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25일 수요일

월간 문헌정보

월간 문헌정보
ㅡ블로그 웹진을 만들어, 이슈를 드러내고자 하는 젊은 벗들과 만남. '금서'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최근 이슈가 된 금서 지정에 대응하여, 금서읽기주간 캠페인 등의 목소리를 내고 계신 책읽는사회문화재단 안찬수 상임이사님을 찾아 뵙고 인터뷰했습니다. - 1

Q.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현재 책읽는사회문화재단에서 상임이사 역할을 하고 있어요. 책읽는사회문화재단은 책 문화 생태계 전체와 연관이 있는 시민사회단체에요. 책 문화 생태계는 글을 쓰는 작가, 책을 편집해서 펴내는 출판사, 책을 전하는 공공영역인 도서관, 책을 전하는 상업적 영역인 서점, 또 책을 읽는 독자를 포함해요. 각개 영역에는 다양한 시민단체가 있는데 그 단체들이 2000년 전후에 새로운 책 문화를 만들고자 ‘책읽는사회만들기국민운동’이라고 하는 시민단체를 결성해서 목소리를 내왔어요.

Q. 책읽는사회문화재단은 어떤 활동을 하는 재단인가요?

시민단체들이 흔히 주창 활동을 해요. 영어로는 Advocacy라고 하는데 ‘어떤 문제가 있으니까 이 문제를 해결합시다’하고 사회적 목소리를 내는 걸 말해요. 당시 20여 년 전에는 도서관 특히 공공도서관이 아직 충분히 확충되지 않은 상태였고, 도서관이 있다 하더라도 도서관 예산 중에 도서 구입비가 넉넉지 않았어요. 넉넉지 않다기보다 거의 없어서 수많은 신간 서적이 쏟아져 나오고 좋은 책이 발행됨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이 마음껏 책을 접할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또 사회에 대고 ‘도서관을 좀 확충하자, 공공도서관을 좀 발전시키자, 그 가운데 장서를 제대로 갖추자’ 이런 목소리를 냈죠. 그 과정에서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사업으로는 MBC 느낌표 프로그램과 결합된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라고 하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책을 읽자는 공익적 목소리를 담아내는 독서문화 캠페인이었어요. 그 프로그램이 매우 성공적이어서 작가, 출판사 분들이 책을 아주 많이 팔았어요.

그래서 원래 이 단체가 도서관 발전, 도서관 변화 모색 등에 취지를 갖고 있으니 프로그램을 통해 나온 수익금 일부를 가지고 우리가 머릿속에 이상적으로 그리고 있는 새로운 도서관 모형을 사회적으로 제시해 보자, 그렇게 해서 시작된 프로젝트가 기적의도서관이에요. 책읽는사회문화재단은 기적의도서관 사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투명성을 높이고 정당한 예산 집행을 하기 위해 설립된 법인이고요. 그래서 책읽는사회만들기국민운동은 2001년에 발족했는데, 책읽는사회문화재단은 기적의도서관 사업이 전개될 때인 2003년에 만들어져서 올해로 20년 차인 거죠.

그래서 기적의도서관으로 대표되는 도서관 문화운동이 책읽는사회문화재단의 한 축이고 또 한 축은 2003년에 시작한 ‘북스타트’라는 운동이에요. 그것도 올해 20년 차인데, 아이들이 부모나 양육자를 매개로 해서 책, 도서관과 만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운동이죠. 지금은 작가와의 만남 같은 프로그램들이 도서관에서 상당히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2000년대 초반만 해도 그런 프로그램들이 없었어요. 그래서 당시에 ‘문학의 순회대사’라고 이름을 붙인, 작가들이 공공도서관에서 독자와 만날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프로그램을 개발해서 보급하는 일도 했죠. 그런 활동 중에 지난 10여 년간 애써온 걸로는 ‘함께 읽자, 사회적 독서를 하자’라는 목적으로 만든 독서동아리지원센터가 있고요.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 https://www.youtube.com/watch?v=Tqv56fTqMPQ

기적의도서관: http://www.bookreader.or.kr/working1.html

북스타트: http://www.bookreader.or.kr/working3.html

문학의 순회대사: http://www.bookreader.or.kr/working11.html

독서동아리지원센터: http://www.readinggroup.or.kr/main/

 
 
