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5월 27일 월요일

아이히만, 그리고 한국의 보통 가장들

아이히만, 그리고 한국의 보통 가장들-<악의 평범성에 관한 보고서>는 아직도 유효하다

<모래시계 古今- 5.31> 1962년 5월 31일 '어느 평범한 가장(家長)'이 처형당한다. 이름은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

아이히만은 1906년생. 그가 오스트리아 나치당에 입당한 것은 1932년. 오스트리아
에서 나치당이 불법화하자 독일로 가서 계속 활동하였다.

아이히만은 유대인의 언어인 이디시어에 능통했기 때문에 유대인이주국 책임자가 되었다가 계속 출세 가도를 달려 나중에는 국가안보경찰본부의 유대임 담당 책임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독일 점령 하의 유럽에서 유대인 탄압과 학살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 아이히만이 1942년 나치에서 복무할 당시의 모습(왼쪽)과 이스라엘에서 재판을 받을 무렵인 1961년 모습.
사진 출처: http://www.dhm.de ⓒ
독일이 패전할 무렵, 진주한 미군에게 체포되었으나 탈출하였다 그 후 아내와 세 아들을 데리고 아르헨티나로 도주, 리카르도 클레멘트라는 가명을 쓰며 부에노스 아이레스 근처의 자동차공장에서 기계공으로 숨어 살았다.
그러다가 1960년 5월, 유대인 학살의 책임자를 끈질기게 추적하던 이스라엘의 비밀정보부 모사드의 요원들에게 체포되어 이스라엘로 강제 연행되었다.

1961년 4월부터 시작된 재판 과정은 다른 무엇보다도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Eichman in Jerusalem: 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 1963년)로 널리 알려진 바 있다.(몇 해 전, 출판 일을 하고 있을 때 이 책을 번역 출간하고자 하였으나 끝내 출간하지 못했다. 하루 빨리 출간되기를 기대한다)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을 통해 이스라엘 측 검사 기데온 하우스너와 아이히만의 독일인 변호사 로베르트 세르바티우스의 논전은 국제법(이스라엘 정보부의 아이히만 납치는 국제법 위반이다)과 재판 관할권(예루살렘 법정의 편파적 구성 문제), 집단 살해와 관련한 이들을 처벌하는 것에 대한 시효문제 등 다양한 문제가 제기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논란이 있었지만, 1961년 12월 15일, 예루살렘의 법정은 아돌프 아이히만에게 인도에 대한 죄를 적용하여 사형을 언도하였고, 1962년 5월 31일 마침내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대량학살의 토양을 들춰 낸, 한나 아렌트의 문제 제기

아이히만이 대량 학살(genocide)의 책임자라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겠지만, 아이히만이 문제적 인물이 되었던 까닭은 한나 아렌트의 문제 제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 옳은 듯싶다.

일종의 방청기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통해 아렌트가 제기한 문제는 부제에서 보듯이 '악의 평범성'이라는 것이었다.

아이히만은 단지 당과 조국에 대해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평범한 관료였을 뿐이라는 게 아렌트의 관찰이었다.

악의 평범성!
이 문제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악한(惡漢)들이 괴물처럼 생겼거나 악마의 형상을 한 인간이 아니며, 실은 아주 평범한 인간들이라는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에게서, 자기에게 주어진 일이 이 세계에 어떤 공적인 의미가 있는 것인가 하는 반성적 사고를 전혀 하지 않은 채 단지 맡은 일만 열심히 하면 된다는 식으로 생활하는 이들의 면모를 보았던 것이다.
집단 학살의 책임자였던 아이히만이 악마적인 존재가 아니라, 아내와 아이들에게도 충실했던 아주 평범한 가장이었다는 것은 우리도 곱씹어 보아야 할 듯싶다.

자기 중심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개인들이 전체주의를 만들어낸다는 것, 맹목적인 충성과 아무런 반성적 사고 없이 일에 몰두하는 것이 사회와 역사에 크나 큰 죄악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정치철학적인 문제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맹목적인 관료, 지시에 따라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는 기계적인 인간인 아이히만은 바로 우리의 이웃일 수도 있고, 바로 나 자신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아이히만에 대해 이야기하면, 흔히들 고문기술자 이근안과 같은 존재를 떠올려 왔다. 그러나 과연 이근안과 같은 존재만이 아이히만과 닮아 있을까.

오늘 우리는 이 '게이트'가 바로 저 '게이트' 같은, 게이트들이 계속해서 터져 나오는 것을 보고 있다. 이른바 권력 비리라는 것이다. 권력 비리가 계속되는 것은 분명 비리를 저지르는 사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비리가 가능하도록 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바로 비리를 저지르고 있는 사람들의 청탁과 압력에 굴복하는 '평범한 가장들'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가족 중에 무슨 교통사고라도 나면, 누구 '힘있는 사람'을 찾아 나서는 우리들 평범한 시민들 때문이 아닐까. '힘있는 사람'들의 전화 한 통화에 혹시 눈에 보이지 않는 불이익이라도 당하지 않을까 마음졸이며 알게 모르게 힘을 써주고 다른 곳으로 전화를 돌리는 아주 평범한 가장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위에서 내려온 지시이니까 그것이 부당하다 하더라도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은 채 그냥 사무적으로 빈틈없이 처리하기만 된다고 생각하는 인간, '아이히만'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 사회 내부의 '아이히만', 그 악의 평범성에 종지부를 찍지 않는 한, 권력 비리는 계속될 것이고, 부정 부패는 근절되지 않을 것이다.

내 마음속 초모룽마, 눈앞의 북한산…

  
 ▲ 초모룽마.
사진 출처: www.project-himalaya.com ⓒ
 
 

<모래시계 古今- 5.29> 1953년 5월 29일 당시 서른세 살의 에드먼드 힐러리와 네팔인 세르파 텐징 노르가이가 세계의 최고봉 에베레스트를 '정복'하였다. 이를 기념하는 갖가지 행사가 네팔에서 열리고 있다.

최근의 외신 보도에 따르면 힐러리의 아들 피터 힐러리와 텐징 노르가이의 손자 타쉬 왕축 텐징이 다른 이들과 함께 줄지어 에베레스트에 올랐으며, 미국의 내셔널 지오그래픽 방송이 이들의 등정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소식을 접하면서 웬일인지 내 가슴 깊숙한 곳에서는 눈물이 흘러나온다. 슬픔의 눈물이!

단독산행으로 유명한 등반가인 라인홀트 매스너는 <산은 내게 말한다>에서 이렇게 말했다. "더 높이 오를수록 나 자신을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된다. ……나는 에베레스트 산이든 어떤 산이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산에 올라야겠다는 야망 때문에 산에 오르는 것은 아니다"라고.

