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 제119호를 읽고 있다. 더글러스 러미스의 <래디컬 데모크라시와 시민사회--간디의 유산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라는 글.
러미스 씨는 <힌두 스와라지> 제17장의 문답을 인용하면서 비폭력의 정의를 도출해내고 있다. "비폭력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끈이며, 그렇지 않으면 '사회'는 성립되지 않고, '인간'이라는 종은 전멸할 것이다."
"간디는 이 구별, 즉 의식적인 '주의'나 '운동'으로서의 비폭력과 일상생활 속의, 별로 의식하지 않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비폭력 사이의 구별을 전개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러미스 씨는 '어디에나 있는 비폭력의 존재', 그 영역을 '시민사회'라고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시민사회는 비폭력의 영역이다."
"시민사회는 '공(公)'을 형성한다. '공'은 인간의 언어능력에 기초한 존재이다. 즉 '공'은 인간이 말로 교류하는 장이지만, 그러나 어떠한 말이라도 좋은 그런 것은 아니다. '공'에 부합하는 말은(사적인 것이 아니라) 공적인 것이라고 말하면 동어반복으로 들리겠지만 그러나 중요한 점이다. 예를 들어, 명령이라는 형태의 언어는 '공'에 부합되지 않는다. 그렇기는커녕 '공'을 파괴할 것이다. 집회가 열려 모두가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듣고 있을 때 기동대가 와서 돌아가라고 명령한다면, 그 장에 있던 '공'은 (만일 그 사람들이 그 명령에 따른다면) 소멸돼버릴 것이다."
"'공' 그리고 시민사회는 대체로 대등한 인간끼리의 대화로써 비로소 존재한다. 그것은 반드시 정치적인 논의에 한정되지 않는다. 함께 행동한다거나 일을 한다거나 하기 위한 대화도 있고, 여러가지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라는 논의도 있고, 그냥 잡담도 있다. 그렇게 해서 언어의 망(네트워크)이 형성되고, 시민사회가 형성되는 것이다. 나아가서 언어로부터 생겨난 유대는 폭력과 모순된다. 폭력은 입이 없다고들 하지만, 입이 없을 뿐만 아니라 언어를 파괴하고, 침묵을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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