 
 
 
 
 

제천 기적의도서관

 
 
 
 
 
 

순천 기적의도서관

Q. 바람직한독서문화를위한시민연대는 어떤 활동을 하는 단체인가요?

오늘 인터뷰의 의제인 금서 읽기와 관련된 단체인데, ‘바람직한독서문화를위한시민연대’는 금서읽기주간을 주최하는 단체에요. 언론에서는 ‘독서문화시민연대’ 이렇게 약칭을 많이 쓰시더라고요. 이 단체는 굉장히 오래됐는데 사실 금서 읽기 때문에 만든 단체가 아니고, 독서 강제에 반대한 단체들이 연대를 한 거예요.

2000년대 초반에 학생들의 성장 과정을 적는 생활기록부에 독서 관련 사항을 기재하자는 사람도 있었고, 기재해서는 안 된다는 사람도 있었어요. 전자는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자라나는 세대가 하도 책을 안 읽으니 강제로 읽혀야 한다, 교육은 강제성이 있는 게 아니냐’라는 식으로 강제성을 강조하는 주장을 펼쳤어요. 지금도 상당한 세력을 갖고 있는 입장이죠. 근데 후자에 해당하는 기적의도서관 운동이라든가 북스타트 같은 동아리는 강제성이 아닌 독자의 자발성에 근거했죠. 그래서 ‘우리가 자라나는 세대에게 책 읽기를 얘기할 때 강제로 떠먹이는 게 아니고 스스로 먹고 싶게끔 만들어야 한다. 독서환경을 만들어주고 학교도서관에는 사서 인력을 배치하여 책을 권해야 한다’라고 주장했죠.

그런데 이 문제가 교육이라는 우리 사회에 중요한 영역과 관련되어 있고 당시에는 공중파 방송도 이 논란에 휩싸였던지라, 책읽는사회라는 틀로만 담아내기는 어려웠어요. 그래서 독자의 자발성에 근거한 책 읽기에 찬동하고 바람직한 독서 문화를 만들어갈 방법을 고민한 단체들, 특히 교육 현장에서 이런 주제에 관심을 가진 단체들이 모여서 ‘바람직한독서문화를위한시민연대’를 만든 거예요.

Q. 2015년부터 금서읽기주간 캠페인을 시작하셨는데, 그 배경이 궁금합니다.

대략 지금으로부터 한 10년 전이죠. 그때 이른바 MB,박근혜 정부와 같은 보수 정권에서 특정한 정치*사회적 입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학교 현장에서 특정 책들이 문제가 되니 서가에서 빼달라고 요구했어요. 사실 그런 주장은 상당히 역사가 오래되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그런 소리가 있다는 정도로만 생각했어요.

그런데 당시 교육청이나 문체부와 같이 행정 권력을 갖고 있는 기관에서 그런 주장을 받아들이고 공문을 보내기 시작했어요. 더구나 어떤 단체는 인터넷에서 학교도서관이나 공공도서관의 장서를 다 검토해서, 특정한 학교를 찍은 뒤 ‘이 책을 어느 때까지 제적하지 않으면 교장 당신을 고소 및 고발 하겠소’라고 공문을 날리는 거예요. 그것도 내용증명까지 해서요. 그러면 교장은 굉장한 압력을 느끼고, 지금도 신분이 매우 불안정한 학교도서관 사서를 부른 뒤 빨리 조치하라 말하죠. 도서관 권리 선언이 있고 IFLA 성명이 있다고 한들, 당장 현장에서 이걸 막아줄 수 없는 현실인 거예요.

그래서 당시에 많은 분들이 문제 의식을 느끼긴 했지만, 안타깝게도 도서관 현장에서는 대부분의 신분이 공무원이란 말이에요. 결국 책읽는사회문화재단 같은 곳에서 목소리를 내달라는 사회적 압력을 느끼게 되는 거죠. 그래서 토론회를 열고 무엇이 문제인지,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고 대처해야 할지를 제안한 게 2015년의 일이에요.