순수한 열정에 사로잡힌 인간의 말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자신을 더 깊이 들여다본다는 선적인 혹은 영적인 목적이라면 굳이 에베레스트를 택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우리는 매스너보다 더 깊이 자신을 들여다본 이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또한 1924년에 에베레스트 정상을 향해 떠난 뒤 행방불명된 산악인 조지 멀로리는 "산이 거기에 있으니까"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과연 에베레스트가 거기 있기 때문에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것일까.

나는 묻는다. 왜 사람들은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에 오르려 했는가. 왜 오르려 하는가 하고.

우선 오늘날 우리가 일상 용어로 쓰고 있는 등산(登山)이라는 말에 대해서 생각해보아야 한다.
등산은 산에 오르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행위를 말한다. 이 말은 물론 이전부터 쓰인 용례가 있지만, 지금 우리가 쓰는 뜻의 등산이라는 말은 서양의 알피니즘(영어의 alpinism 프랑스어의 alpinisme, 독일어의 alpinismus 등)을 번역한 말이다.

알피니즘이란 유럽의 지붕인 알프스산을 '정복'한 역사와 관련이 있으며 그것은 철저하게 근대적인 자연관, 즉 자연이 정복의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현재와 같은 의미를 가진 등산이 이루어진 것은 1760년 스위스의 자연과학자 H.B.소쉬르가 프랑스의 샤모니를 방문하고, 알프스의 최고봉 몽블랑의 첫 등정에 현상금을 걸었고 1786년 의사인 M. 파카르와 J.발마가 몽블랑 등정에 성공함으로써 알프스 등산의 막이 올랐다고 한다.

'알피니즘'의 기원은 이렇듯 현상금과 관련이 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순수한 목적으로'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사람은 없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정상에 선 산악인들은 깃발을 흔든다. 그 깃발은 국기이거나 혹은 자신을 후원해준 기업과 언론 매체의 깃발이다.

세계 최고봉에 에베레스트라는 이름을 붙이고 여기를 경쟁적으로 오르고자 했던 이들은 영국인들이었다. 에베레스트를 '정복'하고자 했던 그들의 의식은 다름 아닌 식민지를 개척하려고 하는 제국주의자의 모험심이며 도전의식일 것이다.

에베레스트의 원래 이름은 '초모룽마(Chomolungma)'이다.
초모룽마라는 말은 초모(Chomo)는 여신, 룽마(Lungma)는 산골짜기. 우리말로 하자면 '대지의 여신'이라고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노자가 <도덕경> 제6장에서 말한 "곡신불사, 시위현빈(谷神不死, 是謂玄牝 골짜기 신은 영원불멸하여, 이를 신령스러운 암컷이라 이르고) 현빈지문, 시위천지문(玄牝之門, 是謂天地根 신령스러운 암컷의 문을 하늘과 땅의 근원이라 이른다)"고 했을 때의 그 '곡신'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해도 좋을 듯싶다.

이런 뜻을 가진 초모룽마가 에베레스트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인도를 지배하던 영국이 히말라야를 측량하면서 세계 최고봉에 당시 식민지 인도의 측량 담당관이었던 조지 에베레스트(George Everest)의 이름을 붙이면서부터다.

사실 이것은 우리의 고유한 지리 개념인 '백두대간'에 일본인들이 태백산맥과 같은 '산맥'의 이름을 붙인 것과 마찬가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아직도 우리의 교과서에 실려 있는 여러 산맥이 우리가 우리 나름으로 우리의 국토를 바라보던 시각을 표현하던 <산경표>다운 이름을 되찾아야 하듯이 에베레스트는 대지의 여신 '초모룽마'라는 이름을 되찾아야 한다.

이것은 단지 이름을 되찾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름을 바꾸어 부른다는 것은 세계관의 변화를 의미한다. 그것은, 자연이 정복의 대상이라는 서구의 근대 합리주의적인 자연관, 기계적 자연관, 일직선의 자연관에서 자연이 우리들 삶의 근원을 이룬다는 자연관으로의 회복을 의미한다.
단지 산꼭대기에 한번 발을 디딘다고 해서 그것을 정복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은 자연을 정복할 수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인간은 자연 속의 인간이다.

자연 속의 인간은 산을 정복하지 않는다. 산에 들어간다. 산에 들어가 속세의 온갖 때를 벗고 산을 닮기 위해 마음을 닦는다. 등산이 아니라 입산(入山)이다. 하지만 산에 오르며 나는 본다. 펄럭이고 있는 플래카드, '입산금지'라고 씌어져 있는 플래카드를. 산사에 몸을 담고 있는 스님들조차도 등산은 할 수 있어도 입산은 안 된다. 등산과 입산의 뜻이 뒤집어져 있는 것이다.

올해는 국제연합(UN)이 정한 '세계 산의 해'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두 산 사람이다(We are all mountain people)", 이것이 '세계 산의 해'의 표어이기도 하다. 산이 높든 낮든, 우리는 모두 산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산 사람인 우리들이, 세계 최고봉을 에베레스트가 아니라 초모룽마로 바라보는 시각은 이 땅의 현실에서도 중요하다.
지금 서울 외곽순환도로를 뚫으면서 북한산 관통도로를 내려고 하고 있다. 직선적 자연관, 개발 우선의 자연관과 인간의 삶을 품고 있는 존재로서 자연을 대하는 자연관이 충돌하고 있다. 북한산을 지켜내려고 하는 시민단체의 시각은 바로 에베레스트를 초모룽마로 바라보는 시각인 것이다.
북한산은 서울 시민의 '초모룽마'이다.

내 마음속의 초모룽마여, 눈앞의 북한산이여,
부디 우리의 눈물을 거두어 주시길!

2002년 5월 25일 토요일

꽃밭에 물을 주는 마음을…

<모래시계 古今- 5.28> 1989년 5월 28일 오후 1시 30분 경, 장소는 연세대 도서관 앞. 건너편의 학생회관 안쪽에 있던 사람들이 플래카드를 펼치면서 밖으로 뛰쳐나왔다. 바로 그 때 핸드마이크를 든 한 사람이 선언문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겨레의 교육성업을 수임 받은 우리 전국의 40만 교직원은 오늘 역사적인 전국교직원 노동조합의 결성을 선포한다. 오늘의 이 쾌거는 학생, 학부모와 함께 우리 교직원이 교육의 주체로 우뚝 서겠다는 엄숙한 선언이며 민족 민주 인간화 교육 실천을 위한 참교육 운동을 더욱 뜨겁게 전개해 나가겠다는 굳은 의지를 민족과 역사 앞에 밝히는 것이다."

핸드 마이크를 든 채 선언문을 낭독하고 있던 이는 윤영규 당시 전교조 위원장.
서울의 주요 대학이 전경들에 의해 이미 봉쇄된 상황에서 기습적으로 거행할 수밖에 없었던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결성식 장면이다.

