만큼, 독서습관을 길러주는 건 이 학교의 첫 번째 교육목표다. 그 숙제를 하는 동안 아이의 어휘와 사고력, 세상에 대한 인식이 나날이 확장되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여기서 내 실용의 알맹이를 발견한다. “좋은 책을 읽는 순간들이 인생에 축적되면, 뜻하지 않은 시련과 고통에 빠졌을 때 그 순간들을 견딜 힘과 앞으로 나아갈 힘을 동시에 준다”고 말한 작가 신경숙처럼, 프랑스인들은 이 고통의 시간을 이겨낼 힘과 지혜를 책 속에서 찾고 있는 건 아닐까? 이들이 말한 실용은 바로 이런, 길게 계획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찾아지는 실용이 아니었을까?
독서의 해를 지정해 놓고 인구당 10원의 예산을 책정하는 허탈한 문화부, OECD 최저 수준의 공공도서관 수, 독서를 방해하는 입시정책. 이 모든 조건 속에 빈사상태에 이른 한국출판계는 도서정가제를 핵심적인 회생책으로 꼽고 있다. 그러나 보다 더 시급한 건, 책을 통해 우리 속에 녹아드는 자산이야말로, 곤궁한 시절 우리가 행할 수 있는 미래를 위한 가장 실용적인 투자임을 아는 안목이다.
학교도서관에서 교육의 길을 묻다
학교도서관에서 교육의 길을 묻다 | ||||||||||||||||||||||||||||||||
- 21세기 창의적인 인재 양성을 위한 독서 교육의 중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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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1월 27일 화요일
조지훈의 '지조론--변절자를 위하여'
지조론
- 변절자를 위하여 -
조지훈
1960년, 잡지 <새벽>
지조란 것은 순일(純一)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며 냉철한 확집(確執, 확고한 집념)이요, 고귀한 투쟁이기까지 하다. 지조가 교양인의 위의(威儀,엄숙한 차림새)를 위하여 얼마나 값지고 그것이 국민의 교화에 미치는 힘이 얼마나 크며, 따라서 지조를 지키기 위한 괴로움이 얼마나 가혹한가를 헤아리는 사람들은 한 나라의 지도자를 평가하는 기준으로서 먼저 그 지조의 강도(强度)를 살피려 한다.
지조가 없는 지도자는 믿을 수가 없고 믿을 수 없는 자는 따를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의 명리(名利)만을 위하여 그 동지와 지지자와 추종자를 일조(一朝)에 함정에 빠뜨리고 달아나는 지조 없는 지도자와 무절제와 배신 앞에 우리는 얼마나 많이 실망하였는가. 지조를 지킨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임을 아는 까닭에 우리는 지조 있는 지도자를 존경하고 그 곤고(困苦)를 이해할 뿐 아니라 안심하고 그를 믿을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이 생각하는 자이기 때문에 배신하는 변절자를 개탄하고 연민하며, 그와 같은 변절의 위기의 직전에 있는 인사들에게 경성(警醒,깨우침의 각성)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지조는 선비의 것이요, 교양인의 것이다. 장사꾼에게 지조를 바라거나 창녀에게 정조를 바란다는 것은 옛날에는 없었던 일이지만, 선비와 교양인과 지도자에게 지조가 없다면 그가 인격적으로 장사꾼과 창녀와 가릴 바가 무엇이 있겠는가. 식견(識見)은 기술자와 장사꾼에게도 있을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물론 지사(志士)와 정치가가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다. 독립운동을 할 때의 혁명가와 정치인은 모두다 지사였고 또 지사라야 했지만, 정당운동의 단계에 들어간 오늘의 정치가에게 선비의 삼엄한 지조를 요구하는 것은 지나친 일인 줄은 안다.
그러나 오늘의 정치-정당운동을 통한 정치도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위한 정책을 통해서의 정상(政商,정치가와 경제활동하는 상인의 결합)인 이상, 백성을 버리고 백성이 지지하는 공동전선을 무너뜨리고 개인의 구복(口腹)과 명리를 위한 부동(浮動,떠다님)은 무지조로 규탄되어 마땅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현실과 이 난국을 수습할 지도자의 자격으로 대망하는 정치가는 권모술수(權謀術數)에 능한 직업정치인보다 지사적 품격의 정치 지도자를 더 대망하는 것이 국민전체의 충정인 것이 속일 수 없는 사실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염결(廉潔,청렴과 결백), 공정(公正), 청백(淸白), 강의(剛毅,굳고 의연함)한 지사정치만이 이 국운을 만회할 수 있다고 믿는 이상, 모든 정치 지도자에 대하여 지조의 깊이를 요청하고 변절의 악풍을 타매(唾罵,침뱉고 꾸짖음)하는 것은 백성의 눈물겨운 호소이기도 하다.
지조와 정조는 다같이 절개에 속한다. 지조는 정신적인 것이고, 정조는 육체적인 것이라고들 하지만, 알고 보면 지조의 변절도 육체생활의 이욕(利慾)에 매수된 것이요, 정조의 부정도 정신의 쾌락에 대한 방종에서 비롯된다. 오늘의 정치인의 무절제를 장사꾼의 이욕과 계교와 음부적 환락의 탐혹(眈惑)이 합쳐서 놀아난 것이라면 과연 극언(極言)이 될 것인가.
하기는 지조와 정조를 논한다는 것부터가 오늘에 와선 이미 시대착오의 잠꼬대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사람이 있을는지 모른다. 하긴 그렇다. 왜 그러냐 하면 지조와 정조를 지킨다는 것은 부자연한 일이요, 시세를 거역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과부나 홀아비가 개가(改嫁)하고 재취(再娶)하는 것은 생리적으로나 가정 생활로나 자연스러운 일이므로 아무도 그것을 막을 수 없고 또 그것을 막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 개가와 재취를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승인하면서도 어떤 과부(寡婦)나 환부(鰥夫,홀아비)가 사랑하는 옛짝을 위하여 또는 그 자녀를 위하여 개가나 속현(續絃,아내를 여읜 뒤 새 아내를 얻음)의 길을 버리고 일생을 마치는 그 절제에 대하여 찬탄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보통 사람이 능히 어려운 일을 했대서만이 아니라 자연으로서의 인간의 본능고(本能苦)를 이성과 의지로써 초극(超克)한 그 정신의 높이를 보기 때문이다.
정조와 고위성이 여기에 있다. 지조도 마찬가지이다. 자기의 사상과 신념과 양심과 주체는 일찌감치 집어던지고 시세에 따라 아무 권력이나 바꾸어 붙어서 구복의 걱정이나 덜고 명리의 세도에 참여하여 꺼떡거리는 것이 자연한 일이지 못나게 쪼를 뿌린다고 굶주리고 얻어 맞고 짓밟히는 것처럼 부자연한 일이 어디 있겠느냐고 하면, 얼핏 들어 우선 말은 되는 것 같다.
여름에 아이스케이크 장사를 하다가 가을 바람만 불면 단팥죽 장사로 간판을 남 먼저 바꾸는 것을 누가 욕하겠는가. 장사꾼, 기술자, 사무원의 생활 방도는 이 길이 오히려 정도이기도 하다. 오늘의 변절자도 자기를 이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자처한다면 별문제이다. 그러나 더러운 변절의 정당화를 위한 엄청난 공언을 늘어 놓는 것은 분반(噴飯,웃음이 터져 나옴)할 일이다. 백성들이 그렇게 사람 보는 눈이 먼 줄 알아서는 안 된다. 백주대로에 돌아앉아 볼기짝을 까고 대변을 보는 격이라면 점잖지 못한 표현이라 할 것인가.