세월이 흘러서 똑같은 일이 반복되는데, 이거는 어찌 보면 인류 역사의 무한반복이기도 해요. 그저 우리의 정치적 현실 때문에 발생했다고만 얘기할 수 없는, 독서문학사나 도서관문화사의 영역에서 끊임없이 현실화될 수 있는 과제예요. 그래서 당시에도 법을 제정해서 선언적으로라도 도서관의 자유 및 독서의 자유를 강조해달라고 국회에 요구했죠. 그런 활동 중에 금서 지정을 요구하는 쪽에서 자꾸 어떤 책들은 도서관에 두면 안 된다고 하니, 우리는 바로 그 책들을 읽는 액션을 함으로써 대응하는 것이죠. 그렇게 금서읽기주간을 정하고 포스터를 붙이고 퍼포먼스를 하고 전시회를 하고 토론회를 하는 거죠.

Q. 금서 지정 요구에 도서관은 무엇을 근거로 대응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미국, 일본, 유럽 같은 곳의 도서관을 많이 참고하잖아요? 금서 지정과 같은 상황이 그 나라들도 다 있었어요. 가장 대표적인 게 미국인데, 1939년에 발행된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라는 작품이 문제가 되었어요. ‘분노의 포도’는 오클라호마라고 하는 미국의 한 지방에서 태평양 권역으로 이동하는 이주노동자의 모습을 그렸는데, 그 노동 현실이 너무나 비참한 거예요. 오클라호마 주민들 입장에서는 자기 고장을 너무 기분 나쁘게 그려 놓은지라 이 책을 도서관에서 빼라고 요구했는데, 의회에서까지 논란이 될 정도였어요. 그래서 미국 도서관 협회(ALA)가 ‘이거 뭔가 대응을 해야겠구나’라고 생각해서, 1939년에 도서관 권리 선언을 내놔요. 도서관에서 특정 책을 빼라는 검열 행위에 저항하기 위해 도서관 권리 선언을 발표했는데, 여기서 참 재미난 점이 있어요.

여러 조항 중에 세 번째 조항을 보시면 ‘도서관은 민주적인 삶을 교육하는 기관이다’라고 써있어요. Institution to educate for democratic living. 민주적 삶을 위한 교육에 필요한 기관이 도서관이다. 그런데 이게 1980년에 개정이 돼요(Library Bill of Rights). 여기 3항에 대한 논의가 굉장히 뜨거워요. 앞서 'Institution to educate for democratic living' 이라고 그랬잖아요. 그러면 ‘도서관은 민주적 삶을 위한 기관이니 민주적 삶에 꼭 필요한 책이 아니라면 도서관에서 빼도 되지 않나?’라는 사고방식이 들 수 있잖아요? 이게 논란이 된 거예요. 그래서 결국 논의 끝에 도서관을 ‘Forums for information and ideas’, 정보와 아이디어를 위한 광장이라 규정해요. 도서관은 민주적이냐 반민주적이냐 이런 가치 판단의 장이 아니고 그러한 것들을 다 모아 놓은 곳이라고 규정한 거죠.

이건 굉장히 중요한 변화예요. 도서관에 A정파나 A이념만 있어야 하고, A에 반하는 이념이나 B이념은 다 빼야 한다는 주장이 있거든요. 근데 도서관 권리 선언에 따르면, 도서관은 반대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광장이죠. A도 있고 반A도 있고 B도 있는 곳이에요. 이게 ‘Forums for information and ideas’라고 하는 1980년에 나온 도서관 권리 선언이 담고 있는 도서관의 가치에요.

최근 이슈가 된 금서 지정에 대응하여, 금서읽기주간 캠페인 등의 목소리를 내고 계신 책읽는사회문화재단 안찬수 상임이사님을 찾아 뵙고 인터뷰했습니다. - 2

Q. 최근 충남지역에서 아동 성교육 관련 도서들에 대해 문제 제기가 있었습니다. 또한 충남도의회에서 "성교육 도서의 과도한 성적 표현들이 청소년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의견이 있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이번에 금서 지정 논란이 충남권역에서 먼저 불거져서, 이에 대응하고자 토론회가 조직됐어요. 성 소수자, 성평등 등에 대한 문제들이 자꾸 거론되었기에, 일단 그것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차별 금지법을 주장하는 단체가 움직였어요. ‘아이들을 성교육하고 성평등에 대한 생각을 갖게 하기 위해, 그런 책이 오히려 필요하다’라고 주장한 거죠. 이런 논란이 있는 와중에, 도서관과 출판계에서 저에게 발제를 요청해서 제가 책 세 권을 거론했어요.

