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담서원의 ‘스터디 민주주의’ 실험
조운찬 논설위원
2020.01.08 20:50 입력
한 달 전, 경향신문에 연재되고 있는 ‘이굴기의 꽃산 꽃글’이 소식을 전했다. 서울 서촌에 자리한 길담서원이 충청도 공주로 옮겨간단다. 길담의 인터넷카페에 들어가니, 책방의 책을 할인판매한다는 글이 올라 있다. 공주 이전을 앞두고 정리작업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지난 주말 길담서원을 찾았다.
오후 늦은 시간, 길담서원 카페에 10여명이 둘러앉아 ‘<자본> 읽기’ 세미나를 하고 있었다. ‘<자본> 읽기’는 지난해 4월부터 경제학자 강신준 교수의 주도로 매달 한 번씩 마르크스의 <자본>을 발췌 해석하는 방식으로 읽어가는 모임이다. 길담의 공부모임은 대체로 회원들이 텍스트를 자율적으로 선정해 진행한다. 과학책을 읽는 ‘시민과학공부 모임’, 경제를 공부하는 모임, 인문학 독서모임 등이 그런 부류다. 그러나 <자본>이나 <헤겔 정신현상학>처럼 전문가의 지도로 진행되는 강좌도 있다. <코스모스>(칼 세이건), <어린왕자>(생텍쥐페리),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니체)와 같은 고전을 원어로 읽는, 원서읽기 모임은 꽤 유명하다. ‘차라투스트라’를 읽으면서 니체 철학에 빠져 대학원에 진학한 회원까지 있을 정도다. 책읽기만 있는 게 아니다. 바느질을 배우며 세상을 얘기하는 ‘바느질 인문학’도 있고, 도시농업을 배우는 ‘텃밭인문학’도 있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이 ‘인문학’을 얘기했다. 대학이 인문학 위기에 빠졌다고 했을 때, 캠퍼스 밖에서는 인문학 열풍이 일었다. 인문학 모임이 하나둘 생겨나고, 지방자치단체에서 잇따라 시민을 위한 인문학 강좌를 개설했다. 기업의 인문학 연수는 스타 인문학 강사들을 배출했다. 길담서원이 첫발을 뗀 것도 그즈음이다. 출범부터 화제가 됐다. 서원이 들어선 곳이 청와대 근처인 데다, 문을 연 2008년 2월25일이 기업인 출신 대통령의 취임 날과 겹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길담서원이 더 주목을 받은 것은 대표의 이력과 독특한 운영방식 때문이었다.
길담서원 박성준 대표는 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한 신학자이고, 대학에서 평화학을 가르친 교수다. 젊은 날에는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돼 13년6개월간 복역하기도 했다. 그가 길담서원을 열었을 때는 68세. 은퇴 나이에 “인생의 길을 찾기 위해 인문학을 생각했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놀라워했다. 그만큼 길담서원에는 박 대표의 오랜 생각과 철학이 담겨 있다. 서원을 서점, 카페, 갤러리, 콘서트홀 등으로 구성한 데에는 공부와 놀이를 결합하면서 문화예술을 향유할 수 있어야 한다는 그의 고민이 녹아 있다. ‘서원’이란 이름에서는 교육, 수행, 생활이 어우러지는 공동체에 대한 꿈을 읽을 수 있다. 간판을 내건 이는 박 대표였지만, 운영은 회원들의 몫이었다. 박 대표는 길담서원의 운영가치로 ‘자율’과 ‘우정’을 강조해왔다. 회원 누구든 인터넷에서 또는 오프라인 모임에서 좋은 기획을 제안하면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다. 그는 대표보다는 ‘서원지기’를 자처하며 낮은 자세로 회원들과 소통해왔다. “밤길을 걸을 때 힘이 되어주는 것은 친구의 발걸음 소리”라는 발터 베냐민의 말을 즐겨 인용하는 박 대표는 우정이야말로 인간 연대의 토대라고 믿는다.
박성준 대표는 “길 잃고 목마른 나그네들을 위해 옹달샘을 하나 파는 심정”으로 길담서원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12년이 흐르면서 옹달샘은 인문학 공부에 목말라 한 사람들이 찾는, 도심 속 큰 우물이 됐다. 지금도 길담서원에는 매주 10여개의 공부모임이 열리고, 온라인카페에는 9000여명의 회원이 가입해 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인문학의 가치를 발견하고 생각의 근육을 키웠다. 토론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생각 공장’이었고 ‘스터디 민주주의’의 장이었다. 길담서원은 독특한 커리큘럼과 회원들의 자율적 운영으로 인문학공동체의 새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럼에도 박 대표는 “나는 여전히 헤매고 있다. 나는 모른다”고 말한다.
길담서원의 ‘스터디 민주주의’ 실험
회자정리(會者定離)라 했던가. 길담서원의 공주 이전은 어느덧 팔순이 된 박성준 대표의 건강과 후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고려한 결정이다. 공주 길담서원 대표는 그간 학예실장으로서 서원을 이끌어온 이재성씨가 맡는다. 다음달에는 12년 활동을 정리한 <작은공간의 가능성, 길담서원>도 출간한다. 길담서원의 이사는 지방으로 인문학 영토가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재성씨는 공주 길담서원을 인문학에 ‘농(農)적 가치’를 결합한 새로운 공동체로 운영할 것이라고 귀띔했다. 길담서원의 새로운 길찾기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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