지조를 지키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자기의 신념에 어긋날 때면 목숨을 걸고 항거하여 타협하지 않고, 부정과 불의한 권력 앞에는 최저의 생활, 최악의 곤욕을 무릅 쓸 각오가 없으면 섣불리 지조를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 정신의 자존자시(自尊自恃)를 위해서는 자학과도 같은 생활을 견디는 힘이 없이는 지조는 지켜 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조의 매운 향기를 지닌 분들은 심한 고집과 기벽(奇癖,기이한 성벽)까지도 지녔던 것이다.
신 단재(신채호) 선생은 망명 생활 중 추운 겨울에 세수를 하는데 꼿꼿이 앉아서 두 손으로 물을 움켜다 얼굴을 씻기 때문에 찬물이 모두 소매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고 한다. 어떤 제자가 그 까닭을 물으매, 내 동서남북 어느 곳에도 머리 숙일 곳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무서운 지조를 지킨 분의 한 분인 한용운 선생의 지조가 낳은 기벽의 일화도 마찬가지다.오늘 우리가 지도자와 정치인에게 바라는 지조는 이토록 삼엄한 것은 아니다. 다만 당신들 뒤에는 당신들을 주시하는 국민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자신의 위의와 정치적 생명을 위하여 좀더 어려운 것을 참고 견디라는 충고 정도이다. 한 때의 적막을 받을지언정 만고의 처량한 이름이 되지 말라는 <채근담(菜根譚)>의 구절을 보내고 싶은 심정이란 것이다. 끝까지 참고 견딜 힘도 없으면서 뜻있는 야당의 투사를 가장함으로써 권력의 미끼를 기다리다가 후딱 넘어가는 교지(狡智,교활한 슬기)를 버리라는 말이다. 욕인(辱人)으로 출세의 바탕을 삼고, 항거로써 최대의 아첨을 일삼는 본색을 탄로(綻露)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이러한 충언의 근원을 캐면 그 바닥에는 변절하지 말라, 지조의 힘을 기르라는 뜻이다.
변절이란 무엇인가? 절개를 바꾸는 것, 곧 자기가 심신으로 이미 신념하고 표방했던 자리에서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철이 들어서 세워 놓은 주체의 자세를 뒤집는 것은 모두 다 넓은 의미의 변절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욕하는 변절은 개과천선(改過遷善)의 변절이 아니고 좋고 바른 데에서 나쁜 방향으로 바꾸는 변절을 변절(變節)이라 한다.
일제 때 경찰에 관계하다가 독립운동으로 바꾼 이가 있거니와 그런 분을 변절이라고 욕하진 않았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하다가 친일파로 전향한 이는 변절자로 욕하였다. 권력에 붙어 벼슬하다가 야당이 된 이도 있다. 지조에 있어 완전히 깨끗하다고는 못하겠지만 이들에게도 변절자의 비난은 돌아가지 않는다.
나머지 하나 협의의 변절자로서 불신의 대상이 되는 변절자는 야당전선에서 이탈하여 권력에 몸을 파는 변절자이다. 우리는 이런 사람의 이름을 역력히 기억할 수 있다.자기 신념으로 일관한 사람은 변절자가 아니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의 치욕에 김상헌이 찢은 항서(降書)를 도로 주워 모은 주화파(主和派) 최명길은 당시 민족 정기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으나 심양의 감옥에 김상헌과 같이 갇히어 오해를 풀었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진 얘기이다. 최명길은 변절의 사(士)가 아니요, 다른 신념이 한층 강했던 이였음을 알 수 있다. 또 누가 박중양, 문명기 등 허다한 친일파를 변절자라고 욕했는가. 그 사람들은 변절의 비난을 받기 이전의 더러운 친일파로 타기(唾棄,침을 뱉음)되기는 했지만 변절자는 아니다.
민족 전체의 일을 위하여 몸소 치욕을 무릅쓴 업적이 있을 때는 변절자로 욕하지 않는다. 앞에 든 최명길도 그런 범주에 들거니와, 일제 말기 말살되는 국어의 명맥을 붙들고 살렸을 뿐 아니라, 국내에서 민족 해방의 날을 위한 유일한 준비가 되었던 <맞춤법 통일안>, <표준말모음>, <큰 사전>을 편찬한 조선어학회가 국민총력연맹 조선어학회지부의 간판을 붙인 것을 욕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런 하는 일도 없었다면 그 간판은 변절의 비난을 받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좌옹(佐翁), 고우(古愚), 육당, 춘원 등 잊을 수 없는 업적을 지닌 이들의 일제말의 대일 협력의 이름은 그 변신을 통한 아무런 성과도 없기 때문에 애석하나마 변절의 누명을 씻을 수 없었다. 그분들의 이름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그에 대한 실망이 컸던 것을 우리의 기억이 잘 알고 있다. 그 때문에 이분들은 반민특위에 불리었고, 거기서 그들의 허물을 벋겨주지 않았던가. 아무것도 못하고 누명만 쓸 바에는 무위(無爲)한 채로 민족정기의 사표가 됨만 같지 못한 것이다.변절자에게는 저마다 그럴 듯한 구실이 있다. 첫째 좀 크다는 사람들은 말하기를 백이숙제는 나도 될 수 있다. 나만 깨끗이 굶어 죽으면 민족은 어쩌느냐가 그것이다. 범의 굴에 들어가야 범을 잡는다는 투의 이론이요, 그 다음이 바깥에선 아무 일도 안 되니 들어가 싸운다는 것이요, 가장 하치가 에라 권력에 붙어 이권이나 얻고 가족이나 고생시키지 말아야겠다는 것이다. 굶어 죽기가 쉽다거나, 들어가 싸운 다거나, 바람이 났거나간에 그 구실을 뒷받침할 만한 일을 획책(劃策)도 못해 봤다면 그건 변절의 낙인밖에 얻을 것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일찍이 어떤 선비도 변절하여 권력에 영합해서 들어갔다가 더러운 물을 뒤집어 쓰지 않고 깨끗이 물러나온 예를 역사상에서 보지 못했다. 연산주의 황음(荒淫)에 어떤 고관의 부인이 궁중에 불리어 갈 때 온몸을 명주로 동여매고 들어 가면서, 만일 욕을 보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고 해 놓고, 밀실에 들어가서는 그 황홀한 장치와 향기에 취하여 제 손으로 그 명주를 풀고 눕더라는 야담이 있다. 어떤 강간도 나중에는 화간이 된다는 이치와 같지 않은가.
만근(輓近) 30년래에 우리 나라는 변절자가 많은 나라였다. 일제 말의 친일 전향, 해방 후 남로당의 탈당, 또 최근의 민주당의 탈당, 이것은 20년이 넘은, 사상적으로 철이 난 사람들의 주착 없는 변절임에 있어서는 완전히 동궤이다. 감당도 못할 일을 제 자신도 율(律)하지 못하는 주제에 무슨 민족이니 사회니 하고 나섰더라는 말인가. 지성인의 변절은 그것이 개과천선이든, 무엇이든 인간적으로는 일단 모욕을 자취(自取)하는 것임을 알 것이다.
우리가 지조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주고 싶은 말은 다음의 한 구절이다. 기녀라도 늘그막에 남편을 쫓으면 한 평생 분냄새가 거리낌이 없을 것이요, 정부(貞婦)라도 머리털 센 다음에 정조를 잃고 보면 반생의 깨끗한 고절(苦節)이 아랑곳 없으리라. 속담에 말하기를 사람을 보려면 다만 그 후반을 보라 하였으니 참으로 명언이다.