그때 청중 속에는 금서를 지정하자는 사람도 꽤 많이 와 있었어요. 그분들은 제가 짐작하기에 일종의 기독교 근본주의랄까요? 그래서 제일 먼저 거론한 책이 성경이었어요. 성경도 금서였다. 성경은 굉장한 역사를 갖고 있는 책이죠. 근데 Bible이 책이라는 뜻이에요. 그걸 번역하신 분이 성스러운 경전이라 번역을 한 것이지 그냥 책이에요. 그런데 그 책을 보관하는 Biblioteca/Biblioteque가 도서관이잖아요. 그러니까 성경을 얘기한다는 건 굉장히 중요한 거죠.

제가 존 위클리프를 언급했는데 이 사람이 14세기 사람이에요. 14세기 이후 거의 한 세기가 지나서야 루터의 종교 개혁이 이루어지는데, 14세기에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존 위클리프는 유럽의 역사를 확 바꾼 선구자예요. 요새 영어로 된 성경 또는 한국어로 번역된 성경을 금서라고 생각하는 사람 없잖아요? 근데 당시에 교회가 어떤 일을 벌였냐면, 존 위클리프가 영어로 성경을 번역했다는 이유로 위클리프의 무덤을 파서 그 시신을 불태웠어요. 우리말에 그 말 있죠, 부관참시라고. 존 위클리프가 그런 일을 당했죠. 영어로 된 성경이 금서 중에 금서였던 거예요.

그럼 성경의 금서 사건이 뭘 얘기하느냐? 해석의 독점권이에요. 당시에 위클리프는 Bible이라는 책을 대중들이 다 읽었으면 했지만, 라틴어 성경을 고집한 사람은 반대한 거죠. ‘이 책에 대한 해석권을 풀 수 없어. 아무나 읽을 수 있는 게 아니고, 제한된 지식과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독점돼야 해’라고 생각한 거에요. 성경의 금서 사건에서 해석의 독점권은 굉장히 중요한 지점인데, 금서 사건에서 계속 반복되기 때문이에요. 예를 들어, 이번 금서 지정 논란에서도 다양한 금서 목록들이 있지만, 우리는 그것에 찬성하는 사람한테 이렇게 물을 수 있죠: 이게 기준이 뭡니까?. 사실 그 사람들은 기준을 제시할 수가 없어요. 그저 ‘내가 볼 때 이 책은 나쁜 책이야’라고 생각하는 거죠.

두 번째로 제가 거론한 책이 존 밀턴의 ‘아레오파지티카(Areopagitica)’인데, 굉장히 중요한 책이에요. 17세기 당시 인류 역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 뭐냐면, 청교도 혁명이에요. 당시는 찰스 1세를 중심으로 한 왕당파와 그에 반대하는 의회파가 대립하던 시기에요. 의회파에서 크롬웰은 대장이었고, 존 밀턴은 의회파의 사상을 공급하던 아주 중요한 인물이었죠.

그럼 ‘아레오파지티카’가 출판된 현실은 어떠했느냐? 먼저 찰스 1세가 물러나고 의회파가 집권을 해요. 근데 집권을 해 놓고 보니 이 혁명이 간당간당한 거예요. 다시 왕당파가 들고 일어나서 의회파의 집권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것 같은 거죠. 그래서 의회파가 시행한 게 청교도 혁명이에요. 의회파가 혁명을 옹호하는 쪽이니, 혁명에 반하는 책은 금지한 거죠. 그런데 바로 그 시점에 밀턴이 ‘아레오파지티카’를 써요. 혁명을 옹호하기 위해 반혁명 책을 반대하는 법령에 다 반대한다고 말한 거예요. 왕당파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을 수 있으니, 왕당파와 의회파의 책에서 말하는 진리들끼리 서로 싸우게 놔두라는 거예요. 이게 ‘아레오파지티카’이고, 이 책에서 언론 자유의 문제, 표현의 자유 문제와 같은 생각들이 나오는 것이죠.

