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마을문고 운동
―멋진 문제 해결 방식
나미에 켄(浪江虔)
『도서관잡지図書館雜誌』 78권 제3호, 일본도서관협회, 1984년 3월 20일
번역 원문은 『도서관 그리고 민주주의 図書館そして民主主義―浪江虔論文集』,
마치다자치연구센터, 1996년, 188~196쪽.
머리말
한국 농촌 독서운동의 제일인자 엄대섭(嚴大燮) 씨의 후의로, 우리 부부는 작년 9월, 여드레 동안 한국여행을 즐겼다. 우리 부부가 외국을 여행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것이어서 일정은 대부분 느슨한 관광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마을문고 운동(マウル文庫運動)에 대해서는 문자 그대로 그 편린을 건드리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홀딱 반해” 버렸다.
전후 짧은 기간 동안 일본의 농촌에서 도서관(圖書館)=부락문고(부라쿠분코 部落文庫) 만들기에 정열을 불태웠던 나로서는 마을문고 운동의 큰 성공은 아주 경이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뜻있는 사람들의 협력을 얻어서 2년 정도 이 운동을 연구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다.1) 따라서 여기에 쓰는 것은 영화의 ‘예고편’ 정도에 불과하다.
특히 감복했던 것
한국에는 3만5,025개의 마을이 있는데 거의 대부분의 마을에 마을문고가 있다. 본부(本部)2)에서 만든 리플릿(영문)에 따르면, 3분의 1은 “run successfully”, 3분의 1은 “in poor operation”이라고 한다. 그것을 조금 에누리해서 20%는 잘 운영되고 50%는 잘 운영되지 않는다고 보아도, 7천 개의 문고가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인구 4천만 명의 나라에 7천 개의 문고가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문고(분코 文庫) 운동은 일본이 가장 발전했다고 생각하고 있던 나로서는 엄청난 인식 부족을 느꼈다.
그러나 내가 진정 감복한 것은 높은 보급률보다도 실용적이면서도 아주 읽기 쉬운 농업기술서 시리즈의 발행과 이를 모든 문고에 무상으로 배포한 사업에 성공한 점이다. 부락문고 운동이 진정으로 의미 있는 운동이 되려면 농산어촌 주민의 생산 활동에 꼭 필요한 책을 충분하게 공급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전쟁이 끝난 직후 일본에서 부락문고 운동을 제창했던 내가 이 운동을 일단 미루고 우선 『누구나 알 수 있는 비료 지식 誰にもわかる肥料の知識』을 직접 저술하고, 이런 종류의 책을 간행하는 데 전력을 다한 것은 이런 ‘반드시 필요’한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 일은 주로 농산어촌문화협회(農山漁村文化協會)3)가 추진하고 다른 곳으로도 파급되어 일본 농민이 활용할 수 있는 책의 저작 출판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게 되었지만, 아쉬운 것은 도서관운동(圖書館運動)과 문고운동(文庫運動)의 접촉면이 얼마 되지 않은 점이었다. 그것이 한국의 마을문고 운동에서는 완전히 일체가 되어 있는 것이다.
엄 씨의 거대한 족적
한국의 마을문고 운동이 이처럼 성공적으로 추진될 수 있었던 최대의 원인은 ‘낳은 정보다 기르는 정’을 지닌 엄 씨의 ‘힘’이다. 이 ‘힘’은 아주 의미심장한 것으로 상당한 재력, 그리고 그것보다도 자금을 조달하는 능력, 발군의 기획력과 실행력, 언론계·재계·정계 등을 움직이는 설득력 등이 혼연일체가 된 것이다.
엄 씨의 도서관운동은 우선 1951년 6월에 고향인 울산에 사립 도서관을 창립하면서 시작된다. 장서 3천 권에 불과한 조촐한 도서관이었지만 한국에서는 최초의 무료 도서관이었다. 엄 씨는 순회문고용 상자를 50개 정도 만들어 요소요소에 자전거로 배포하여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했지만 그것은 성공하지 못했다. “읽게 하고 싶다”라는 마음이 너무 강했기에 도리어 잘 되지 않았던 것이리라. 그러나 그는 이 실패에서 아주 귀중한 교훈을 얻어서 이후 마을문고를 성공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그 교훈은 문고 운영의 핵심인 ‘사람’을 중시하는 것이었으며 자주성(自主性) 자발성(自發性)을 존중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것은 그들의 강력한 원조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었다.