  
 ▲ 지난 89년 전교조 강원지부 속초지회 개소식 장면.
사진 출처: 전교조 속초.고성.양양지회 홈페이지.
www.ktu-sokcho.or.kr ⓒ
 
 
한국의 교육노동운동은 1980년 광주민중항쟁 이후 본격화되었다. 숱한 해고와 투옥의 탄압이 있었지만 이것을 이겨내고 마침내 노조를 결성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노태우 정권은 전교조를 불법으로 규정하였고, 노조에 가입한 교사들에게 탈퇴를 요구했다. 그리하여 1500여 명의 '선생님'들이 해직의 길을 택했다.

이후 김영삼 정권 때인 1994년 1491명의 선생님들이 복직했고, 1999년 7월 합법화되었다.

그리고 2002년 4월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는 전교조 해직교사들을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인정함으로써 전교조 해직교사에 대한 역사적인 명예회복도 이루어졌다.

전교조의 역사를 이렇게 몇 줄로 줄일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몇 줄로 줄여 쓰게 된 기록이지만, 이 기록 속에는 선생님들과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전교조가 결성된 지 오늘로써 13돌.

십여 년의 시간을 거치면서 전교조가 교육 개혁과 사회 개혁을 위해 이루어낸 것도 적지 않다. 그러나, 오늘 전교조 앞에 놓인 과제도 결코 만만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교육 현장에도 불어닥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물결은 선생님들을 더욱 힘들게 만들고 있다. 교육 현장은 교육의 민주화를 이룸으로써 공교육을 지켜내고자 하는 선생님들과 이런 선생님들의 열망과는 상관없이 교육 시장화의 정책을 추진하려고 하는 이들 간의 치열한 대결장인 것처럼 느껴진다. 오늘도 계속해서 '선생님'의 피와 땀과 눈물 그리고 투쟁의 행진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묻는다. 아, 언제 우리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려나 하고. 언제 조기 유학, 교육 이민이라는 광풍(狂風)이 잠잠해질 수 있겠는가 하고. 언제 교육재정이 충분하게 마련되고, 언제 사학비리를 근절시킬 수 있는 사립학교법이 만들어지려나 하고. 언제 자라나는 아이들이 입시 경쟁에서 벗어나 더불어 사는 삶의 지혜를 맘껏 배울 수 있게 되느냐고.

아주 오래 전에 읽었던 시집 한 권을 다시 꺼내어 읽는다. 1989년 12월 당시 전교조 광주시지부 편집실의 손동연, 최승권 두 분이 펴낸 <교과서와 휴전선>이라는 시집이다.
이 시집에 실린 시 가운데 김시천 선생님의 '아이들을 위한 기도'를 읽어본다.



당신이 이 세상을 있게 한 것처럼
아이들이 나를 그처럼 있게 해주소서
불러 있게 하지 마시고
내가 먼저 찾아가 아이들 앞에
겸허히 서게 해주소서
열을 가르치려는 욕심보다
하나를 바르게 가르치는 소박함을
알게 하소서
위선으로 아름답기보다는
진실로써 추하기를 차라리 바라오며
아이들의 앞에 서는 자 되기보다
아이들의 뒤에 서는 자 되기를
바라나이다
당신에게 바치는 기도보다도
아이들에게 바치는 사랑이 더 크게 해주시고
소리로 요란하지 않고
마음으로 말하는 법을 깨우쳐 주소서
당신이 비를 내리는 일처럼
꽃밭에 물을 주는 마음을 일러주시고
아이들의 이름을 꽃처럼 가꾸는 기쁨을
남 몰래 키워 가는 비밀 하나를
끝내 지키도록 해주소서
흙먼지로 돌아가는 날까지
그들을 결코 배반하지 않게 해주시고
그리고 마침내 다시 돌아와
그들 곁에 순한 마음으로
머물게 하소서
저 들판에 나무가 자라는 것처럼
우리 또한 착하고 바르게 살고자 할 뿐입니다
저 들판에 바람이 그치지 않는 것처럼
우리 또한 우리들의 믿음을 지키고자 할 뿐입니다

2002년 5월 24일 금요일

독일 통일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독일 통일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1999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독일 작가, 귄터 그라스(Gunter Grass)가 5월 27일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게 된다. 중앙대 한독문화연구소와 주한독일문화원이 공동으로 주최하는 학술 심포지엄(5월 29~5월 30일, 중앙대 아트센터 대강당)에서 '독일통일의 교훈'이라는 제목으로 주제 발표를 할 예정이다.

지난 5월 8일자 프랑스 일간지 리베라시옹은 귄터 그라스가 황석영 씨와 함께 방북하리라는 보도를 했었고 국내 언론에서도 이 기사를 인용 보도한 바 있지만, 이 방북계획은 무산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이번 심포지엄 기간 중에 황석영 씨 등과의 대담은 이루어질 예정이다.

귄터 그라스라고 하면 독일의 현대문학사에서 전후 청년문학의 대표적인 집단인 '47그룹'의 멤버이며 , 무엇보다도 세 살에 성장이 멈춰버린 오스카의 눈을 통해 현실을 그리고 있는 <양철북 Die Blechtrommel>(1959)의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은 1979년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영화에 나온, 자폐증에 걸린 한 어린이의 형상은 지금도 내 뇌리에 뚜렷하게 남아 있다.
괴성을 지름으로써 유리창을 깨뜨린다. 그렇게 함으로써 일그러져 있는 성인들의 윤리, 그리고 '나치가 등장하고 패배하는 정치 현실'에 개입하는 어린이였다.

귄터 그라스는 위르겐 하버마스 등과 함께 독일 통일을 적극적으로 비판해온 작가로도 유명하다.

피해자의 민족주의, 가해자의 민족주의…그 경험의 차이는?

통일에 대한 비판! 우리처럼 '민족주의'의 틀이 강하고 거의 무조건적인 통일 지상주의가 횡행하는 나라에서는 무슨 일인가 싶지만, 권터 그라스를 비롯한 지식인들의 통일 비판에는 귀를 기울여야 할 점이 적지 않다고 생각된다.

귄터 그라스의 통일 비판의 논리는 독일이 과거 제1차,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제국, 배타적인 민족국가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마틴 발저와 논쟁 과정에서, 귄터 그라스는 독일 민족의 정체성을 강조했던 발저와는 반대로 아우슈비츠와 불가불의 관계에 있는 민족 감정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민족 감정에 바탕을 둔 통일은 비이성적인 불행을 재생산할 거라고 우려했던 것이다.

과연 독일이 통일하는 과정에서 민족 감정이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면밀하게 더 검토해야 하겠지만(민족 감정 없이 민족 통일이 가능한가라는 문제), 분명 현실은 귄터 그라스가 의도하고 주장했던 바와는 반대로 흘러갔다. 동독에서는 '우리가 인민이다'라는 자유에 대한 의지가 '우리는 한 민족이다'라는 자본주의에 대한 열망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그러나 독일이 통일한 지 벌써 십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 동안 독일 내부에서도 통일을 바라보는 시각이 많이 바뀐 듯하다. 왜냐하면 급속한 통일 과정을 겪으면서 원치 않았던 통일 후유증을 아주 심하게 앓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세계화 정보화로 말미암아 민족주의의 경계가 무너지는 시기에 살고 있다.
또한 한국 경제의 발전에 따라 저항적 민족주의의 긍정성보다는 민족주의의 배타성을 우려하는 상황에 이름으로써 민족주의 자체를 새롭게 받아들여야 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래서 지난 시기 한국인을 결속시켰던 민족공동체적인 의식이 갖는 편협성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여기 저기서 들리고 있는 것이다.