차돌에 바람이 들면 백 리를 날아간다(늦게 배운 잘못은 더 큰 잘못을 저지른다.)는 우리 속담이 있거니와, 늦바람이란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아직 지조를 깨뜨린 적이 없는 이는 만년을 더욱 힘 쓸 것이니, 사람이란 늙으면 더러워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아직 철이 안든 탓으로 바람이 났던 이들은 스스로의 후반을 위하여 번연(飜然, 깨달음이 갑작스러움)히 깨우치라. 한일합방 때 자결한 지사시인 황매천(黃梅泉)은 정탈(定奪)이 매운 분으로 매천필하무완인(梅泉筆下無完人)이란 평을 듣거니와 그 [매천야록]을 보면 민충정공, 이용익 두 분의 초년 행적을 헐떧은 곳이 있다. 오늘에 누가 민충정공, 이용익 선생을 욕하는 이 있겠는가. 우리는 그 분들의 초년을 모른다. 역사에 남은 것은 그분의 후반이요, 따라서 그분들의 생명은 마지막에 길이 남게 된 것이다.
도도히 밀려오는 망국의 탁류 - 이 금력과 권력, 사악 앞에 목숨으로써 방파제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은 지조의 함성을 높이 외치라. 그 지성 앞에는 사나운 물결도 물러서지 않고는 못배길 것이다. 천하의 대세가 바른 것을 향하여 다가오는 때에 변절이란 무슨 어처구니 없는 말인가. 이완용은 나라를 팔아먹었어도 자기를 위한 36년의 선견지명(?)은 가졌었다. 무너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권력에 뒤늦게 팔리는 형색은 딱하기 짝이 없다. 배고프고 욕된 것을 조금 더 참으라. 그보다 더한 욕이 변절 뒤에 기다리고 있다.
'소인기(小忍飢.배고픔을 조금 참다)하라.' 이 말에는 뼈아픈 고사가 있다.
광해군의 난정(亂政) 때 깨끗한 선비들은 나아가서 벼슬하지 않았다. 어떤 선비들이 모여 바둑과 청담으로 소일하는데, 그 집 주인은 적빈(赤貧)이 여세(如洗.씻은 듯하다)라, 그 부인이 남편의 친구들을 위하여 점심에 수제비국이라도 끓여 드리려 하니 땔나무가 없었다. 궤짝을 뜯어 도마 위에 놓고 식칼로 쪼개다가 잘못되어 젖을 찍고 말았다. 바둑 두던 선비들은 갑자기 안에서 나는 비명을 들었다. 주인이 들어갔다가 나와서 사실 얘기를 하고 초연히 하는 말이, 가난이 죄라고 탄식하였다. 그 탄식을 듣고 선비 하나가 일어서며, 가난이 원순 줄 이제 처음 알았느냐고 야유하고 간 뒤고 그 선비는 다시 그 집에 오지 않았다. 몇 해 뒤 그 주인은 첫뜻을 바꾸어 나아가 벼슬하다가 반정 때 몰리어 죽게 되었다. 수레에 실려서 형장(刑場)으로 가는데 길가 숲속에서 어떤 사람이 나와 수레를 잠시 멈추게 한 다음, 가지고 온 닭 한 마리와 술병을 내 놓고 같이 나누며 영결(永訣)하였다. 그때 그 친구의 말이, 자네가 새삼스레 가난을 탄식할 때 나는 자네가 마음이 변한 줄 이미 알고 발을 끊었다고 했다. 고기 밥맛에 끌리어 절개를 팔고 이쏠이 되었으니, 죽으면 고기맛을 못 잊어서 어쩌겠느냐는 야유가 숨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찾은 것은 우정이었다.
죄인은 수레에 다시 타고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탄식하였다.
'소인기, 소인기(小忍飢)하라.'고-
변절자에게도 양심이 있다. 야당에서 권력으로 팔린 뒤 거드럭거리다 이내 실세(失勢)한 사람도 있고, 지금 요추(要樞.중요한 요직)에 앉은 사람도 있으며, 갓 들어가서 애교를 떠는 축도 있다. 그들은 대개 성명서를 낸 바 있다. 표면으로 성명은 버젓하나 뜻 있는 사람을 대하는 그 얼굴에는 수치의 감정이 역연하다. 그것이 바로 양심(良心)이란 것이다.
구복과 명리를 위한 변절은 말없이 사라지는 것이 좋다. 자기 변명은 도리어 자기를 깎는 것이기 때문이다. 처녀가 아기를 낳아도 핑계는 있는 법이다. 그러나 나는 왜 아기를 배개 됐느냐 하는 그 이야기 자체가 창피하지 않는가.
양가(良家)의 부녀가 놀아나고, 학자.문인까지 지조를 헌신짝같이 아는 사람이 생기게 되었으니 변절하는 정치가들도 우리쯤이야 괜찮다고 자위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역시 지조는 어느 때나 선비의, 교양인의, 지도자의 생명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지조를 잃고 변절한다는 것은 스스로 그 자임(自任)하는 바를 포기하는 것이다. (全文)
민주주의를 생각한다
민주주의를 생각한다 | ||||||||||||||||||
염 무 웅 (영남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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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치의 표면으로서의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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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선거철이다. 텔레비전의 뉴스시간마다 대개 첫 소식은 대통령선거에 출마한 세 후보들의 일정과 그들의 공약으로 채워진다. 거의 매일 똑같은 방식으로 되풀이되다 보니, 차츰 ‘그 나물에 그 반찬’ 같아 식욕이 떨어지는 걸 느낀다. 정치에 대한 염증을 유발하기로 방송국들끼리 짠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다. 답답할 때마다 왜 우리가 몇 해마다 이런 국가적 행사를 치러야 하나, 이런 대규모적 소란을 통해 우리가 진정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고 결국 얻게 될 것은 무엇인가, 민주주의라는 정치과정이 실제 우리 삶을 개선하는 데 얼마나 구체적인 기여를 할 것인가 —이런 상념에 잠긴다.
평소에 나는 국어교육•역사교육•환경교육과 더불어 정치교육이 초•중등과정의 필수과목으로 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가령, 지난 9월 이 난에 썼던「대한민국 정체성의 뿌리」라는 글에서 우리나라 건국운동의 선배들이 1948년 정부수립 훨씬 이전부터, 그러니까 1919년 삼일운동과 1898년 만민공동회 때부터 민주공화국의 정신을 키우고 지켜왔다는 사실을 소개한 바 있는데, 그 사실에 함축된 정치적 의미를 국민들이 어려서부터 배우면서 자란다면 나라가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상상해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승만•박정희 시대의 이 나라 국가권력은 그렇게 하기는커녕 두 차례(1954, 1969)의 삼선개헌 강행이 보여주듯 특정인의 장기집권을 위해 민주주의를 만신창이로 짓밟았다. 그나마 삼선개헌은 헌법합치의 절차적 외양을 갖추기 위해 최소한의 시늉이라도 해본 것이었다. 하지만 1972년 10월 17일 유신쿠데타부터 1987년 10월 29일 직선제개헌안 공포까지 15년 동안에는 국민의 선거권은 사실상 박탈되고 삼권분립은 껍질만 남았으며 언론•집회•결사•신념의 자유 등 기본권은 심각한 제약을 받았다. 이것은 한마디로 민주주의라는 형식의 전면적 파괴였다.
정치의 이면에 있는 불법세계
하지만 형식의 파괴는 그 자체로서 심각한 사태라 해도 어떤 점에서는 정치의 표면을 이루는 사건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역사 내부를 들여다보면 표면의 사실들로 다 설명되지 않는 또 하나의 지배질서, 일종의 이면(裏面)질서라고 부를 만한 것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깨달을 수 있다. 경찰과 정보기관, 때로는 용역과 폭력배에 의한 미행•납치•협박•구타•체포•고문•암살 그리고 해직과 해고 등 공포영화에나 나옴직한 각종 불법적 수단들이 일상생활 깊숙이까지 침투하여 국민들의 의식과 무의식을 얼어붙게 했던 것이다. 그것들은 경우에 따라서는 끝내 역사기록의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랬기에 12년 독재정권이 무너지던 날 아침 시인은 그 감격을 이렇게 노래했다.
