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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 사회학과 교수 마이클 슈월비가 ‘카운터펀치(Counterpunch)’ 주말판(2015년 6월 5~7일자)에 기고한 글을 우동현 선생이 필자의 동의를 얻어 번역해 기고하는 글이다. 대학 교육에서 좌파 교수들과 참여 지식인들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공세가 커지고 있고 사회참여 활동 자체도 억압되고 있다는 내용이다. 한국의 현실과 다르지 않는 모습이다. 글의 원문 출처 링크<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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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28년 전 러셀 자코비(Russell Jacoby)는 『마지막 지식인』(The Last Intellectuals)에서 2차 대전 이후 급속히 팽창한 미국의 고등교육이 자유롭고 지적인 말썽꾼보다는 교수가 되길 선택한 급진주의자들을 흡수했다고 주장하였다.
자코비에 따르면, 좌파 성향을 가졌던 많은 수의 교수들은 학계에서의 제약과 보상을 통해 효과적으로 탈정치화됐다. 그들은 당근과 채찍에 길들여져 교육받은 대중을 위한 일상어 대신, 한줌의 학자들을 위한 특수어로 글을 썼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대개 학계에서의 경력을 쌓는 데 정치력을 경주(傾注)하였다.
자코비는 괜찮은 삶을 좀처럼 살 수 없는 반체제적 사유가에게 대학이 안식처를 제공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는 또한 출세주의가 급진적인 저작을 출간하거나 또는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적으로 보라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과 그렇게 상충되지 않았다고도 지적한다.
문제는 오늘날 학계에서 경력을 쌓기 위한 이런저런 요구사항들로 인해 이전 세대의 참여적 지식인만큼의 성과를 내기가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자코비를 부연하자면, 따라서 우리는 수천의 좌파 사회학자들 가운데 라이트 밀즈(C. Wright Mills)는 없는 그런 현실에 부닥치게 되었다.
자코비의 책이 출간된 이래 상황은 무척이나 악화됐다. 여전히 미국의 대학에는 좌파 성향의 교수들이 꽤 존재한다. 그러나 고등교육의 고용부문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오늘날 진행 중인 강력한 보수화 추세는 수십 년 안에 미국사회에서 좌파세력으로서의 교수를 멸종시킬 것이다.
한 가지 중요한 변화는, 자코비가 관측한 학계에서의 일자리 팽창이 오늘날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1960~70년대 교수직 시장이 커질 때에는 급진주의자도 대학에 자리를 잡고, 재직권(在職權)을 얻으며, 학계에서의 관습적인 보상에 대한 욕망에 왕왕 가려지긴 했어도 비판적인 작업을 수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은 종신재직권을 보장하는 일자리가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대학당국은 줄어든 예산에 더불어 값싸고 고분고분하며 처분하기 쉬운 “유연한” 노동력을 얻고자, 종신교수직을 대폭 축소하는 대신 일시적이고 비(非)종신 시간제 교원을 선호한다. 이처럼 학계의 취업시장이 혹독해지자 남아있는 종신교수직을 둘러싼 경쟁이 격화되었다.
이와 같은 조건에서는, 매번 새로운 대학원생들이 목도하듯이, 인쇄물을 통해서나 수업에서 평지풍파를 일으키지 말고 학술잡지에 논문을 게재하기 위해 집중하는 것이 현명하다. 대학원생들은 미래의 고용주를 염두에 두고 페이스북(Facebook)이나 트위터(Tweets)를 하라는 조언을 받는다. 따라서 대학원생들은 경쟁적인 취업시장을 생각하며 일찍부터 보수적으로 바뀐다.
“미안하지만 당신의 수업은 없소”
오늘날 많은 대학원생들의 앞날이자 교원들의 피할 수 없는 현실인 바로 이 불안정한 고용은 더욱 보수적으로 바뀌고 있다. 모든 교수가 학문적 자유를 향유해야만 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비전임 교수의 글쓰기나 수업이 문제를 일으킬 경우 해고를 면치 못한다. 계약이 갱신되지 않거나, 학과장이 “미안하지만, 당신이 가르칠 수 있는 수업은 없소.”라고 말하면 그게 바로 끝이다.
이러한 불안정한 상황은 몸가짐을 조심하게 하고, 어떠한 요구도 일축하며, 학생들을 계속 행복하게 만들도록 강요한다. 하지만 여전히 실제적인 문제가 남게 된다. 학기당 4개 이상의 강의를, 그것도 부당하게 낮은 임금을 받아가면서 겨우 삶을 연명하는 동시에 얼마나 많은 연구와 저술을 수행할 수 있을까?
