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3·1 혁명', 누가 '3·1 운동'으로 바꿨나
[주장] 70년간 잃어버렸던 '혁명' 이름 이젠 되찾아야
이준식(필자는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
오마이뉴스 14.03.01 09:21l최종 업데이트 14.03.01 09:32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의 독립선언과 만세시위로부터 비롯되어 몇 달에 걸쳐 한반도 전역을 뒤흔든 일련의 움직임은 한국 근·현대사의 흐름을 일거에 바꾼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 사건을 '3·1 운동'으로 부른다. 한국 근·현대사의 주요 사건 가운데 '3·1 운동'만큼 이름에서 신성불가침의 위상을 확보한 경우는 따로 없다. 왜 그럴까?
제헌헌법부터 시작해 현행 헌법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헌법이 전문에서 '3·1 운동'으로 명시해 놓은 데서 답의 일단을 찾을 수 있다. 헌법이 '3·1 운동'으로 규정했으니 거기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헌헌법에 '3·1 운동'이라는 표현이 들어가기 전에 헌법기초위원회가 작성한 헌법초안에 '3·1 혁명'으로 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실제로 제헌국회의 헌법 논의과정에서 '3·1 혁명'은 갑자기 '3·1 운동'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60년 이상 '3·1 운동'이라는 단 하나의 이름만이 마치 특허등록된 상표처럼 쓰여 왔다. 그런 가운데 과연 '3·1 운동'이라는 이름이 1919년 3월 1일에 시작되어 이후 한국 근현대사의 흐름을 바꾼 일대사건의 의미를 제대로 담고 있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3·1 혁명' 100주년을 불과 5년 앞둔 이제 지금까지 해왔듯이 '3·1 운동'을 고수할 것인지 아니면 이제부터라도 '3·1 혁명'으로 바꾸어 써야 할지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나는 세 가지 측면에서 '3·1 혁명'으로 바꿀 것을 주장하려고 한다.
'3·1 혁명', 인민은 더 이상 신민이 아니었다
첫 번째는 '3·1 혁명의 역사적 성격과 관련된 것이다. 19세기 말 이후 한국사회의 과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전근대적 요소를 극복해 근대사회를 구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주권을 지키고 잃어버린 주권을 되찾는 것이었다. '3·1 혁명'은 이러한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이루려고 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3·1 혁명'의 독립 요구에는 두 가지 의미가 복합적으로 함축되어 있다. 하나는 말 그대로 식민통치로부터 벗어나 독립을 이루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독립선언서의 '조선인의 자주민'이라는 말에는 정치적 정당성을 결여한 권력이자 부당한 폭력의 주체인 일제(조선총독부)에 대항해 주권자로서의 민(民)이 봉기한다는 의미도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결실이 자유·민주·평등의 가치를 내건 새로운 정치체제 곧 민주공화제의 확립이었다.
'3·1 혁명'은 현행 헌법에 따르면 대한민국에 법통을 제공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의 첫 헌법문서인 대한민국임시헌장(1919)이 주권의 주체로 명기한 '인민'이 한국역사에서 처음으로 역사의 주체로 떠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1910년 국망 당시 황제와 지배층이 지켜내지 못한 국가의 주권을 인민의 힘으로 되찾으려 나선 것은 역사의 주체가 바뀐 것을 보여주는 일대사건이었다.
'3·1 혁명'은 국가의 주인이 더 이상 황제나 소수의 지배층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3·1 혁명'을 통해 제국은 종지부를 찍었고 민국의 시대가 새로 열렸다. 인민은 더 이상 1910년 이전의 신민(臣民)이 아니었다. 목숨을 내건 투쟁을 통해 민주공화국의 주체임을 스스로 입증했다. '3·1 혁명'을 통해 일본제국뿐만 아니라 대한제국도 부정되었다.
'3·1 혁명'을 독립선언과 만세시위에 국한시킨다면 그 자체로는 일제의 통치정책에 약간의 변화를 가져온 결과만을 남겼기 때문에 미완의 혁명일 수 있지만 임시정부의 수립에서 상징되듯이 민국으로의 전환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과거와의 혁명적 단절을 초래한 미증유의 사건이었다.
실제로 '3·1 혁명' 과정에서 출범한 여러 임시정부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민주공화제'를 내걸었다. 이후에도 독립운동 진영은 너나 할 것 없이 일제 식민통치로부터 해방된 뒤 만들 국가체제를 민주공화제로 보았다. 해방공간의 혼란 속에서도 다른 나라에서는 흔히 있는 왕정복고파와 민주공화파의 갈등도 없었다.
좌우를 막론하고 민주공화제 말고 다른 정체를 이야기한 정치집단이 없었다는 것은 수천 년 동안의 전제왕권과 35년의 일본 천황제를 감안하면 놀라운 일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1919년 3월 1일에 시작된 사건은 단순히 독립운동에 그친 것이 아니라 민국으로의 전환을 초래한 민주혁명이기도 했다.
