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 29일 화요일

쓰고자 하는 사람은 읽지 않을 수 없다

지난 12월 21일 월요일, 대구를 방문했었다. 2010년 대구광역시 교육청과 함께 '책날개' 사업을 전개하게 되는데, 이 날 대구 지역의 초등학교 선생님들을 모시고, 이 사업에 대한 설명회를 열었다.

 

설명회가 끝난 뒤, 한원경 장학관님과 함께 차를 마시고, 식사도 하였다. 책읽기, 책쓰기에 대하여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 이야기 가운데 한 장학관님이 <대구매일>에 칼럼을 쓰기 시작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런데 12월 29일자에 그 칼럼이 실려 있어 읽게 되었다. '깊은생각'이라는 칼럼 꼭지에 '책쓰기와 한글'이라는 제목의 글이다. 한 장학관님은 앞으로 제목을 계속 잇대어 나갈 생각이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다음 칼럼의 제목은 '한글과 무엇'이 될 터이다.

 

지난 몇 년 동안 대구광역시 교육청이 전개한 '독서운동'은 다른 지역의 귀감이 된 바 있다. 그렇게 된 데에는 몇 가지 필수불가결한 요인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요인 가운데 무엇보다도 한원경 장학관이라는 분의 역량이 우뚝하다. '글쓰기와 한글'이라는 칼럼에서 한 장학관님이 밝히고 있는 생각은 책읽기 교육에 더하여 책쓰기 교육으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쓰고자 하는 사람은 읽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전 세계에서 출판되는 책의 70% 이상이 알파벳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알파벳이 배우기 쉬운 문자이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란다. 하지만 그러한 알파벳보다 더 배우기 쉽고 과학적인 문자가 바로 한글이다. 영국의 역사 다큐멘터리 작가 존 맨은 모든 언어가 꿈꾸는 최고의 알파벳이 바로 한글이라고 했다.

 

한글은 세계의 모든 언어 중에서 가장 배우기 쉬울 뿐만 아니라 인간이 발음하는 거의 모든 소리를 표기해 낼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탁월한 기능을 지닌 완벽한 꿈의 문자인 한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한명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럴까?

 

우수한 작품은 많지만 번역 수준이 형편없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그 이유도 타당하다 할 수 있지만 그것보다는 제대로 된 위대한 작품이 부족한 탓이 아닐까? 6·25전쟁은 세계 전쟁사에 가장 짧은 기간에 가장 많은 희생자를 만들어 낸 비참한 전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참상을 드러내고 고발한 세계적인 문학작품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우수한 문자와 풍부한 소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문학작품을 만들어 내지 못한 원인은 무엇일까? 어릴 때부터 독자교육만 하고 저자교육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수가 작가라는 이름을 가지고 작품 창작을 독점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책을 읽는 독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영국의 해리포트 시리즈,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 등의 작품이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북스타트와 같은 책읽기 운동의 공도 있지만 그것보다 어릴 때부터 저자와의 만남과 같은 자연스러운 저자교육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저자교육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책쓰기 교육이다. 책쓰기 교육은 560여년 전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만드신 숭고한 뜻을 완성하는 길이기도 하다. 세종대왕께서는 불쌍한 백성들이 자신의 뜻을 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한글을 만들었다고 하셨다. 자신의 뜻을 편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자신의 뜻은 자신만의 표현으로 이루어진다. 당연히 남이 쓴 글을 읽을 줄 아는 단계를 넘어 자신의 삶을 글로 쓸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까지의 책읽기에 치우친 한글교육은 절름발이 교육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만의 책으로 써 내는 그것이 바로 진정한 소통이다. 자신의 문제를 책으로 써 공론화할 수 있어야 소외되거나 억울한 사람이 없는 진정한 선진사회가 된다.

 

문맹률 제로를 이끈 꿈의 문자 한글을 가지고도 수동적인 책읽기 교육만 하고, 능동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책쓰기 교육을 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한글로 전 세계 책의 절반이 출판되는 날을 기대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욕심일까?

 

한원경(대구시교육청 장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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