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낙묵:
한글날에 생각해 봄직한 문제
한글날이다.
한글의 본디 이름은 훈민정음이다. 훈민정음 해례 서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不相通~” "나랏 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짜와로 서르 사맛디 아니할쌔~, 훈민정음)이다. 이 서문을 현대 한국어로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로는 서로 통하지 않는다.”로 거의 다 옮긴다.
의문이 생긴다. 異乎中國에서 중국이 지금의 중국이냐는 것, 세종대왕 시대에는 중국이라는 나라는 없었다. 명나라였다. 중국이라는 나라 이름은 현대 마오쩌둥이 세운 '중화인민공화국'의 준말이다. 중국을 영어로 China로 부른다. China는 한자로 支那(지나)라고 부른다. 차이나나 지나는 현 중국을 처음으로 통일한 진시왕의 진(秦, Chin)에서 비롯되었다. 진이 중국을 통일하고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진이 바로 중국을 칭하게 되었고, 여기에 a, 또는 e를 붙여 영어의 China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자로 표기할 때 支那(지나)라고 하여 중국을 지나라고 불렀다. 마치 한국이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조선이었듯이 현재 중국은 支那(지나)였다. 따라서 異乎中國의 中國은 나라 이름이 아니다. 중심 되는 곳을 뜻하는 지역 이름일 수 있다. 비슷한 말로 중원(中原)이 있다. 중원은 넓은 들판의 중앙, 중국의 중심부나 중국 땅을 이른다. 지금의 북경 일대다. 북경 일대는 중국의 역대 나라들이 흥망성쇠가 일어났던 중심 되는 땅이었고, 무엇보다 우리 한국의 고대 조상 나라 고조선이 중심으로 활동했던 지역이다. 그 무엇보다 한자가 발생하고, 한자 문명이 발흥했던 지역이다. 따라서 세종대왕이 異乎中國이라 한 것은 中國은 나라 이름이 아니라, 북경 일대의 중원 지역을 이르는 말로 썼다고 봐야 한다. 따라서 異乎中國을 나라 이름 '중국과 달라서'로 풀이하는 게 틀린 것이다. 異乎中國을 중국 나라로 풀이하니, '중국의 한자와 달라'로 與文字不相通의 文字도 한자로 새긴다. 더 나아가 중국은 한자란 문자가 있는데, 우리나라는 문자가 없어, 훈민정음의 문자를 세종대왕이 창제해 쓴다고 해석한다. "故愚民 有所欲言 而終不得伸其情者 多矣 予 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人易習 便於日用耳"을 '이런 이유로 어린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나타내지 못할 사람이 많다. 내 이를 딱하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서 날마다 쓰기에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여기서 눈여겨 새겨야 할 세종 대왕의 뜻은 나라말이 없어서 훈민정음 이란 문자를 창제한 것이 아니라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제 뜻을 나타내고, 쓰기에 편하게 하고자 문자를 만들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나라말이 없어(중국은 한자가 있는데) 훈민정음을 창제한 것이 아니라 백성이 제 뜻을 잘 표현하는 쓰기에 편한 문자를 만든 것이다. 이 뜻에 비추면 異乎中國은 중국 나라는 자가 나라 문자가 있는데 조선은 나라말이 없어 나라말을 만든 게 아니라 북경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중국(중원) 지역과 말소리(발음)이 다르고, 누구나 말하는 바를 쉽게 표기(적을 수 있는)할 수 있는 소리글자(발음 문자)를 만든 것으로,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 한 뜻으로 새겨야 한다. 이렇게 훈민정음 해례 서문을 새겨야 자가당착(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에 빠지지 않는다.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를 우러르면서도 문자가 없어서 중국 나라의 한자를 빌려 쓰다가 훈민정음이 만들어져 비로소 나라말을 가지게 되었다는 정신 나간 소리를 국어 학자들이 자랑이라고 버젓이 하고 있다. 한자는 중국 문자, 중국말이라는 뿌리 깊은 관점이 이런 자가당착을 낳고 있다. 이 자가 당착이 중화 사대주의, 모화사상을 낳았다. 한자는 동아시아 공통의 언어다. 또 한자를 중국 민족인 화화족이 만든 것도 아니다. 