여기서 책이 나온 현실을 잘 봐야 해요. 왜? 찰스 1세로 대표되는 왕당파가 집권했을 때 나온 책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우리 현실 정파를 예로 들어볼게요. 직전에는 민주당이 여당이었다가, 현재는 국민의힘이 여당이 되었잖아요. 그러면 ‘아레오파지티카’는 국민의힘이 집권해서 국민의힘을 옹호하는 책만 도서관에 두라고 했을 때 그에 반대하여 나온 책이 아니라, 민주당이 집권했을 때 국민의힘의 책은 빼라는 주장에 반대하여 나온 책인 거에요. 이건 굉장히 중요한 얘기예요.

그래서 지금 이 의제에 대해 제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만일 야당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전 반대한다는 보편성이 있다는 것이에요. 그것이 우리가 얘기하는 민주주의이고 도서관의 가치이고 독서의 자유라고 얘기할 수 있어요. 이게 가장 핵심적인 원리에요. '이거 참 좋은 책이야', '이건 참 나쁜 책이야'라고 얘기할 수도 있지만, 나쁜 책이라는 게 있냐는 거예요. 나쁜 책은 없어요. 히틀러의 ‘나의 투쟁’은 우리나라에서 번역된 지 꽤 오래됐어요. 나치즘을 얘기하는 히틀러의 자서전인데 버젓이 번역이 돼서 도서관에 있죠. 그럼 이제 금서 지정을 주장하는 사람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어요: 나의 투쟁’은 놔두고 성교육 책에서 성기를 좀 기분 나쁘게 그렸다고 뺄 수 있다면, 이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설명 못 해요.

결국 이 사태 핵심은 독자를 믿지 않는다는 거예요. 어떤 책을 빼자고 하는 쪽은 독서의 원리나 독자의 자유, 독자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생각이 다른 거예요. A라는 책을 읽으면 이 책에 전염이 되어서 그 책을 읽은 독자도 A처럼 된다는 틀로 보고, 수동적 독자를 전제하고 있는 거예요. 인간이라는 존재, 독자라는 존재, 시민이라는 존재를 비어있는 그릇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그리고 이 비어있는 그릇에 교육자본, 문화자본을 계속 채워야 인간이 풍성해진다고 생각하죠. 그렇기 때문에, 이 틀에서 전제하는 읽기 방식에서는 빈 그릇을 채우기 위해 나쁜 책을 제공하면 안 돼요. 나쁜 책을 제공하면 그릇 자체가 굉장히 더러워지니까요. 하지만 이게 현실적으로 가능할까요?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떤 계기로 어떤 책을 만날지 알 수 없잖아요.

Q. 그렇다면 대표님께서는 독서의 원리와 독자의 자유 그리고 독자란 존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는 개인적으로 나쁜 책은 없다고 봐요. 한번 다른 유형의 전제를 생각해보죠. 수동적 독자가 아니라, 능동적, 주체적 독자를 말이죠. 이러한 독자는 어떤 사람이 나쁜 책이라고 한 책을 본다고 하더라도, 그냥 보지 않아요. 이 책이 왜 나쁜지를 스스로 ‘판단’하면서 보죠. 즉, 비판적, 성찰적, 대안적 읽기가 가능한 독자인 거예요. 이러한 독자에게는 세상의 어떤 책을 줘도 돼요. 스스로 문제의식을 가지고 읽으니까요. 단순하게 얘기해 보자면, 기독교도가 금강경을 읽었다고 불교도가 되진 않아요. 반대로 스님이 성경을 읽었다고 해서 기독교인이 되는 것도 아니죠. 즉, 독자는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는 거예요.

하지만 단순히 ‘우리 집안이 기독교를 믿으니까, 불교의 비읍 자가 들어간 책은 전부 다 빼야 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게 지금 현실이라고 볼 수 있어요. 말이 안 되는 상황인 거죠. 몇몇 분들은 ‘이 책을 아이들에게 건네주기에는 걱정이 된다’라고 생각하실 수 있어요. 저도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그 점은 매우 동감해요. 하지만 ‘내가 읽었기 때문에 이 책을 아이들에게 주어서는 안 된다, 도서관에서 빼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조금 다른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독자로서 책을 읽고 느낀 점을 표현하는 것에서 그친 게 아니니까요.