대한민국임시헌장(1944)에는 '3·1대혁명'으로 적혀 있다
두 번째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진영의 '3·1 혁명' 인식과 관련된 것이다. 일제강점기만 하더라도 '3·1 혁명'은 '3·1', '3·1 운동', '3·1(대)혁명', '독립선언', '만세운동', '기미운동', '기미독립운동'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어느 특정한 이름만이 '3·1 혁명'을 표상하는 특권을 갖지는 않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기록을 보면 독립운동 진영에서는 1920년대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3·1 운동'이라는 표현을 상대적으로 더 자주 쓰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3·1 혁명'이라는 표현도 쓰이기는 했지만 일반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독립운동의 발전에 따라 독립운동가들은 '3·1 혁명'을 혁명(운동)으로 규정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중일전쟁(1937) 이후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의 통합을 이루어가던 중국 관내 독립운동 진영에서는 일반적인 것이었다.
1930년대 후반부터 당시 중국 관내 독립운동의 양대 진영인 임시정부와 민족혁명당이 모두 '3·1 혁명'을 혁명운동으로 규정하기 시작했다. 1938년에는 민족혁명당 안에서 '3·1 대혁명'이라는 표현까지 등장했다. 임시정부도 1941년부터는 '3·1 혁명'을 대혁명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실제로 임시정부 산하의 한국광복군 기관지 <광복>(1941)에 '1919년의 전민(全民) 대혁명'이라는 표현이 등장했고 임시정부가 1941년 3·1절을 맞아 발표한 글에도 '3·1대혁명운동'이라는 이름이 쓰였다. 그 연장선에서 임시정부는 1941년에 만든 건국강령을 통해 '3·1혁명'을 "우리 민족의 혁혁한 혁명의 발인"이자 "우리 민족의 자력으로써 이족전제(異族專制)를 전복하고 오천 년 군주정치의 구각(舊殼)을 파괴하고 새로운 민주제도를 건립하며 사회의 계급을 소멸하는 제일보의 착수"로 규정했다.
이제 임시정부는 '3·1 혁명'에 대해 일제 식민통치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한 민족혁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민주와 평등이라는, 근대국민국가에 반드시 필요한 새로운 가치를 추구한 민주혁명으로까지 파악하고 있었음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이제 '3·1 혁명'을 혁명, 더 나아가서는 '대혁명'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굳어졌다. 1941년 말부터는 민족혁명당과 임시정부의 합작이 이루어져 화북으로 가지 않은 민족혁명당원과 조선의용대원이 대거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이로써 '3·1 혁명'이라는 말이 중국 관내 독립운동에서 일상적으로 쓰이게 되었다.
예를 들어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1943년 다음과 같이 말했다.
"'3·1'대혁명은 한국 민족이 부흥과 재생을 위해 일으킨 운동이었다.…우리는 '3·1'절을 기념할 때 반드시 '3·1'대혁명의 정신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밝히고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3·1'대혁명의 가장 기본적인 정신은 바로 '반일독립'과 '민주자유'이다.…자존과 공존, 민주와 단결, 기개와 도의, 자신과 자존이야말로 '3·1'대혁명 정신의 요체이자 전부라 할 수 있다."
김구는 '3·1 혁명'이 독립을 목표로 한 민족혁명이자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한 민주혁명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이는 김구 개인에게 '3·1 혁명' 더 나아가서는 한국혁명의 성격에 대한 인식의 전환의 이루어졌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중국 관내 독립운동 진영의 '3·1 혁명' 인식이 가장 잘 녹아 있는 것은 1944년 임시정부에서 제정한 대한민국임시헌장이다.
대한민국임시헌장(1944) '서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우리 민족은 우수한 전통을 가지고 스스로 개척한 강토에서 유구한 역사를 통하여 국가생활을 하면서 인류의 문화와 진보에 위대한 공헌을 하여왔다. 우리 국가가 강도일본에게 패망된 뒤에 전 민족은 오매에도 국가의 독립을 갈망하였고 무수한 선열들은 피와 눈물로써 민족자유의 회부에 노력하야 삼일대혁명에 이르러 전민족의 요구와 시대의 추향에 순응하야 정치, 경제, 문화 기타 일절 제도에 자유, 평등 및 진보를 기본정신으로 한 새로운 대한민국과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가 건립되었고 아울러 임시헌장이 제정되었다.(강조- 인용자)"
임시정부의 마지막 헌법문서에 명백히 '3·1 혁명'이 대혁명으로 규정되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김구 등 중국 관내 독립운동을 이끌던 독립운동가들의 합의에 의해 '3·1대혁명'이라는 표현이 대한민국임시헌장에 들어갔다는 사실이다. 대혁명이라는 말 자체가 프랑스혁명을 연상시킨다.
