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 14일 목요일

시민 속에 뿌리내릴 도서관으로

책읽는사회만들기국민운동 10주년을 돌아보는 자료들을 뒤적이면서 다시 읽게 되는 이용남 선생님의 글. 제목은 '시민 속에 뿌리내릴 도서관으로'. 출처는 간행물윤리 통권 281호, 2001년 12월의 글이다.


도서관은 기본 시설이다.

깔끔한 소도시 대로변, 속이 환히 들여다보이는 유리벽 건물에 어린이와 주부들이 부지런히 드나들고 있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책 서가와 테이블의 모습으로 보아 시민들을 위한 도서관임을 금새 알 수 있다. 부리나케 문을 나서는 어느 주부의 시장 바구니에는 몇 권의 책과 액자에 넣은 그림이 보인다. 아마도 이 도서관에서는 가정에 잠시 동안 걸어두고 감상할 수 있는 그림도 소장하여 대출하는 듯하다. 뒤이어 몇 권의 그림책과 CD를 가슴에 안고 나오는 어린이들은 조금 전에 끝난 인형극의 재미에 흠뻑 빠져 있는 듯 연상 재잘거린다. 저녁 무렵쯤 되자, 조그마한 이동도서관 차량이 도서관으로 들어온다. 도서관에 직접 오가기가 먼 변두리 마을을 순회하며 책의 대출∙반납을 마치고 돌아오는 모양이다. 이 이동도서관은 내일 아침에 다시 새로운 책을 싣고 다른 변두리 마을을 돌아다닐 것이다. 인구 일이십만 정도의 소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앞선 나라 도서관 앞의 모습니다.

주민들이 한 곳에 집단적으로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건립한 것이 마을의 교회이고 다음으로 학교였으며, 그 후에 마을도서관 순서로 지역 사회가 형성되었다는 선진국의 사례는 우리에게 커다란 교훈을 준다. 영혼의 안식처, 자녀의 교육시설, 그리고 주민들의 자기향상을 위한 도서관은 예로부터 지역 공동체 생활을 위한 기반시설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읍∙면∙동리 단위에 설립된 공공도서관은 지역 주민의 교육∙문화발전을 도모하고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기본적인 하부구조이다.

 오늘날 정보통신기술과 컴퓨터를 중심으로 한 첨단매체는 급속히 발전하고 지식정보량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 자체는, 모든 곳에서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원하는 시기에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무질서하게 범람하는 지식과 정보의 탁류 속에서 개개인에게 꼭 필요한, 생명수 같은 지식정보를 구하기는 더욱 어려워지는, ‘풍요 속의 빈곤’ 현상이 가속화되기 쉽다. 그래서 지식정보 매체의 기술적 발달과 콘텐츠의 범람에도 불구하고, 우리 앞에 놓여진 주요 명제는 어떻게 하면 필요한 지식정보에 ‘편리하고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느냐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다양한 매체에 담겨진 많은 지식정보 중 필요한 것을 수집∙가공하여 이용자에게 제공하는 기관으로서,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되고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여 온 기관은 바로 도서관이다. 그 중에서도 시민 대중 누구에게나 그들이 필요로 하는 자료와 정보를 무상으로 제공하며, 문화적 공간을 마련해 주고자 지방정부가 설치하여 운영하는 도서관이 바로 시립도서관, 군립도서관 등으로 부르는 공공도서관이다.

도서 진흥에 주력하는 선진국들

미래 사회에서는 인쇄매체가 사라지고 디지털 정보를 중심으로 한 전자매체로 완전히 대치되어 앞으로는 종이책이 사라질 터인데, 아직도 책읽기가 필요하겠느냐는 어처구니없는 사회 일각의 분위기 또한 우리를 당혹하게 한다. 공공도서관은 단편적인 정보를 보관하고 제공하는 기능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들 ‘정보’가 ‘지식’으로 변환되고, ‘지식’이 ‘지혜’로 승화되도록 학습시킴으로써, 시민들을 문화적으로 변하게 하며 삶의 질을 높여 주는 곳이다. 그래서 앞으로의 도서관은 인쇄매체 형태의 책과 전자형태의 정보가 서로 그 특성을 보완해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린이, 주부, 노인 등 시민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대부분의 공공도서관의 주요 활동은 주민을 대상으로 한 독서진흥 활동에 치중하고 있으며, 그러한 예는 선진국의 여러 도서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요즈음 세계 각국으로 번지고 있는 북 스타트(Book Start)운동은 어렸을 때부터 책읽기의 중요성을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1992년에 처음으로 영국에서 발족된 이 운동은 읽고 쓰는 능력의 저하, 상상력의 결여, 엷어진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 등의 문제를 위한 해결책의 하나로 버밍햄 공공도서관, 버밍햄 보건국, 버밍햄 대학 교육학부가 힘을 합쳐 시작하였다. 이 프로젝트에 의하면, 영국의 아이들은 태어난 지 7-9개월이 되어 건강진단을 받는 자리에서, 영국의 부모들은 두 권의 유아용 도서와 그 지역 공공도서관 이용 안내서 등이 들어 있는 꾸러미를 무상으로 받는다. 이 프로젝트가 시작된 지 6년 후, 버밍햄 대학 연구진이 북 스타트를 실시한 가족과 그렇지 않은 가족을 비교 조사한 결과, 이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그룹의 아이들은 기초평가에서 다른 그룹의 아이들보다 많은 영역에서 현저히 높은 점수를 받음으로써, 읽고 쓰고 셈하는 능력에서 확실히 앞서고 있음이 증명되었다.