울산에서 물러나와 1953년에 경주에 도서관을 열고 그것을 읍립(邑立, 나중에 市立)으로 만들고 스스로 초대 관장을 지낸 10년 동안 그는 두 가지 중요한 일을 실행한다. 하나는 한국도서관협회(韓國圖書館協會)를 결성하고 1955년부터 1961년까지 초대 사무국장 겸 상무이사가 된 일이었다. 이 일은 경주의 관장으로 활동하면서 동시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또 한 가지는 말할 것도 없이 마을문고 운동이다. 마을문고 운동은 1960년에 구상하여 1961년에 시작했는데, 처음 2년간 생겨난 100개의 문고에 대해서는 사재를 털어 책장과 책 수십 권을 제공했다.
실은 이 책장이 마을문고 운동의 성공의 열쇠다. 1980년에 간행된 「마을문고 운영과 활동 사례」에도 상세하게 그 제작 방법이 실려 있는데, 이 자료에 따르면 엄 씨 자신이 고안하고 설계하여 형무소에서 염가로 제작한 책장은 높이 135센티미터, 폭 91센티미터, 깊이 28.5센티미터, 유리창이 달린 문짝, 2개의 서랍이 달려 있는 것으로, 약 2백 권의 책을 꽂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소도서관(小圖書館)’이며, 마을문고의 상징이기도 하다. 수천 권의 장서를 갖고 있는 큰 문고로 성장한 곳도 어김없이 이 책장이 한 구석에 놓여 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상당히 많은 문고가 활성화되어 있지 않지만, 어쨌든 이 책장과 마을문고본부에서 간행하여 무상으로 배포한 아주 실용적인 책 수십 권이 들어가 있다. 그래서 누군가 “해보자”라는 마음을 일으키면 틀림없이 생기를 띄게 된다.
이야기를 다시 돌리면, 1961년에 서둘러 사단법인 마을문고본부를 창립한 엄 씨는 “고향에 미니도서관(ミニ圖書館)을 만드십시오”라는 민간운동과 자치체에 마을문고를 만들도록 하는 운동을 정력적으로 전개했다. 자치체가 책을 제값에 출판사에서 구입하고, 운송과 배포를 맡도록 하는 ‘묘수’를 짜내었다.
그러나 엄 씨는, 문고가 과다한 보호에 빠지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면서 지역의 도서 구입 자금을 자주적으로 조달하도록 하는 기운을 북돋는 일에도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양과 질 모두 급성장
국민적 고양의 시기라는 것도 있었을 터이다. 이 운동은 비상한 형세로 퍼져나갔다. 그래서 거의 18년 사이에 거의 모든 마을에 문고가 생기게 되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책은 아주 부족했다. 1977년 미국 인디애나주립대학 도서관학 교수인 김중한(金重漢) 박사가 고국의 마을문고 운동의 실태조사를 실시하여 보고서4)를 제출했는데(1978년), 이에 따르면 3만5,011개 문고의 장서 총수는 285만 권에 불과했다.
이 조사 보고서는 전국에서 204개 문고를 표본으로 추출하여 장서수를 다섯 단계로 나누어 그 비율을 표시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0~99권까지 49개(24%), 100~199권까지 63개(31%), 200~299권까지 32개(16%), 300~399권까지 18개(9%), 400권 이상이 42개(20%)다.
이후, 마을문고 장서는 급증했다. 엄 씨 자신이 일본의 『독서추진운동読書推進運動』(독서추진협의회 기관지) 1979년 11월호(144호)에 「한국의 풀뿌리 독서추진운동―마을문고 활동의 현상韓國における草の根読書推進運動―マウル(村落)文庫活動の現状」이라는 글을 발표하는데, 여기에는 평균 110권이라고 쓰여 있다. 총 장서 수는 385만 권 정도가 될 듯하다.
그런데 새마을운동본부가 작성한 『SEAMAUL IN NEW AGE 1983』을 보면 635만 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1982년의 실정일 터인데, 5년 사이에 250만 권이 늘어난 것이다.