당시 대혁명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프랑스 혁명 정도였다. 프랑스혁명을 통해 신생 프랑스가 출현했듯이 '3·1대혁명'을 통해 '자유, 평등. 진보를 기본 정신'하는 주권재민의 민주공화제 국가 대한민국이 출현했다는 긍지가 대한민국임시헌장에는 반영되어 있다. 이제 민족혁명과 민주혁명의 동시 완성은 해방된 이후 새로운 나라를 만들 때의 기본 구상이 되었다.
말 바꾼 이승만... '3·1 혁명'을 '3·1 운동'으로
세 번째는 1948년 7월 제헌헌법에 '3·1 혁명'이 '3·1 운동'으로 바뀐 채 들어가게 되는 과정과 관련된 것이다. 1948년 5·10 선거를 통해 구성된 제헌국회는 제헌헌법을 만들기 위해 30명의 의원으로 헌법기초위원회를 구성했다.
유진오안을 중심으로 헌법기초위원회에서 만든 헌법초안에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민국은 3·1 혁명의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라는 문구로 시작되는 전문이 들어 있었다.
유진오의 회고에 따르면 전문의 '3·1 혁명'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문제제기가 없었다고 한다. 곧 30명의 제헌의원의 합의에 의해 '3·1 혁명'이 헌법초안의 전문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헌법초안이 국회 본회의에 상정된 이후 문제가 생겼다. 처음에는 의원들도 별 거부감없이 '3·1 혁명'이라는 표현을 썼다 국회의장이던 이승만도 의원 자격으로 한 발언에서 '기미년 3·1 혁명'으로 바꿀 것을 제안했다.
7월 7일 '3·1 혁명'을 '3월 혁명'으로 바꾼 전문 수정안이 다시 본회의에 제출되었는데 이때 조국현이 "조선이 일본하고 항쟁하는 것" 곧 독립운동은 혁명이 될 수 없다는 해괴한 논리를 내세우면서 '3·1 혁명'을 '항쟁'으로 바꾸자는 발언을 하면서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여기에 불과 엿새 전만 해도 '혁명'으로 부르던 이승만이 "혁명이라는 것이 옳은 문구가 아니라는" 데 가세했다.
스스로 자랑했듯이 미국통인 이승만이 미국인이 미국의 독립운동을 독립혁명으로 부르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이승만은 '3·1 혁명'이라는 이름이 중국 관내나 만주·노령에서도 일반화되지 않고 있던 '3·1 혁명' 직후 미국에서 '3·1혁명'을 혁명봉기(revolutionary uprising) 또는 혁명으로 지칭한 적이 있었다(Los Angeles Times, 1919년 5월 2일; The Washington Post, 1919년 5월 2일)
1941년 6월 이후 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이 되면서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방침에 따라 더 확실하게 '3·1 혁명'을 혁명으로 규정했다. 실제로 1942년 2월 27일부터 3월 1일까지 워싱턴에서 열린 자유한인대회에 참석한 이승만은 여러 차례 발언을 했는데 그때마다 '3·1 혁명'에 대해 "1919년 혁명", "새로운 혁명", "역사상에서 최초로 있었던 혁명", "무혈의 혁명" 등으로 언급하고는 했다(재미한족연합위원회, <한인자유대회 회의록>).
따라서 일제 식민통치를 부정하는 것은 혁명이 될 수 없다는 이승만식의 논리는 이전에 자신이 한 말을 뒤집어엎는 궤변에 불과했다. 어쨌거나 이승만이 전문의 '혁명'을 바꿀 것을 주장하자 이승만의 핵심 측근 윤치영이 이승만에 적극 동조해 '광복'이라는 제안을 했고 다시 한민당의 조헌영이 '3·1 운동'을 제안했다.
그리고 이승만계열의 윤치영, 한민당의 백관수, 김준연, 친일파 출신 이종린 등 5명으로 구성된 소위원회에서 조헌영이 제안한 '기미 3·1 운동'으로 바꾼 수정안을 제출했다. 그러자 사회를 맡은 이승만이 토론을 막은 채 수정안을 표결에 붙여 "재석의원 157인 중 가 91, 부 16"으로 통과됨으로써 '3·1 혁명'은 헌법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당시 제헌국회의 의원 정원이 200명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재적의원 과반수에도 미치지 못하는 91명의 찬성으로 제헌헌법 전문이 통과되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일부 의원이 주장했듯이 충분한 토론도 없이 재석의원 과반수 이상의 찬성으로 헌법 전문같은 중요한 사안을 의결했다는 것은 절차적 정당성에 중요한 흠결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3·1 혁명'을 되찾을 때
1919년 3월 1일부터 시작된 만세시위에 참여한 사람은 일제 경찰의 통계에 따르더라도 연인원 200만 명이 넘었다. 일부에서는 '3·1 혁명' 참여자가 1000만 명에 이른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당시 1700만 명 안팎으로 추산되던 전체 인구를 감안하면 놀라운 일이었다.