더 나아가서, 이번 사태의 제일 큰 문제점은 충남도지사가 의회에서 ‘열람 제한 조치를 했다’라는 식의 발언을 한 것이라 생각해요. 행정 권력을 가진 사람이 열람을 제한하라고 지시하는 것은, 독자나 시민단체에서 주창(Advocacy)을 하는 것과 차원이 다른 이야기거든요. 다시 말해서, 세 레벨이 있는 거예요. 첫 번째 단계는 독자 개인의 영역이에요. 독자가 책을 읽고 판단하는 단계인 것이죠. 여기서 ‘내가 읽어보니까, 나쁜 책이야’라고 자신의 관점에 타인이 동의하도록 만드는 것이 두 번째 단계예요. 다른 사람한테도 이 책을 나쁘다고 인정하라고 강요하는 거죠. 세 번째 단계는 행정 권력을 가진 기관에서 열람 제한을 지시하는 단계라고 할 수 있어요. 지금은 이 마지막 단계까지 일이 벌어져 있는 거고요.

Q. 금서 지정과 관련해 사서와 사서를 응원하는 시민들은 어떤 행동을 해야할까요?

두 번째 단계에 진입하기 전에 먼저 스스로 읽어보고 책이 나쁜 것 같다고 느꼈다면, 다른 사람에게도 읽을 권리를 주어야 해요. 그 사람도 그 책이 좋은지 나쁜지 판단해야 하니까요. 자신이 생각한 게 옳다고 여긴다 해서 다른 사람의 권리를 뺏을 수는 없어요. 오히려, 어떤 독자가 ‘이 책은 다음 세대에게 읽히면 위험하다’라고 이야기한다면 반대로 그 책을 읽어야 해요. 읽고 나도 판단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죠. 그래야 그 책이 나쁘다고 말한 사람과 토론할 수 있으니까요. 원리상 읽을 권리가 더욱 중요해지는 거예요. 그래야 ‘이 부분에 있어서는 나쁘다는 점에 동의할 수 있지만, 반대로 이 책은 이런 장점도 있다’라는 식의 토론이 가능하니까요. 그리고 그걸 위한 기관이 공공도서관이고요. 그렇기에 도서관을 향해서 ‘이 책 빼라, 이 책 둬라’라고 말할 수 없어요. 지금은 토론으로의 전환이 일어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는 상황인 거고요.

Q. 금서라고 하면 출판 유통 시 법적 불이익을 받는 책이 떠오르곤 합니다. ‘금서’란 무엇인가요? 또 금서를 읽어야 하는, 금서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금서를 영어로 ‘Banned books’ 또는 ‘Challenged books’라고 해요. 도전받은 책, 문제가 제기된 책. 어떤 시대에서나 특정한 정치, 종교 등의 신념에 바탕을 두고 문제가 제기되는 책들은 항시 존재했어요. ‘이 책은 상당히 문제가 있다’라는 말은 계속 반복된 거죠.

최근 가장 뜨거운 이슈인 홍범도 장군에 관한 부분도, 근원으로 따져 들어가면 비슷할 수 있을 거예요. 이걸 책과 관련된 사안으로 바꿔 볼게요. 육군사관학교도서관에는 홍범도에 관한 평전이 있을 수 있고, ‘범도’라고 하는 최근에 나온 소설이 있을 수도 있고, 역사적 사료도 있을 수 있는데 이걸 다 뺄 수 있을까요? 저는 뺄 수 없다고 봐요. 육사의 생도들도 홍범도 장군에 대해서 알아야 하니까요. 이 외에도 여러 요소에 의해 계속 문제가 제기되는 책이 있을 수 있어요. 이에 대해 도서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이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라고 생각해야 해요. ‘내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라는 고민도 가져야 하고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일이 벌어졌을 때, 한국의 도서관에 계신 분들은 조심스러운 입장을 취했어요. ‘도서관 관리자로서 나는 이런 입장을 취하고 이런 행동을 하겠다’라는 발언이 미약했죠. 지금까지는 그랬어요. 그게 우리의 현 시대이자 역사고요. 옛날 60, 70, 80년대 소위 권위주의 정권하에 우리는 끊임없이 적절한지에 대해 감시받았어요. 도서관에서 책을 구입하긴 했지만, 열람되지 않는 책도 꽤 많았죠. 어떤 책은 캐비닛에 넣어뒀어야 했던 체험을 이야기하신 분도 있고요.