이렇게 장서가 급증한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는 정부 당국이 마을문고 운동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국책(國策)이며 국민운동이기도 한 새마을운동의 하나로 마을문고를 편입하고 1979년을 ‘마을문고의 내실을 다지는 해’로 정하여 육성에 힘썼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마을 주민이 자주적으로 마을문고를 충실히 하려고 한 분위기도 만들어진 것도 있고, 마을문고본부의 ‘실용서 출판 배포사업’이 궤도에 올랐던 점도 있었다. 이 사업에 대해서는 뒷부분에서 언급하겠다.
농촌 마을의 문고를 방문
여기서 우리가 방문했던 농촌 마을의 문고 하나를 소개해보자. 경기도 김포군은 서울공항도 있는 곳이고, 남북 경계선에도 접한 곳이기도 한데, 그 중에서 대곶면 대능리(大陵里)의 한 마을, 호수는 30호, 주요 작물이 벼와 포도인 함배5)라는 곳의 마을문고가 그것이다. 신축한 지 1, 2년쯤 되었다고 생각되는 대능 5리 마을회관의 왼쪽 3분의 1 정도가 문고 전용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2칸 또는 2칸 반 정도, 어림잡아 10다다미(疊)6) 정도의 넓이다. 삼면의 벽(일부는 창이 있다)에는 중간 정도의 2단 혹은 3단의 철제 서가가 있고, 그 아래는 베니어합판으로 하나하나 칸막이를 친 책상(15석)이 있다. 형광등이 달려 있고 바닥은 온돌로 되어 있다. 장서는 1,320권, 1983년의 도서 구입비가 90만 원, 그 중에서 60만 원은 지역 주민이 낸 것이고, 강화군이 20만 원, 약방을 운영하는 군(郡) 지부장이 10만 원을 낸 것이라 한다. 환율을 계산하면 원(圓)은 엔(円)의 약 3분의 1 정도 되는데, 버스와 지하철을 110원으로 탈 수 있고 B6판의 실용서 등도 수백 원으로 살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놀랄 만한 도서 구입비다. 그래서 아동용 백과사전 전질(8만 원) 같은 것도 갖추고 있다.
안내를 맡은 군(郡)의 문고운동 담당자의 이야기에 따르면, 250개 문고 중에서 이 정도의 공간과 장서를 갖춘 것이 22개 있으며, 조금 작지만 상당한 수준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또 22개 있다고 한다.
문고 조사를 위한 여정이 아니었기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듯한 사진밖에 찍지 못했는데 이 사진을 보면 서가와 책상의 모습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고 없이 방문한 것이어서, 소년 한 명이 책상을 향하고 있는 채로 찍은 것이다.
*중앙이 엄대섭 씨, 왼쪽 두 사람은 군의 마을문고 담당자, 오른쪽이 나미에 켄과 부인.
--『도서관 그리고 민주주의図書館そして民主主義―浪江虔論文集』, 마치다자치연구센터, 1996년, 194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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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령은 출판 배포 활동
마을문고의 전국적인 보급에 성공한 후, 엄 씨가 좋든 싫든 몰두하게 된 것은 진짜 유용한 책을 제공하는 문제였다. 당시 출판 판매되고 있는 책의 대부분이 마을문고를 이용하는 마을 주민에게는 적합한 도서가 아닌 것은 분명했다.
이 점에서도 엄 씨는 멋진 아이디어를 만들어냈다. 가장 중요한 점은 만화와 거기에 덧붙여져 있는 글만 읽어도 일단 이해할 수 있는 ‘만화 농서(マンガ農書)’(앞에서 언급한 『독서추진운동』에서 엄 씨 자신이 사용하고 있는 단어)의 간행이었다. 전문학자에게 아주 실용적으로 알기 쉬운 원고를 집필하도록 하고, 일류의 만화가에게 책 내용을 잘 파악한 후에 그 핵심을 만화로 그리도록 하여, 엄 씨는 더없이 곤란한 두 가지 과제를 멋지게 해결했다. 마을문고운동본부에서 “그림으로 설명된 최신 농업기술, 알기 쉬운”이라는 공통의 형용 어구를 붙인 ‘만화 농사’를 계속해서 간행했다.
