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1월 13일 일요일

다시 읽기 위하여--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가 김응교 (시인, 문학평론가, 숙명여대 교수)

2016. 11. 10.
노고지리는 어찌하여 고독한가
‘최순실=박근혜=새누리당’ 게이트가 국정을 농락하는 초유의 사건이 일어났다. 국정원 선거 개입, 세월호 참사 외면, 위안부 합의, 해운·조선업 붕괴, 한반도 사드 배치, 원전·방산 비리, 역사 교과서 국정화, 패션 외교 등 끊임없이 문제가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다. 매일 쏟아지는 뉴스에 속이 터진다. 뻔한 거짓에 거짓을 반복하는 허깨비에 참을 수 없는 분노로 일을 못할 정도다. 최순실 체포, 박근혜 하야, 새누리당 해체밖에 길이 없을까. 과연 이것만 하면 이 나라가 바로 설까. 이 기간을 어떻게 해야 이 나라가 바로 설 수 있을까.
1960년 4·19 시민혁명이 일어나고 많은 작가들이 혁명의 성공을 노래했다. 이 혁명이 실패로 끝날 수 있다는 것을 예견한 시인은 세 명이었다. 박두진은 <우리의 깃발을 내린 것이 아니다>, 신동엽은 <껍데기는 가라>를 썼다. 김수영은 1960년 6월 15일 그러니까 4·19혁명이 일어난 두 달 후에 <푸른 하늘을>을 썼다
푸른 하늘을 제압(制壓)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왔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詩人)의 말은 수정(修正)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飛翔)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自由)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있는가를
혁명(革命)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革命)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ㅡ 김수영 <푸른 하늘을>(1960.6.15)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웠다” 고 하는 어떤 시인의 말을 인용하면서 시는 시작된다. 그 시인이 누군지는 별로 중요치 않다. 높이 하늘을 나는 노고지리를 보고 그저 '자유로이 보이는군. 멋있어'라고 피상적으로 보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피 없는 혁명은 가짜다
‘노고지리’는 ‘종달새’를 말한다. 참새처럼 생겼는데 참새보다는 조금 크다. 등산하다 살찐 참새처럼 보이는 새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비만한 참새로 보이는, 우리땅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텃새가 노고지리다. 북위 30° 이북의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분포하는 노고지리는 우리나라 전국에서 번식하는 흔한 텃새다. 방금 우리땅 어디서나 볼 수 있다고 썼는데, 그 말이 중요하다. 동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이 글을 읽으시는 당신이나 필자도 모두 종달새처럼 흔한 존재다.
이 노고지리가 쉽게 날 수 있을까. 날기는커녕 알에서 나오자마자 들짐승에게 먹히는 경우도 있다. 종달새 새끼를 씹고 피 묻은 주둥이로 입맛을 다시는 살쾡이도 있을 것이다. 날기 위해 얼마나 오랜 시간 파닥이며 연습해야 할까. 언덕에서 굴러 떨어지기도 하고, 뭣 모르고 절벽을 뛰어내린 종달새는 많이 죽었을 것이다. 만약 새장 속에 갇혀 있던 새라면 더욱 치열한 탈출 시도를 해야 할 것이다. 날기 위해 오랜 시간 처절한 자신과의 싸움을 견뎌 내야 한다. 그래서 한 마리 노고지리가 자유롭게 날기 위해서는 “어째서 자유에는 /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푸른 하늘을 날기 위해, 푸른색과 대비되는 붉은 피를 흘려야 하는 법이다.
혁명은 단 한 번의 날갯짓으로 성취되지 않는다.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실패와 배반, 흐르는 피눈물을 삼키며 겨우 하늘에 오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피[血]는 신체적인 혈액만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더욱 치열하게 고독한 투쟁을 말한다. 비단 신체적인 혈액만을 의미하는 것을 넘어, 근본적인 각성(覺醒)의 훈련을 뜻한다.
김수영 <푸른 하늘을>이란 시가 그 뜻을 이어받고 있다. 박두진의 <푸른 하늘 아래>는 『청록집』(1947)에 발표된 작품이고, 김수영의 <푸른 하늘을>은 1960년 6월 15일에 발표된 작품이다. 거의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김수영이 박두진을 읽었을 가능성도 있다. 박두진에게 푸른 하늘은 해방조국이며, 김수영에게 푸른 하늘은 혁명조국이다. 시기는 다르지만 박두진과 김수영 시에서 ‘푸른 하늘’이라는 이미지는 모두 자유의 표상이다. “산이 거기 있기에 산에 오른다”라는 누군가의 말처럼 종달새는 그저 하늘을 날기 위해 날개를 퍼덕인다. 여기서 시인은 너스레 떨지 않고 직언한다. 2연 끝부분과 3연을 보자.
