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한 대목은 책에서 고른 것이 아닙니다. 누리집들의 여러 글 가운데 한 대목을 골랐습니다. 오늘 사무처에는 산후 휴가 중이던 김선영 간사님께서 복귀했습니다. 그래서 잠시 짬을 내어 농사 일을 배우러 간 다른 김 간사님은 어찌 지내시나 궁금해졌습니다. 풀무환경농업전문과정의 9기 신입생이 된 그이의 글이 마침 눈에 띄어 옮겨 놓습니다.
그 글 가운데 "나에게도 내년 새봄은 들나물로 시작되겠지."라는 기대감이 실감 있게 다가왔습니다.
봄이 와도 봄 같지 않은 이 봄,
기다림이 봄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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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미
첫 실습 시간에 장 샘이 호미를 한 자루씩 나눠 주셨다. 풀무 전공부가 나를 애기농부로 인정하고 농사에 필요한 도구를 하나 장만해 준 것이다. 가슴 벅찬 순간이었다. 두해 전 호미와 밀짚모자를 구해다가 내가 일하던 사무실에 두었던 기억이 났다. 해질 때까지 실내에서, 호미질 할 땅 한 뼘 없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호미를 바라보거나 모자를 어루만지는 것뿐이었다. 이제는 당당하게 사용할 내 호미가 생겼다.
김유리 2009년 3월 8일
일 투정
우리 기수(전공부 9기)는 사람 수가 많아서 한사람 몫으로 다 돌아가지 않는 게 생긴다. 도서관의 책, 풍물 악기 수, 아침 똥 눌 변기.
때로는 일도 그렇다. 사람이 많으니까 칠백평 밭에 심을 감자와 완두콩 파종이 금세 끝난다. 참 먹을 때도 안됐는데 일을 마치기도 한다. 계분을 퍼 올리느라 트럭 짐칸에 다가가면 두겹 세겹 둘러싸게 되어 친구 머리에 계분을 뿌리게 될 정도다. 그런데다 일 욕심들도 많아서,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시골 어디서나 성실하다고 칭찬 받을 사람들이 모였다.
이런 가운데 작용하는 통념 두가지가 있다. 통념 1: 남자니까 내가 할게. 통념 1에 대한 내 생각: 일의 분량이 한정돼 있으니까 한 번씩이라도 더 실습할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서로 배려하는 것이 좋겠다. 통념 2: 내가 더 힘이 세고 능숙하니까 내가 할게. 내 생각: 너무 오래 머리와 입만 쓰고 살아서 몸으로 하는 일로 균형을 찾아가려는 노땅에게도 기회를 주라. 실습 시간에 무엇인가 하고 있으면 언제든지 사방에서 손이 나타나 내 손에서 도구나 짐을 받아 가고, 내 의사와 관계없이 어느새 뒤로 밀려 우두커니 서 있곤 한다.
그래도 조바심 내지 말고 천천히 겪어나가자고 마음먹는다. 아직 첫달이 채 지나지 않았고, 모내기와 논 김매기 일도 시작되지 않았다. 우리 기수는 사람이 많아서 일이 더 늘어나도 걱정 없다. 그때 나도 한손 보탤 수 있기를 바란다. 내가 기운이 없고 약해졌을 때 도와줄 손들도 많다. 누군가 아프면 나도 도울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내 나이와 성별과 힘에 상관없이 언젠가 나도 맛볼 수 있기를 바란다, 몸 노동으로 인한 영혼의 정화 그리고 대지에 굳건히 발 딛고 선 사람만이 가지는 긍지와 용기를!
김유리 2009년 3월 18일
*보기만 해도 상큼한 냉이 한 움큼. 사진출처: http://dazizima.com/2461435
봄
언니는 나물을 캐러 다닌다. 모자 쓰고 옷 든든히 입고 바람 부는 들에 나간다. 소쿠리를 들고 나갈 때도 있고 배낭만 짊어질 때도 있다. 생활관을 들락거리다 보면 어느새 언니가 캐어온 나물이 현관에 줄줄 놓여 있다.
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언니는 냉이를 캤다. 냉이 담은 그릇에 씀바귀가 조금 얹혀 있었는데 이제는 씀바귀만 해도 한소쿠리 그득 쌓인다. 오늘의 나물 목록은 씀바귀, 민들레, 소리쟁이 삼총사다. 소리쟁이는 된장국에 넣어 먹는다고 언니가 알려줬다. 냉이로는 국 끓이고 양념을 해 무친다. 파말이 강회 하듯 돌돌 말아 차를 만들 수도 있다. 냉이말이 차와 쑥말이 차를 넓은 그릇에 담아 말리는 장면은 백마리도 넘는 갑충이 일정한 간격으로 웅크리고 앉아 동심원을 그리는 것처럼 보인다. 언니는 쑥말이 차 한잔을 방으로 가지고 올라와 맛보여주었다. 향이 은은하고 속이 따뜻해진다. 민들레는 뿌리까지 온전히 캐서 얇게 썰어 말리고 잎과 줄기는 데쳐 먹는다. 지난 주말 언니와 언니 친구가 함께 다듬어 무친 민들레 나물을 먹는데 얼마나 맛있었는지 모른다. 쌉쌀하면서도 쫄깃했다. 언니들은 양념 없이 그냥 먹었다. 민들레 뿌리의 싱싱한 단맛도 참 좋다. 언니가 한번 먹어보래서 처음 맛을 본 이후로, 널어놓은 곳을 지날 때마다 한개씩 집어 먹는 것을 언니는 알까?
실습을 하고 있으면 멀찌감치 언니가 나물 하러 나가는 모습이 보인다. 나도 따라가고 싶어진다. 보름 전쯤 나도 언니처럼 냉이 캐러 한번 나가 봤다. 학교 밭 주위 길가나 논둑에서 한참 캤다. 언니는 나물을 하면 흙이 안보이게 깔끔하게 털어가지고 기본적인 손질을 해다가 집으로 들이는데, 그에 비해 나의 냉이는 흙덩어리였던 것 같다. 그래도 당번이 씻어주고 곽 샘이 무쳐주신 냉이 나물 반찬을 먹으며 흐뭇했다.
언니 방 작은 찬장에 들나물 차 담은 유리병이 세개로 늘어났다. 한해 동안 얻을 수 있는 나물과 약초 가공품으로 찬장이 가득해지겠지. 나에게는 아직 이름 모를 풀들이지만 언니 어깨너머로 하나하나 얼굴을 익힐 수 있겠지. 그러면 나에게도 내년 새봄은 들나물로 시작되겠지.
김유리 2009년 3월 23일
*글의 출처: http://www.poolmo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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