‘그럼 이제 민주화가 되었으니, 민주화라는 원리가 구체적인 현장에서 다 작동하고 있느냐’라고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죠. 현장에 일하고 계신 사서 선생님들은 이런 일이 벌어지면 매우 큰 스트레스와 압력을 받아요. 그래서 현장 바깥에서 언론이, 시민사회가 또렷하게 계속 이야기해 주는 게 매우 중요해요. 매년 금서 읽기 주간 퍼포먼스를 한 건 아니지만, ‘금서라고 언급되는 책들을 우리가 읽겠다, 시민들이 읽겠다’라고 하는 그 액션 자체의 상징적 크기는 굉장히 큰 거예요. 왜냐하면, 저쪽에서는 이 책 읽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데 이쪽에서는 오히려 그 책을 읽자고 하는 것 자체가, 읽지 말자는 방향 말고 읽자는 방향도 있다는 걸 보여주는 행동이거든요. 그래야 균형이 맞춰진다고 생각해요.

Q. 금서 지정이 아니더라도 도서관에서 장서를 구성할 때 현실적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책을 담을 수 없다보니 나름의 지침을 가지고 선택을 하게 됩니다. 이 과정도 어떻게 보면 특정한 가치관을 가지고 선별하는 영향이 들어갈텐데, 앞서 말씀해주셨던 '정보와 생각을 위한 광장으로서의 도서관'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특정한 책들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도서관의 현실에서 사서들이 어떠한 관점과 가치관을 갖는 게 중요할지 대표님 의견이 궁금합니다.

미국에 '독서의 자유 선언'이라고 하는 선언문이 있어요. 사서가 도서를 수서하고 배가할 때도 자기의 신념이 있잖아요? 그걸 넘어선다는 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거든요. 현장에서 일하고 계신 구체적인 사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지적인 자유, 사회적, 종교적 신념과 수서의 원칙 등이 충돌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독서의 자유 선언’에서 바로 이 지점을 넘어서야 한다는 내용이 나와요. ​거기에 더해 오히려 저는 진리끼리 싸우게 하라고 해요.

예를 하나 들어볼게요. 과연 지동설이 옳을까요? 나의 경험적 현실은 아침에 해가 동쪽에서 뜬다는 거예요. 그래서 경험적으로는 천동설이 여전히 옳은 것 같지만, 과학적으로 보면 지동설이 맞다고 하죠. 근데 내 경험적 현실은 아침에 해가 뜨고, 땅은 평평해 보인다는 거예요. 그게 내 경험적 현실이지만, 지구는 조금 찌그러진 구이고 약간 삐딱한 각도로 공전과 자전을 하고 있다는 게 우리가 배우고 있는 지식인 거죠. 그러면 설령 천동설이 옳다고 생각하더라도, 사서로서 지동설 책도 갖춰야 돼요. 그게 정당한 수서의 원칙일 거예요.

그렇다면 사서는 아무 원칙도 없이 수서를 하느냐? 그런 건 아니에요. 수서의 원칙은 독자를 믿는 것이에요. 그것이 민주주의 원리죠. 독자가 천동설과 지동설을 다 읽고 판단할 거라는 믿음을 놓으시면 안 돼요. 그게 원칙이어야 해요. 그래서 평범한 독자가 아무 책이나 읽는다 해서 그게 위험하다고 판단하면 안 되는 거죠. 내 개인의 판단에 수서의 원칙이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독자는 이 천동설과 지동설을 다 보고 판단할 거라는 믿음 위에 수서가 되는 것이죠. 그 믿음을 놓지 않으셨으면 해요.

Q. 독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생각과 반대되는 책을 읽는다는 것 자체가 거부감이 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렇다면 대표님께서 생각하실 때 독서라는 것 자체가 삶에 있어서 어떤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우리나라의 많은 문제는 책을 많이 읽은 사람 때문에 생겨요. 그 사람들의 문제는 이미 자기가 갖고 있는 해답을 뒷받침하는 책만 끊임없이 읽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많이 읽고 많이 안다는 사람일수록 흔한 얘기로 꼰대가 돼요. 자기 입장이 너무나 확고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 얘기를 들으려고 안 하는 것이죠. 그래서 알고리즘에 갇히는 거는 굉장히 위험한 거예요.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하고 만나서 대화를 나눠야 되는데, 이미 자신이 갖고 있는 세계관을 바탕으로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 다른 입장의 얘기를 들으면, 자기 관점이 깨질까봐 짜증부터 내요.

