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지금 이 의제에 대해 제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만일 야당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전 반대한다는 보편성이 있다는 것이에요. 그것이 우리가 얘기하는 민주주의이고 도서관의 가치이고 독서의 자유라고 얘기할 수 있어요. 이게 가장 핵심적인 원리에요. '이거 참 좋은 책이야', '이건 참 나쁜 책이야'라고 얘기할 수도 있지만, 나쁜 책이라는 게 있냐는 거예요. 나쁜 책은 없어요. 히틀러의 ‘나의 투쟁’은 우리나라에서 번역된 지 꽤 오래됐어요. 나치즘을 얘기하는 히틀러의 자서전인데 버젓이 번역이 돼서 도서관에 있죠. 그럼 이제 금서 지정을 주장하는 사람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어요: 나의 투쟁’은 놔두고 성교육 책에서 성기를 좀 기분 나쁘게 그렸다고 뺄 수 있다면, 이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설명 못 해요.
결국 이 사태 핵심은 독자를 믿지 않는다는 거예요. 어떤 책을 빼자고 하는 쪽은 독서의 원리나 독자의 자유, 독자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생각이 다른 거예요. A라는 책을 읽으면 이 책에 전염이 되어서 그 책을 읽은 독자도 A처럼 된다는 틀로 보고, 수동적 독자를 전제하고 있는 거예요. 인간이라는 존재, 독자라는 존재, 시민이라는 존재를 비어있는 그릇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그리고 이 비어있는 그릇에 교육자본, 문화자본을 계속 채워야 인간이 풍성해진다고 생각하죠. 그렇기 때문에, 이 틀에서 전제하는 읽기 방식에서는 빈 그릇을 채우기 위해 나쁜 책을 제공하면 안 돼요. 나쁜 책을 제공하면 그릇 자체가 굉장히 더러워지니까요. 하지만 이게 현실적으로 가능할까요?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떤 계기로 어떤 책을 만날지 알 수 없잖아요.
Q. 그렇다면 대표님께서는 독서의 원리와 독자의 자유 그리고 독자란 존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는 개인적으로 나쁜 책은 없다고 봐요. 한번 다른 유형의 전제를 생각해보죠. 수동적 독자가 아니라, 능동적, 주체적 독자를 말이죠. 이러한 독자는 어떤 사람이 나쁜 책이라고 한 책을 본다고 하더라도, 그냥 보지 않아요. 이 책이 왜 나쁜지를 스스로 ‘판단’하면서 보죠. 즉, 비판적, 성찰적, 대안적 읽기가 가능한 독자인 거예요. 이러한 독자에게는 세상의 어떤 책을 줘도 돼요. 스스로 문제의식을 가지고 읽으니까요. 단순하게 얘기해 보자면, 기독교도가 금강경을 읽었다고 불교도가 되진 않아요. 반대로 스님이 성경을 읽었다고 해서 기독교인이 되는 것도 아니죠. 즉, 독자는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는 거예요.
하지만 단순히 ‘우리 집안이 기독교를 믿으니까, 불교의 비읍 자가 들어간 책은 전부 다 빼야 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게 지금 현실이라고 볼 수 있어요. 말이 안 되는 상황인 거죠. 몇몇 분들은 ‘이 책을 아이들에게 건네주기에는 걱정이 된다’라고 생각하실 수 있어요. 저도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그 점은 매우 동감해요. 하지만 ‘내가 읽었기 때문에 이 책을 아이들에게 주어서는 안 된다, 도서관에서 빼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조금 다른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독자로서 책을 읽고 느낀 점을 표현하는 것에서 그친 게 아니니까요.