그러나 4•19혁명이 가져온 해방의 감격은 잠깐이고 기득권의 반격은 순식간에 대세를 뒤집기 시작했다. 만인의 일상은 다시 환멸과 망각의 시간 속으로 침몰하고 시인의 가슴은 이유 없이 메말라갔다. 이제 시인의 언어는 쓰디쓴 자기비하와 바닥 모를 공허감과 풍자의 신랄함으로 돌아간다.
물론 민주화 이후 상황은 크게 개선된 것이 사실이다. 이제 한국 시민들은 국가권력의 공공연한 위협과 언제 닥칠지 모를 폭력의 불안에서는 일단 벗어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을 ‘어떤 수준의’ 민주주의라고 불러야 할지는 여전히 쟁점으로 남아 있다. 왜냐하면 권력과 자본의 연합체로서의 기득권체제가 과거에 불법적이고 적나라한 폭력을 통해 얻었던 것을 이제는 부드럽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얻을 수 있게 된 것뿐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지배계급의 입장에서 폭력적 수단의 동원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된 진짜로 유리한 상황의 도래, 즉 피상적 변화에 불과한 상황을 우리가 민주화라는 수사로 분식해주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각각의 사회적•역사적 조건들 속에서 민주주의가 그때그때 참으로 무엇을 의미하고 어떻게 실질적으로 작동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논쟁문화의 가능성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 달에 내가 읽어본 책은 로널드 드워킨의 『민주주의는 가능한가』(홍한별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2)와 최장집의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폴리테이아 2012)이다. 두말할 것 없이 나는 정치학에 문외한이고, 따라서 이 책들을 학술적으로 검토할 만한 식견을 갖고 있지 못하다. 다만, 막연하게나마 ‘진정한 민주주의’가 실현되기를 열망하면서 이 나라 정치현실을 주시해왔다고는 말할 수 있다. 어쨌든 국어학자가 아니어도 언어사용자로서 국어문제에 관여할 수 있듯이, 사람살이의 필수영역인 정치와 경제에 대해서는 누구나 일정한 견해를 가지고 발언하는 것이 응분의 권리라고 생각한다. 물론 나의 내심에는 지금 진행 중인 대선의 판세를 옳게 읽고 바르게 대처하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민주주의는 가능한가』가 전하려는 메시지는 책 뒤에 붙은 <해제>에서 정치학자 박상훈씨가 명쾌하게 요약했듯이 “과도한 정치적 양극화의 조건에서는 공적 관심을 이끄는 논쟁이 있을 수 없고, 그런 논쟁이 없다면 민주주의가 그 가치를 실현할 수 없다”(p.217)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의 주제가 미국 민주주의의 현실과 가능성에 관한 것이므로, 먼저 미국에서 정치적 양극화의 양상이 어떤지 들어보자. 저자 드워킨은 책의 첫 페이지 첫 문단에서 다음과 같은 서술로 독자의 관심을 끌어당긴다.
그런데 드워킨은 민주당이 대표하는 ‘파란 문화’와 공화당이 상징하는 ‘붉은 문화’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있다는 데에 쉽게 동의하지 않는다. “만약에 두 문화 사이의 틈이 바닥 모를 정도로 깊다면, 공통기반도 찾을 수 없고 진정한 토론도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정말 그렇다면 정치다운 정치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할 텐데, 그것은 너무도 비극적인 일이다. 그래서 드워킨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이런 입장에서 드워킨은 정치적 의견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공적 논쟁이 얼마나 유익하게 작용하는지에 대해 답할 수 없는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말하며, 심지어 선거의 민주성은 투표 자체보다도 선거과정의 정치적 논쟁이 어떤 성격의 것이냐에 달린 문제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만인이 동의하고 공유함으로써 진정한 논쟁의 바탕이 될 수 있는 기본원리를 세우는 것은 미국 정치의 ‘쓰라린 분열’을 치유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그 자체의 건강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그가 제시하는 논쟁의 두 원칙을 요약하면, 첫째는 모든 인간의 동등한 존엄성에 입각하여 그가 어떤 사람이고 그에게 정치적 판단능력이 있는지의 여부와 관계없이 그를 동료시민으로서 인정해야 한다는 것, 둘째는 각각의 개인은 자신의 판단과 행동에 대해 자율적 책임을 갖는다는 것이다. 길게 설명할 여유가 없지만, 이것은 칸트가「계몽이란 무엇인가」에서 밝힌 유럽 휴머니즘의 정신과 사유를 드워킨이 진지하게 계승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국가의 정치도 철학 세미나처럼 운영될 수는 없다. 민주주의체제는 누가 이 체제를 이끌 것인가에 대한 최종평결을 경제, 철학, 외교정책, 환경과학 등에 대한 지식이 없고 이런 분야에 대해 자질을 갖출 시간도 능력도 모자란 수천만의 사람에게 맡겨야 한다.”(p.170)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란 것이다. 그러나 드워킨은 단순히 다수결주의만을 민주주의의 원칙으로 보는 데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왜냐하면 “다수결주의 개념에서 민주주의는 정치적 의견이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분포되어 있느냐의 문제일 뿐, 이 의견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와는 무관하기 때문이다.”(p.177)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 민주주의가 갖는 진정한 가치는 의견의 분포를 해석하는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견을 형성해가는 차원에 있다. 그리고 모든 정치적 투쟁은 서로 화해할 수 없는 가치들 간의 싸움이 아니라 보편적 도덕원리의 공통기반 위에서 누구의 주장이 더 합리적인가를 두고 이론적으로 경합하는 싸움, 즉 건강한 논쟁이 되어야 한다.
<해제>에서 박상훈씨가 드워킨의 미국정치 분석에서 끊임없이 한국정치의 문제점에 대한 교훈을 발견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실제로 정치적 양극화를 서술하는 드워킨의 문장은 몇 개의 필요한 수정만 가하면 그대로 한국정치에 대한 서술로 읽을 수 있다. 필요한 수정 중에서 결정적인 것은 미국과 한국 간의 국제적 위상의 차이에 관련된 것일 테고, 빠질 수 없는 것은 테러의 위협 대신 북핵 위협을 넣는 것일 게다. 물론 근본적인 것은 미국정치의 질적 개선을 위해 드워킨이 주장한 해결책 즉 수준 높은 논쟁문화가 우리의 경우 얼마나 착근 가능하겠는가 하는 점이다. 가끔 우리의 토론문화를 접할 때마다 나는 공익에 부합하는 건설적인 논쟁과 사익의 추구를 내장한 표면상의 논쟁을 구별하는 것이 실로 쉽지 않으리라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번 미국 대선에서 오바마와 롬니가 벌인 세 차례 토론에 대한 보도를 보면서도 나는 토론내용의 빈곤에도 불구하고 토론방식의 가차없음에 상당히 놀랐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후보들 간에 그만큼 노골적이고 치열한 논쟁이 가능할지 의문이다. 미국의 정치문화를 뒤쫓기 바쁜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의 앞길은 요원하다는 걸 새삼 절감한다.
