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복지가 대세다. 더구나 이번 총선의 승패는 연말에 치러지는 대선과도 직결되니 만큼 여야 정당과 대권주자들에겐 사활이 걸려있다. 그럼에도 특별한 정치쟁점이나 선거몰이 바람이 없다. 지난 해, 서울시장 선거만 해도 무상급식 찬반이라는 첨예한 대립각이 있었는데, 그 뒷심을 이어가는 총선치고는 이상하리만치 평이하다. 오히려 선거 때문에 디도스 공격은 물론이고 민간인 사찰이라는 전대미문의 반민주적 실상이 드러났는데도, 정권의 기반을 송두리째 뒤흔들 수 있는 문제조차 흐지부지 묻혀버리고 있다.
어쨌든 총선을 목전에 둔 정당이나 후보로 나선 정치인들에겐 선거에서의 승리가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이므로 신경쓸 겨를이 없을 만도 하다. 그러나 누가 이기든, 누가 다수당이 되든 그냥 덮어두고 곱게 넘어갈 수는 없다. 자기도 사찰을 당했다고, 자기도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박근혜나 적반하장격으로 노무현 정권이 사찰의 몸통이라고 물타기를 하면서 오히려 특검을 제안하는 새누리당의 속내는 누가 봐도 뻔하다. 이 문제가 총선 이후, 대선에 미칠 영향력을 어떻게든 차단하고자 하는 비겁한 꼼수를 드러낸 것이다.
그렇다면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불법사찰정권'의 표적을 눈앞에 두고 왜 전국민적인 공분이 들끓어오르지 못하는 것일까? 왜 참을 수 없는 분노로 폭발하지 않는 것일까? 이 정도의 부도덕함은 이미 지난 4년 동안 수없이 단련되었으므로 저항이라는 세포 자체가 어쩌면 무감각하게 죽어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잘못을 더 큰 잘못으로, 비열함을 더 엄청난 비열함으로, 부도덕을 더 천인공로할 부도덕으로 계속해서 쏟아내고 있으니... 누구 말마따나 우리 국민들이 욕을 하고 싸울 만한 틈을 전혀 주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제 만성적 스트레스가 쌓이고 쌓여 그만 지쳐버린 것이다.
욕만 하다가 지칠대로 지친 국민들이 그나마 선거를 맞아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런데 헷갈린다. 이명박이 '서민'을 죽이기 위해서, 서민을 앞세워, 서민들을 헷갈리게 했듯이, 이번에는 그 이름이 '복지'로 바뀌었다. 너도 나도 복지를 주요공약으로 들고 나왔다. 각정당들의 복지공약과 정책들만 살펴본다면 진보니 보수니 중도니 하는 이념논쟁은 한국 정치판에서 깨끗하게 사라졌다. 복지국가를 만들겠다는데 이념이 무슨 소용인가.
그들이 복지를 이야기 하는 것은 쉽게 말하면 1등과 꼴등을 없애겠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른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중에서 우리나라가 바로 비정규직 비율 1위, 연간노동시간 1위, 노인자살율 1위이다. 이밖에도 산재를 비롯해서 교통사고, 공직자청렴도, 언론탄압 등 가장 좋지 않은 것들의 순위에는 늘 대하민국이 TOP10에 자리를 잡는다. 여기에 반해 공공복지부문은 꼴등이다. 국민행복지수 역시 꼴등이다. 빈부격차, 조세개혁, 공정분배 등은 꼴등을 놓고 다툰다. 한마디로 좋지 않은 것들은 죄다 1등이요, 좋은 것들은 죄다 꼴등에 줄을 선다. 하지만 부끄러운 1등과 부끄러운 꼴등을 만들어 놓은 세력들이 알츠하이머형 치매라도 걸렸는지, 급작스레 복지국가를 만들겠단다. 좋은 것을 1등으로, 좋지 않은 것을 꼴등으로 돌려놓겠단다. 4.11 총선에서 정당별 복지공약을 살펴보면 사실 눈 감고 아무나 찍어줘도 된다.
