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준식 감독의 다큐멘터리 '어머니'. 2012년 4월 9일 대학로 CGV에서 영화평론가 김영진과 이화정 기자가 태준식 감독과 함께 시네마톡을 열고 있다. 사진: 안찬수
21세기의 '전태일'은 여전히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고 있는 현실. 그 근로기준법 가운데 눈에 띄는 조항 하나. 제10조.
사용자는 근로자가 근로시간 중에 선거권, 그 밖의 공민권(公民權) 행사 또는 공(公)의 직무를 집행하기 위하여 필요한 시간을 청구하면 거부하지 못한다. 다만, 그 권리 행사나 공(公)의 직무를 수행하는 데에 지장이 없으면 청구한 시간을 변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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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스무비=글 태준식 감독] <어머니>는 다양한 투쟁의 현장을 가로지르며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을 꿈꿨던 태준식 감독 필생의 과업으로, 노동운동의 대모 이소선을 넘어 겸손과 낙천으로 향기로웠던 인간 이소선을 뚝심 있게 그려낸 작품이다. 태준식 감독은 전태일의 어머니이자 모든 노동자의 어머니셨던 고 이소선 여사의 마지막 2년을 그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바라보며, 가장 낮고 사려 깊은 카메라로 밀착해서 기록했다. 2년 여간 어머니의 심부름도 하고, 손톱도 깎아 드리고, 고스톱도 함께 치는 등 어머니의 평온한 일상에 함께 속하며 두터운 신뢰를 쌓아간 태준식 감독이 <어머니>를 만들면서 일어났던 일들을 상세하게 털어놓았다.
1. 피곤. 2000~2001
피곤함이었다. 이 체제의 균열을 내고 실질적인 변혁을 가져올 수 있는 노동자계급이 더 이상은 하나가 될 수 없음을 알았던 그 순간. 그럼에도 나와 나의 친구들은 이 체제의 불안정에 노예처럼 종속되어 그 피해를 온전히, 끊임없이 받아 않아야 한다는 사실을 온 몸으로 느끼던 그 순간. 피곤함이 밀려왔다. 한통계약직 노동자들이 전화국에서 끌려 나오고 흩어진 노동자들이 한강대교에 올라가 절규해도, 온 몸에 고추장을 바르고 출입을 막던 경비와 충돌하며 눈물짓는 주봉희 위원장을 팔로우 하면서도, 희망의 크기를 키우기 보다는 패배를 받아들이는 나름의 방법을 배우는 시기였다. 지독한 환멸의 시간이었다.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소선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은 그때부터 였던거 같다. 노동자뉴스제작단에서 할당(?)받은 편집을 위해 지난 시절의 화면을 보다 보면 언제나 대오 가운데에 아니면 연단 위에서 달관의 표정으로 지도부와 대오에 참여한 노동자들을 바라보고 있던 그녀. 그리고 마이크를 잡으면 언제나 당대 노동운동의 큰 화두를 ‘계급적 단결과 연대’로 단칼에 정리해 버리는 그녀 특유의 화법에 놀라곤 했었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라는 신화보다는 그저 저 자리에서 흔들리지 않는 메시지를 보내는 그녀의 강건함에 매료되었었다.
만나보고 싶었었다. 어줍잖게 첫 장편 다큐멘터리였던 ‘인간의 시간’을 끝내고 인물다큐멘터리를 해보고 싶다는 욕구가 ‘대화’ 시리즈와 ‘필승’ 시리즈의 틀을 만들고 있던 중이었다. 내 스스로 이 피곤함을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했던 시절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었던 고육지책이었으리라.