‘얼굴 없는 노동’ ‘노동 없는 민주주의’
몇 해전 최장집 교수의 유명한『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후마니타스 2002 초판, 2005 개정판)를 뒤늦게 읽고 전반적으로 깊이 공감하면서도 부분적으로 동의하기 어려운 대목이 있음을 느꼈는데, 이번에 나온『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이하『상처들』로 약칭)에서도 마찬가지로 큰 감동과 작은 불만을 아울러 느꼈다. 그런데 전자는 대중독자를 염두에 두면서도 한국 민주주의의 문제를 역사적•이론적으로 논술한 저서임에 비해 후자는 민주주의가 실현되고 있는 — 정확히 말하면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 삶의 현장으로 직접 찾아가 그 자리에서 우러난 저자의 실감을 담고 있어, 전자가 한 권의 완결된 이론서라면 후자는 전자의 문학적 별책부록 같기도 하다. 그만큼 후자의 감동은 내 경우에는 주로 문학적인 것이었다.
이 책의 3분의 2쯤 되는 앞부분은 저자의 현장답사 내지 현지조사 기록이다. 현장답사라곤 하지만, 르포나 다큐처럼 사실의 구체적인 묘사가 많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안내자의 사전준비가 충실해서인지 아니면 저자의 평소 문제의식이 현장의 실상과 맞아떨어져서인지, 독자인 나에게는 사회적 약자들의 삶의 핵심에 다가서는 저자의 감성적 충정과 이론적 날카로움이 화살처럼 전해져왔다. 170쪽 미만의 작은 분량임에도 이 저서가 오늘 우리 사회의 그늘진 구석을 대형화면으로 펼쳐 보이는 듯한 중량감을 주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책을 쓰는 동안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깊이를 알 수 없는 상념에 빠지는 일도 많았다. 인간존재의 비극적 운명에 무너지지 않고 싸울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를 많이 생각해본 시간이었다.”(p.10)는 <서문>의 언급도 큰 울림을 주었다.
『상처들』에서 저자는 여러 형태의 사회경제적 소외지대를 찾아간다. ① 일용직 건설노동자들의 인력시장이 열리는 성남시 수진리 고개 인근에서 그는 “전국적으로 약 57만 명에 이르는 이들의 삶의 조건과 생활현실뿐만 아니라 한국 민주주의의 감춰진 뒷모습을 적나라하게” 본다고 말한다.(p.18) 그리고 “노동 없는 민주주의 혹은 실재하는 사회경제적 문제들을 다루지 못했던 한국 정당체제의 무기력함이 가져온 결과”(p.21)가 바로 오늘의 ‘안철수 현상’이라고 지적한다.
② 현대차노조 비정규직 지회 사무실을 방문하고 나서 적은 다음과 같은 문장이야말로 사회학적 문학작품으로서의『상처들』의 백미라 할 만하다.
그러나 조금 욕심을 내서 말한다면 저자가 성남이나 울산으로 떠나기 전에 먼저 박태순의『정든 땅 언덕 위』(민음사 1973), 황석영의『객지』(창작과비평사 1974), 윤흥길의『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문학과지성사 1977),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문학과지성사 1978) 같은 소설집을 다시 꺼내 읽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 소설들은 1970년대 한국 민중문학의 ‘위대한 성취’라 해도 과언이 아닐 텐데, 거기에는 정치학자 최장집의 2010년대적 시선에 포착된 현실의 원형이 이미 40년 가까이 전에 풍성하게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③ 허름한 건물에 2천여 개의 작은 봉제공장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는 장위동, 서울에서만 대략 25만 내지 50만 노동자들이 일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산업현장에서 저자는 “적지 않은 고용을 흡수하고 도시 서민가구의 소득에 크게 기여하고 있음에도, 이 부문의 기업주-노동자들은 정부의 공식통계에도 잡히지 않는, 세금도 없고 보험도 없이 공적 제도 밖에 존재하는 얼굴 없는 사회경제적 집단”(p.38)을 확인한다. 그리고 그는 강한 어조로 말한다.
④ 재벌 대기업 2세•3세들의 빵집•커피숍•분식점이 골목상권을 분쇄하고 대형마트가 재래시장을 초토화시키는 현실은 언론에 자주 보도되기도 했지만,『상처들』도 주목하는 우리 시대 사회경제적 상처의 하나다. 이 대목에서 나는 일본의 경우 이미 1930년대부터 소매상 보호법이 시행되었다는 걸 알고 놀랐고, 대기업•중산층•노동자의 공생을 제도화하는 원리가 자민당 같은 보수정당의 주도로 실현되었다는 걸 알고는 더욱 놀랐다. 그러니 다음과 같은 저자의 탄식에 어찌 공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민주주의의 내용적 전진을 위하여
위의 몇 가지 사례에서 제시된 바와 같이 최장집 교수의『상처들』이 목표하는 것은 단순히 사회경제적 소외지역의 삶을 현상적으로 묘사하거나 그 참상을 고발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정치학자답게 모든 현장에서 사회적 소외의 정치학적 진단을 시도하며 그 궁극적 해결책도 정치에서 찾는다. 가령, 그는 현장방문을 마친 다음의 결론적인 문장에서 단순하다면 단순하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언명의 정당성과 중요성을 공공연히 부인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여당 대통령후보조차 한때 ‘경제민주화’를 소리 높여 외쳤던 사실이 그것을 입증한다. 그러나 나는 어느 지점에서부터인지 최장집 교수의 견해에 일정 부분 동조하기 어려워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간단히 한두 가지 이견만 제시하겠다.
가장 중요한 것은 김대중-노무현 정부에 대한 평가에서 그렇다. 최장집 교수는『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개정판)에서 이미 ‘민주개혁정부’를 ‘신자유주의적 민주주의로의 후퇴’라는 측면에서 비판한 바 있다. 이번『상처들』에서도 그의 비판적 어조는 도처에서 반복되는데, 예컨대 “권위주의적 관치경제 시기로부터 민주화 이후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시대인 현재에 이르기까지, 경제영역에서만큼 정책의 연속성이 유지되는 분야는 없을 것이다”(p.120)는 지적이 그렇다. 이 점에 관해 김기원 교수가 이미 재비판을 한 바 있는데,(「김대중-노무현 정권은 시장만능주의인가」, 최태욱 엮음,『신자유주의 대안론』창비 2009 수록) 내 생각에도 최장집 교수의 경우 ‘민주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비판이 경제 바깥의 영역에 대한 전반적 비판으로까지 과도하게 확대된 느낌이 있고, 경제영역 자체에서만 하더라도 남한의 ‘혁명정부’ 아닌 ‘민주정부’가 객관적 조건에 있어 정책선택의 자유공간을 얼마나 확보할 수 있었는지도 고려해볼 사항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정부가 IMF위기를 ‘한국적 복지국가의 모델로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p.129)로, 즉 민주주의의 내용적 전진의 기회로 활용하지 못했다는 지적은 여전히 뼈아픈 것이다.