더 나아가서, 이번 사태의 제일 큰 문제점은 충남도지사가 의회에서 ‘열람 제한 조치를 했다’라는 식의 발언을 한 것이라 생각해요. 행정 권력을 가진 사람이 열람을 제한하라고 지시하는 것은, 독자나 시민단체에서 주창(Advocacy)을 하는 것과 차원이 다른 이야기거든요. 다시 말해서, 세 레벨이 있는 거예요. 첫 번째 단계는 독자 개인의 영역이에요. 독자가 책을 읽고 판단하는 단계인 것이죠. 여기서 ‘내가 읽어보니까, 나쁜 책이야’라고 자신의 관점에 타인이 동의하도록 만드는 것이 두 번째 단계예요. 다른 사람한테도 이 책을 나쁘다고 인정하라고 강요하는 거죠. 세 번째 단계는 행정 권력을 가진 기관에서 열람 제한을 지시하는 단계라고 할 수 있어요. 지금은 이 마지막 단계까지 일이 벌어져 있는 거고요.
Q. 금서 지정과 관련해 사서와 사서를 응원하는 시민들은 어떤 행동을 해야할까요?
두 번째 단계에 진입하기 전에 먼저 스스로 읽어보고 책이 나쁜 것 같다고 느꼈다면, 다른 사람에게도 읽을 권리를 주어야 해요. 그 사람도 그 책이 좋은지 나쁜지 판단해야 하니까요. 자신이 생각한 게 옳다고 여긴다 해서 다른 사람의 권리를 뺏을 수는 없어요. 오히려, 어떤 독자가 ‘이 책은 다음 세대에게 읽히면 위험하다’라고 이야기한다면 반대로 그 책을 읽어야 해요. 읽고 나도 판단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죠. 그래야 그 책이 나쁘다고 말한 사람과 토론할 수 있으니까요. 원리상 읽을 권리가 더욱 중요해지는 거예요. 그래야 ‘이 부분에 있어서는 나쁘다는 점에 동의할 수 있지만, 반대로 이 책은 이런 장점도 있다’라는 식의 토론이 가능하니까요. 그리고 그걸 위한 기관이 공공도서관이고요. 그렇기에 도서관을 향해서 ‘이 책 빼라, 이 책 둬라’라고 말할 수 없어요. 지금은 토론으로의 전환이 일어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는 상황인 거고요.
Q. 금서라고 하면 출판 유통 시 법적 불이익을 받는 책이 떠오르곤 합니다. ‘금서’란 무엇인가요? 또 금서를 읽어야 하는, 금서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금서를 영어로 ‘Banned books’ 또는 ‘Challenged books’라고 해요. 도전받은 책, 문제가 제기된 책. 어떤 시대에서나 특정한 정치, 종교 등의 신념에 바탕을 두고 문제가 제기되는 책들은 항시 존재했어요. ‘이 책은 상당히 문제가 있다’라는 말은 계속 반복된 거죠.
최근 가장 뜨거운 이슈인 홍범도 장군에 관한 부분도, 근원으로 따져 들어가면 비슷할 수 있을 거예요. 이걸 책과 관련된 사안으로 바꿔 볼게요. 육군사관학교도서관에는 홍범도에 관한 평전이 있을 수 있고, ‘범도’라고 하는 최근에 나온 소설이 있을 수도 있고, 역사적 사료도 있을 수 있는데 이걸 다 뺄 수 있을까요? 저는 뺄 수 없다고 봐요. 육사의 생도들도 홍범도 장군에 대해서 알아야 하니까요. 이 외에도 여러 요소에 의해 계속 문제가 제기되는 책이 있을 수 있어요. 이에 대해 도서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이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라고 생각해야 해요. ‘내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라는 고민도 가져야 하고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일이 벌어졌을 때, 한국의 도서관에 계신 분들은 조심스러운 입장을 취했어요. ‘도서관 관리자로서 나는 이런 입장을 취하고 이런 행동을 하겠다’라는 발언이 미약했죠. 지금까지는 그랬어요. 그게 우리의 현 시대이자 역사고요. 옛날 60, 70, 80년대 소위 권위주의 정권하에 우리는 끊임없이 적절한지에 대해 감시받았어요. 도서관에서 책을 구입하긴 했지만, 열람되지 않는 책도 꽤 많았죠. 어떤 책은 캐비닛에 넣어뒀어야 했던 체험을 이야기하신 분도 있고요.