일제의 공식 통계만 놓고 보더라도 4만6948명이 체포·투옥되었고, 2만 명 정도가 미결수나 기결수로 수감되었다. 부상자는 1만5900여 명이었고 사망자도 7500여 명에 이르렀다. 이러한 수치는 '3·1 혁명' 참여자들의 독립과 자주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그리고 그러한 열망이 어느 정도 거족적으로 넓게 확산되어 있었는지를 웅변으로 보여준다.
세계 혁명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이 1919년 3월 1일 이후 우리 민족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지 일어났다. 제헌헌법이 만들어지던 당시의 용례에 따라 혁명을 "한 나라의 국체, 정체, 또는 사회제도나 경제조직을 근본적으로 개혁하여 새로 만듦"이라고 본다면 '3·1 혁명'이야말로 제국에서 민국으로의 변화를 초래한 혁명적 사건이었다.
그동안 우리는 좁은 의미에서의 독립운동(민족혁명)으로만 '3·1 혁명'을 이해해 왔다. 이제 민주혁명으로서의 '3·1 혁명'으로 시야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 1919년 3월 1일부터 국내외 각지에서 일어난 독립선언과 만세시위는 민중의 힘으로 주권재민의 근대국민국가 수립과 일제 식민통치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추구한 민족·민주혁명이었다.
그런데 한국 역사에서 혁명적 단절을 가져온 이 사건을 우리는 지금까지 거족적 독립운동으로서의 '3·1 운동'으로만 기려왔다. 제헌헌법(1948) 전문에 '기미3·1 운동'이라는 문구가 들어간 이래 아무런 의문 없이 '3·1 운동'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는 것이다. '3·1 혁명'은 임시정부의 건국강령(1941)과 대한민국임시헌장(1944)에 연원을 둔 것이었다.
김구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패망과 한국의 독립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3·1 혁명'을 반일독립의 민족혁명이자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민주혁명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2019년 '3·1 혁명' 100주년을 맞이해 이제는 '3·1 혁명' 참여자들이 꿈꾸었고 이후의 독립운동가들이 이어받은 '3·1 정신'을 제대로 반영하는 방향으로 '3·1'의 역사상을 복원해야 한다. 제헌국회에서 지워버렸던, 그리하여 이후 70년 가까이 사람들에게 잊혀졌던 '3·1 혁명'의 이름을 되찾는 것이야말로 그 출발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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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혁명, 대한민국 오늘 있게 한 위대한 역사로 기억돼야"
3.1 혁명 100년 대회 선포식 열려... "새로운 의미의 독립선언 하겠다“
오마이뉴스 18.02.01 18:06 최종 업데이트 18.02.01 18:06
김아름내(hope0021)
3.1혁명 100주년을 맞아 새로운 의미의 '독립 선언'을 하고 국민적인 각성과 실천운동이 시작됐다. 3.1민회 조직위원회는 1일 오후 1시 종로에 위치한 문화공간 온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3.1민회 조직위원회' 출범 및 2018. 3.1 혁명 100년 대회 선포식을 가졌다.
3.1민회 조직위원회는 "2018년은, 1919년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국권 침탈과 식민 통치, 주권 탄압에 결연히 맞서서 조선이 독립국임을 만천하에 선포하고 침략과 수탈에 반대하여 전국 방방곡곡에서 남녀노소 민중들이 목숨을 걸고 분연히 항거했던 3.1혁명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라고 말했다.
이어 "3.1혁명은 대한민국 최초 헌법인 임시헌장 제정과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고, 항일 독립투쟁과 4.19혁명, 5.18광주항쟁, 6월항쟁, 촛불시민혁명으로 발전되어 온 미완의 혁명"이라면서 "3.1혁명은 대한민국의 오늘이 있게 한 위대한 역사로 기억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3.1민회 조직위원회는 계속해서 "2017년에 우리는 연인원 1700여 만 위대한 시민들의 힘으로 정권을 바꾸었다"면서 대한민국에서는 지금 가냘픈 촛불의 힘으로 부패한 권력을 무너뜨리고 참다운 민주주의와 국민의 행복한 삶을 보장해 주는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기 위한 혁명이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촛불 시민들은 새로운 대통령을 세우면서 나라다운 나라를 건설할 것을 명하였다"면서 "그러나, 기득권 세력들의 강고한 네트워크는 흔들림 없이 작동하고 있으며, 특권과 사리사욕을 내려놓지 않으려는 수구 세력들은 낡은 질서를 지키기 위해 저항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3.1민회 조직위원회는 "그러나, 수구 기득권세력들의 저항 앞에 촛불시민혁명이 좌절하고 무력화되는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된다"면서 "우리 모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평화로운 촛불혁명을 반드시 성공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계속해서 "세계인들이 부러워 할 참다운 민주국가, 복지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면서 "부패와 특권의 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정의와 공평의 공화국을 건설해야 한다. 동학혁명으로부터 3.1혁명, 4.19혁명, 5.18항쟁 등 수많은 선열들이 목숨을 바쳤던 미완의 혁명을 이번에는 반드시 완성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3.1민회 조직위원회는 "우리는 동학혁명과 3.1혁명 정신을 이어받아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운동을 시작하려고 한다"면서 "3.1혁명 100년을 맞아 새로운 의미의 '독립 선언'을 하고 국민적인 각성과 실천운동을 시작하려 한다"고 말했다.