최장집 교수가 민주정부의 신자유주의적 후퇴와 연관하여 강하게 비판한 다른 한 가지는 한국 정치와 정당들이 생활하는 민중의 구체적 현실로부터 괴리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사회경제적 약자들이 정치적으로 대표되지 못하고 있고, 그럼으로써 정치 자체가 왜곡되고 공허해지는 현실을 개탄한다. 그런데 내 생각에 문제는 그가 주로 지식엘리트의 관념성에서 그 귀책사유를 찾는다는 점이다. 그가 보기에 한국에서 학생운동의 역사적 역할은 이미 오래전에 끝났어야 했다. 왜냐하면 “실제현실의 삶과 유리된 조건 아래 의식화되면서 갖게 된 (운동권 학생들의) 과잉 이념화된 사고방식과 도덕적 우월의식은 그것이 지속되는 시간에 비례해 부정적 효과를 더 크게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p.22) 한국 진보정당들의 몰락의 원인도 그는 정당을 끌고나가는 상층부의 진보이념과 정당이 발딛고 있어야 할 실제현실의 유리에서 찾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정책이슈와 대안들이 이념적 거대담론으로부터 직접 도출되지 않아야 한다”(p.109)고 말한다. 이것은 내게도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있는 주장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실제현실의 구체적 생활인도 이념화된 지식인도 그 자체로서는 아직 자기 집단의 정치적 대표자가 아니다. 물론 나는 농민과 노동자도 청년실업자와 신용불량자도 정책형성에 참여하고 정당활동에 접맥될 수 있도록 정당의 체계가 달라져야 한다는 데 전적으로 찬성한다. 그러나 ‘참여’와 ‘접맥’의 과정은 불가피하게 이념화의 요소를 동반하게 마련이다. 물론 그 어느 단계에서나 과잉이념은 극복되어야 하지만, 과거나 현재나 학생운동•청년운동의 열정과 헌신이 없다면 정치적 대표가 성장할 수 있는 중요한 토양도 더불어 소실되는 것이며, 따라서 현실에 밀착된 이념의 획득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선학(先學)들이 말했듯이 이론차원과 실천차원의 끊임없는 교류와 상호교섭을 통해서만 민주주의는 더 충실한 내용의 것으로 발전해가지 않겠는가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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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1월 26일 월요일
대만의 지혜도서관
*대만의 '지혜도서관'智慧圖書館(Intelligent Library)은 RFID를 이용한 무인도서관을 말한다.
*이는 타이베이(台北) 시의 재정난, 도서관 인력 확보의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구상된 것, 도서관을 새로 건축하는 것이 아니라, 설치에 민간의 힘을 빌리면서, 무인화함으로써 인원 부족을 극복하고자 한 것.
*2005년 7월 카르푸에 105.78제곱미터(32평)의 공간을 10년간 무상 사용 조건으로 시작. 2011년에는 松山機場(松山空港)智慧圖書館이 개관.
자료:
*이는 타이베이(台北) 시의 재정난, 도서관 인력 확보의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구상된 것, 도서관을 새로 건축하는 것이 아니라, 설치에 민간의 힘을 빌리면서, 무인화함으로써 인원 부족을 극복하고자 한 것.
*2005년 7월 카르푸에 105.78제곱미터(32평)의 공간을 10년간 무상 사용 조건으로 시작. 2011년에는 松山機場(松山空港)智慧圖書館이 개관.
자료:
Ref : http://www.tpml.edu.tw/ct.asp?xItem=1139536&CtNode=33629&mp=104021
http://japanese.tpml.edu.tw/ct.asp?xItem=204993&CtNode=28299&mp=104023
HTTP : / / www.tphcc.gov.tw/library/lib_serv01.asp?id=355
http://www.ksml.edu.tw/informactions/MSLweb_ksml/w01.aspx
http://news.chinatimes.com/domestic/
11050615/112012101000231.html http://www.youtube.com/watch?v=KdrT3ERg7Go http://www.youtube.com/watch?v=4LF4_9Krcco http://www.youtube.com/watch?v=aTJ8A64emto http://www.youtube.com/watch?v=79hALi7Tpek http://www.youtube.com/watch?v=evi34pGs9ys http://www.youtube.com/watch?v=PO_FGtoRdNQ
‘독서 문화 활성화’ 대선 공약이 있다면
[박병두의시선]‘독서 문화 활성화’ 대선 공약이 있다면
지식 사회 기본 인프라 구축 관련 대선 후보 어느 누구도 언급 없어 지식 문화 산업 간과해서는 안된다
흔히 가을을 ‘독서의 계절’이라고 일컫는다. 가을 하면 우리는 고즈넉한 분위기를 벗 삼아 한 권의 책을 읽는 모습을 떠올리는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사람들이 책을 가장 안 읽는 계절이 바로 가을이다. 그래서 일설에 의하면, 출판계에서 불황기를 극복하고자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다’라는 말을 만들어 냈다고 한다. 가을에는 햇살이 청명하며 기온이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으니 외출하기에 제격이고, 단풍 구경과 야외 나들이 등 책 말고도 여가를 즐길 만한 것들이 많기 때문이리라.
국내 성인의 독서율은 최근 7년 새 60%대까지 떨어졌다. 10명 중 4명은 일 년에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이처럼 갈수록 독서 문화가 쇠퇴하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지식인들이 위기감을 느끼고 나섰다. 바로 ‘책읽는 나라 만들기 국민연대’(임시대표 김민웅 성공회대 교수)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11월 7일 ‘책읽는 나라 만들기 국민연대’ 김민웅 대표는 다음과 같이 설립 취지를 발표했다.
“21세기 한국의 미래는 독서 인구의 성장과 성숙에 달렸습니다. 독서로 함양된 새로운 발상과 성찰 능력을 가진 국민만이 민주주의 발전과 창발성 있는 문화의 주체가 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현재 출판계를 비롯해서 도서관과 학교, 서적 유통과 저술가들의 열악한 형편으로 보건대 한국 지식사회는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지식사회의 기본 인프라 구축에 대한 실질적인 정책 수립이 절실합니다. 그런데도 이번 대선 과정에서 어느 후보도 이에 대해 제대로 얘기하는 이가 없어요. 참담한 심정입니다.”
이번 대선 공약은 경제와 사회복지와 관련된 것들이 주를 이루고 문화 관련 공약은 상대적으로 빈약한 듯싶다. 그래서 ‘책읽는 나라 만들기 국민연대회의’(연대회의)의 결성을 공표하고 대선 후보들에게 “책 읽는 나라 만들기를 위한 공약을 제시하라”고 촉구했다. 그리고 11월 13일 대선 후보들을 초청해 포럼을 열기로 했다.
우리나라에는 이미 여러 독서 문화 관련 단체들이 있어 왔지만 이번 ‘책읽는 나라 만들기 국민연대’는 출판·문화·지식계의 첫 융합기구이다. ‘책보다는 밥이 우선’이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필자 역시 문화계 인사 중 한 사람이기 때문에, 문화의 힘이 얼마나 큰지 몸소 느껴오고 있다. 최근 대선 후보들이 민생 우선을 앞세우고 있지만 인간 존엄성과 사회적 품격이 중심에 놓일 때 비로소 모든 정책의 가치기준이 명확해지고 민생도 제대로 된다. 책을 읽는 공동체의 형성이 그 근본동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때 쇠퇴하던 영국이 재기할 수 있었던 것도 출판산업 덕이었다. <해리 포터>와 <반지의 제왕>으로 영국은 재건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책 읽는 나라 만들기 국민연대’에는 도정일 책읽는 사회만들기 국민운동 상임대표, 김언호 파주북소리2012 집행위원장,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 윤형두 대한출판문화협회 회장, 고영은 한국출판인회의 회장, 남태우 한국도서관협회 회장, 이시영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등 출판·문화계 33개 단체 대표와 관계자들이 참여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자원이 빈약하기 때문에 지적 자산으로 승부해야 할 필요가 있다. 최근 우리 대중문화 산업이 한류 열풍으로 크나큰 부가가치를 창출해 내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지식 문화 산업은 간과할 수 없는 분야이다. 따라서 대선 후보들이 21세기 대한민국의 국가모델을 만들어가는 지식사회 기반 구축에도 관심을 기울이면 어떨까 싶다.
독일의 작가 프란츠 카프카는 ‘책은 내 마음속의 언 바다를 깨는 도끼와도 같다’고 말했다. 그만큼 책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자양분이라는 것이다. 좋은 책은 나뿐만 아니라 다른 이의 삶까지 소중하게 여기게 한다.