한민족의 먼 조상인 동이족이 고조선 시대에 만들었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점점 얻고 있다. 어느 민족이 만들었느냐가 중요하지 않다. 한자는 역사적으로 한겨레 언어생활의 대들보 구실을 해 왔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자 때문에 백성들이 제 뜻을 표현하고 살지 못한 건 아니다. 계급 신분 사회에서 백성들은 문자를 배울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까놓고 말해 옛 중국 사람은 한자가 있어서 문맹이 없었는가 오히려 문맹이 더 많았다. 거기도 신분 계급 사회에 갇혀서 백성은 거의 문자를 모르고 살았다. 한자가 지배계층 중심으로 쓰인 일은 한자 문화권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다. 옛 중국 백성들이 한자가 있다고 해서 공자 왈 맹자 왈을 입에 달고 다녔다고 생각하는 거는 착각이다. 훈민정음이 만들어지면서 우리나라 사람의 말글살이(언어생활이)가 풍부해졌다. 백성들은 훈민정음으로 자기 말과 생각을 쉽고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또 한자(한문) 공부도 쉬워졌다. 이 점은 지배계급인 양반도 마찬가지다. 그전엔 한자 뜻을 한자로 배웠다. 훈민정음(한글)으로 한자 뜻을 백성의 말(지금은 순우리말)로 배우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두 개의 언어로 말글살이(언어생활)을 했다. 뜻글자인 한자와 소리글자인 훈민정음(한글)으로 훈민정음(한글)을 한자와 대립 관계로 보지 말고 상호 보완 관계로 봐야 한다. 특히 한자는 일제 강점기 들어온 일본식 한자를 버리고 조선의 한자를 배워야 한다. 조선의 한자는 백성의 말이 깊게 배어 있다. 조선의 한자는 한겨레 역사와 전통 문화, 고전 문학을 통해 배워야 한다. 그 길이 말글살이(언어생활)를 풍부하게 하는 길이고 한글날을 기리는 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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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관:577돌 한글날을 맞아 나누는 <한글서예>이야기
-한글서예를 생각하며 쓴 책, 한 대목입니다_
한글서예
언어는, 그 언어를 쓰는 민족 모두가 살아오고 겪은 일상에서 쌓인 시간이 들어있습니다. 한 민족이 살아온 경험이 축적되어 있으며 정서와 역사를 품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하여 언어는 단순히 입에서 맴돌고 나오는 소리나, 무엇을 기록한 글자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에 깊이 배어 나오는 모든 표현방식을 포함합니다. 당연히 다른 언어를 몸과 마음에 새긴다는 것은 그만한 시간과 세월이 필요합니다. 하여 한반도에 사는 우리는 한글서예를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굳이 남의 나라 글자로 제 생각과 사상을 쓰고 말 할 까닭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자漢字’라는 언어는 그림으로 시작됩니다. ‘상형문자象形文字’라고 하지요. 높다란 돌기둥에 그림 같고 기호같이 새겨놓은 이집트문자, 거북이 배딱지나 짐승 뼈에 새겨진 갑골문자甲骨文字같은 글자들입니다.
처음에는 ‘그림언어’였습니다. 상형象形이 물형物形을 본뜨고 그리는 것이니 다름 아닌 ‘그림글자’입니다. 꽃을 그리고, 해를 그리고, 물고기를 그리고, 말馬을 그리고, 사람을 그려 상대방에게 뜻을 전했습니다. 그러면 상대방은 꽃을 알아보고, 해를 알아보고, 물고기를 알아보고, 말을 알아보고, 사람을 알아봅니다. 보태어 눈과 입이 마음과 표정을 담았으니 사람마다 ‘온 얼굴’이 그림언어였습니다.
‘한자’는 글자 획 안에 그림이 담긴 채 진화되어 ‘뜻글자(표의문자表意文字)’가 되었습니다. 자연히 글자마다 본디 비롯된 형상이 있어 뜻하는 바를 표현하기에는 수월한 면이 있지만, 그 뜻을 새기고 공부하기에는 여간 어려운 문자가 아닙니다. 주로 ‘천자문千字文’에 실린 1천자 정도를 알고 있으나, 한자 수는 10만자 정도로 가늠하고, 평소에 쓰는 글자 수만 해도 3천 자가 넘는다니 오랜 공부가 필요합니다. 그러기에 한자 뜻을 충분히 알고 그 문자를 몸에 익혀 자기 몸에서 나오는 문장으로 글씨를 쓴다는 것은 한자를 모어로 하는 민족에겐 가능할지 모르나, 우리에겐 어려운 일입니다. 한학자나 한문이 경지에 오른 사람들은 제 뜻을 한자로 펼치는 일이 가능하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제 나라 말만큼은 못 미칠 겁니다.