이어 "2018년 3월 1일, '3.1 민회 운동'을 선포하고 1년 동안의 토론을 통해 개혁의제를 설정하고 2019년 3월 1일부터 범국민적인 실천 운동의 대장정을 시작하려 한다"면서 "우리는 대장정을 성공적으로 실행하기 위해 전국의 시민사회단체, 지역과 부문 각계의 인사들이 함께 하는 '3.1혁명 100년, 3.1민회 조직위원회'를 구성하였다"고 설명했다.
이어 "대장정의 첫 걸음은 오는 3월 1일이 시작된다. 3.1민회 조직위원회는 3월 1일부터 3일까지 3일동안, 광화문 일대에서 '3.1혁명 100년, 다시 일어서는 대한국민'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3.1혁명 100년 대회'를 개최할 준비를 시작했다"면서 "'3.1혁명 100년 대회'는 시민들이 주도하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3.1혁명 기념 행사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3.1민회 조직위원회가 오늘 밝힌 바에 따르면 '3.1혁명 100년 대회'는 다음과 같이 진행될 예정이다.
첫날인 3월 1일에는, 11시 30분 광화문 광장에서 터울림 풍물공연으로부터 시작되어, △12시 정각에 3.1혁명 100년 기념식, △200여 명의 은빛 순례단 출범식, △갖가지 독립선언문을 발표하는 만민공동회, △1000개의 북소리 대행진과 거리굿, △친일청산 역사콘서트 등으로 진행된다.
3월 2일 오후에는 △3.1혁명 100년 춤 제전이 열리고 저녁에는 청년들과 청소년들이 함께 하는 불금파티가 열립니다. 3월 3일 오후에는 500여 명이 참여한 대한민국 다시 세우기 '화백회의'가 개최되고, 이어서 '국민주도 개헌을 위한 1000인 원탁회의' 개최하고 3일 저녁에는 개헌과 정치개혁을 요구하고 전쟁을 반대하고 한반도 평화를 염원하며 다시 3.1혁명의 결의를 다지는 촛불문화제를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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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헌헌법 초안에서 '3·1혁명'이 사라진 까닭
그날 이래 우리의 민족민주혁명은 지금도 진행형... 이제 다시 혁명이라 부르자
오마이뉴스 19.01.07 07:59 l최종 업데이트 19.01.07 07:59l
김학규(hkkim21) 동작역사문화연구소 공동대표 겸 소장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다.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한 세기를 의미하는 100년의 역사가 무겁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남과 북이 지난해 9월 평양 남북정상회담에서 올해 3·1운동 100주년 기념행사를 공동 개최하기로 하여 올해 삼일절은 역사에 길이 남는 삼일절로 기록될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대한민국 현행 헌법(10호 헌법)은 그 전문에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는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한다고 한 1948년의 제헌헌법 정신을 그대로 계승한 표현이다.
그런데 최근 이 3·1운동이라는 명칭을 '3·1혁명'으로 불러야 한다는 목소리가 이낙연 국무총리와 집권여당 더불어민주당의 이해찬 대표의 입을 통해 나와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12월 14일 "일제는 3·1거사를 '폭동' '소요' '난동' 등으로 부르며 불온시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임시정부 등 민족진영은 '3·1혁명' '3·1대혁명'이라고 불렀다"면서 "3·1운동을 3·1혁명으로 바꿔 부르는 방안에 대한 학계의 검토"를 요청했다. 이해찬 대표는 12월 27일 "3·1운동을 3·1혁명이란 용어로 바꿔야 한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3·1운동에 대한 재해석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했다.
이래저래 3·1운동의 성격과 그 의미에 대한 논의가 연초부터 활발히 진행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삼일절은 "한국민족의 위대한 혁명기념일"
그렇다면 일제 강점기 우리의 독립운동가들은 3·1운동을 어떻게 불렀을까.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26년(1944년) 3월 1일 제25회 삼일절기념대회를 개최한다. 이때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제25주년 삼일절 기념대회 선언'(이후, 선언)을 발표한다. 이 선언에서 3·1운동의 성격을 분명히 드러내는 구절이 있다.
"친애하는 동포들! 오늘은 한국민족의 위대한 혁명기념일이다. 지금으로부터 스물다섯 해 전 이날에 삼천만 한국민족은 우리의 거룩하신 선열과 선배들의 영도 밑에서 굳세게 뭉쳐 국내외 각지로부터 일제히 총동원하여 우리의 원수 왜놈과 용감하게 싸우고 전 세계에 향하여 한국의 자유독립을 선언하였다.