민족주의의 폐해를 '피해자'로서 경험했던 한국인과, 민족주의의 폐해를 '가해자'로서 경험했던 독일인의 현실은 다르다.

그러나 '피해자'의 민족주의가 '가해자'의 민족주의와 얼마나 다른 것일까 하는 점도 생각해보아야 할 시점에 이른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귄터 그라스가 우리에게 들려줄 '독일통일의 교훈'이 어떤 것일지 더욱 궁금해지는 것이다.

2002년 5월 23일 목요일

노동자의 권리, 월드컵에 묻혀야 하나

민주노총은 월드컵 개최에도 '굴하지 않고' 파업을 강행할 태세다.

5월 23일, 수도권에서는 종묘공원에서 명동성당까지, 충남에서는 천안역, 전북에서는 전북 코아 백화점 등에서 '총력투쟁승리 지역별 결의대회'를 가질 예정이다. 또 25일에는 부산시청 앞에서 지역별 파업집회를 연다고 한다.

이미 지난 20일 오전 11시, 민주노총은 집중파업과 대규모 집회를 열겠다는 기자회견을 한 바 있다.

노동탄압 중단, 노동조건 후퇴 없는 주 5일 근무제 도입, 국가기간산업 사유화 중단, 산별 교섭 수용 등을 요구하고 주장하기 위해서이다.

민주노총의 기자회견이 있던 다음날인 5월 21일,김대중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 월드컵은 어느 정권이나 정당의 차원에서 볼 것이 아니라 민족적 차원에서 봐야 한다”"100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기회인 월드컵 기간 중에는 단합하는 자세를 보여줘야 한다”
김 대통령은 또 "노동단체는 지금 해결되지 않는 것은 월드컵 대회가 끝난 후 해결하면 된다”며 국민은 정쟁, 노사분규를 중단하고 월드컵 성공에 힘을 모아주기를 바라고 있다고 덧붙였다.

노동자들이 파업할 수 있는 나라, 그런 나라가 선진국 아닌가

이미 '월드컵 파업'은 사회적 이슈로 각종 언론의 '뜨거운'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

<대한매일>은 5월 9일자 사설에서 '월드컵 앞두고 파업 안된다'는 제목 아래, "노조가 목적달성을 위해 파업을 선택할 수는 있지만 월드컵을 전후한 기간에는 자제해 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중앙일보>는 5월 13일자 "노동계, 월드컵 볼모 삼지 말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올림픽이 해외에 한국을 알리는 계기였다면 월드컵이야말로 선진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고 대외신인도를 제고할 수 있는 더 없는 기회다. 그런데도 노동계가 이처럼 엇나간다면 이는 집단이기주의의 발로가 아닌가"라고 비난했다.

<동아일보>는 5월 15일자 칼럼난에 예종석 한양대 교수(경영학)의 "월드컵을 볼모 삼지 마라"는 시론을 실었다. 예 교수는 이 시론에서 "요즈음 대한민국의 국위 선양은 최경주 박세리 박찬호 김미현 같은 젊은 스포츠 스타들이 도맡아하고 있다. 이 젊은 아들,딸들은 낯선 이국 땅의 온갖 악조건 속에서도 나라를 빛내고 있는데 우리는 안방에서 하는 큰 잔치를 가족의 이기심 때문에 망칠 지경에 와 있다. 그럴 수는 없지 않은가."라고 일갈했다.

<조선일보>는 5월 18일 사설에서 "월드컵 파업 최선의 자제력을"이라는 제목 아래, " 월드컵 개막을 앞두고 노동계 일부가 ‘총파업 불사(不辭)’를 선언하며 강경투쟁 노선으로 치닫고 있어 걱정스럽다. 전 세계인이 주시하는 월드컵 대회운영이 노·사의 물리적 충돌로 차질을 빚고, 축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 벌어지지나 않을까 우려된다. 손님을 맞는 주인의 도리가 아닐 뿐 아니라 그렇게 해서 형편없이 구겨진 나라의 체면은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라는 논리를 폈다.

월드컵을 통해 '성숙한 한국'의 얼굴을 보여주기 원한다면…

<한겨레신문>에서는 월드컵 파업과 관련한 눈에 띄는 사설을 싣지 않고 있다.

다만 2002년 5월 9일자의 '취재파일'에서 박민희 기자는 '어이없는 월드컵 노사평화선언'이라는 제목 아래, 월드컵을 앞두고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는 월드컵 노사평화선언이라는 행사를 소개하면서 노동부의 전시행정을 이렇게 꼬집었다.

"정말 사이가 좋다면 정말 서로를 존중하는 노사관계라면 정부까지 나서서 '선언'을 하도록 할 필요가 있을까. 발전파업에 참여했던 노조원들이 매달 월급의 절반 이상을 가압류 당하고 있고, 공무원노조를 결성했다는 이유로 징계, 수배당하는 공무원들이 있다. 감옥에는 단병호 민주노총 위원장을 비롯해 50명의 노동자가 갇혀 있고 같은 일자리에서 10년 넘게 근무하고도 '계약 해지, 재계약 안함'이라는 회사의 통보 한마디로 아무런 법의 보호도 받지 못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한숨도 끊이지 않는다. 이런 동원식 행사는 월드컵을 앞두고 서둘러 멀쩡한 보도블록을 바꾸고, 노점상들을 몰아내느라 부산을 떠는 것과 똑같은 전시행정의 표본이다. 노동부는 노사갈등이 이런 전시성 행사로 극복될 수 있다고 정말로 믿는 것일까?"

그런데, 기억을 되살리자면 지난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이 열릴 즈음 프랑스에서도 파업은 있었다.

그 해 6월 초의 각 일간지에는 연봉 삭감을 반대하여 월드컵 보이콧을 공약해온 프랑스 국영 항공사 에어프랑스 조종사들의 파업 강행 소식이 실려 있다.

당시 우리 나라의 언론들은 이들 조종사들의 파업 때문에 월드컵에 큰 차질이라도 생길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지만, 다 아시다시피 월드컵을 개최한 프랑스는 그들이 원하는 여러 가지 효과를 모두 거두었으며, 프랑스 축구 대표팀은 '아트 사커'라는 명칭까지 얻으며 우승을 차지했다.

