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0월 10일 월요일

천병희 선생의 번역

시사in의 기사, 장일호 기자가 시사in 211호(2011년 10월 8일자) 에 낸 기사, 그의 존재는 한국 ‘문사철’ 커다란 축복 이라는 제목의 기사다. 천병희 선생에 대한 기사. 여력이 생긴다면, 천병희 선생의 번역서를 한자리에 모두 모아놓고 읽어보고 싶다. 아래는 기사 전문.
----------------------------------------------------

그의 존재는 한국 ‘문사철’ 커다란 축복
서양 고전을 읽는 이들에게 피해갈 수 없는 이름이 있다. 바로 번역자 천병희 선생이다. 중역(重譯)이 아닌 ‘원전’을 번역하는 그의 이름은 이미 하나의 브랜드이다.

예상했던 대로 단조롭고 고요한 일상이었다. 매일 오전 10시가 되면 천병희 선생(71)은 안방에서 서재로 ‘출근’한다. 그리고 배운 지 10여 년 됐다는 컴퓨터 앞에 앉아 워드 프로그램을 띄운다. 책상 위에는 각종 사전과 요즘 번역한다는 다양한 언어로 쓰인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가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어떤 때에는 한 문장 번역하는 데 하루를 다 보내기도 해요. 정확히 이해가 되지 않는 문장을 만나면 참 답답하죠(웃음). 그럴 때는 영어·독어 등 내가 가진 번역본은 죄다 꺼내 보는 거예요. 이해가 될 때까지.”

점심을 먹고 나면 한두 시간은 낮잠을 자거나 차를 마시며 쉰다. 휴식시간까지 포함해 일하는 시간은 되도록 8시간을 넘기지 않는다. 눈의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이다. 3년 전 단국대 명예교수 직을 내려놓고 번역에만 매달리는 선생의 색다른 일상이라곤, 일주일이면 두세 차례 근교의 남한산성으로 산책을 나서는 것 정도이다.
사실 그동안 라틴어와 그리스어 고전 중역(重譯)본이라면 얼마든지 있었다(한글로 써 있으나 이해가 안 된다는 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그러나 원전으로 번역하는 이는, 천 선생 한 사람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원전 번역은 잘 손질된 벽돌 같은 거예요. 어디든 사용할 수 있는 건축자재라고 해야 할까. 기초공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집을 지을 수 없듯이, 원전 번역이 안 되어 있으면 다른 공부도 쌓아올리기 쉽지 않죠. 그래서 일본에서는 번역을 주요한 국가사업 중 하나로 여기기도 했어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사실 지원이랄 게 없죠.” 문사철(문학·역사·철학) 전공자가 너무 많아 청년실업률이 높다고 말하는 고용노동부 장관이 있는 나라니 오죽할까. 그럼에도 선생은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나갈 뿐이다.
매일 오전 10시가 되면 천병희 선생은 안방에서 서재로 출근해 번역에 몰두한다. (사진은 시사in 조우혜 기자)

그리스 3대 비극 작가 ‘전집’ 번역

선생이 펴낸 번역서의 목록은 엄청나다. 특히 최근에는 가속도가 붙은 듯 쏟아내고 있다.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전집(전 2권)>, 플루타르코스의 <수다에 관하여>와 <영웅전>, 오비디우스의 <로마의 축제들> 등이 지난해에 나왔고, 그리스 3대 비극 작가인 소포클레스·아이스킬로스·에우리피데스 전집(‘선집’이 아닌, 전집이다!) 또한 최초로 번역해 2009년 빛을 봤다.

올해만 벌써 묵직한 책이 두 권 나왔다. 국내 첫 번역된 투키디데스의 <필로폰네소스 전쟁사>와 크네소폰의 <페르시아 원정기>이다. <페르시아 원정기>는 단국대출판부에서 한 차례 출간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 새로 다듬어 펴냈다. “완전한 번역은 없어요. 독자 처지에서는 두세 가지 이상 번역본이 존재하고, 그래서 골라 읽을 수도 있어야 좋을 텐데, 참 우리 상황에서 쉽지 않죠. 돈 안 되는 일이잖아(웃음).”

선생은 돈 안 되는 일을 어쩌다 시작하게 되었을까. 게다가 선생은 휠덜린 연구로 박사를 받은 독문학자 아닌가. 고등학교 시절 ‘언젠가는 꼭 독일에 가서 공부해야지’라고 마음먹을 정도로 독일어를 좋아했다. 결심대로 서울대 독문과에 입학한 게 1956년. 그런데 1학년 1학기 때 친구의 권유로 그리스어 교양수업을 들은 게 시작이었다.

