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지식의 착각: 생각이 혼자만의 것이 아닌 이유(The Knowledge Illusion: Why We Never Think Alone)
출처: http://newspeppermint.com/2017/08/28/m-thinking1/
원문: https://www.scientificamerican.com/article/you-do-not-think-alone/
깊은 생각에 빠져있는 사람의 상징과도 같은 로댕의 조각상 “생각하는 사람”은 홀로 바닥을 쳐다보며 손에 턱을 괴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식의 착각: 생각이 혼자만의 것이 아닌 이유(The Knowledge Illusion: Why We Never Think Alone)”의 저자들은 이것이 사실과 다르다고 말합니다. 브라운 대학의 스티븐 슬로먼과 콜로라도 대학 리즈 경영대학원의 필립 펀바흐는 우리의 지적 능력은 우리 주변의 사람들과 물건에 의존하며, 단지 우리가 이를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지식을 공동체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래는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의 가레쓰 쿡과 슬로먼의 대화입니다.
Q: 당신은 우리가 자신이 생각하는 만큼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뜻인가요?
A: 사람들은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신이 가진 이해의 깊이를 과신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심리학 실험 중에는 이를 직접 증명한 다양한 실험들이 있습니다. 예일의 위대한 심리학자인 프랭크 카일과 그의 학생들은 오늘날 지식의 착각(knowledge illusion)이라 부르는 현상, 곧 사람들이 자신의 설명 능력에 가지는 착각을 처음으로 보였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지퍼, 화장실, 볼펜 등의 여러 대상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얼마나 잘 이해하는지 물었습니다. 사람들은 평균적으로 자신이 7점 척도에서 중간에 해당하는, 충분한 이해를 하고 있다고 답했습니다. 하지만 카일이 사람들에게 실제로 그 작동방식을 물었을때 사람들의 답은 형편없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가장 간단한 물건의 작동 방식조차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다시 그들의 이해 정도를 묻자 그 값은 크게 낮아졌습니다. 그들은 직접 설명을 해보고 나서야 자신이 가진 착각을 깨우친 것입니다. 우리는 물건만이 아니라 정부의 정책처럼 대상을 바꿔가며 실험해 보았고, 사람들의 지식에 대한 착각은 반복해서 발견되었습니다. 심리학자 매튜 피셔는 사람들이 자신이 가진 믿음을 논리적으로 정당화하는 능력 또한 실제보다 과신한다는 것을 보였습니다.
간접적인 증거 중에는 사람들은 놀라울 정도로 무지하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미국인의 약 50%는 항생제가 바이러스가 아니라 미생물을 죽인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으며 대법관의 이름을 한 명이라도 댈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레베카 로손은 사람들이 충분한 도움을 받더라도 자전거를 제대로 그릴 수 없다는 것을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이 이를 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할 때 크게 놀랍니다.
Q: 사람들이 자신의 믿음을 논리적으로 정당화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매우 놀랍네요. 어떻게 그럴 수 있나요?
A: 인간의 추론은 몇 가지 형태를 띄고 있습니다. 우리가 내리는 대부분의 결론은 직관에 의한 것입니다. 직관의 특징은 그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우리 스스로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직관이 내리는 결론만을 알게 됩니다. 예를 들어, 직관은 기억에 저장된 결론을 바로 가지고 옵니다. 우리는 기억에서 정보를 꺼내는 과정을 관찰할 수 없습니다. 오직 그 결론만이 의식에 전달될 뿐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대부분은 18세기 프랑스에서 대혁명이 일어났다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이 믿음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요? 우리 대부분은 역사학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기억에서 사실을 꺼내올 뿐입니다. 자신의 기억을 이용하지 않을 경우 우리는 이 사실을 제대로 정당화할 수 없으며, 사실 기억에서 어떻게 이 정보를 꺼내오는지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저 마음에 이 사실이 떠올랐을 뿐입니다. 물론 직관은 기억보다 조금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직관은 고도로 정교한 패턴 인식이 가능합니다. 만약 나에게 프랑스 혁명에 대해 말하라고 한다면, 나는 그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는 상당히 피상적이고 정말로 중요한 많은 사실을 놓치겠지만, 크게보면 대체로 맞는 이야기일 것이고 이는 내가 가진 직관 시스템이 합리적인 세상의 작동방식을 포함할 정도로 정교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그 때 프랑스 왕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가 목이 잘리기 전에 사람들에게 잡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는 누군가의 목을 자르기 위해서는 그를 먼저 잡아야하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가 목이 잘렸다는 것은 내 추측일 뿐입니다. 하지만 나는 그 시대에 많은 사람들의 목이 잘렸다는 것을 역시 기억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즉, 직관은 정말로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합니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의 측면에서는 큰 한계를 가지게 됩니다. 얼마전 세상을 떠난 인지과학자 토마스 란다우어는 인간이 기억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은 오늘날 USB 드라이브보다 작은 1기가바이트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우리는 직관보다 더 강력한, 어떤 것을 곰곰히 생각해서 결론을 내리는 숙고(deliberating)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자주 하지 않으며, 특히 혼자서는 이를 잘하지 못합니다. 즉, 이를 잘하기 위해 여러가지 도움을 필요로합니다. 우리는 칠판이나 컴퓨터와 같은 도움이 되는 도구를 사용합니다. 하지만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은 바로 사람입니다. 대부분의 깊은 생각은 다른 사람과의 협력을 통해 만들어집니다. 과학자들이 실험실 미팅을 하고 의사들이 전문의와 상담하는 이유가 이것이며, 누군가 분노하거나 혼란에 빠졌을 때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개인은 자신의 믿음을 혼자서는 정당화하지 못하는 반면, 집단은 무언가를 정당화하는데 탁월한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정당화가 꼭 철학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수준이어야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회적인 지지가 커다란 확신을 만들어낸다는 뜻입니다.