1973년에 『벼키우기』를 시작으로 한 20종, 1974년에 『농작물 병충해 예방법』 등 16종, 1975년에 『월별 농가 기술』 등 6종, 합계 42종이 나와 있다. 놀랄 만한 스피드인데, 그 중에서 예를 들면, 『가축의 병』 을 보면 본문 173페이지 중에서 만화가 117페이지, 사진이 5장 들어가 있다. 만화의 글은 대부분 회화로 이루어져 있다. 농업 이외의 실용서도 간행하는데, 『생활인의 법률 상식』이라는 것도 있다. 시리즈 중에서 두꺼운 것은 본문이 264페이지가 되는데 그 내용에서도 회화가 들어가 있는 만화가 106페이지가 된다.7)
1979년의 시점에 마을문고운동본부가 간행하여 전국의 문고에 무상 배포했던 이런 종류의 책은 48종 120만 권이었다. 이후에도 이 일은 계속해서 이어져서 우리가 방문했던 사무실의 지하에는 천장까지 닿을 정도로 책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이러한 내용의 책을 모든 문고에 배포했던 것이 어떤 효과를 거두었을까 하는 것은 지금부터 우리가 연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항이다. 지금 단계에서 가볍게 말할 수는 없어도 이 정도로 서민의 생산 활동과 생활 행동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는 도서관운동이 일본에는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을 듯하다.
부기: 엄 씨는 마을문고 운동의 공적으로 1980년도에 막사이사이 상을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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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역주. 나미에 켄은 이 여행 이후, 1984년 6월에 일본도서관협회에 ‘마을문고조사연구임시위원회’를 설치하고 1985년 5월 1차 조사단, 1985년 11월에 2차 조사단을 이끌고 방한, 현장 조사를 실시하였고, 1987년에 일본도서관협회 마을문고조사연구임시위원회日本図書館協会マウル文庫調査研究臨時委員会의 이름으로 『마을문고조사연구보고서マウル(村落)文庫調査研究報告書』를 펴냈다.
2)역주. 나미에 켄은 이 글에서 본부(本部), 사단법인 마을문고본부(社団法人マウル文庫本部), 마을문고운동본부(マウル文庫運動本部)와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마을문고 관련 단체의 이름은, 『새마을문고운동 40년사 1961~2000』(새마을문고중앙회, 2001, 편찬위원회 위원장 이용남)에 따르면, 1961.2.11. 농어촌마을문고보급회, 1962.7.11. 마을문고진흥회, 1968.1.15. 마을문고본부, 1982.11.29. 새마을문고중앙회로 그 명칭이 변화해왔다. 나미에 켄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에는 이미 단체 이름이 새마을문고중앙회로 바뀐 이후이나, 나미에 켄은 ‘마을문고본부’에 익숙하여 ‘본부’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3)역주. 農山漁村文化協會(のうさんぎょそんぶんかきょうかい) '농문협'은 1940년 3월 25일 창립. 나미에 켄은 이 협회의 상무이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2013년 4월 1일부터 일반 사단법인체가 되었으며, 지금도 농업 분야의 책과 잡지 등을 출판하고 있다. 참고 http://www.ruralnet.or.jp/
4)역주. 김중한, 「마을文庫運營과 利用者에 關한 硏究: 풀브라이트-헤이즈 프로그램 硏究報告書」, 서울: 마을문고본부, 1978.
5)역주. ハムペ라고 표기되어 있음, 함배(含盃)일 듯.
6)역주. 일본에서는 방의 크기를 다다미 장수로 나타내는 경우가 많은데, 1다다미(疊)는 일반적으로 180×90㎝라고 한다.
7)역주. 여기서 말하는 책의 제목은 확인이 필요하다. 국회도서관 온라인 검색을 통해 확인해보면, 마을문고본부가 1979년에 간행한 것으로 최병욱이 지은, 『생활인의 법률 상식: 가정편』 『생활인의 법률 상식: 재산편』 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이 나미에 켄이 말하는 책일 듯한데, 불분명하다. 또한 『월별 농가 기술』 『가축의 병』 등의 책 제목은 일본어를 번역한 것일 뿐, 정확한 책 제목인지 확인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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