구직경쟁 및 불안정 고용은 보수화를 이끄는 요인들 중 차라리 ‘보기 쉬운 것’이다. 다른 것들은 좀체 보이지 않는다. 이 중 하나가 바로 온라인 지침의 강화다. 수업, 즉 교수의 주관 하에 글과 즉흥성, 양자의 조합으로 이해되던 그 무엇은 이제 온라인 지침에 따라 행정적으로 검사될 수 있고 교체될 수 있는, 소유 가능한 어떤 지적 재산의 일부로 둔갑한다.
누군가가 교수자로서 하는 모든 일이 전자기록으로 남고 또 그것이 어느 때든 행정적 검토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기껏해야 몸을 사리게 하고 최악의 경우 살 떨리게 한다. 다시 말하지만, 가장 안전한 방책은 수업에서 자료와 대화를 이전처럼 유지하는 것이다.
대학에서의 문화전쟁, 계급전쟁
보수화의 힘은 종신재직권을 받지 못한 교수뿐만 아니라 종신교수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예산 감소에 따라 연구비를 따내라는 압력이 가중됐고, 정상과학 및 전통을 존중하는 학문이 선호된다. 긴축은 또한 자원을 둘러싼 내부경쟁, 즉 생산성 수요를 높이는 경쟁(우리가 더 많이 출간하지 않으면 다른 학과에 비해 무능하게 보일 거야!)을 격화시켰고, 동시에 종신교수직 검토 절차를 더욱 엄격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은 교수가 상상력이 빈핍(貧乏)한 학문적 작업만을 수행하도록 인도한다. 공공 지식인으로서의 자질을 기르는 데 필요한 규칙이 없는 속에서, 교수들은 여타의 노동자처럼 그들이 책임질 수 있는 것과 보상 받을 수 있는 바에만 몰두하게 된다.
종래의 보수파는 여전히 교수를 공격하고, 이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아테네의 노인에서부터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와 리드 어빈(Reed Irvine), 데이비드 호로위츠(David Horowitz)를 거쳐 오늘날의 무지(無知)한 공화당 의원에 이르기까지 심란한 질문을 제기하고 불편한 진실을 가리킨다며 교수를 꾸짖는 작태는 표준적인 문화·계급전쟁이다.
그러한 공격의 대부분은, 적어도 매카시 시대가 종언을 고한 이후부터는 언론 및 학계의 자유와 종신재직권에 의해 방향을 잃었다. 그러나 오늘날 새로운 정치·경제적 현실로 인해 보수파의 공격은 다시 한 번 더욱 불길한 것으로 바뀌었다.
우파 입법자들이 국가와 정부를 통제할 때, 그들의 반지성주의는 심각한 결말을 초래할 수 있다. 이는 단지 직업과는 별 관련 없는 고등교육에 대한 입법자들의 적개심에서 비롯된 공립대학에 대한 예산 감축과 그 가능성 때문만은 아니고, 오히려 교수들이 공적인 활동으로 인해 보복을 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더욱 잘 인지하게 됐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간 이곳 노스캐롤라이나(North Carolina)주에서는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UNC)의 일부였던 연구소와 기관이 문을 닫았는데, 이는 그러한 연구소 및 기관과 관련 있는 교수들이 공화당 의원의 기분을 상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교수들이 직장을 잃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 누구도 미리 경고를 받지 못하였다.
심지어 노스캐롤라이나주의 몇몇 공화당 의원들은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 교수들의 수업 강도를 높이려 했고, 교수를 포함한 공무원이 근무시간이나 주 자원을 이용하여 공적인 사안에 대한 논평과 같은 일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려고 하였다.
두 제안은 즉각적으로 기각됐으나, 그것이 전달하고자 한 내용은 명백하였다. “우리는 너를 지켜보고 있고, 우리의 정치력을 발휘하여 너를 망신 줄 수도 있다.” 이는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만 벌어지는 특수한 싸움이 아니다. 위스콘신(Wisconsin)주와 미국입법교환위원회(ALEC)와 관련 있는 공화당 의원의 주들에서 비슷한 갈등이 불거지고 있다.
공공지식인으로서의 교수의 종말
신자유주의 이념이 미치는 범위가 확장되면서 이러한 위협은 더욱 강화되었다. 오스트리아학파를 추종하는 자유지상주의자들이나 자유시장주의자들은 공립대학을 직업기술학교처럼 운영하고, 대기업에 복무하는 두뇌집단으로 만들고자 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회과학과 인문학의 제거를 핵심목표로 설정하였다. 주장의 근거는, 이러한 분과학문이 곧바로 취직으로 연결되지도 않고 또 자본주의적 경영을 돕지도 못하기 때문에 혈세를 들여 지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임금이 정체됐고 내야 할 세금은 높아진 중산층과 노동자층 유권자에게 높은 호소력을 갖는다. 또한 이러한 시각은 결국엔 공립대학에서 교양교육을 뿌리 뽑을 것이며, 따라서 참여적 지식인으로 거듭나고자 하는 박사학위 소지자의 일자리 역시 박탈할 것이다.