프랑스 월드컵, 에어프랑스 조종사의 파업, 그리고 프랑스 축구팀의 우승….
이런 사실을 생각해보면 "월드컵 경기가 열리니까 파업은 안 된다"는 주장에는 뭔가 억지스러움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진정 프랑스의 힘은 월드컵의 성공적 개최, 그리고 우승에 있는 게 아니라, 월드컵과 노동자의 권리를 분리해서 받아들일 줄 아는 성숙한 시민의식에 있을 터이다.

노동을 하는 이들, 즉 노동자들이 마지막 수단으로 자신의 힘을 드러내는 방법은 역설적이지만 '노동을 하지 않는 것'이다.

노동자는 노동을 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 없는 존재다. 그래서 파업 즉 일에서 손을 놓는다는 것은 자신의 마지막 생존 수단을 걸고 싸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자들이 파업을 강행할 때에는 뭔가 절실한 요구와 주장이 있는 것이다.

나도 어지간히 축구를 좋아한다. 우리 나라 경기가 있으면, '코리아 팀 화이팅'을 외친다. 그러나 그 '코리아 팀'에는 파업을 할 수밖에 없다는 절박한 심정의 노동자들도 포함되어 있다.

축구장 안의 응원 소리로, 축구장 밖에서 울려퍼지는 노동자의 목소리를 억누르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노동자는 월드컵이 열리든 열리지 않든, 자신의 생존과 인간 존엄성을 위해 싸울 권리가 있다.

월드컵이 아니라 그보다 더 크고 중요한 대회가 열리더라도 노동자들이 파업을 할 수 있는 나라, 그런 나라가 선진국이 아닌가.

월드컵을 통해 성숙한 '한국의 얼굴'을 보여주기를 원한다고 말하면서 "월드컵 경기가 열리니까 파업은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이율배반이다.

2002년 5월 22일 수요일

방콕의 5·18… 광주의 5·18

2002년 5월 18일.
광주의 5·18묘지에는 `5·18민주화운동 22주년 기념식`이 거행되었다. 유명한 정치인들이 5·18 유족들과 함께 이 기념식에 참석했다는 보도가 전해진다.

17일엔 1980년 당시의 시위와 무력진압을 재연하는 횃불시위와 차량행진, 주먹밥 나누어 먹기와 함께 노래극 공연과 통일해원 상생굿도 열렸으며 5·18을 되새기는 각종 문화행사가 이어졌다.

이런 기념식과 행사를 보면, 5·18민주화운동은 이제 한국민주화 운동사의 한 장으로 조용히 그러면서도 확고하게 자리잡아 나가고 있는 듯이 보인다.

1995년 5·18특별법이 제정되었고, 1997년에는 5·18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무엇보다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주인공`이었던 김대중이 1998년 대선에서 승리하여 대통령이 되었고 벌써 임기 말년을 맏고 있다.

광주의 망월동 묘역은 깔끔하게 단장되어 추모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5월의 그날을 기억하려던 대학생과 청년들이 참으로 힘들게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찾아가야만 했던 망월동 묘역. 그곳에 여야의 유명 정치인들이 모여들어 추모식을 거행하는 모습을 보면 분명 달라졌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5·18 기념식과 문화행사에 대한 소식만으로 충분한 것일까.

"5·18을 왜곡한 그 언론인들이 변함없이 언론을 지배"

한겨레 신문 손석춘 기자가 몇 해 전에 쓴 칼럼에 이런 지적이 있었다.

"무엇보다 오월이 제기한 두 핵심적 과제는 미완으로 남아 있다. 먼저 미국의 존재다. 미국이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오월은 온몸으로 드러냈다. 분단체제와 독재정권 쪽에 미국이 서 있다는 역사적 진실을 피투성이로 증언했다. ……또 하나는 실질적 민주화다. 오월의 무장항쟁이 없었다면 6월 대항쟁은 불가능했다.……우리는 그해 오월의 민중들이 열망하던 민주주의를, 그날의 정의를, 오늘 구현하고 있는가. 아니다. 단적으로 5·18을 왜곡한 그 언론, 그 언론인들이 변함없이 언론을 지배하고 있지 않은가."(<5월의 고독>에서)

이런 지적을 되새겨 보면, 아직도 5·18은 광주의 오월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 부산의 광주, 대전의 오월, 서울의 꽃잎, 대한민국의 민주영령이어야 할 터인데 말이다.

1919년의 3·1운동이 중국의 5·4운동, 인도의 제1차 사티아그라하운동, 이집트의 반영자주운동, 터키의 민족운동 등 아시아와 중동의 민족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듯이, 5·18광주민주화운동(광주항쟁)은 태국, 필리핀, 미얀마, 인도네시아, 동티모르, 중국(천안문사태) 등 아시아 여러 지역의 민주화에 직간접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오늘 우리는 광주민주화운동 22돌이지만 태국에서는 방콕의 5·18 십주기였다. 방콕의 5·18,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태국은 오랜 왕권 국가였다. 그러던 것이 1932년 인민당이 무혈 쿠데타를 일으킴으로써 입헌군주제로 바뀌었다. 1932년의 개혁은 인권이나 민주주의와 같은 서구적 개념을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태국인들이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기존의 반동적인 세력 때문에 새로이 제기된 이념은 철저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입헌군주제`라는 절충적인 제도로 개혁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인민당 내부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에 정권 교체가 계속되었다.

입헌군주국가임에도 전통적으로 군부독재가 실시되어 온 상황에서 1988년 차티차이 춘하반(Chartchai Choonhavon)이 총리에 취임하자, 위상저하를 두려워하는 군부와 정부 간에 갈등이 계속되었다.

아무리 선거에 의해 문민정부가 들어선다 해도 권위주의적 문화가 존재하는 한, 지식인 계급과 중간계급의 눈에는 정부의 여러 정책이 부패와 부정행위의 결과로 드러나기 때문에 정부는 계속해서 정통성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던 것이다.
타티차이 춘하반의 문민정부도 혹독한 비판에 직면했으며 총체적인 부패 때문에 비판을 받았다. 정부의 부패는 군부에게 쿠데타를 일으킬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

1990년 11월 각군 사령관들이 개각에 불만을 품고 전원 국방회의에 불참함으로써 정부와 군부 간의 긴장이 고조되었는데 1991년 2월 순톤 군(軍)최고사령관이 1932년 이래 17번째의 쿠데타를 일으키고 아난드(Anand)를 총리로 하는 과도정부를 수립하였다.
아난드의 문민정부가 행정을 이양받은 후 여러 분야에서 다소 신임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1991년 10월에는 신군부의 실세인 수친다(Suchinda Kraprayoon)가 군최고사령관에 취임하였고, 1992년 4월에는 총리에 올랐다. 그는 총선에서 당선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총리에 올랐던 것이다.

우리가 오늘 찾아야 할 유골은 어떤 것인가…

마침내 1992년 5월 17일 수친다의 퇴진을 요구하는 대규모의 시위가 일어났다.