Q: 사람들이 이런 사실을 알아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A: 우선 가장 중요한 건 이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네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알고 있습니다. 알아야 하는 자신 중에 자신의 지적 능력 만큼 중요한 것이 있을까요? 게다가 우리가 자신의 생각보다 더 무지하다는 사실은 우리를 더 겸손하게 만들며 지식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더 큰 존경과 감사를 가지게 할 것입니다. 이는 직장이든 가정이든 어느 곳에서난 매우 중요한 인간관계의 원칙입니다. 사회를 더 정의롭고 평화롭게 만드는데에도 기여할 것입니다.
Q: 우리의 지식이 “사회적”이라는 주장에 대해 더 말씀해 주시죠.
A: 사람들은 자신의 머리 속에 있는 지식과 그렇지 않은 지식,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의 머리에 있는 지식을 잘 구별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지식이 어디에 있느냐는 사실 그렇게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지식을 필요할 때 활용할 수 있느냐입니다. 이는 우리가 사용하는 지식은 공동체안에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지식 공동체의 일원입니다. 생각은 한 개인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거시적 관점에서는 이 말을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곧, 우리의 기본적 가치와 믿음을 정의하는 사회적, 정치적, 정신적 자아가 문화 공동체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미시적 관점에서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타고난 협력자이며 지적인 팀 플레이어입니다. 우리는 공동으로 목표를 설정할 수 있는 인간의 고유 능력을 이용해 다른 사람과 협력해 문제를 생각합니다.
개인이 정보를 처리하는 합리적인 주체가 되기는 힘듭니다. 사람들은 보통 공동체를 통해 정보를 처리합니다.
Q: 인간이 “지적 팀 플레이어”라는 것은 어떤 뜻인가요?
A: 숙고하는 상태(deliberative mind)는 다른 사람과 협력하기위해 진화한 마음의 상태입니다. 길을 건널 때 우리는 운전자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를 추측해야하며 서로 같은 생각을 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기위해 눈빛을 교환하기도 합니다. 이런 종류의 지적 협력은 스포츠나 저녁 식사 테이블에서의 농담, 자동차 수리, 혹은 유전자 분석과 같은 모든 집단 활동에서 발견됩니다. 인간은 함께 생각합니다. 우리는 다른 이의 직관을 자극하며 서로의 생각을 완성시키고 다른 이가 사용할 수 있는 지식을 제공합니다. 여기에는 지적 노동의 분업이 있습니다.
어떤 인지 인류학자들은 인간이 이런 종류의 협업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자 유일한 지적 주체라고 주장합니다. 인간은 목적을 공유할 수 있습니다. 이는 다른 동물들에게서 발견되는 사냥을 위해 힘을 합치는 수준의 협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보다 일반적인 목표를 위해 협력합니다. 예를 들어, 아이와 부모가 같이 모래성을 쌓을 때 그들은 말 그대로 생각을 공유합니다. 날씨나 썰물과 밀물(모래성이 바닷가에 있다면), 도구의 활용 등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갑니다. 한 명에게 문제가 생기면 다른 사람이 돕습니다. 이는 서로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이런 종류의 지적 상태의 공유는 인간에게 매우 흔히 발견되며, 우리의 가장 가까운 유전적 친척인 침팬지보다 오히려 어린 아이들이 여기에 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이는 기발한 실험들이 있습니다.
Q: 첨단 기술은 인간의 이런 특징과 어떤 관계를 가지나요?
A: 여러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우선 기술은 강력한 정보의 창고이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지식의 착각을 강화시킵니다. 심리학자 아드리안 워드와 동료들이 행한 실험에서 사람들은 구글 검색을 사용할 수 있을때 자신들이 더 영리하다고 느꼈습니다. 물론 우리가 구글을 사용할 수 있을때 영리해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구글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정보의 천국입니다. 아마 우리의 지식 공동체에서 가장 중요한 일원일 것입니다. 하지만 구글은 인간이 가진 결정적인 능력인 목적을 공유하는 능력을 가지지 못했다는 점에서 인간과는 다른 역할을 합니다. 구글은 우리의 마음을 읽고 우리가 무엇을 찾는지 알아내지 못합니다. 때로 영리한 프로그래머가 어떤 질문에 적절한 대답을 만들어 놓음으로써 인간을 잘 흉내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리함은 인간 프로그래머의 영리함이기 기계의 영리함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술을 사용할 때 조심해야 합니다. GPS 네비게이션은 종종 운전자를 잘못된 길로 보내며 호수 속으로 인도하기도 합니다. 만약 우리가 기술을 인간을 대할 때처럼 목표를 공유할 수 있는 상대로 착각한다면 큰 재난을 맞을 수 있습니다. 즉, 우리는 항상 주의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기술이 가진 가장 무서운 점은 기술이 우리의 사회를 바꾸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소셜미디어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와 생각이 비슷한 이들에 둘러싸여 살아가기 쉽게 만들었습니다. 사실 그러지 않기가 더 어려운 상황입니다. 또한 우리가 과거에 본 내용을 바탕으로 우리가 좋아할 만한 것을 추천해 줍니다. 그 결과 우리는 정치적 의견이 다른 사람들과 완전히 다른 뉴스를 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실제 세상과는 전혀 다른 정보로 이루어진 세상 속에 살아갈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는 사회적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이때문에 생긴 현실을 우리는 지금 정확하게 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