배달의 피가 있는 사람은 어떠한 곳이나 어떠한 환경에 있을지라도 반드시 뜨거운 정성과 엄숙한 태도로써 이 위대한 민족혁명의 절일(節日)을 다같이 기념하면서 위대한 선열의 위업을 완성할 결심을 더 한층 굳세게 갖게 된다."(필자가 현대 표준어 한글표기로 바꿈)
선언은 삼일절을 "한국민족의 위대한 혁명기념일"이라고 한 후 3·1운동을 "우리의 원수 왜놈과 용감하게 싸우고 전 세계에 향하여 한국의 자유독립을 선언"한 "위대한 민족혁명"이었다고 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민족혁명'이라는 말은 이미 1922년 12월 의열단의 김지섭이 유석현, 윤석구와 함께 군자금 마련을 위해 조선총독부 판사 백윤화에게 보여줬다는 "오인은 민족혁명을 위하야 생명재산을 희생하고 내도하였다"는 내용의 서면에도 등장한다(의열단사건 예심종결 결정문, 1923. 6. 14 <동아일보>).
아울러 선언은 4개항의 맹서 중 4항에서 "국내 혁명세력과 밀접한 연락을 취하여 삼일혁명 당시보다도 더욱 힘 있는 전국 민중의 대폭동을 일으킬 것"이라고 하는 대목에서 3·1운동을 '3·1혁명(三一革命)'이라고 칭하고 있다.
이러한 선언의 문제의식은 1944년에 개정된 대한민국임시헌장의 전문에 아래와 같이 반영된다.
".... 무수한 선열들은 피와 눈물로써 민족자유의 회복에 노력하여 3·1대혁명에 이르러 전민족의 요구와 시대의 추향에 응하여 정치 경제 문화 기타 일체 제도에 자유 평등 및 진보를 기본 정신으로 한 새로운 대한민국과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가 건립되었고, 아울러 임시헌장이 제정되었다." (필자가 일부 표현을 현대 표준어 맞춤법으로 바꿈)
이로써 3·1운동은 '3·1대혁명'이라는 호칭을 얻게 된다.
물론 대한민국 임시정부만 3·1운동을 '3·1혁명'이라고 부른 것은 아니었다. 일제에 압수된 문헌을 보면 1922년 3월 1일 상해에 있던 삼일청년구락부(三一靑年俱樂部)가 <삼일혁명(三一革命)>이라는 이름의 인쇄물을 발행했다든지, 만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에 나선 독립운동가와 독립운동단체들이 민족주의계와 사회주의계를 막론하고 '삼일혁명'이라는 표현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참조)
"대한민국임시정부는 3·1대혁명의 민족적대유혈투쟁 중에 산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3·1운동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는 해방 직후 귀국한 백범 김구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개선 환영대회(1945. 12. 19, 서울운동장)에서 한 답사에서도 확인된다.
"우리 임시정부는 3.1대혁명의 민족적 대유혈투쟁 중에서 산출한 유일무이한 정부였습니다. (중략) 우리 정부의 유일한 목적은 오직 전민족을 총단결하여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한국에 진정한 민주공화국을 건립하는 데 있습니다. (중략) 우리가 이 임무를 달성하자면 오직 3·1대혁명의 민주단결정신을 계속 발양해야 합니다. (중략) 3·1대혁명의 전민족 총단결 총궐기의 정신을 다시 한 번 발양해서 우리의 독립주권을 찾고 자주평등행복의 신한국을 건설합시다." (1945. 12. 20, 동아일보)
이 답사에서 김구는 3·1운동을 대한민국임시헌장(5차)의 전문 표현 그대로 '3·1대혁명'이라고 부르고 있다.
아울러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3·1대혁명으로 '산출'되었다는 인식 하에 '독립주권을 찾고 자주평등행복의 신한국, 진정한 민주공화국을 건립'하는 일도 '3·1대혁명의 정신을 발양'할 때 가능하다고 보고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개선 환영대회(1945. 12. 19) 1945년 12월 19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임시 정부 개선 환영대회”의 모습이다. 이날 대회에는 10여만 명의 군중이 운집하였다. 김구는 이 자리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3·1대혁명의 민족적 대유혈투쟁 중에 산출한 유일무이한 정부“라고 했다.
갑자기 이상한 방향으로
1919년의 3·1운동을 3·1혁명이라고 부른 것은 비단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백범 김구만이 아니었다. 해방정국에서 쏟아져 나온 모든 언론은 3·1운동을 3·1혁명이라고 자연스럽게 불렀고, 1946년부터 진행된 삼일절 기념식에서도 좌우를 막론하고 3·1운동을 3·1혁명이라고 불렀다.