이 봉기에 각계각층의 수십만 국민들이 참여하였으나 군부는 시위대를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피의 오월(Bloody May)` 사건이 일어난 것이었다.

1992년 5월 17일부터 5월 20일까지의 `피의 오월`사태는 부미폴(Bhumipol)왕의 중재와 수친다 장군의 총리직 사임 후 망명으로 진정되었다. 그리고, 9월에 있었던 총선에서 반군부세력인 민주당이 승리하여 추안 리크파이가 총리로 선출되었다.

딱 10년이 지난 태국 `피의 오월` 사태를 22돌을 맞은 우리 나라의 `5·18광주민주화운동`의 경과와 비교해보면 한가지 뚜렷하게 대조되는 것이 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실패`했으나 방콕의 5·18은 `성공`했다는 점이다. 이 차이의 원인이 무엇인지, 우리는 똑바로 응시해야 한다.

당시 방콕에 특파되었던 한국일보의 최해운 기자는 1992년 5월 25일자 칼럼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언론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국민들에게 제대로 알려야 사태는 국민이 원하는 해결점을 찾을 수 있다. 소련사태에서는 군부가 언론을 통제하지 않아 정권탈취에 실패했고 광주사태 천안문사태 버마민중봉기는 언론이 입을 다물었기 때문에 민주화 요구는 군대에 비참하게 무릎을 꿇어야 했다. 태국사태는 언론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다시 한번 인식케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래서 우리의 언론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한다."

외신은 방콕의 5·18 십주기를 맞아 유골을 찾고 있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우리가 오늘 찾아야 할 유골은 무엇일까.

2002년 5월 21일 화요일

행복한 아라비아로 가는 길

모카커피로 우리에게 더 친숙한 나라, 전설과 같은 시바왕국의 역사를 간직한 나라 예멘, 오랜 분단의 아픔을 간직한 남북예멘이 1990년 5월 20일 통일했다.

남북 예멘의 통일은 거시적으로 보면 탈냉전이라는 세계사적인 흐름 속에서 이루어진 통일이지만, 예멘 나름의 특수성도 없지 않았던 통일이었다.
그 특수성을 잘 들여다보면, 동∙서독 통일 과정보다도 훨씬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을 터인데, 우리는 아직 남북예멘의 통일에 대한 탐구는 활발하지 않은 듯싶다.

우선 예멘이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를 잇는 매우 중요한 지정학적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 대륙과 해양을 잇는 반도 국가인 우리와 닮아 있다.

예멘은 해상 실크로드의 중요한 거점 국가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 나라의 역사에는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과 그에 대한 응전이 있었다. 오랫동안, 이 나라는 아라비아 지역의 패권국가였던 오스만투르크의 지배를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투르크가 패전했을 때, 승전국 영국의 분리정책에 따라 북예멘만 독립하였던 것이 분단의 씨앗이었다.

영국 총독의 지배를 받던 남예멘이 반영투쟁을 전개하던 남예멘해방전선과 인민해방전선 등의 세력의 힘으로 독립한 것이 1967년.
아랍민족주의를 지향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북예멘과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표방하는 사회주의 체제의 남예멘은 남북한, 동서독, 남북베트남과 같은 분단국이었던 것이다.

각기 정통성을 주장하며 상대방을 통합하려는 시도가 계속되어 1979년에는 전쟁을 치를 정도로 관계가 악화되기도 했지만 주변 아랍 국가의 중재로 평화 협상도 계속되었다.
되풀이되는 갈등 속에서도 통일의 노력이 지속될 수 있었던 까닭은 언어, 종교의 동일성이라는 밑바탕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직도 이 문제의 정답을 찾고 있는 과정에 있다

남북전쟁 이후 1980년 남예멘에 온건파인 나세르 모하메드가 집권하면서 통일 무드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1981년에는 북예멘 살레하 대통령이 남예멘을 처음으로 방문하였고 남북을 통합하는 것을 밝힌 '아덴협정'이 체결되었다.
1986년에는 남예멘에서 체제를 고수하려는 강경파가 쿠데타를 일으키기도 했지만 탈냉전의 세계사적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마침내 1989년 정상회담을 통해 통일 헌법을 승인하였고, 1990년 5월 22일에는 남북예멘이 통일했다는 것을 전세계에 알렸다.

그러나 남북예멘은 1994년 5월 내전에 휩싸이고 만다.

내전의 원인은 정치적인 통합만을 우선시하면서도 정치적인 불안정이 계속되었다는 점, 국유화되었던 기업과 토지를 사유화하는 과정에서 옛 소유자들이 소유권을 주장하는 등 경제적인 문제가 표출되었다는 점, 이슬람 문화를 사회적 문화적 통합의 기초로 삼으려는 북예멘 주민과 사회주의 실험을 통해 전통문화의 한계를 넘어선 남예멘 주민 사이의 사회문화적 갈등, 형식적으로만 군사적 통합을 이룸으로써 통수권이 일원화되지 못했던 점 등이었다.

또한 통일된 에멘은 석유개발로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1990년 8월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는 걸프전 발발이라는 국제 정세도 작용했다.
이라크를 지지했던 예멘은 걸프전 이후 경제가 악화된 이라크로부터도 원조를 받지 못하였고, 미국, 사우디 아라비아, 쿠웨이트 등 연합군의 경제적 보복도 받았던 것이다.

1994년 7월 7일, 북예멘군이 남예멘군의 최후 거점 아덴을 함락하여 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무력 재통일이 이루어진다. 지금 통일된 예멘의 주민들은 '행복한 아라비아(Arabia Felix)'라는 옛 명성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불완전한 통일에서 비롯된 유혈 내전까지 겪은 예멘은 이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인 우리에게 숱한 교훈을 일러주고 있다.

우선 언뜻 떠오르는 것으로 사회 문화적 교류와 통합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생각해볼 수 있다. 누가 통일 이후의 대통령이 될 것인가 따위의 형식적이고 외형적인 것보다 주민과 주민이 서로 손을 맞잡고 만나 이해하는 실질적인 통일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다음은 어느 인터넷 사이트에서 찾은 윤리 문제 가운데 하나다. 우리는 아직도 이 문제의 정답을 찾고 있는 과정에 있다.

<문제> 예멘의 통일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① 정치 제도적인 통합이 가장 중요하다.
② 북한보다 우월한 경제력을 확보해야 한다.
③ 남한과 북한주민들간의 스포츠 교류가 우선되어야 한다.
④ 정치, 경제, 사회 등 전반적인 통일이 될 수 있어야 한다.
⑤ 군사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어야 불리해도 통합되지 않을 수 있다.

'생리대로 만든 드레스'가 묻는다

1957년 5월 19일, 한국에서 처음으로 미스코리아 선발대회가 열렸다. 장소는 서울 시립극장.

올해도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는 5월 19일 오후 6시 30분부터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렸다. 그러나 올해 열린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는 특별한 점이 있었다.