2. 성숙. 2002~2008 하지만 오랜 기간 활동해 왔던 노동자뉴스제작단을 정리하여야 하고 그 불안의 정점으로 내 스스로를 내 던져야 하는 상황이 도래했다. 그때 입에 달고 다녔던 말은 바로 ‘성숙’이었다. 아마도 스스로 무너져 도망가듯 어디론가 가야 했던 나를 변명하기에 가장 적당한 단어였던 거 같다. 무의식적으로 쓰다 보니 정말 그렇게 되었던 것일까? 몇 군데의 회사 생활을 경험하면서 노동자라는 존재를 하나의 계급, 덩어리로 바라만 봤던 내 스스로의 한계가 보이기 시작했다. 노동자의 생활, 노동자의 욕망, 노동자 사랑, 노동자의 행복, 노동자의 가족, 노동자의 미래, 노동자의 감수성... 이 모든 것들이 나의 문제가 되었고 내가 해결해야 할 화두가 되었던 것. 불안의 정점에서 그 이유를 몸으로 체득해 갔고 변화를 위한 노력은 매우 디테일 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 갔다. 지겹던 회사 생활을 그만두고 이제는 홀로 설 수 있다는 최면(!)을 걸며 허허벌판에 서게 되었다. 조직이 아닌 다큐멘터리 제작 전 과정을 혼자 온전히 담당해야 하는 상황을 견디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멈추지 않고 그 일들을 해 나아갔다. 세상과의 몇 건의 불화와 몇 편의 장편 다큐작업이 그 동안의 시간에 놓여졌다. 후퇴의 징후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긍정의 힘을 믿는가? 그렇다면 그 시기는 이소선을 만나기 위한 성숙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3. 만남. 2009. 8 ~ 2010. 5 또 한 번의 환멸의 시간이었다. 이명박이 대통령으로 등극하고 곧 이어 터진 금융위기. 그리고 2009년 1월 20일에 터진 용산참사. 혼자 좋아라 했던(?) ‘샘터분식’을 마치고 이제는 이 사회의 시민으로서 자기 발언을 하여야겠다 생각했던 그 시점. 2000년대 초반 무척이나 사모했던 한 인물이 떠올랐다. 창신동 골목길을 구비 구비 올라 전태일 기념사업회 한쪽에 있던 그녀를 2009년 초반 무턱대고 찾아갔다. 9시 뉴스를 보고 있던 그녀는 귤을 까먹고 있었다. 티비 속에 나오던 안 좋은 소식을 날선 언어로 비아냥 대었던 그녀는 자주 찾아 뵙겠다는 나의 말은 귓등으로 듣고 ‘더 놀다 가지...’라는 말만 자꾸 자꾸 했었다. 자그마한 체구에 몸빼 바지와 헝클어진 머리를 했던 그녀는 아침에 했던 김치를 한번 맛보고 가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녀를 처음 본 순간. 나는 이 작품을 짧게 끊어서 할 작품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세상 사람들이 가장 ‘평화롭다’ 여기는 그림과 소리는 어떤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누구에게나 있는 ‘어머니’라는 존재와 나누는 교감의 순간일 것이다. 불안과 위기의 시대, 그 교감이 가지는 의미는 남 다를 것이다라는 판단과 이소선이라는 인물과 그것을 나누려면 조직과 효율이 몸에 밴 그동안의 작업 관성을 버려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길게 가면 3년. 짧게라도 1년 이상은 그녀와의 만남에 집중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
‘더 놀다 가지’라는 말을 하는 그녀에게 ‘자주 찾아 뵐께요’ 를 수도 없이 반복하며 나오던 창신동 골목에서 전체의 그림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또 하나, 그녀의 긴 삶을 되돌아 보는 방법이 누군가에게 제공되어지는 말과 뉴스릴이 아니라 나의 카메로만 온전하게 가능하게 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그러려면 시간이 필요한 건 당연한 거 아니겠는가. 그 이후 처음으로 카메라를 잡았던 것은. 불타는 평택의 쌍차 노동자들 싸움이 끝나고 그 해 8월 말. 만해대상 시민운동가상을 받으러 가는 그녀를 쫓아가면서 였다. 2009년 부터 몸이 안 좋았던 그녀에게 백담사까지의 이동하는 모습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누군가에게 부축을 받지 않으면 이동이 원활치 않았던 그녀는 쉬이 피곤해 하며 힘들어 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어느 정도의 시각적 움직임을 예상했던 나에게 전체적인 톤과 리듬을 잡아가기 위한 단초를 제공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무한한 노동자 편들기(?)는 그 자리에서도 어김없이 빛이 났다. 수상소감을 발표하는 자리. 문화부 장관과 노동부 장관을 옆에 두고 그녀는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에 대한 폭력을 분노 어린 목소리로 질타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했다. 민망함을 넘어서 울그락 불그락 해지는 그들의 표정이 현장중계되던 큰 모니터에 흐를 때 같이 갔던 유가협 어머니들과 재단 식구들의 박수 소리는 좌중에 울려 퍼졌었다. 2009년 11월. 