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의 학문후속 세대에게는 송구한 이야기이지만, 석사학위 논문만 쓰면 대학 교수로 초빙되던 시절이 있었다. 1980년대 초반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한 전두환과 신군부 일당은 국민적 지지를 겨냥한 조치 가운데 하나로 대학 정원을 두 배로 늘리고, 그것에 더하여 ‘졸업정원제’라는 듣도 보도 못한 제도로 다시 30%를 더 늘렸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권력이 하라면 하는 데에서는 대학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오히려 아무런 준비도 없으면서 적극적으로 가담해 돈벌이 기회로 삼았다. 내가 다녔던 학과는 시설이나 교수진에 아무런 변화도 없이 20명의 입학 정원을 52명으로 늘렸다.
대학들은 부랴부랴 교수들을 끌어 모았다. 물론 준비된 학자도 있었지만, 엉겁결에 석사 학위를 받고 급행으로 대학으로 달려간 학자들도 많았다. 그래서 그들은 ‘立稻先賣’ 세대로 불렸다. 게다가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른바 ‘육개장’이라는 파격적인 특혜까지 받았다. 동년배들이 32개월 안팎의 기간을 군복무로 보낼 때, 석사 학위를 소지했다는 터무니없는 이유로 그들은 ‘특수전문요원’으로 대접받으며 6개월간의 군대 체험만으로 장교 계급장을 달고 전역했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그것은 전두환과 노태우의 아들들을 위한 일시적인 제도로, 그들의 의사나 요구와 무관하게 ‘운 좋게’ 주어진 혜택인 만큼 그들에게 책임을 물을 일은 아니겠으나, 적어도 동년배들이나 후배들에게 미안해해야 할 부채인 것은 분명하다. 더구나 그 80년대는 광주의 선혈이 지식인들에게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을 일깨운 시대였다. 이제 그들이 은퇴하고 있다.
나도 그 ‘입도선매’ 세대의 막차를 타고 대학 교수가 됐다. 그리고 ‘직업’ 교수로서 남 보기에 아주 풍족한 것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잘 지내왔고 이제 은퇴를 눈앞에 두고 있다. 하지만 연구자로서, 교사로서, 지식인으로서 저간의 시간을 되돌아보면, 나는 부끄러움을 떨칠 수 없다. ‘내 부끄러움이 나만의 것이어서는 안된다’며 박완서 선생은 부끄러움을 가르쳤지만, 누구를 가르칠 주제가 못되는 나로서는 후배 교수들께 반면교사, 타산지석이라도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부끄러운 자화상을 말씀드린다.
그저 그런 연구자
사실, 내가 대학원에 진학한 것부터 ‘운’이었다. 한해의 절반은 방학으로, 그리고 나머지 절반에서도 절반은 휴교 등등으로 대학생활을 허송한 탓에 졸업을 눈앞에 두고도 나는 딱히 하고 싶다거나 해야 한다거나 하는 일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까닭은 모르겠지만 뒷날의 대학 팽창을 예비하기라도 하듯, 내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 대학원 입학 정원이 늘어났고, 공부의 목표나 사명, 또 내 적성이나 능력 같은 것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는 나 같은 사람도 마침 대학원에 응시해 행운인지 불운인지 입학하게 됐다.
대학원 시절, 同學들은 종속자본주의니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니 하며 한국의 사회현실과 뜨겁게 씨름하고 있을 때, 그러니까 서구에서 대처와 레이건을 앞세운 신보수주의가 득세하고 동구에서 사회주의가 붕괴하던 좌절의 1980년대를 한국에서는 ‘질풍노도의 시대’로 만들 만큼 치열하게 공부하며 ‘학술운동’을 전개하고 있을 때, 나는 과학이란 무엇인가, 사회과학이란 무엇인가를 따지는 현학으로 도피해 한가롭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러다가 덜컥 교수가 된 것이다.