“처음에는 나도 재미없었어요. 그런데 중간에 그만두기가 아깝더라고요. ‘2학기에 한 번 더 들어봐?’ 하다가 보니까 조금씩 들리기도 하고, 공부를 더 해보고 싶었어요. 방학 때 고향(경남 고성)에 내려가서 <그리스어 첫걸음(First year Greek)>을 다 뗐죠. 요샛말로 완전 꽂힌 거죠(웃음).” 문법을 익힌 후 본격적으로 원서로 책을 읽기 시작하니 그때부터는 이전에는 몰랐던 ‘별세계’가 펼쳐졌다.

1961년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 유학길에 오르면서(당시에는 유학을 가려면 교과부에서 시행하는 자격시험을 치러 통과해야 했다)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본격적으로 만났다. 독일에서는 독일 문학을 전공할지라도 두 언어를 익히는 것이 필수였다. 어느 날 장학금을 줄 테니 고전문학을 공부해 학위를 받아보라고 담당 교수가 제안했다. 그러나 그는 공부가 길어질까 싶어 어렵게 뿌리치고 아내가 기다리던 한국에 돌아와 서울대 강사로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는 건 ‘시련’이었다. 1967년 선생은 동백림 사건에 휘말린다. 선생은 “발을 딛고 서 있기 어려울 정도였다”라고 표현했다. “당시 독일은 통일 전이었지만 부활절 등에 서로 자유롭게 교류하고 있었어요. 그런 분위기에 휩쓸렸다고 해야 할까, 북한 사람을 만나는 게 그렇게 어마어마한 죄가 될 줄 몰랐죠.”(2006년 1월,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동백림 사건에 대해 “박정희 정권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대규모 간첩사건으로 사건을 확대 과장했다”라고 발표했다.)

서울구치소(옛 서대문형무소)에서 3년2개월을 지내는 동안 그는 결심했다. “자고 있으면 구더기가 막 올라와요. ‘통방’할까봐 시도 때도 없이 방을 바꾸기도 하고. 그러면서 내가 결심한 게 있죠. ‘내가 살아야겠다, 살아서 할 일이 있다’라는. 그게 바로 그리스 고전 번역이었어요.” 형기를 마치고 나왔지만 10년간 ‘교수 자격정지’ 상태였다. 그는 연탄 200장과 쌀 한 가마니를 집에 들여놓는 것이 ‘소원’이었다.

“고전 읽기는 무궁무진한 세계”

1972년 선배의 주선으로 첫 번역을 하게 됐다. ‘대사상전집’이라고 해서 플라톤 전집을 내던 휘문출판사였다. 원래 번역을 하고 있던 이가 있었는데 1년이 넘도록 마감을 지키지 못하자, 선생에게까지 기회가 온 것이었다. 주어진 기한은 두 달이었다. 잠잘 시간도 쪼개서 밤낮을 매달렸다. “번역이 끝나고 나니까 복통이 너무 심한 거예요. 신경성인 줄 알았지. 그런데 병원에 가보니 변비였더라고(웃음). 화장실도 제대로 못 가면서 번역을 했더니 이런 사달이 났구나 했지요. 그때는 그렇게도 작업을 했어요.”

자격정지 기간이 끝난 1981년, 선생은 단국대 독문과 교수로 임용됐다. 그리고 퇴임하는 2004년까지 쭉 몸담았다. 강의하는 틈틈이 번역을 해왔다. 독자들이 ‘원형’에 다가가길 원하는 마음이었다. “고전 읽기는 시작이 어렵지, 맛을 들이기 시작하면 정말 무궁무진한 세계예요. 당시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 가만히 보고 있으면, 이게 지금도 다르지 않거든요? 삶과 인간에 관해 깊이 사색하게 하는 힘을 가진 게 바로 고전입니다.”

선생이 번역한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도대체 어떤 운명이 예비되어 있기에 그토록 많은 고통이 그대 뒤를 쫓고 있는가”라는. 계획했던 대로 ‘평탄하게’ 살았더라면, 선생은 교수로 살다가 정년퇴임 이후에나 번역에 매진했을 터였다. 그러나 선생에게 예비된 운명은 따로 있었다. 덕분에 독자들은 중역을 거치지 않은 생생한 이야기들을 접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를 축복이라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