“혁명(革命)은 / 왜 고독한 것인가를 // 혁명(革命)은 /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똑같은 말을 조금 다르게 꼬아서 두 번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해직당하고, 가족과 이별했고, 고문받고, 감옥에 가고, 자살했고, 죽어갔다. 팬옵티콘 어용 언론의 구축으로 인해 사회는 책임 없는 감시사회로 변했다. 아직 혁명은 아마득하다. 얼마 전 물대포를 맞고 농민 백남기 선생이 사망하기도 했다. 대체 얼마나 피의 냄새가 넘쳐야 깨달을까. 혁명을 이루고 난 뒤에도, 국민들 한 명 한 명이 ‘고독’한 노고지리처럼 피의 결심을 하고 민주주의를 지켜내지 않는다면 결코 ‘푸른 하늘을’ 날 수 없는 것이다.
“자유를 위해서 /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 사람”(2연 1~3행)은 자유의 냄새에 그 ‘피’가 섞여 있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 피는 ‘고독’과 이어진다.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지,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지. ‘피’와 ‘고독’이야말로 혁명을 이루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혁명, 너무도 자연스러운 과정
혁명(革命)이라 하면 흔히 1789년 프랑스 혁명을 떠올린다. 혁명을 뜻하는 영어 ‘리볼루션(revolution)’은 라틴어 ‘revolutio’가 어원으로, ‘회전하다’, ‘바뀐다’, ‘반전하다’라는 뜻이다. 잠깐 성공했던 1960년 4·19 혁명, 1987년의 6월 민주항쟁 같은 정치적인 변화만 혁명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산업혁명, 디지털혁명처럼 새로운 체계가 시작할 때 ‘혁명’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혁명의 혁(革)이라는 한자는, 죽은 뿔 달린 짐승의 가죽을 벗겨내 펼쳐놓은 상형이다. 짐승이 죽었을 때 그대로 두면 금방 썩어버린다. 가죽을 쓰려면 빨리 벗겨내 안쪽에 붙어있는 살을 다 떼어내 물에 잘 씻고 한참 두들겨 부드럽게 ‘무두질’한다. 버릴 껍질을 ‘무두질’하면 쓸 만한 가죽이 되듯이, ‘혁(革)’이란 한자에는 ‘고치다’, ‘새롭게 하다’라는 뜻이 있다.
혁명이란 꼭 사회 변화만이 아니라, 내 삶을 바꾸는 변화도 의미할 수 있겠다. 매일 매일 무두질(革)하듯 새롭게 살아가는 삶은 ‘혁명적인 삶’이다. 깨인 의식으로 내 삶을 혁명시켜야 한다. 내 삶과 의식과 제도를 혁명해야 한다.
서양 용어로만 알고 있는 혁명이라는 단어는 실은 고대 중국의 고전인 『주역(周易)』, 『서경』, 『맹자』에도 나온다. 『주역』의 「혁괘편(革掛篇)」은 “바꾸어야[革] 하는 형국이다. 고난의 날이 지나며 한 마음이 될 것이다. 시작해야 할 때 시작하고,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때 나서며, 거두어야 할 때 거두고, 마무리해야 할 때 마무리하면 후회함이 없을 것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어서 이렇게 써 있다.
“천지가 바뀌어 사시(四時; 춘하추동)를 이룬다. 탕과 무가 혁명하여, 하늘 뜻을 따르고 사람에게 응한 것이니, 바꿔야 할 때에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天地革而四時成。湯武革命、順乎天而應乎人。革之時大矣哉)
인용문을 세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겠다.
첫째, “천지가 바뀌어 춘하추동을 이룬다(天地革而四時成)”는 말은 천지가 바뀌어(革)하여 새로운 천지를 이룬다는 선언이다. 계절이 새롭게 바뀌듯 혁명의 시기는 새로워야 한다. 흔히 혁명이라 하면 무서운 시간을 생각하지만, 고대 중국에서는 계절이 바뀌듯 새롭게 바뀌는 것을 혁명(革命)이라 했다. ‘하은주’ 삼대(三代)의 정치체제가 ‘변하는(革)' 혁명을 고대 중국인들은 계절 바뀌듯 자연스럽게 생각했던 것이다. 혁명 과정을 거쳐 이상적인 국가로 기록되는 주(周, BC1046~BC256)가 세워진다.