문제는 서예를 하는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 한자를 모르고 평생 한문서예를 쓴다는 사실입니다. 한자를 읽을 줄 알고 그 뜻을 대강 안다고 그 언어를 이해한다고 볼 수 없습니다. 언어가 완전히 몸에 익어 어떤 뜻이든 마음대로 표현할 수 있는 정도가 되어야 ‘안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외워서 아는 언어가 아니라, 들어도 그냥 알고, 어떤 문장이라도 자연스럽게 짓는 정도가 되어야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조선을 지나 현대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한 결 같이 서예를 한다면 한자를 쓰는 걸까요? 앞서 말했지만 ‘자존감’이 무너져서입니다. ‘언어권력’에 물들어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자존감이 묻혔으니 내 속에 꿈틀거리는 상상력은 깊은 잠을 자고, 품고 있는 창의력은 샘솟지 않습니다. 일제강점기를 지나 해방이 해방이 아니요, 독립이 독립이 아닌 역사를 사는 까닭입니다. ‘청산淸算’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가려지고 덮어진 역사를 사는 까닭입니다. 게다가 길고 참담했던 독재를 건너 숨 쉴 겨를도 없이 몰려들어온 천박한 자본주의에 눈이 멀어, 사람이 ‘사는 이유’와 ‘사는 방식’을 잃은 까닭입니다.
글씨를 말하며, 엇나간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역사를 들춰내는 이유는 글씨가 곧 사람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요, 사람 마음은 그 민족이 지닌 역사와 문화에서 우러나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굴곡과 가파름에 ‘제 것’을 챙기지도 못한 딱한 사정이 우리 시간 속에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있으나, ‘자존’과 ‘창의성’은 스스로 이끌고 견디며 일구어 나가야 하는 일이기에 이런 변명에 숨어서는 아니 됩니다..
무엇보다 ‘한글서예’를 말하는 이유는, 거듭 강조하지만 ‘서예’는 ‘내 생각’을 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글씨’라는 기술을 쓰는 것이 아니라, 내가 품고 있는 사유의 세계를 펼치는 것이 서예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가지고 있는 철학과 뜻을 우리말을 하듯 한자로 표현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써도 좋겠지요.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굳이 모어, 내 나라 말, 내 언어를 놔두고 남의 나라 문자로, 다른 언어로 쓴다는 것은 이상하고 어색한 일입니다. 거기 가식의 중독이 보입니다. 한글보다 한자를 위에 놓고 ‘암클’이라며 깔보던 조선의 굳어진 관념과 다르지 않습니다. 한글문장도 제대로 펼치지 못하면서 한자를 알아야 뭘 좀 아는 사람으로 대접하는 천박하고 슬픈 시대를 이어갑니다. 내가 가장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는 말과 글을 놔두고 남의 말과 글을 쓰는 일을 계속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심각한 일인지 인식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동양학에 흐르는 지혜가 집대성 된 한자서예에서 그 깊이 있는 정신을 공부하는 일입니다. 또한, 그것에서 숲과 같이 자라난 문장들과 들꽃처럼 피어난 시詩를 눈여겨 봐야합니다. 산맥과도 같이 유유히 이어져 내려오며 큰 강물처럼 도도히 흐르는 그들의 지혜를 겸허한 자세로 받으며 마침내, 내 생각과 내 문장으로 바꿔내야 합니다. 우리는 한자서예에서 정신을 배울 일이지, 글자를 배울 일은 아닙니다. 그들이 쌓아온 서법의 필력을 기르는 일과 글자 자체를 따라 쓰는 일은 다른 것입니다. 보태어 서양과 동양에 이어져오는 철학과 이야기들을 삼베를 짜듯 잇고, 날과 씨를 엮듯 짜서 ‘우리이야기’로 만들어내야 합니다. 치우치고 기우는 생각이 아닌, 유연성 있고 깊이 있는 정신으로 우리 정서가 담긴 문장으로 피어나게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내 몸과 마음에 익어진 언어로 지어내어 우리글인 한글로 표현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굳이 한마디 더 하자면, 중국인들 앞에서 한자를 쓰는 일은, 재즈나 랩rap을 흑인들 앞에서 연주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재주로 갈고닦아도 그들에게 미치지 못합니다. 단순한 음악성과 기술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온 정서와 삶이 그 안에 스며있어야 합니다. 수 천 년 내려오며 그곳에서 나고 자란 정서와 문화 덩어리인 한자를 그들보다 더 잘 쓰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바꿔 말하면 다른 나라 사람들이 한글서예를 이 땅에서 사는(살아온) 우리보다 잘 쓰기는 불가능하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뛰어난 음악성을 지닌 (외국)재즈뮤지션이라 할지라도 우리와 함께 자란 판소리를 잘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는 말입니다.