지금 우리의 독서 문화의 병폐는 바로 그 점이거든요. 학교에서 교사분들과 토론할 때 자주 하는 얘기인데, 독서교육을 자꾸 뭘 집어넣기로 생각하신단 말이에요. 근데 그런 식으로 애들한테 계속 집어넣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시라 말씀드려요. 그 틀에서 벗어나는 현장이 도서관이고, 애들한테 밥만 먹이는 게 아니라 이야기를 공급해줘야 하니까요. 예를 들면, 빅뱅 이야기가 이야기잖아요. 점이 터져서 우주가 만들어졌다는데, 이거 재미난 얘기거든요. 그러면 애가 선생님이 무슨 책 읽으라고 그러면, 서가 지나다가 자연과학 책도 보고 역사책도 보면서 자기가 발견해 가는 기쁨을 느끼는 거죠. 그러면서 '내가 갖고 있는 관점은 이렇지만 이 사람은 또 다른 관점을 갖고 있네'라고 느낄 수 있는 그런 현장으로서 우리가 아이들을 인도해야지, 독서교육한다고 꼭 이 책만 전해주려고 하는 거는 좀 곤란해요. 그런 거를 넘어서자고 지금 이렇게 책읽는사회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야 우리 사회가 새로운 가치와 문화에 대해서 정말 눈이 확 떠지면서 혁신이 일어나고 세계 문화를 주도하는 걸 내놓을 수 있죠.

유카와 히데키라고 일본에서 노벨 물리학상을 처음으로 받은 사람이 있어요. 탕천수수(湯川秀樹) 유카와 히데키. 이론 물리학자인데 중간자를 발견해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어요. 그런데 이 사람이 학문적 회고를 하면서 뭘 얘기하냐면, 자기가 어릴 때 노자를 읽었다는 거예요. 노자에 보면 '무에서 하나가 나오고 하나에서 둘이 나오고 둘에서 삼이 나오고 삼에서 만물이 나왔다'라는 구절이 있어요. 물론 노자가 살아계셨을 때 물리학이 있어서 이런 말을 만들어낸 건 아니죠. 그런데 자기가 물리학을 공부해 보니까, 무에서 하나는 이제 양성자겠죠. 핵, 원자핵. 그리고 하나에서 둘은 양성자와 중성자. 그런데 둘에서 삼이 나왔다는데. 이 삼은 뭔지 모르겠는 거죠. 자기가 볼 때 양성자, 전자 뭐 이런 세계가 당시의 우주관인데, 이 삼을 모르겠는 거예요. 그 질문을 갖고 탐구하다가 '이 삼은 중간자다'라는 가설을 세우고 탐구해 보니까, 실제로 중간자가 발견되는 거죠. 그러면 노자가 물리학일까요? 아니에요. 근데 인류 문화 문명은 그런 식으로 연결이 돼 있어요. 그러니까 노자 책은 우리 식 표현으로 문과책이기만 한 건 아니에요. 앞서 말씀드린 그 구절이 우주론이잖아요. 이런 점에서 다음 세대의 책 읽기를 얘기할 때, 사서가 그런 세계를 열어주는 인도자로서의 역할을 해야죠.

Q.이번에 금서 지정 반대 운동으로 플래시몹을 진행하셨는데, 다음 활동 계획 있으실까요?

특별히 계획은 없어요. 모든 일이 특별하지 않기 때문에, 그거는 일상일 수밖에 없죠. 사실 구체적 현장의 문제가 최전선이에요. 저처럼 밖에서 플래시몹하고 이런 거는 그런 사람들 힘내라고 응원하는 것이지, 그게 특별한 게 아니에요. 그리고 우리 사회의 기조가 금방 안 바뀔 거기 때문에, 도서관에서 일하시고 도서관을 고민하고 도서관을 사랑하고 또 지금 새롭게 문헌정보학을 공부하는 분들께 이러한 일들은 언제든지 닥칠 수 있는 일상적 사건이라는 걸 말씀드리고 싶어요. 언제든지 닥칠 수 있는 현실이더라고요. 그래서 끊임없이 이 문제에 대해 같이 고민해주셨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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