둘째, 탕(湯) 임금과 무(武) 임금이 하늘(天)을 따라 정치적인 결단을 한다. 탕과 무의 혁명이 곧 역성혁명(易姓革命)이었다. 고대 중국, 하(夏)나라에서 은(殷)나라, 은에서 다시 주(周)나라로 왕조가 교체될 때를 소위 ‘은주혁명(殷周革命)’이라고도 한다. 왕조의 교체를 의미하는 ‘혁명(革命)’을 하려면 이렇게 하늘 뜻에 따라야 한다. 그런데 하늘의 명(天命)을 ‘안민(安民)’으로 삼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서경』에 보면 ‘혁명’을 할 수 있는 자는 ‘하늘의 명(天命)을 바르게 아는 자’라고 명확히 나온다.
“하늘은 우리 백성들이 보는 것을 따라 보며(天視自我民視),
하늘은 우리 백성들이 듣는 것을 따라 듣는다(天聽自我民聽).” 
하늘(天)이 백성을 만들었으니(下民), 하늘의 뜻은 백성의 마음을 보면 알 수 있다. 여론 조사나 지지율도 백성의 마음을 볼 수 있는 중요한 지표다.
셋째, 인민들이 한마음으로 응했다. 혁명이 가능했던 것은 정치가들이 인민을 귀히 여겨 ‘안민(安民)’에 힘썼기 때문에 인민들이 혁명 과정에 응하고 참여했던 것이다. 혁명이냐 아니냐의 기준은 그 사건이 백성을 위한 것이냐 아니냐에서 판가름이 난다.
『맹자』에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왕조의 성(姓)을 바꾸는(易) 혁명이다. 맹자(孟子, BC372~289)는 임금이 된 자는 ‘백성들과 더불어 즐거움을 함께(與民偕樂)’ 해야 하고, ‘백성들과 함께 즐기고, 백성들과 함께 근심(樂以天下 憂以天下)’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백성들에게서 신뢰를 잃은 군주는 ‘혁명’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군주에게 큰 잘못이 있으면 말하고, 이를 반복하여 듣지 않으면 군주를 바꿔야 한다(君有大過則諫反覆之而不聽 則易位)’(『맹자』 萬章章句下)고 분명히 써 있다. 맹자는 ‘민’을 위한 위민정치(爲民政治)를 반복해서 강조한다. ‘민’을 위하지 않는 군주를 향해 폭력(暴力)을 가해도 좋다는 암시를 주기도 한다. 『맹자』에서는 역성혁명이 가능하려면 군주가 백성과 슬픔이든 즐거움을 나누는 ‘여민동락’(與民同樂)을 여러 번 강조한다.
‘혁명’이란 반란이나 정변이 아니다. 사계절의 순환처럼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혁명의 잣대는 백성이 바라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다.
고독 없는 혁명은 실패다
다시 시로 돌아가자. “어째서 자유(自由)에는 /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에서 ‘피’는 무엇일까. 눈에 보이는 육체적인 피[血]를 말하는 것일까. 김수영은 일기에 이렇게 썼다.
“이 고독이 이제로부터의 나의 창조의 원동력이 되리라는 것을 나는 너무나 뚜렷하게 느낀다. 혁명도 이 위대한 고독이 없이는 되지 않는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혁명이란 위대한 창조적 추진력의 복본(複本, counterpart)이니까. 요즈음의 나의 심경은 외향적 명랑성과 내향적 침잠 혹은 섬세성을 완전히 일치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다. 졸시<푸른 하늘을>이 약간의 비관미를 띄우고 있는 것은 역시 격려의 의미에서 오는 것이리라”ㅡ김수영「1960년 6월 16일 일기」『김수영 전집』, 1984, 332면.
인용된 일기를 보면 두 가지를 알 수 있다.