이는 5·10 단독총선 결과로 탄생한 제헌국회의 제헌헌법 논의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제헌헌법 초안의 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三一革命의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라고 하고 있었다. 초안에는 나중에 확정된 '기미 삼일운동'이 아니라 '3·1혁명'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헌법기초위원회(위원장 서상일)가 제출한 제헌헌법 초안을 가지고 토론할 때 처음으로 전문 수정의 필요성을 제기한 인물은 초대 국회의장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은 헌법 제2독회(7월 10일)에서 "우리들 대한국민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민족으로서 기미년 삼일혁명에 발기하야 처음으로 대한민국정부를 세계에 선포하였으므로 그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야 자주독립의 조국재건을 하기로 함"이라는 의미를 담은 문구를 넣자고 제안했다.
이승만의 뜻을 받은 윤치영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년 삼일혁명으로써 대한민국을 수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그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지금 독립민주정부를 재건함에 있어서"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제헌헌법 전문 수정안을 공식 제출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논의가 이상한 방향으로 전개되기 시작한다. 발언권을 얻은 조국현이 수정안에 대해 지지를 표명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혁명이라는 문구는 불가하다"면서 '삼일혁명'이라는 표현을 문제 삼고 나선 것이다.
"삼일민족운동이라는 것이 일본의 유인정권 밑에서 제도를 고치자는 혁명이 아닙니다. 대한이 일본에게서 뺏겼든 그놈을 광고하자는 운동인만큼 혁명은 아닙니다. 항쟁이라고 할지언정 혁명은 아니요 혁명은 국내적 일이라는 게 혁명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태조가 고려왕조를 전복시킨 것이 혁명이고 갑오의 운동이 혁명운동이고 우리의 조선이 일본하고 항쟁하는 것은 혁명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다가 혁명을 쓴다면 무식을 폭로하는 것이라고 내가 생각하기 때문에 이 혁명 글자를 변경해서 '항쟁'이라고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 제헌국회 국회의사록
조국현이 '3·1혁명'이라는 명칭을 부정하고 '3·1항쟁'으로 변경하자면서 내세운 논리는 사실 난센스에 가까웠다. 이미 '민족혁명', '민족해방혁명'이라는 개념이 일반화되어 있던 시대에 '3·1운동이 일제에 맞선 투쟁이었기 때문에 혁명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무식을 폭로하는 것'이라는 논리는 사실 '조국현 자신의 무식을 폭로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당시 제헌국회 의장이었던 이승만이 적극 호응하고 나서면서 일이 꼬인다.
"혁명이라는 것이 옳은 문구가 아니라는 말씀을 내가 절대로 찬성합니다. 혁명이라면 우리나라 정부를 전복하자는 것인데 원수의 나라가 와서 있는 것을 뒤집어 놓는 것은 혁명이라는 게 그릇된 말인데 '항쟁'이라는 것은 좋으나 거기다 좀 더 노골적으로 '독립운동'이라고 그러면 어떱니까."
- 제헌국회 국회의사록
이승만은 '3·1혁명'이라는 명칭 대신 '3·1독립운동'으로 하자는 제안을 한 것이다.
이에 제헌국회에서는 '항쟁'으로 하자, '광복'으로 하자 설왕설래 하는 와중에 조헌영이 '3·1운동'으로 하자는 새로운 제안을 한다.
"그 '삼일혁명'이라는 것과 '광복'이라는 것과 '항쟁'이라고 하는 것이 다 적당치 않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혁명이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고 항쟁이라는 것은 좀 우리 위신상 관계가 있고 또 광복된 것이 아니니까 광복이라는 것이 적당치 아니해서 제 생각에는 그냥 '삼일운동'이라고 하는데...."
- 제헌국회 국회의사록
이후 제헌국회는 제헌헌법을 신속히 통과시켜야 한다는 주장에 밀려 3·1운동의 의미에 대한 충분한 검토와 토론을 생략한 채 '그냥 무난하게' 3·1운동이라는 명칭을 채택하고 만다.
이렇게 해서 제헌헌법 초안에 있던 3·1혁명이라는 명칭은 사라지고 3·1운동이 공식 명칭으로 정리되었고,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제헌의원 선출을 위한 5·10총선거에 남로당을 비롯한 좌파는 물론 김구, 김규식, 조소앙 등 임정계열 주요인사가 불참한 사정이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이제 다시 '3·1혁명'이라 부르자
1919년의 3·1운동은 침략자 일제에 맞선 민족혁명이자, 대한제국 시기까지 있었던 전제군주정이 아니라 우리의 지난 역사에서 한 번도 없었던 민주공화국을 건립하기 위한 위대한 민주혁명이었다. 당시 인구의 1/10이 넘는 250만 명 이상이 만세운동에 참여했다는 점도 획기적인 일이었다.
1919년의 3·1운동은 일제를 완전히 몰아내고 한반도에 민주공화국을 건립하는 것으로 곧바로 귀결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3·1운동은 국내외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독립운동가들의 다양한 노력을 모아내 상해에서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을 수립하여 대한민국을 세계에 공포하는 성과를 만들어냈다.