문화 산업을 육성하는 데에 대선 후보들에만 전적으로 기대지 말고 우리 시민들도 책과 좀 더 가까이 지내길 바란다. 그래야 건강한 정서를 기르게 되고, 더불어 키우는 사회를 만들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지식 사회 기본 인프라 구축 관련 대선 후보 어느 누구도 언급 없어 지식 문화 산업 간과해서는 안된다
흔히 가을을 ‘독서의 계절’이라고 일컫는다. 가을 하면 우리는 고즈넉한 분위기를 벗 삼아 한 권의 책을 읽는 모습을 떠올리는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사람들이 책을 가장 안 읽는 계절이 바로 가을이다. 그래서 일설에 의하면, 출판계에서 불황기를 극복하고자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다’라는 말을 만들어 냈다고 한다. 가을에는 햇살이 청명하며 기온이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으니 외출하기에 제격이고, 단풍 구경과 야외 나들이 등 책 말고도 여가를 즐길 만한 것들이 많기 때문이리라.
국내 성인의 독서율은 최근 7년 새 60%대까지 떨어졌다. 10명 중 4명은 일 년에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이처럼 갈수록 독서 문화가 쇠퇴하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지식인들이 위기감을 느끼고 나섰다. 바로 ‘책읽는 나라 만들기 국민연대’(임시대표 김민웅 성공회대 교수)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11월 7일 ‘책읽는 나라 만들기 국민연대’ 김민웅 대표는 다음과 같이 설립 취지를 발표했다.
“21세기 한국의 미래는 독서 인구의 성장과 성숙에 달렸습니다. 독서로 함양된 새로운 발상과 성찰 능력을 가진 국민만이 민주주의 발전과 창발성 있는 문화의 주체가 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현재 출판계를 비롯해서 도서관과 학교, 서적 유통과 저술가들의 열악한 형편으로 보건대 한국 지식사회는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지식사회의 기본 인프라 구축에 대한 실질적인 정책 수립이 절실합니다. 그런데도 이번 대선 과정에서 어느 후보도 이에 대해 제대로 얘기하는 이가 없어요. 참담한 심정입니다.”
이번 대선 공약은 경제와 사회복지와 관련된 것들이 주를 이루고 문화 관련 공약은 상대적으로 빈약한 듯싶다. 그래서 ‘책읽는 나라 만들기 국민연대회의’(연대회의)의 결성을 공표하고 대선 후보들에게 “책 읽는 나라 만들기를 위한 공약을 제시하라”고 촉구했다. 그리고 11월 13일 대선 후보들을 초청해 포럼을 열기로 했다.
우리나라에는 이미 여러 독서 문화 관련 단체들이 있어 왔지만 이번 ‘책읽는 나라 만들기 국민연대’는 출판·문화·지식계의 첫 융합기구이다. ‘책보다는 밥이 우선’이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필자 역시 문화계 인사 중 한 사람이기 때문에, 문화의 힘이 얼마나 큰지 몸소 느껴오고 있다. 최근 대선 후보들이 민생 우선을 앞세우고 있지만 인간 존엄성과 사회적 품격이 중심에 놓일 때 비로소 모든 정책의 가치기준이 명확해지고 민생도 제대로 된다. 책을 읽는 공동체의 형성이 그 근본동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때 쇠퇴하던 영국이 재기할 수 있었던 것도 출판산업 덕이었다. <해리 포터>와 <반지의 제왕>으로 영국은 재건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책 읽는 나라 만들기 국민연대’에는 도정일 책읽는 사회만들기 국민운동 상임대표, 김언호 파주북소리2012 집행위원장,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 윤형두 대한출판문화협회 회장, 고영은 한국출판인회의 회장, 남태우 한국도서관협회 회장, 이시영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등 출판·문화계 33개 단체 대표와 관계자들이 참여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자원이 빈약하기 때문에 지적 자산으로 승부해야 할 필요가 있다. 최근 우리 대중문화 산업이 한류 열풍으로 크나큰 부가가치를 창출해 내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지식 문화 산업은 간과할 수 없는 분야이다. 따라서 대선 후보들이 21세기 대한민국의 국가모델을 만들어가는 지식사회 기반 구축에도 관심을 기울이면 어떨까 싶다.
독일의 작가 프란츠 카프카는 ‘책은 내 마음속의 언 바다를 깨는 도끼와도 같다’고 말했다. 그만큼 책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자양분이라는 것이다. 좋은 책은 나뿐만 아니라 다른 이의 삶까지 소중하게 여기게 한다.
문화 산업을 육성하는 데에 대선 후보들에만 전적으로 기대지 말고 우리 시민들도 책과 좀 더 가까이 지내길 바란다. 그래야 건강한 정서를 기르게 되고, 더불어 키우는 사회를 만들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독서·토론·투표... 청소년들이 직접 문학상 뽑았다
독서·토론·투표... 청소년들이 직접 문학상 뽑았다
삼정중 1학년 학생들, 청소년문학상의 심사위원이 되다
[아시아경제 이상미 기자]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문학상들은 어른들, 유명작가나 평론가가 심사한다. '아동청소년 문학상만큼은 아이들 손으로 직접 뽑아보면 어떨까?' 하는 상상이 드디어 현실이 됐다.지난 22일 서울 강서구 방화동에 위치한 삼정중학교 대강당에서는 국내 최초로 청소년이 직접 선정하는 문학상 시상식이 열렸다. 100여 명의 학생들이 8권의 후보 작품을 모두 읽어보고 서평 작성, 토론과 투표를 거쳐 선택한 작품은 한윤섭 작가의 '해리엇'. 이날 시상식에 참석한 한윤섭 작가는 "평론가들의 잣대로 평가하는 게 아니라 독자인 아이들이 후보작들을 모두 읽고 선택해줘 수상이 더욱 뜻깊다"며 소감을 밝혔다.
지난 22일 서울 강서구 방화동 삼정중학교 강당에서는 1학년 전교생에 모여 지난 한 학기동안 심사한 청소년문학상 시상식을 열었다. 시상식에 이어 홍대인디남성힙합트리오 '세남자'의 축하공연이 진행됐다. |
한 학기라는 긴 시간동안 삼정중 1학년 전교생을 대상으로 진행된 이번 프로젝트는 연희문학창작촌과 문화기획집단 '재미로'의 제안으로부터 시작됐다. 기획을 맡은 양연식 씨는 "늘 수동적으로 책을 추천받아 읽어야 하는 청소년들에게 청소년문학상 심사위원 자격을 주면 어떨까 싶었다"며 "직접 책을 읽고 토론하고 작가를 만나는 과정 등을 거쳐 마음에 가장 와 닿는 작품을 선정하는 이색적인 문학상이 탄생했다"고 밝혔다.
학생들은 후보도서 선정 과정에서부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삼정중학교의 이민수 국어교사를 중심으로 유은실, 박채란 작가가 '문학나눔 2011년도 분기별 우수 문학도서' 중 아동ㆍ청소년부문 74권에서 4권을 확정했고, 8권의 후보도서 중 남은 4권은 14명의 진행위원들이 읽고 선정했다.
2학기가 시작되자 1학년 전체 153명 학생이 약 두 달간 후보 도서 8권을 일주일에 한 권씩 읽고, 서평을 작성해 공유했다. 이민수 교사는 "국어시간 중 일주일에 한 시간씩 독서교육차원에서 이 프로젝트를 진행했다"며 "서평작성하기, 작가에게 편지쓰기, 토론 등 다양하게 이루어진 독후활동은 수행평가에 반영됐다"고 밝혔다.
삼정중 1학년 학생들은 직접 청소년문학상의 심사위원이 되어 약 3개월간 8권의 후보도서를 모두 읽고, 서평작성 및 토론, 투표를 거쳐 수상작을 선정했다. |
이 교사는 "8권의 후보도서를 모두 읽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아이들이 자신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책을 읽을 때 힘들어하기도 했다"며 "그래도 이번 기회에 책 편식을 하던 아이들이 다양한 분야의 책을 자연스럽게 접하게 됐다"고 말했다.