모름지기 연구자는 천직으로서 소명의식, 구도자적 겸허, 무한책임의 자질을 갖춰야 한다고 한 大家는 설파한 일이 있는데, 나도 처음에는 단순히 서양 학자들의 주장을 모으고 얽어서 내 이야기처럼 내놓는 것이 아니라 ‘一家’를 이루겠노라는 야심찬 포부를 갖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불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내가 전공하는 ‘사회과학철학’은 국내에 전문연구자가 거의 없기 때문에 그들과 토론을 통해 성장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학술지 편집자의 충동질을 못 이겨 몇 차례 ‘논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얻은 소득은 무지하고 당파적이라는 평판뿐이었다. 어쩔 수 없이 서양 학자들의 글을 주로 읽어야 했고 언어장벽 때문에 늘 뒤쫓아 가는 처지일 수밖에 없을 뿐 아니라, 무슨 새로운 착상을 하더라도 그것을 발표하고 서양 학자들과 경쟁하는 일은 꿈꿀 수 없었다.
결국 한국어로 한국독자를 대상으로 글을 썼고, 전문연구자들이 희소하기 때문에 적당히 얼버무려도 책잡는 사람은 없었다. 교수의 지위를 유지하는 데에는 소소한 논문들을 발표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지식 수입상’이라는 꼬리표를 붙여도 학문 후진국 연구자의 운명이라며 자위했다. 연구 성과를 묻는 질문에는 “대가는 나중에 저서로 말한다”는 은사의 말로 답을 대신했다. 그러는 사이 내가 근무하는 대학은 실적을 강조하면서 저서를 논문보다 저급한 것으로 취급하는 이상한 제도를 도입했다. 논문을 ‘많이’ 발표하면 탁월한 연구자로 평가받을 수 있었지만, 그 기준마저도 내게는 힘에 부치는 것이어서, 한해에 그저 그런 논문 한편을 발표하는 데 급급하며 지내왔다.
엉터리 교사
교수는 무엇보다 ‘교사’이다. 우리 사회의 대학들 대부분이 자칭으로 내세우는 ‘연구중심 대학’이라는 것이 냉전체제의 중요한 유산이라는 것을 나는 근래에서야 알았다. 그것은 미국의 군부가 군비경쟁에 필요한 과학지식 개발을 위해 연구비를 제공하면서 대학과 교수들을 동원할 때, 돈벌이에 눈이 어두워진 대학의 경영자들이 그리고 그들을 통해 대학을 통제하려는 권력자들이 붙인 이름이었다. 양보해서, 연구중심이라고 하더라도 대학은 연구소가 아니라 엄연히 학교이다. 학교의 일차적인 사명은 ‘교육’에 있고, 그러므로 교수는 일차적으로 교사이다.
그러나 운 좋게 교수가 된 나는, 하다못해 교육학 개론조차 공부해본 적이 없는 준비되지 않은 교사였다. 학문의 자유는 들어라도 봤지만 교사의 책무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아는 것도 별로 없지만) 아는 것을 학생들에게 전달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무작정 수업을 진행했다. 수업 준비에 꾀가 생기면, 자기주도 학습이라는 허울로 학생들에게 발표를 맡기고, 더러는 호연지기를 키운다는 핑계로 산이나 들로 데려가 육신의 양식으로 마음의 양식을 대신하기도 했다. 무엇을 어떻게 왜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된 것은, 근래 ‘취업준비’를 강요하는 총장에 맞서 대학교육이 그래서는 안 된다고 떠드는 과정에서의 일이다.
그러니 내게 배운 학생들 가운데, 내 전공분야는 말할 것도 없고, 사회학을 계속 공부하는 사람이 대여섯에 지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사회학에 흥미도 느끼고 지식욕구도 생길 수 있도록 제대로 가르쳤다면, 아무리 지방대학이라고 하더라도, 30년 동안 대여섯의 후학을 배출하는 데 그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제자의 논문을 가로챘느니 대학원생의 인건비를 착복했느니 어쩌니 하는 말들이 떠돌지만, 공부하는 제자가 없으니, 내게 그런 일은 애당초 일어날 수 없었다.