그해 4월 11일 상해에 모인 각 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은 이념과 노선을 떠나 대한민국의 인민이 "남녀·빈부 및 계급 없이 일체 평등"하고(제3조), "종교·언론·저작·출판·결사·집회·주소이전·신체 및 소유의 자유를 향유"(제4조)할 뿐만 아니라, "공민자격이 있는 자는 선거와 피선거권이 있음"(제5조)을 선언하였고, 이전의 대한제국이나 일제의 식민지배 체제와 달리 "생명형·신체형과 공창제를 전폐"한 '민주공화제'를 표방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민족민주혁명의 성격을 띤 3·1운동을 '3·1혁명'이라고 부르지 않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1946년 제27주년 3.1절 기념식에 참석한 김구와 이승만 김구와 이승만이 해방이후 처음 맞이한 '3.1국경절 제27회 기념식'(보신각 앞,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주최)에서 연단에 나란히 앉아 있다. 김구는 '3.1운동'을 '3.1대혁명'이라고 불렀지만, 이승만은 1948년 제헌국회 헌법독회 과정에서 '혁명'이라는 표현에 찬성하지 않는다는 뜻을 밝혔다.(이승만 옆은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인 오세창 선생)
우리의 민족민주혁명은 현재 진행형
'3·1혁명' 이후 독립운동가들은 미완의 민족민주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헌신했고, 해방이후에는 민족통일전선에 기반하여 민족적 총의를 모은 통일민족국가 수립을 위해 분투하였다.
이때 1948년 8월 15일 정식으로 수립된 대한민국정부는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제헌헌법 전문)하는 와중에 수립된 정부였다.
하지만 38선 이남에만 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조건에서 대한민국정부는 3·1혁명에서 제기된 민족민주혁명 과제를 완수한 결과로 탄생한 정부라고 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대한민국정부가 현실에서는 이승만의 독재, 박정희군사정권과 전두환군사정권의 독재로 이어지면서 3·1혁명의 완수를 책임질 수 있는 정부인지 줄곧 의심받아 왔다.
이러한 위기에서 3·1혁명 이래 제기된 민족민주혁명의 과제 실현을 위해 나선 이는 민중들이었다. 그들은 4·19혁명-부마민중항쟁-5·18광주민주화운동-6월민주항쟁으로 이어지는 민주화운동의 역사에서 불의에 맞서 의연히 떨쳐 일어섰으며, 2016-17 촛불혁명을 통해 한국 민주주의의 새 장을 여는 역할도 해냈다.
하지만 대한민국이 촛불혁명을 거치면서 아무리 새로운 단계로 발전하고 있다고 해도 그 자체가 3·1혁명의 완성일 수는 없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 실현이라는 민족적 과제를 이루어내지 못하는 한 1919년 3·1혁명에서 제기된 민족민주혁명의 과제는 여전히 미완의 과제로 남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마침 지난해 세 차례 정상회담을 소화해낸 남과 북의 정상은 새해가 시작되기 무섭게 희망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한반도의 평화가 돌이킬 수 없는 흐름이 되도록" 하고, "남북이 경제공동체가 되는 한반도 신경제구상을 실현"하겠다고 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조선반도에 항구적이며 공고한 평화체제를 구축하고 완전한 비핵화에로 나가려는 것은 본인의 확고한 의지"라면서 "2019년에 북남 관계발전과 평화번영, 조국통일을 위해 더 큰 전진을 이룩하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백두산 정상의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 지난해 9월 20일 평양정상회담 사흘째되던 날 오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백두산 정상인 장군봉에 올라 손아 잡아들고 있고, 김정숙 여사와 리설주 여사가 박수를 치고 있다. 이들 남과 북의 지도자가 3.1혁명 100주년을 맞는 올해 3.1혁명이 제기한 민족민주혁명의 과제를 완수하기 위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의 길에 획기적인 이정표를 마련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지금 남과 북이 함께 3·1운동의 의미를 되새기고 그 현재적 과제를 도출해내는 과정에서 3·1운동의 성격을 분명히 하는 '3·1혁명' 명칭의 부활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는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인지 분명히 하는 의미를 가진다. 대한민국이 앞으로 해야 할 과제가 무엇인지 뚜렷이 드러내는 의미도 담고 있다. 더 중요하게는 남과 북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함께 찾아나가자는 제안을 대내외에 선포하는 의미도 가진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4·19혁명-부마민중항쟁-5·18광주민주화운동-6월민주항쟁-촛불혁명으로 이어져온 자랑스러운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발판으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일구어내는 제2, 제3의 건국운동을 본격적으로 벌여야 하는 시점에 서 있고, '3·1혁명이 제기한 민족민주혁명의 과제 완수'라는 시대적 사명을 실현할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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