미스코리아 선발대회가 공중파 방송에서 '퇴출'되었다는 점이다. 1972년부터 2001년까지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는 지상파 방송의 붙박이 프로그램이었다.

그러나 올해부터는 케이블 텔레비전과 인터넷을 통해서만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미스코리아 선발대회가 공중파에서 '퇴출'된 것은 한국사회에서 여성의 힘이 커졌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여성계는 여성의 성을 상품화하는 데 공중파가 나서지 말 것을 주장해왔는데, 이것이 받아들여진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바버라 크루거의 작품 <무제(너의 몸은 전쟁터다)>,1989. 여성의 성 상품화 등의 문제를 담은 작품이다.
사진 출처: <미술로 보는 20세기>(이주헌 지음, 학고재 펴냄) ⓒ
1999년부터 여성단체는 '안티미스코리아 페스티벌'을 개최하였다.
'안티미스코리아 페스티벌'을 통해 여성 자신의 시각으로 본 여성의 아름다움을 말하겠다는 의지를 표출하였다.

사실,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라고 하면 33-24-33이라는 수치가 떠오르게 마련인데, 이런 식으로 여성의 아름다움이 획일화될 수는 없다는 점에 대해서 안티미스코리아 페스티벌은 문제를 제기했던 것이다.


4회째를 맞은 '안티미스코리아 페스티벌'.
지난 5월 11일 남대문 메사 팝콘 홀에서 열렸다. 이번 페스티벌에서는 월드컵에 즈음하여 '운동하는 여자가 아름답다'는 것을 기치로 내걸었다.
시각장애우들의 스포츠댄스와 철인3종 경기를 하는 할머니, 아마추어 복싱을 즐기는 여대생 등 다양한 이들이 이번 페스티벌에 참가했다.

여성신문 5월 17일자에는 안티미스코리아 페스티벌에 참가한 이들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것은 생리대로 드레스를 만들었다는 성미광 씨의 인터뷰였다.

성미광 씨는 행사장 한가운데 여성의 자궁이 연상되는 미술 작품을 설치했다. 일견 불결한 느낌을 줄 수 있는 생리대로 여성이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욕망의 상징물인 드레스를 만듦으로써 여성, 몸, 아름다움, 생리에 대해 새로운 의미를 드러내 보이고자 하였던 것이다.

미스코리아 선발대회가 획일화된 남성의 시각, 자본의 시각에서 바라본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대회라면 안티미스코리아 페스티벌은 여성 자신의 시각에서 여성의 아름다움은 어떤 것인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하고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생리대로 만든 드레스를 보면서, 우리는 생리는 불결한 것이 아니고, 드레스라는 '상징물에 붙어 있는 욕망'이 추하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이 심각한 미학적 질문 앞에 노출되어 있다.

간디가 쥐어 준 `허공을 가르는 무기`

잘록한 허리의 유리병 속에 모래가 흘러내리고 있다.
모래를 흘러내리게 하는 것은
이 세상의 중심에서 작용하는 중력,
그리고 천천히 흘러가는 시간이다.
중력이나 시간은 보이지 않지만
모래시계는 이것들을 눈앞에 보여준다
다 흘러내린 모래시계는 뒤집어놓아야 한다
그러면 오래된 미래와 다시올 과거가 흘러내린다.
'모래시계 고금'에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 속에서 옛일의 뜻을 되새기면서,
과거 속에 숨겨져 있는 미래를 만나고자 한다. <편집자주>


  
 ▲ 마하트마 간디의 미소.
ⓒ nuvs.com
 
 
1991년 5월 21일 당시 인도 총리였던 라지브 간디가 암살 사건으로 사망했다.

라지브 간디는 인디라 간디의 아들, 그리고 인디라 간디는 인도 초대 총리였던 네루의 딸이었다. 네루는 국부인 간디에 대한 존경의 마음에서 자신의 딸에게 간디라는 이름을 붙였다.

인도의 국부 마하트마 간디도 암살 사건으로 죽었으니, 암살로 죽은 간디라는 이만 모두 3명인 셈이다. 라지브 간디의 죽음으로 네루가(家)의 인도 통치도 끝났다.

1948년 1월 30일 마하트마 간디는 암살당했다.
암살자 나투람 고두세는 소송이 진행될 때 철저히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다.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의 화해를 주장한 간디의 정신을 고두세처럼 편협한 종교적 울타리에 갇힌 이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리라.

인도의 파키스탄의 영토 분할은 간디가 바란 것이 아니었다.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의 반목과 갈등과 분쟁도 간디가 바란 것은 아니었다.

마하트마 간디는 <힌두 스와라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태를 제대로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코란>을 읽어도 좋을 겁니다.
<코란>에서는 힌두교도들이 기꺼이 받아들일 만한 구절들을 수없이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또한 <바가바드 기타>에는 이슬람교도라 하더라도 이의를 달 수 없을 만한 구절이 많이 있습니다.
<코란>에 내가 이해하지 못하거나 좋아하지 않는 구절이 있다고 해서 이슬람교도를 싫어해야 할까요?
싸움을 벌일 때는 두 가지 요건이 필요합니다. 내가 싸우려 하지 않는다면 이슬람교가 내게 은근히 싸움을 걸려고 해도 싸움은 일어나지 않을것도, 마찬가지로 이슬람교도가 나와 싸우려고 하지 않는다면 나 또한 싸움을 벌일 수 없을 것입니다.
허공을 가르는 무기는 아무것도 벨 수 없습니다."

"인도의 망국병은 분열과 대립" …과연 그럴까?

간디가 말한 종교는 우리가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힌두교 등과 같은 개별 종교를 말할 때의 그 범주를 뛰어넘은 종교다.
우리는 각기 다른 종교를 믿고 다른 언어를 쓰지만, 한 가지,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동일성을 지니고 있다고 간디는 믿었다. 그리고 간디에게 하느님이란 진리(Truth)를 말하는 것이었다.

진리가 하느님이다, 이것은 간디의 아주 중요한 테제였다.

하지만 인도의 현실을 마하트마 간디의 신념과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고, 인디라 간디가 그리고 라지브 간디까지 암살을 당했다. 라지브 간디가 폭사를 당했을 때 사람들은 시크교도에 의해 저질러진 일이라고 말했다.
과연 종교적 차이가 만들어낸 끔찍한 사건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최근에 나는 어느 외국인이 쓴 칼럼을 읽었다. <세계일보> 2002년 3월 15일자 7면에 실린 "인도의 망국병은 '분열과 대립'이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글을 쓴 이는 토마스 소웰이라는 미국의 칼럼니스트. <워싱턴 타임스>에 실린 글을 권화섭 객원편집위원이 정리한 것이었다.