필자는 주로 공립연구대학을 거론했는데, 부분적으로는 그러한 대학들이 내가 아는 한 가장 낫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 공립연구대학이 갖는 가치와 취약성을 세심히 고려해야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대학들은 공익에 기여하는 방식으로 운영돼야 하고, 따라서 교수들에게 정책현안이나 사회문제에 대한 발언권을 보장해야만 한다.
그리고 교육에 초점을 맞춘 학교와 달리, 연구대학은 교수들에게 출간의 의무를 지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공립연구대학은 비판적인 학문을 배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확히 납세자의 혈세가 그러한 대학들을 지원하기 때문에, 최소한 부분적으로는 신자유주의 이념가들의 공세에 맞서 대학은 취약할 수밖에 없다.
유수(有數)한 사립대학의 이야기는 또 다르다. 사립대학들에게 예산 조정과 혈세의 적절한 사용에 대한 선동적 수사와 같은 것은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한 학교의 교수에게는 연구와 저술에 필요한 충분한 시간과 지원이 뒤따른다. 아이비 리그(Ivy League)의 교수들 중에는 유명해지는 사람도 많아 대학을 즐겁게 해준다.
그러나 소수의 사례를 제외하고, 대중적 인지도를 획득하는 아이비 리그 교수의 행태는 가내(家內) 지식인이 국가 엘리트에게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급진적인 비판보다는 현상을 정당화하고 유지시킨다고 할 수 있다. 하버드(Harvard)에서 종신교수직을 꿰차기 위해서는 『월간 비평』(Monthly Review)을 거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이렇듯 공공지식인으로서의 교수의 종말에 관해 필자와 대담을 나눈 몇몇 동료들은 필자에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였다. 그들이 인정하듯, 오늘날 우리에게 과거의 걸인(傑人)은 없더라도, 수천 개가 넘는 누리집(websites), 블로그, 트위터를 통해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평범한 교수도 광범한 청중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정말 우리는 누리망(Internet) 이전 시기보다 생각과 정보를 전달하는 더 많은 수단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여전히 편하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비판적 분석을 다양하게 담아낼 방도가 있더라도, 위에서 언급한 보수화의 힘(가혹한 구직경쟁, 불안정 고용, 감시가 가능한 온라인 지침, 연구비 취득 및 종래 형태의 생산성에 대한 요구, 더욱 엄격해진 자기검열체제, 행정적 감시와 이에 따른 공격) 또한 여전히 강고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계 바깥의 청중에게 다가갈 수 있는 새로운 수단이 있을지언정 대부분의 교수들에게는 그러한 수단을 일축할 이유가 충분하다. 트위터, 블로그를 하거나 누리집에 글을 쓰고 싶은가? 좋다. 남는 시간에 그렇게 하되 그에 대한 보상은 꿈도 꾸지 말라. 그리고 말조심해라.
2008년, 오하이오주립대학의 영어교수인 프랭크 도너휴(Frank Donoghue)는 『최후의 교수들』(2014, 차익종 옮김, The Last Professors)을 펴냈다. 그는 위신을 세워주고 보수도 괜찮으며 작업을 통제할 수 있는 자율성을 갖는 교수가 여전히 좋은 직업이라고 말하며, 필자도 이에 동의한다.
그러나 오늘날 대학당국의 통제와 횡포로 인해 교수직의 이점은 점점 저하되고 있다. 따라서 교수들, 특히 학계의 중견 및 소장학자들은 그들이 한때 그랬거나 그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의문을 제기하고 질문을 설정한 뒤 수행하는 작업을 그만두고 있다. 대학의 명백한 영리화(營利化)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도너휴의 책을 처음 접했을 땐 그가 너무 불필요한 우려를 자아내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 필자는 그가 너무 신중했다고 생각한다.
자코비가 흠숭(欽崇)하는 참여적 지식인은 깨인 대중을 상대로 하여 자유롭게 글 쓰는 것으로 더 이상 먹고살 수 없게 되면서 사라지기 시작했고, 그러한 사정은 교수에게도 별반 다를 바 없다. 한때 대학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비판적이고 지적인 작업을 뒷받침하고 교수들에게는 광범한 청중에게 자본과 무관한 명철한 분석을 제공한 자리(niche)는 변모하는 중이다. 이러한 변화는 교수들, 심지어는 종신교수들 중에서 좌파적 공공지식인으로서 거듭나려는 열망을 품고 있는 이에게 차디찬 물을 끼얹을 것이다. 그 후 남는 것은 한낱 탁상공론(academic)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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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슈월비는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 사회학과 교수이다. 그의 이메일 주소는 다음과 같다. MLSchwalbe@nc.r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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