언어 안에 흐르는 피와 정서를 유한한 인생으로는 바꿀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찌하여 만약 더 잘 한다하여도 그것을 내세우고 자랑할 일은 없습니다. 제 나라 글과 말을 아끼며 쓰는 일에 견주어 그럴 일이 결코 아닙니다..
훈민정음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처음 알릴 때에 글자 수는 28자(오늘날에는 24자만 사용)였습니다.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을 만드는 데 큰 몫을 했던 정인지는 ‘천지만물에 소리가 있다면 천지만물에 글자가 있다’는 단순하면서도 참신한 철학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물론, 세종과 같은 마음이었겠지요. 한글은 누구든지 한나절 시간을 내어 몇 글자만 익히면 거의 모든 표현을 할 수 있는 문자입니다. 그만큼 유연성과 활용도가 남다른 탁월한 문자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글자를 ‘만든 이’의 속마음이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한글은 그야말로 ‘만백성’으로 일컫는 ‘모든 사람’을 향해 있습니다. 여자 어린아이 남자 노인뿐만 아니라,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도 누구나 쉽게 외우고 쓸 수 있도록 만든 글자입니다. 그리하여 한글은 ‘배려와 연민의 글자’입니다.
이 지구상에서 인류가 사용하는 언어 중, 언어를 만든 ‘때’와, 만든 ‘사람’과, 만든 ‘목적’을 알 수 있는 언어는 우리가 쓰는 언어 ‘한글’밖에는 없습니다. 게다가 표기방식도 세계에서 가장 최근에 만든 언어이니 그만큼 ‘현대적’이라는 밀도감이 진한 글자입니다. 흥미롭고 뿌듯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기 나라 언어를 스스로 만든 민족도 수메르 민족, 이집트인, 페니키아인들 정도라고 합니다. 세계 대부분의 민족이 자기가 쓰는 글이, 말이, 그 언어가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언어로 갖는 자존감은 어떤 민족도 우리민족을 따라올 수 없습니다..
하지만 ‘소리글자(표음문자表音文字)’인 한글은 ‘뜻글자’가 가진 풍부하고 아름다운 함축성이 부족하기에 글씨로 표현하는 ‘서예동네’로 옮겨가면 결코 유리한 글자가 아닙니다. 게다가 서예로 쓰기에는 그 구조가 단순하여 짜임새 있게 구성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기에 한글서예는 ‘뜻’이 담긴 문장을 표현하려면 ‘붓’이 가지고 있는 매력을 한껏 도모하고, 한 획, 한 글자로 길쌈하듯 꼼꼼하게 구성하되 자연스러우며 세련되게 잘 엮어야합니다. 이렇듯 한글서예는 글자 짜임새를 변형시키고 응용하는 길이 잘 보이지 않으니 당연히 ‘체體’를 만들어내기도 까다롭습니다. 이것이 서예를 하는 이들도 한글서예를 멀리하는 큰 이유라고 봅니다.
그리하여 또 한 번 ‘한글서예’를 아끼는 마음이 보태집니다. 글씨(서예)는 하루아침에 해낼 수 있는 일이(장르가) 아닙니다. 별을 헤아리듯 멀리 바라보고 아기가 자라나듯 기다려야합니다.
서예라는 장르가 만약 근사한 글꼴과 반듯한 글씨만을 향한 것이라면 도무지 그 매력은 크게 떨어지겠지요. 하지만 문장 속에 담긴 뜻이 그 핵심이요, 문장이 품은 정신이 그 나갈 길이라면 우리가 한글서예를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모든 언어는 뜻을 가지고 있고, 그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과 사람은 그 뜻을 전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 몸 안에는 한글이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 혈관에 모음이 흐르고, 우리 근육에 자음이 흐릅니다. 숨을 쉬어도 한글이요, 노래를 불러도 한글입니다. 그리하여 ‘한글서예’는 우리 숨이요, 우리 피요, 우리 근육이며 우리에게 흐르는 노래입니다. (홍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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