재작년 8월, 일본 국회에서는 정치적으로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는 그러나 국가의 미래를 생각해서는 매우 의미 있는 한 가지 사안에 대해 의결을 하였다. 즉, 일본국가대표도서관 부설기관인 국립국제어린이도서관이 개관되는 2000년을 ‘어린이 독서의 해’로 삼자는 결의를 만장일치로 채택한 것이다. 결의문은 “책을 만나며 아이들은 말을 배우고, 감성을 닦으며 표현력을 높이고, 창조력을 풍부히 하면서 인생을 더 깊게 살아갈 힘을 얻는다. 정부는 독서의 무한한 가치를 인정하여...(중략)...거국적으로 어린이의 독서 활동을 지원하는 시설을 집중적으로 강구해야 한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독서진흥사업을 국정차원에서 표명한 것은, 일본 헌정사에서 획기적인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지난 8월부터 미국의 시카고 시에서는 희한한 독서캠페인이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시카고 공공도서관이 7주 동안 기간을 정하여 ‘전 시민 책 한 권 함께 읽기’(One Book, One Chicago)운동을 시작하여, 시장이 직접 나서 시민 참여를 호소하고 다양한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서관이 선정한 책은 흑백인종 갈등을 주제로 한 40여 년 전의 소설 ‘앵무새 죽이기’(To Kill a Mockingbird)로서, 우리에게는 그레고리 펙이 주연했던 ‘알라바마에서 생긴 일’이란 영화로도 잘 알려진 책이다. 이 운동 관련 인터넷 사이트를 장식하고 있는 다양한 캠페인의 아이디어가 흥미롭다. 도서관 당국이 소설 4천권을 사다 비치하였음에도 모자라 미처 책을 빌리지 못한 사람들이 서점으로 몰려들었다는 즐거운 비명이다. 그 무서운 테러 공포 속에서도, 이번 가을철 책 한 권 함께 읽기 운동에 뒤이어 내년 4월부터 시작할 봄철 운동에 함께 읽을 만한 책을 모든 시민들에게 추천해달라는 안내 광고를 보니 부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도서관에 대한 인식 전환시켜야

한번 클릭으로 모든 정보를 꺼내어 쓸 수 있다고 맹신하고 있는 오늘날의 디지털 시대에 왜 선진 여러 나라들에서는 도서관과 시민의 독서진흥을 위한 활동에 이처럼 관심을 쓰고 있을까? 삶의 방식과 경험을 멀티미디어의 가벼움 속에서 찾기 쉬운 오늘날, 개인과 사회의 건강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출발점을 도서관과 책읽기에서 시작하려는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도서관 모습은 어떠한가? 우선, 공공도서관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인구 1백만명 당 8개관인데, 이는 OECD국가의 1/40-1/3수준이다. 개발도상국인 말레이시아나 터키와 비교하여도 1/2-1/3수준밖에 안 된다. 그러나 더 문제가 되는 것은 몇 안 되는 도서관이나마 대부분이 장서가 빈약하다는 것이다. 자료 구입비의 부족으로 도서관 장서의 수는 현재 국민 1인당 평균 0.47권으로서, OECD국가의 1/15-1/5수준에 머물러 있다. 도서관 알맹이인 자료와 정보가 부족하여 덩그러니 책걸상만 있고, 각종 문화프로그램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여력이 안되니, 재수생의 공부방 역할밖에 할 수 없지 않겠는가? 도서관의 수가 적어 멀리 떨어져 있고, 그나마 볼만한 책이 부족하여 공부방 구실에 머물러 있으니 도서관은 시민대중 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경제이론은 수요가 공급을 창출하기 마련이지만, 문화의 세계, 특히 대중을 위한 도서관은 공급이 수요를 창출하는 법이다. 주민 가까이 건물의 규모는 작더라도 알맹이가 알차고 가득한 도서관이 있을 때, 시민들은 책을 가까이 하게 된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본래 공공도서관은 시민의 지식∙정보의 샘터이며, 문화의 보금자리이다. 취학 전 어린이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주민의 자기성장과 교육에 필요한 자료를 제공하여, 평생교육체제의 기반시설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또한 주민의 개인 생활과 직업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며, 각종 회합과 집회 활동 등 지역사회 공동체 형성을 위한 구심점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각종 전시회∙음악회∙문예활동∙공연 등을 개최하여 주민의 문화 향수권을 극대화시키는 곳이다. 한마디로 말해 지역사회의 종합 교육∙정보∙문화센터인 공공도서관이 제 구실을 다하기 위해서는 도서관 안에 알맹이를 충분히 갖추는 정책이 필요하다. 도서관은 책걸상 등의 시설이 아니라, 자료와 프로그램의 조직체이기 때문이다.

이제 21세기에 들어선 우리 사회는 도서관에 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전환시켜야 한다. 그 실마리는 국가의 정책에서부터 비롯되어야 한다. 건국 이후, 도서관 정책다운 정책이 없었던 사실을 직시하고 건강한 사회를 위한 도서관 정책을 국가차원에서 새롭게 수립하여야 한다. 우리 나라를 비롯하여 개발도상국의 도서관 발전 저해요인을 집중적으로 조사∙연구한 어느 학자의 결론은 우리 사회 지도층 모두가 음미할 만하다. 즉, “아시아 각국의 도서관 부진은 예산부족 때문이 아니다. 예산문제는 진전을 더디게 할 수는 있으나 도서관의 기본 개념을 왜곡시키지는 않는다. 보다 더 큰 문제는 사회적∙정책적 신념의 결핍이다”라는 조언에 우리 사회와 정부당국은 심각하게 귀를 기울여야만 할 것이다.

댓글 1개:

  1. 처장님, 이정수입니다. 허락도 없이 제 페북으로 모셔갑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좀 읽히고 싶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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