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히로시마에 갔다가 돌아왔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히로시마에는 일본 전역과 세계 각처로부터 평화를 염원하는 수많은 시민·활동가들이 모여들어 다양한 집회를 연다.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8월6일이 바로 저 가공할 원폭이 투하된 날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번에 난생처음 그 히로시마를 방문하게 된 것은 오랫동안 평화운동을 해온 일본의 한 시민단체 덕분이었다. 그들은 ‘8·6 히로시마 평화모임 2018’이라는 이름으로 금년의 집회를 준비하면서, 최근의 한반도 정세와 관련하여 한국인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의견을 모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어쩌다가 내게 강연 요청이 왔는데, 그 요청을 받은 지난 5월쯤에 나는 이번 여름 더위가 이토록 지독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약속된 날짜가 다가오자 더위에 약한 나는 서울보다 더하면 더했지 조금도 덜하지 않을 히로시마의 가마솥더위 속으로 들어갔다가 돌아올 일이 아득했다.(어디선가 읽은 증언 기록에 의하면, 원폭 투하에서 기적처럼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기억 중에 가장 뚜렷한 것 하나는 73년 전 그날 아침 폭탄이 터지기 직전의 히로시마 날씨가 너무도 더웠다는 것이다.)
내 강연 요지는 단순했다. 즉, 2차 세계대전 이후 지금까지 한반도와 동아시아, 나아가서는 세계 전역에 걸친 제1의 지배논리는 안보였고, 이 안보논리 때문에 인류사회(특히 한반도와 동아시아)에는 여하한 창조적인 삶의 가능성도 원천적으로 차단되었다. 최근 촛불혁명 이후 남한에 모처럼 민주정부가 들어선 이후 한반도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해빙 기류는 이 안보논리에 갇힌 기존의 세계질서를 타파하는 것은 물론, 우리들의 상상력을 열어주는 결정적인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한반도 주민은 말할 것도 없고 동아시아인 전체는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질적으로 높은 인간적인 삶을 자유롭게 탐색할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기회를 살리는 데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일찍이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2009~2010년 재임)가 제시한 ‘우애에 기초한 동아시아공동체’라는 개념 혹은 그와 유사한 정치철학이며, 그것을 위해서 무엇보다 불가결한 것은 민족과 국경이라는 경계를 넘어선 동아시아 시민들끼리의 자유롭고 활발한 교류와 대화, 연대를 향한 노력이다….
그러나 이런 까다로운 문제보다 더 근본적인 우려도 표명되었다. 그것은 동아시아공동체라는 개념은 그 자체로 흠잡을 데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 말에는 어딘가 ‘아시아주의’를 표방하면서 실제로는 아시아 침략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했던 일본제국주의 시대 우익 사상의 불길한 냄새가 풍긴다는 점을 지적하는 발언이었다. 거기에 대해 나는 우리가 지향하는 동아시아공동체는 어디까지나 ‘우애’에 기초한 것이며, 따라서 어떤 특정 국가가 동아시아공동체의 구축을 주도한다는 발상 자체를 버려야 한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고, 매우 상식적인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강연장은 한국이 촛불혁명으로 민주정부를 세움으로써 ‘희망적’인 사회가 된 것을 매우 부러워하는 분위기였다. 참석자들은 거의 전부라 해도 좋을 정도로 68학생운동을 경험한 고령층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아마도 연금생활자인 듯했다. 사실 내가 봐도 문제였다. 일본의 젊은이들은 사회에 부조리가 넘쳐나도, 총리를 비롯한 정치가와 고위 공직자들이 끊임없이 거짓말을 하는 상황이 계속되는데도, 정치에는 무관심한 채 자신들의 개인생활에 매몰된 잘 길들여진 가축이 돼 가고 있다고 누군가 한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나는 잘 모르지만, 한때 세계적으로도 가장 극렬한 투쟁을 전개했던 옛 학생운동가들의 탄식이 절절하게 울려왔다. 그러나 그들의 발언을 들으면서 나는 밤낮없이 스마트폰에 고개를 들이박고 지내는 한국의 젊은이들을 생각하고, 속으로 한없이 불편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뜨거운 히로시마의 햇볕 속을 걸으며, 그리고 히로시마평화공원에서 지금까지 사진으로만 봤던 저 뼈만 앙상하게 남은 ‘원폭돔’의 실물을 보고, 공원의 한쪽 구석에 세워져 있는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비’를 찾아 헌화를 하며 묵도를 하는 동안에도, 내 뇌리를 집요하게 붙들고 있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기후변화 문제였다.
기후변화가 세계적 이슈가 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금년 여름 세계는 전례 없는 규모와 강도의 열파 속에서 온갖 종류의 재앙을 겪으며 신음하고 있다.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지역은 우리가 경험하는 대로이지만, 서유럽의 기온은 아프리카의 사하라사막 수준이 되었고, 북극권마저 기온이 무려 30도까지 올라 스웨덴에서는 곳곳에 발생한 엄청난 산불을 제어하지 못해 마침내 폭탄을 떨어뜨리는 방법까지 쓰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만년설과 빙하의 고장 그린란드는 얼음이 녹아내린 땅이 온통 진창으로 변했고, 그 결과 멕시코만의 해류 속도가 느려져 남대서양의 해수 온도가 상승하고, 그 여파로 남극대륙의 동쪽 빙하가 급속히 붕괴되고 있다고 과학자들은 설명하고 있다.
전쟁은 어쨌든 막아내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핵무기라는 것도 완전히 미치지 않았다면 그 누구도 쓸 수 없는 무기이다. 하지만 기후변화는 본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문제다. 물론 화석연료의 대량 소비에 의한 온난화 가스 배출이 주된 요인이라는 점에서 인간사회가 합심을 한다면 못 막을 사태는 아닐 게다. 하지만 대기 중 온난화 가스가 어떤 수준을 넘어버리면 그때는 여하한 노력도 부질없는 것이 돼버린다는데, 지금은 온갖 정황으로 볼 때 그 수준을 넘고 말았다는 과학적 평가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심지어 10~15년 내에 인류를 포함한 고등생물들이 절멸할 것이라고 말하는 과학자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세계의 초부유층은 어떻게 하면 자기들만 살아남을 수 있을지 도피할 궁리만 하고, 정치가들은 여전히 경제성장이라는 미신에 붙들려 있다. 히로시마에서 서울로 돌아오자 문재인 정부가 ‘혁신성장’을 위해 규제완화를 적극 추진하기로 했다는 뉴스가 나온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민주정부’도 이럴진대 우리는 어디서 희망을 찾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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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56954.html#csidxcaf356979b47f31b2a3600ce1580e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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