첫째, 김수영은 ‘정치적 혁명’과 ‘내면의 혁명’을 따로 생각하고 있지 않다. 정치혁명이나 내면혁명이나 모두 ‘고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의 심경은 외향적 명랑성과 내향적 침잠 혹은 섬세성을 완전히 일치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다”는 구절에 주목해야 한다. 김수영은 외향적 명랑성(정치적 혁명)과 내향적 침잠 혹은 섬세성(내면적 고독)을 일치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김수영에게 ‘혁명’이라는 단어는 사회적인 껍데기만의 혁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둘째, 진정한 혁명은 국민들의 진정한 고독에서 시작해야 한다. ‘혁명도 이 위대한 고독이 없이는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자기혁명 없어 사회혁명은 없다는 말이다. 철저히 자기혁명의 고독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타인, 타자의 힘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것은 혁명이 아니다. 철저히 나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사람들은 거대한 일은 하려 하면서 자기 곁의 일은 못한다. 역사혁명은 일으키려 하면서도 가족혁명은 일으키지 못한다. 아프리카 빈자를 도우려 하면서도 집안 노모의 대소변을 받아내지 못한다. 철저히 자기혁명을 이룬 고독한 단독자들의 연대, 그것이 없다면 내면의 혁명이나 외면의 혁명 모두 실패한다. 단독자들의 사유(思惟)혁명에서 비롯된 혁명이 아니라면 또 다른 ‘동물농장’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피’를 흘린다는 것은 살아 있는 몸과의 결별을 의미한다. ‘고독’하다는 것은 사사로운 인간관계와의 결별을 의미한다. 곧 자기희생의 ‘피’와 적폐(積弊)에 썩어 있는 과거와 결별한 ‘절대고독’에서 혁명은 가능한 것이다. 순종적인 신체와 결별하는 ‘피’, 썩은 과거와 결별하는 ‘고독’의 씨앗으로부터 혁명은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다.
4·19 이후에 발표된 김수영의 시 몇 편 중에 나는 이 시가 가장 마음에 든다. 그가 일기에 쓴 ‘격려의 의미’로 독자인 나에게도 위로가 된다. 차분하며 격정의 상태에서 멈추고 있다. 마치 한 방 탄알이 발사되기 직전에 숨을 멈춘 듯 하다. “그, 모오든 껍데기는 가라”고 외치는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1967)를 연상시킨다.
혁명이란 단순히 사람을 바꾸는 문제를 떠나, 치열하게 깨달은 단독자들의 역사적 성과인 것이다. 이 땅에 사는 국민들 한 명 한 명이 고독하게 피 흘리는 심정으로 민주주의를 깨닫고, 온갖 언구럭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일상에서 매일 고독한 내면적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혁명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정신적 고투의 피를 흘리는 묵언정진(默言精進), 기억해야 할 것을 절대 잊지 않는 고독한 이들의 연대에 의해 진정한 혁명은 가능하다.
혁명은 박근혜 한 명 바꾼다고 성공하지 않는다. 혁명은 하늘 뜻을 따르는 각성한 민심이 한 마음이 될 때 이루어진다. 국민 한 명 한 명이 깨어 있는 고독한 단독자로서 모든 적폐(積弊), ‘친일파=친독재=박근혜=공범자’를 몰아내야 한다. 박근혜의 거짓으로 박정희의 적폐를 설명하기 쉬워졌다. 위기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 분노하고 소리지르는 행동 이상으로 고독하게 저 얼룩을 지워야 한다. ‘이제 나는 바로 보마’(<공자의 생활난>)라는 판단력을 키우며 실천해가야 한다, 그래서 혁명은 고독하다. 혁명은 고독해야만 한다. 혁명이란 고독한 단독자들이 뿌리와 뿌리를 얽으며 이루는 숲이다. 그래서 혁명은 늘 영원한 시작이다.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필자 소개김응교 (시인, 문학평론가, 숙명여대 교수)
연세대 신학과 졸업, 연세대 국문과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7년 『분단시대』에 시를 발표하고, 1990년 『한길문학』 신인상을 받았다. 1991년 「풍자시, 약자의 리얼리즘」을 『실천문학』에 발표하면서 평론 활동도 시작했다. 1996년 도쿄외국어대학을 거쳐, 도쿄대학원에서 비교문학을 공부했고, 1998년 와세다대학 객원교수로 임용되어 10년간 강의했다. 2012년 현재 숙명여자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로 있으며, 페이스북과 트위터(@Sinenmul)로 세상과 소통한다.

시집 『씨앗/통조림』과 평론집『그늘-문학과 숨은 신』 『한일쿨투라』, 『한국시와 사회적 상상력』, 『박두진의 상상력 연구』, 『시인 신동엽』, 『이찬과 한국근대문학』, 『韓國現代詩の魅惑』(東京:新幹社、2007), 예술문학기행 『천년 동안만』, 시인론 『신동엽』, 장편실명소설 『조국』 등을 냈다. 번역서는 다니카와 슌타로 『이십억 광년의 고독』, 양석일 장편소설 『다시 오는 봄』, 『어둠의 아이들』, 윤건차 사상집 『고착된 사상의 현대사』, 윤건차 시집 『겨울숲』, 오스기 사카에 『오스기 사카에 자서전』, 엘던 라드 『부활을 믿는 사람들』 그리고 일본어로 번역한 고은 시선집 『いま、君に詩が來たのか: 高銀詩選集』(사가와 아키 공역, 東京: 藤原書店、2007)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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