10월에는 학생들이 직접 후보도서의 작가 중 3명을 초대해 '작가와의 대화'시간을 가졌고, 이후 최고의 작가 선출을 위한 반별 모둠 토론을 진행했다. 학생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중심으로 모둠을 만들어 자기 모둠의 책이 청소년 문학상을 받아야 함을 주장하는 토론을 벌였다.
이 교사는 "마지막으로 8권의 후보도서를 모두 읽고, 서평을 올린 학생 총 104명을 대상으로 투표를 실시해 29표를 얻은 한윤섭 작가를 선택했다"며 "전교생 153명 중에서 3분의 2가 넘는 학생이 힘든 과정을 완주해 뿌듯하다"고 말했다. 이 교사는 "이번 기회를 통해서 아이들은 단순히 책을 읽고 서평을 작성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토론, 투표과정을 거쳐 스스로 책을 평가하고 고르는 눈을 얻게 됐다"며 "앞으로도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책을 선택하고, 읽어나갈 수 있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이날 시상식의 사회를 맡았던 이윤재 학생은 "대학 갈 때 도움이 된다는 부모님의 말씀을 듣고 의무적으로 책을 많이 읽으려고 할 때는 깊이 읽지 못했다"며 "그러나 이번에는 심사위원이 된다는 책임감에 한 권 한 권 자세하게 들여다보고 깊이 생각하며 읽었는데 독서가 훨씬 재밌어졌다"고 말했다.
이상미 기자 ysm1250@
강정에 ‘희망의 기지’ 도서관을 짓자
강정에 ‘희망의 기지’ 도서관을 짓자
신용목 시인이 강정마을에서 띄운 글
“내가 책 한 권을 냄으로 해서 지구 한켠의 숲 하나가 사라진다.”풀뿌리 독서모임 6-대구 독서문화 버팀목 두 단체, 대구독서포럼과 지구인
"디지털 시대라 더 소중한 독서의 힘"…대구 독서문화 버팀목 두 단체
젊은 세대가 급속도로 책과 멀어지고 있다. 스마트폰 안에 세상 모든 것이 들어있는 듯 이를 하루 종일 붙들고 있다. 재미있는 게임, 자극적이고 충동적인 영상에 반응하는 속도는 빠르다. 뇌는 자연스레 생각과 기억을 거부하게 된다.
젊은 세대가 급속도로 책과 멀어지고 있다. 스마트폰 안에 세상 모든 것이 들어있는 듯 이를 하루 종일 붙들고 있다. 재미있는 게임, 자극적이고 충동적인 영상에 반응하는 속도는 빠르다. 뇌는 자연스레 생각과 기억을 거부하게 된다.
이런 시대 흐름을 거스르려는 '구닥다리'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아날로그 세대는 여전히 책을 사랑하고, 디지털 세대를 향해 책을 가까이 할 것을 주문한다. (사)대구독서포럼을 이끌고 있는 조동택 경북대 의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요즘 대중교통 수단이나 고속버스, KTX 등을 타면 책을 들고있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며 "젊은 세대에게 어떻게 책 사랑과 독서 문화를 전파할 지 고민"이라고 말했다.
대구 독서 문화 확산의 최첨병 역할을 하고있는 모범적인 두 단체를 찾아봤다. 이들 두 단체는 독서의 힘을 삶을 통해 보여주고 있었으며, 젊은 세대에게 독서 문화 확산이라는 메세지를 깊이 있게 던지고 있었다. 출근 전 아침 일찍, 퇴근 후 저녁 일찍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 있는 두 단체를 소개한다.
◆유명저자 초청, (사)대구독서포럼
올해 '잘가요 엄마'를 출간한 소설가 김주영이 이달 5일 (사)대구독서포럼이 주최하는 저자 특강에 모습을 드러냈다. 김 소설가는 1시간 30분 동안 자신의 책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함께 포럼 회원들과의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그는 "책을 사랑하는 포럼 몇몇 회원들 간의 각별한 인연도 있어 기꺼이 먼 길을 달려왔다"고 말했다. 다음 달에는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의 저자인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소장이 저자 특강을 한다.
(사)대구독서포럼은 깊이 있는 독서와 사색을 목표로 2005년 시작됐다. 처음엔 대구경영자독서모임으로 출발했으며, 지난해 7월부터 경영자에 국한된 이미지를 탈피하고자 명칭을 대구독서포럼으로 바꾸고 사단법인으로 등록했다.
이 포럼의 회원들은 기업인을 비롯해 의사, 교수, 공무원, 변호사, 회계사 등 전문직 종사자들이 많으며, 일반 회사원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이들도 가입돼 있다. 특히 이 포럼은 '부부가 함께 참여하는 모임'을 자주 가져, 가정 화목에도 도움을 주고 있다.
이 모임 회원인 이순동 판사는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많은 모임이 있지만 이 독서모임 만큼 유익한 모임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라며 "매월 2권의 책을 골라 저자로부터 직접 강의를 들을 수 있어 더욱 좋다"고 말했다.
이 포럼의 창립멤버인 전진문 운영위원장(경일약품 이사)은 "이 포럼이 독서의 동반자로서 정신적 영양 공급원이 되고, 좋은 커뮤니티로 발전해 가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2009년 5월 100권 독파 기념식을 가졌으며, 내년 초 200권 독파를 앞두고 있다. 2010년에는 소설가 이문열과의 '저자와의 만남'도 가졌다. 053)761-4828.
◆출근 전 독서모임, 지구인 독서토론회
오전 7시∼8시 30분. 회사 사무실로 출근하기 전에 독서로 아침을 깨우는 모임이 있다. 매월 둘째, 넷째 목요일 아침이면 책을 사랑하는 이들이 모임 장소인 강의실을 채운다. 김밥`샌드위치 등 간단한 아침이 제공된다. 대개의 회사원들이라면 이런 독서를 위한 만남이 귀찮겠지만 이 모임의 회원들은 정반대다. 독서모임이 있는 주간에는 수요일 저녁에 일찍 귀가하며, 다른 회원들이 어떤 책을 어떻게 읽었는지에 대해 귀를 쫑끗 세운다.
산학연구원과 지역경제연구회가 주관하는 이 아침 독서모임은 지구인(智求人, 지혜`지식을 구하는 인간) 독서토론회다. 2009년 10월 부터 매월 둘째, 넷째주 목요일이면 모여서 건전한 독서 문화를 이끄는데 앞장서고 있다. 회비는 매번 모임 때 1만원씩 거둬 간단한 아침 식사 비용으로 처리하고, 남으면 다음 번엔 거두지 않는다.
이 모임을 태동시킨 제1대 지구인 회장 김지욱(대구흥사단 사무처장) 산학연구원 대외협력센터 소장은 "아침 독서모임인 만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데 어려움이 많았지만 회원들의 지속적인 참여로 자리를 잡았다"고 평가했다. 제2대 회장은 문종상 한국섬유개발원 경영본부장이 이어 받았으며, 현 제3대 회장은 황병우 대구은행 컨설팅센터장이 맡고 있다.
회원은 40여 명이며 모임 때마다 20여 명이 참석해 각자 순서를 정해서 2, 3주 전 발표되는 지정된 책을 읽고, 직접 요약해 프리젠테이션 형태로 발표한다. 이런 방식 때문에 혹시 책을 읽지 않고 참석한 회원들도 발표자의 정리된 요약을 듣고, 질의응답을 할 수 있다. 지구인 독서토론회는 '리더십과 자기기만'을 시작으로 3년여 동안 73회째 독서모임을 지속하고 있다. 053)959-2861.
권성훈기자 cdro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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