공부를 계속했으면 좋겠다 싶은 대학원생이 학교를 떠날 때에도 나는 말리기는커녕 등을 떠밀었다. 솔직히, 나는 그가 사회학 공부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내가 제대로 된 교사라면, 사회학 공부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그를 훈련시키고, 또 사회학 공부를 하는 사람도 밥 먹고 살 수 있도록 세상을 고쳤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인재를 얻어 가르치는 것을 군자의 세 번째의 즐거움으로 꼽은 선현도 있기는 하지만, 그런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엉터리 교사의 자업자득이다.
여우의 신포도
교수로서 나는 어쩌면 염불보다 잿밥에 더 마음이 있었는지 모른다. 총장이 보직을 맡아달라면, ‘생각해볼 시간을 달라’는 상투적인 인사치레조차 없이 기다렸다는 듯이 덥석 맡았다. 줄 때에는 확실하게 줘야 고맙다는 말을 듣는다고 핑계를 댔다. 대학에 대해, 학문에 대해, 교육에 대해, 무엇보다 행정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학습한 적이 전혀 없음에도 나는 ‘그래도 다른 사람이 맡는 것보다는 내가 맡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근거 없이 합리화했다. 그리고 ‘구조조정’이라는, 이제 생각해보면 대학에는 가당하지 않은 이름을 앞세운 ‘대학 황폐화 작업’에, 내가 근무하는 대학이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다며, 가담하고 앞장섰다. 보직을 맡지 않았을 때에는 적당한 수준에서 총장을 비판하기도 하면서, 그러나 식사라도 같이 하자는 전갈이 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화기애애하게 지냈다.
근래 나는 대학에서 보직이라고 할 수도 없고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모호한 일을 맡고 있는데, 엊그제도 ‘당신은 회의를 기준이나 원칙 없이 일방적으로 진행했을 뿐 아니라, 자제하지 못하고 화를 냈으니 사과하고 책임지라’는 공박을 받았다. 내 능력과 품성이 감당할 수 없는 ‘자리’ 욕심이 불러온 설화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저런 연줄에 기대어 정치판에도 기웃거렸다. 이름을 말하면 웬만한 사람들은 알만한 정치인들과 밥도 같이 먹고 나라를 걱정하는 ‘高談峻論’을 나누기도 했다. 그러면서 불러주면 열심히 수발을 들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내 지식의 깊이가 얕았던지, 내 이름값이 저렴했던지, 아니면 내 태도가 미덥지 못했던지 나를 불러주는 정치인은 없었다.
텔레비전에도 한 번 출연한 적이 있다. ‘숫자 어쩌고’ 하는 책을 놓고 서너 명이 대담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나는 내용 없는 잡담으로 시청자의 시간을 빼앗는 것은 죄악이라고 생각하고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하고 나갔다. ‘혹시 아는가, 나도 대중매체에 적합한 체질이어서 계속 기회가 생길지.’ 분장 담당자의 조언을 무시하고 ‘있는 그대로의 얼굴’을 고집했는데, 내가 몰라볼 만큼 늙은 내 얼굴이 화면에 나오는 것을 보고 낙담하고 말았다. 그런 외모 탓이었던지, 아니면 어눌하고 재미없는 말주변 탓이었던지 그 뒤에는 어디서도 나를 부르지 않았다.
신문사 같은 곳에서 원고를 부탁해오면 군말 없이 응했다. 그러다가 한번은 지역 신문에서 (아마도 거기 근무하는 제자의 주선으로) ‘고정칼럼’을 부탁받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여기자를 성추행한 뒤 ‘식당 주인인 줄 알고 그랬다’고 거듭 망발한 검사 출신의 지역 유력 정치인과, 교수들의 항의를 피해 병실에 입원해서 치명적인 결정을 한 (내가 근무하는 대학의) 총장을 싸잡아 ‘최소한의 품위라도 지키라’고 힐난하는 첫 번째 원고를 보낸 것으로 끝났다. 그 원고가 게재되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나는 내 원고의 행방에 대한 해명이나 사과조차 받지 못했다. 그리고 악명이 퍼졌던지 그 뒤에는 원고를 부탁받는 일이 아예 없었다.