‘그럼 이제 민주화가 되었으니, 민주화라는 원리가 구체적인 현장에서 다 작동하고 있느냐’라고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죠. 현장에 일하고 계신 사서 선생님들은 이런 일이 벌어지면 매우 큰 스트레스와 압력을 받아요. 그래서 현장 바깥에서 언론이, 시민사회가 또렷하게 계속 이야기해 주는 게 매우 중요해요. 매년 금서 읽기 주간 퍼포먼스를 한 건 아니지만, ‘금서라고 언급되는 책들을 우리가 읽겠다, 시민들이 읽겠다’라고 하는 그 액션 자체의 상징적 크기는 굉장히 큰 거예요. 왜냐하면, 저쪽에서는 이 책 읽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데 이쪽에서는 오히려 그 책을 읽자고 하는 것 자체가, 읽지 말자는 방향 말고 읽자는 방향도 있다는 걸 보여주는 행동이거든요. 그래야 균형이 맞춰진다고 생각해요.
Q. 금서 지정이 아니더라도 도서관에서 장서를 구성할 때 현실적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책을 담을 수 없다보니 나름의 지침을 가지고 선택을 하게 됩니다. 이 과정도 어떻게 보면 특정한 가치관을 가지고 선별하는 영향이 들어갈텐데, 앞서 말씀해주셨던 '정보와 생각을 위한 광장으로서의 도서관'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특정한 책들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도서관의 현실에서 사서들이 어떠한 관점과 가치관을 갖는 게 중요할지 대표님 의견이 궁금합니다.
미국에 '독서의 자유 선언'이라고 하는 선언문이 있어요. 사서가 도서를 수서하고 배가할 때도 자기의 신념이 있잖아요? 그걸 넘어선다는 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거든요. 현장에서 일하고 계신 구체적인 사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지적인 자유, 사회적, 종교적 신념과 수서의 원칙 등이 충돌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독서의 자유 선언’에서 바로 이 지점을 넘어서야 한다는 내용이 나와요. 거기에 더해 오히려 저는 진리끼리 싸우게 하라고 해요.
예를 하나 들어볼게요. 과연 지동설이 옳을까요? 나의 경험적 현실은 아침에 해가 동쪽에서 뜬다는 거예요. 그래서 경험적으로는 천동설이 여전히 옳은 것 같지만, 과학적으로 보면 지동설이 맞다고 하죠. 근데 내 경험적 현실은 아침에 해가 뜨고, 땅은 평평해 보인다는 거예요. 그게 내 경험적 현실이지만, 지구는 조금 찌그러진 구이고 약간 삐딱한 각도로 공전과 자전을 하고 있다는 게 우리가 배우고 있는 지식인 거죠. 그러면 설령 천동설이 옳다고 생각하더라도, 사서로서 지동설 책도 갖춰야 돼요. 그게 정당한 수서의 원칙일 거예요.
그렇다면 사서는 아무 원칙도 없이 수서를 하느냐? 그런 건 아니에요. 수서의 원칙은 독자를 믿는 것이에요. 그것이 민주주의 원리죠. 독자가 천동설과 지동설을 다 읽고 판단할 거라는 믿음을 놓으시면 안 돼요. 그게 원칙이어야 해요. 그래서 평범한 독자가 아무 책이나 읽는다 해서 그게 위험하다고 판단하면 안 되는 거죠. 내 개인의 판단에 수서의 원칙이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독자는 이 천동설과 지동설을 다 보고 판단할 거라는 믿음 위에 수서가 되는 것이죠. 그 믿음을 놓지 않으셨으면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