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제프 자코토라는 사람 이야기를 읽었다. 고명섭 한겨레 기자의 서평기사. 그 서평기사 속의 주인공인 자크 랑시에르.
이 철학자는 작년에 우리나라에 왔었다. 무지하게 느린 나로서는 이 사람의 생각을 따라잡을 생각도 자신도 없지만...... 작년 이 사람 한국에 왔을 때, 그 포스터를 기억한다. "68혁명의 투사에서 자리옮김과 불화의 철학자로"라는 문구를 보면서 도대체 이 '자리옮김'이라는 말을 이렇게 써도 되는가 싶었다. 혁명, 투사, 불화, 철학자라는 한자어와 '자리옮김'이라는 번역어가 서로 불화하고 있었다.
*포스터 출처: http://ranciere.wordpress.com/2008/11/27/hello-world/
어쨌든, 조제프 자코토의 이야기는 흥미롭다. 고 기자의 기사 중 자코토 이야기는 이렇다.
랑시에르는 문서고 탐사를 통해 찾아낸 독특한 인물 조제프 자코토(1770~1840)를 등장시킨다. “1818년 루뱅 대학 불문학 담당 외국인 강사가 된 조제프 자코토는 어떤 지적 모험을 했다.” 자코토는 19살에 법학 박사학위를 받고 이른 나이에 에콜 폴리테크니크 교장 대리를 지내기도 한 수재였다. 1815년 부르봉 왕정이 복귀하자 그는 네덜란드가 지배하던 벨기에로 망명해 루뱅 대학의 강사 자리를 얻었다. 기이한 경험은 이때 이루어졌다. 불문학 강사였던 그는 네덜란드어를 몰랐고, 학생들은 프랑스어를 몰랐다. ‘무지한 스승’은 학생들에게 <텔레마코스의 모험>이라는 책의 프랑스어-네덜란드어 대역본을 교재로 삼아 ‘강의’를 시작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네덜란드어 번역문을 사용해 프랑스어 텍스트를 익히라고 주문했다. 스승과 학생 사이에 서로 통할 수 있는 공통의 언어가 없는 상태에서 학생들은 스스로 프랑스어를 기초부터 학습했다. 스승은 그 자기학습의 조건이자 계기로만 존재했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그들은 단어들을 조합해 프랑스어 문장을 만들었고 철자법과 문법도 스스로 익혀 완성시켰다. “더구나 그들이 구사하는 문장은 초등학생 수준이 아니라 작가 수준이었다.”
*출처:‘지적 평등’이 두려워 저들은 ‘독학’을 깔본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332358.html
<무지한 스승>이라는 책을 통해 고명섭 기자는 "스승과 학생 사이의 나눔·분할을 거부하고 평등한 자들의 공동체를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그런 것인가?
모르는 자가 모르는 자를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은 옳다. 그래도 아는 자가 생긴다면 그이를 스승으로 모실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선생과 학생의 분할선을 뭉개나갈 수는 있을 것이다. 내가 배운 것은 선생에게 배운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승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에게서 배운 것이라고 하면 안될까?
배병삼 씨의 <한글세대가 본 논어>를 읽고 있다. <논어>의 이런 대목을 랑시에르에게 말해준다면 어떨가?
7-21-0 선생님 말씀하시다. 세 사람이 길을 가도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게 마련. 그 가운데 잘난 것은 골라서 좇고, 잘못된 것은 고칠 일이다. (술이)
7-22-2 우리 선생님이 어디선들 배우지 않았겠으며, 또 어찌 일정한 스승이 있었으리요!(자장)
어찌 되었든, 자코토 이야기는 재미있다.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은 말이 통하지 않아도, 가르칠 수 있고 배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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