그들의 불편한 진실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새누리당에서는 '국민행복5대공약'을 발표했다. 공약이라기보다는 솜사탕처럼 자꾸만 부풀어오르는 5대 약속인데, 건강 걱정 없는 노후, 비정규직 차별 없는 일자리만들기, 주거비 부담덜기, 새로운 청년취업시스템 도입, 보육에 관한 국가완전책임제 등이다. 과거 무상급식 논란에서 보편적 복지를 결사반대하던 새누리당이 총선을 앞두고 알츠하이머형 치매가 혈관성 치매로 바뀐 것이 분명하다.
민주통합당에서도 7대 비전을 내놓았다. 일자리 창출, 경제민주화, 보편적 복지, 평화공영의 한반도시대, 국가균형발전, MB역주행 심판과 권력개혁 등이다. 민주당의 비정규직 축소와 최저임금 확대, 무상보육뿐만 아니라 무슨 백화점 세일하듯 내놓은 1+3이라는 각론에는 무상교육과 반값등록금, 무상의료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과연 왜 이러는 걸까? 이것은 뜬금없이 복지라는 개념을 희석시켜버린 새누리당에 맞서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그러나 굉장히 파격적이지만, 하드웨어도 소프트웨어도 없는 작동 불가능한 '버전'이다. 어쩌면 통합진보당의 대동소이한 공약이 형편없어 보이기까지 한다.
정말로 우리 국민들은 이와 같은 복지를 바라는가? 정말 복지국가가 되면 사회 정의가 실현되고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세상이 이루어지는가? 보수집단과 부자들은 말한다. 무조건 퍼주기식 복지는 공평하지 못하다고. 세금을 걷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은 정의롭지 못하다고. 그들의 눈에 가난한 사람들은 게으른 배짱이로 보이고 자신들은 열심히 일하는 개미라서 체제로서의 복지를 부정한다. 그런데 진보, 개혁적인 사람들도 복지를 우선시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복지는 정의로운 모든 것이 아니며 공정하고 공평한 사회를 먼저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재벌개혁과 공평한 분배를 통해서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는 나라가 되어야하고 이를 기반으로 복지, 평화, 공생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오로지 경쟁과 성과, 능력과 생산성, 돈과 이윤이 지배하는 시장자유주의에서 이러한 공정성이 곧 정의일까? 무엇보다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정의롭지 못하고 공평하지 못한 구조인데, 가진 자들의 특권과 특혜를 철폐한다고 해서 복지국가가 될 수 있는지 의문이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국가적 복지제도를 통해서 노동문제가 해결되는가? 이른바 보편적 복지가 왜곡된 노동시장과 재벌중심의 산업구조를 바로잡을 수 있는가? 더구나 복지라는 사회적 시스템으로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되돌려놓을 수 있는가? 상품으로 전락해버린 복지는 이미 최하급 상품으로 살아가는 노동자들의 불안한 삶을 구원해 줄 수 없다. ‘노동주체의 복지’가 실현되지 않고서는 영원히 노동자는 배제당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나는 자본주의라는 세계 속에 살면서 복지국가를 바라지 않는다. '복지'는 현실을 위장하는 희석제이며 도무지 조화가 불가능한 추상이라고 생각한다. 근본적으로 자본이 지배하는 시장원리를 멈추지 않는 한 말이다. 그러므로 나는 어쩔 수 없는 빈민으로 살아가기를 바란다. 빈민이 되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빈민이야말로 가장 정의로운 계급이라고 믿는다. 그 정의로운 계급이 바라는 것은 복지가 아니다. 이 불편한 체제의 변혁이다. 복지라는 미명으로 진실을 밝혔던 그 밤의 촛불들을 사라지게 하지 말라. 희망의 광장에서 빈 공명으로 피어난 꽃송이들, 그 순결한 의지를 왜곡시키지 말라!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