작품 속에서도 등장하지만 도쿄대학교 와다 하루키 교수의 한국의 민주화 운동 인사와의 인터뷰 자리는 이소선의 삶의 원형을 확인하고 내가 이소선이라는 인물과 어떻게 관계 설정할 것인가를 정립하게 했던 에피소드이다. 전태일 열사와 헤어지는 그 순간을 떠올릴때 마다 매우 힘들어 한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 인터뷰 과정을 촬영하면서 내 스스로도 감정 조절이 안될 정도로 그녀는 그 기억의 순간을 매우 힘들어 했다. 세상 사람들이 기대하는 이소선과 전태일을 어떻게 소화할 것인가를 고민했던 나는 전태일을 드러내는 전략보다는 최대한 숨겨야 겠다는 전략을 택했다.(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나올것이라는 생각도 하면서) 이것은 나의 카메라가 전태일에 대한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거보다는 그녀의 그 이후와 지금의 그녀를 가능케 했던 어떤 삶의 원칙들을 드러내는데 노력하여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 이후 나는 그녀와의 인터뷰 자리에서 전태일과 헤어지는 순간을 묻지 않았다. 어느 다큐멘터리 워크샵 자리에서 그런 사정을 모르는 어느 한 분은 이소선 과거 정보의 대부분을 차지할 전태일을 왜 선택하고 보여주지 않았냐는 지적을 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에서야 변명해 본다. 4. 언어. 2010. 5 ~ 2011. 3 |
스태프들을 꾸리고 틈만 나면 작품의 전체 컨셉을 토론했던 시절이었다.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는 이소선의 ‘신화’와 이소선의 ‘일상’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였다. 들었던 생각은 ‘신화’로서 이소선이 제대로 다루어 졌던 일이 있었던가? 였고 ‘일상’이라는 빈 사이를 ‘실험’의 관점이 아니라 ‘대중의 언어’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였다. 이 작품 ‘어머니’는 ‘신화’라는 거대한 성의 한 층을 더 쌓는 역할을 한다기 보다 그 성의 근간을 바라보게 하고 싶었다. 물론 전태일이라는 원형이 있기에 배가가 되었던 건 사실이지만 그 원형의 힘을 빌리지 않은 그녀 나름대로의 사람으로서의 향기를 공감시킨다면 그 ‘신화’의 근간은 더욱 튼튼해질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것을 표현하는 전략으로서 그녀와 카메라간의 관계의 밀접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데 ‘일상’이 작동하지만 여기서 ‘일상’은 그 자체로서의 의미 획득보다 ‘신화’의 근간을 확인하는 역할로 한정 지으려 했다. 그 속에 작품 속의 작품으로 ‘엄마, 안녕’을 삽입함으로서 전체 극의 긴장과 최소한의 정보제공, 그리고 작가의 시선을 대신해 주는 씨퀀스로 촬영되어졌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그녀가 평생 살면서 세상 사람들과 교감하며 획득했던 보편적인 언어, 진정함이 기반되어 졌던 그녀의 삶 속에서 나왔던 언어를 그녀의 방식대로 성기고 거친 듯 하지만 대중들에게 표현하고 싶었다. 이소선은 가면 갈수록 몸이 안 좋아졌다. 2010년 5월. 응급실로 실려 갔던 그녀는 몇 달간의 병원 생활을 반복했었다. 그때였다. 처음으로 어머니가 세상을 등질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하지만 어머니는 그 생활을 잘 이기셨고 전태일 열사 추모 40주기에 자기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몸을 추스르셨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 병원 생활을 벗어나기 위해 그 노구의 몸을 이끌고 노력하시는 모습은 지금도 마음 한쪽에 큰 감동으로 남아있다. 이후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40주기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셨고 오히려 그 전보다 왕성하게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언어를 남기려 했다. 늙어버린 육신의 그늘은 방 안 구석 조용한 읖조리으로만 남겼고 어디를 나가도 예의 그녀의 토닥임과 질타는 전태일 40주기를 기억하는 모든 이들에게 남았다. 어찌 보면 아들과의 약속으로 부터 시작된 노동자들과 함께 했던 빛나던 40년 중. 이 시기가 그녀에게 가장 힘들었지만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이었으리라 감히 짐작한다. 태준식 감독이 직접 쓴 <어머니> 제작노트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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