토마스 소웰이라는 사람은 인도의 구자라트 주에서 일어난 처참한 폭력사태--이삼일 사이에 사망자가 489명이 일어난 사태로 이슬람 사원 터에 힌두 사원을 지으려는 힌두 과격분자들이 피살되자 폭도들이 이슬람교도를 보복 살해한 사건이었다--를 보면서 인도의 근원을 이루는 다양성에 대해서 새로운 시각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 마하트마 간디가 암살당했던 장소. ⓒ nuvs.com 
 
그리고 언어와 문화, 종교, 계급에 의해 분열된 세계 여러 나라의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과거 미국으로 건너온 이민자들이 외국인으로 남아 있기보다는 미국인이 되었지만, 오늘날에는 한사코 이민자들이 집단적 정체성과 지위 보장을 요구하며 외국인이나 소수 인종으로 남으려 한다는 데 대해 우려를 표시했다.

그러니까 토마스 소웰은 미국이 인도처럼 다양성을 인정하는 이민자 정책을 편다면, 인도와 같은 분열과 대립상을 보게 될 거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이런 칼럼을 싣고 있는 국내 언론의 저의를 모르겠다.
외국인 이주노동자에 대해서 다양성을 인정하는 정책을 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종교나 문화의 다양성보다는 우리의 단일한 민족적 정체성을 더욱 강조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내 생각은 토마스 소웰과는 다르다.
비록 인도의 현실이 마하트마 간디의 생각과는 다른 길로 나아갔지만, 간디의 생각은 옳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간디는 이렇게 지적한 바 있다.
"당신이 언급한 잔인한 행위들이 비록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졌다 하더라도 종교의 책임은 아니라는 사실을 다들 이해하고 있다."

그러니까 실제로 폭력사태가 일어나고, 암살행위가 자행될 때 표면적으로는 종교의 차이 때문에 일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2001년 9월 11일 뉴욕의 테러 사건이 일어난 것이 과연 종교의 차이에 기반한 증오심 때문이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미국의 패권적 세계 정책이 더 직접적인 원인이 아니었을까?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고, 비슷하고 같은 것에 더욱 친화력을 보이는 것이 인간의 정서이고 태도이다.
그러나 지구촌이 점점 더 좁아질수록 우리는 다른 것, 차이가 나는 것을 인정하고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평화롭게 살 수가 없다. 자기와 다른 것을 무력으로 억지로 자기와 같은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

그렇게 하면 불행은 싹튼다. 간디의 죽음을 생각하며, 아무것도 베지 않는, 허공을 가르는 무기를 상상해본다.

새로운 독립국가 탄생을 보며

" 우리는 긴 세월 동안 독립을 위해 투쟁했다. 아무리 적은 수의 사람들일지라도 자신들의 '목소리'가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 - 동티모르 지도자, 마리 알카티리 -


  
 ▲ 동티모르 국기를 흔들며 기뻐하는 어린이. 사진 출처 : www.etan.org ⓒ  
 

포르투갈의 식민지, 일본군 점령, 인도네시아의 군사지배.
무려 478년에 걸쳐 외세의 지배를 받아온 티모르인들에게 2002년 5월 20일은 잊을 수 없는 날이 되었다.
동티모르인들은 수도인 딜리 인근 타시톨로 광장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21세기 새로운 독립국가의 탄생을 전세계에 알렸다.

독립선포식에는 약 2십만 명의 군중이 운집하여 역사적인 날이 밝아오는 것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1998년의 인구가 88만여 명이니 전국민의 4분의 1정도가 모인 셈이다.
여기에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과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인도네시아 대통령, 그리고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등이 참석했으며, 한국에서는 이홍구 씨가 특사로 파견되었다.

코피 아난 유엔사무총장이 독립을 축하하는 연설을 한 뒤에 통치권을 넘겨주었고, 프란시스코 구테레스 동티모르 제헌의회 의장이 공용어인 포르투갈어로 독립국가의 탄생을 알렸으며, 사나나 구스마오 대통령 당선자의 취임 연설이 이어졌다.
독립선포식이 끝난 뒤 동티모르인들은 횃불행진을 벌이며 독립을 자축했다 한다.

고난을 상징하는 검은색, 피를 상징하는 붉은색, 희망을 상징하는 노란색으로 이루어진 동티모르 국기가 유엔기 대신에 게양대에 걸릴 때, 운집한 동티모르 국민의 가슴에는 갖가지 감회와 환희의 감정이 넘치는 것처럼 보였다.

고난과 피와 희망, 이것은 여느 신생국과 마찬가지로 동티모르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 즉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앞으로 걸어갈 길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리라.

  
 ▲ 동티모르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다 희생된 이들을 기리는 촛불.
사진 출처: www.easttimor.com ⓒ Rusty Stewart
 
 
신생국의 앞날이 반드시 밝지만은 않다고 외신은 전하고 있다.

우선 동티모르는 빈국 가운데서도 최빈국이다. 파탄 직전의 상태에 몰려 있는 경제를 어떻게 살려 나갈 것인가.

또한 정치적으로는 인도네시아로부터의 독립이냐 아니면 합병이냐를 놓고 오랫동안 갈등을 빚어온 '분단'의 갈등이 남아 있다.
서티모르에는 6만여 명의 티모르 난민이 있다. 이들은 독립을 반대하는 활동을 했던 이들이다.

비록 동티모르 정부가 화해의 메시지를 던지고는 있지만 '분단'의 갈등이 쉽게 아물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을 우리의 역사를 반추해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유엔평화유지군도 국경수비와 치안을 위해 2004년까지 계속 주둔하기로 하였다고 하는데, 독립국이라면 국경수비와 치안을 자주적으로 해나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동티모르가 인도네시아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을, 신생국 동티모르가 껴안고 있는 과제를 잘 해결해 나가기를 멀리서나마 기원하게 된다.

사실, 동티모르가 인도네시아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게 된 과정을 살펴보면 단순히 티모르인들의 독립 열망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전세계 인권사회단체의 활동가들과 양심적인 시민의 연대가 있었다. 우리나라에도 동티모르 연대모임(동연모, Korea-East Timor Solidarity)라는 단체가 있었다.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주민에 대한 만행을 알리고 동티모르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세계 각국의 사회단체의 도움은 이 나라의 탄생에 커다란 도움이 된 것이 사실이다.
앞으로도 동티모르의 평화와 건설에 세계인들의 연대와 지원이 계속해서 이어져야 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덧붙여서 이 지구상에는 아직도 독립을 쟁취하지 못한 나라가 있다는 사실도, 동티모르의 독립을 지켜보며 생각하게 된다. 21세기 첫 독립국 동티모르, 그렇다면 21세기 마지막 독립국은 어느 나라가 될 것인가. 이런 생각도 해보게 되는 것이다.
'동연모'의 사이트에서 만나게 된 짤막한 시구절을 읽는다.


시냇물이 모여서 강이 되고,
강물이 모여서 또 하나될 때,
그 흐름은 아무도 막을 수 없다.
그러기에 티모르 사람들이여, 하나 되어라.
하나가 되어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에 맞서거라.

--동티모르 민족시인 다 코스타의 <시냇물>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