동료 교수가 이름을 얹어줘서 지방정부의 용역사업에 참여한 일도 있지만 그 또한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지역개발 사업 항목을 ‘제안’하라는 것이었는데, 중간보고를 한 뒤 용역비 지급이 중단되고 용역사업은 유야무야 끝났다. 다른 나라의 사례를 알아본다며 그 돈으로 심지어 일본 구경까지 했던 마당에, 황당했지만 어디에도 하소연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용역을 맡긴 시장의 의도는 자신이 추진하려는 ‘폼 나는’ 토목건설 사업을 정당화해 달라는 것이었는데, 우리가 엉뚱한 다리를 긁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폴리페서를 비웃고 텔레페서를 조롱했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그것은 여우의 신포도라고 해야 한다. 이리 재고 저리 간보며 이익을 구하면서도 ‘교수’라는 명함으로 속물스러움을 적당히 감추고 고상한 척했을 뿐이다. 단적으로, 나도 가끔은 ‘시국’과 관련한 성명서에 이름을 올리기도 하고, 서너 번은 후배 교수들에게 등 떠밀려 앞에 나서기도 했다. 친분 있는 국정원 직원이 더러 연락해온 것을 보면 어디선가 뒷조사 같은 것을 하는 모양이었지만, 그리고 연구재단의 무슨 단장 자리인가를 제안 받았다가 ‘당신 꼬임으로 성명서에 이름을 올린 사실이 드러나 없었던 일이 됐다’는 이야기를 동료 교수에게서 들은 적은 있지만, 딱히 내가 교수 노릇하는 데 불이익이 된다고 느낄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비겁하게도 뒷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상황이 기울어졌을 때에나 나는 지식인으로서 공공성을 수호하는 척 나섰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교수가 된지 10년쯤 지난 후, 지금 젊은 교수들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어렵지 않게 ‘정년보장’을 받았다. 정년보장이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것, 그러니까 이런 저런 압력에서 자유롭게 뜨겁게 연구하고 발표하라는 명령인 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내 몸은 그렇게 반응하지 않았다. 경력이 늘어난 만큼 무게도 잡고 싶었고 평판도 얻고 싶었다. IMF 관리의 경제위기를 거쳤어도 신자유주의의 혹독함은 아직 교수들에게 당도하지 않았다. 이런 저런 모임에 얼굴을 내밀고 듣기 좋은 이야기를 하면, 모났다거나 괴팍하다거나 분위기 파악을 못한다고 뒷담화를 하면서도, 각박하게 대접하지는 않았다. 그런 기회들을 챙기고 만들면서 ‘교수’의 자세가 관성으로 몸에 익었고 당연히 연구와 교육은 뒷전으로 밀렸다. 그렇게 20년 가까이 보냈다.
잔혹한 시대, 암울한 시대, 각박한 시대를 거치며 나는 운이 좋았던 덕택에 ‘직업’ 교수로 별다른 어려움을 겪지 않고 그렇게 대충대충 지내왔다. 교수를 두고 “실력이 없다. 품격이 낮다. 휴강이 많다. 가르치는 일에 성의가 부족하고 연구와 공부를 게을리 한다”는 타박은 이미 1950년대부터 있었지만, 바로 내 이야기였다. 나는 교수 사회의 관행과 규범에 적당히 타협했고 적당히 안주했다. 누구에게도 뜨거운 적이 없으면서도, 나는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자라고 믿으며, 연탄재를 함부로 발로 찼다. 브레히트는 운이 좋아 오래 살아남은 “자신이 미워졌다”고 자멸(自蔑)했다.
출처 : 교수신문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4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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