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주의 큐레이션: 드디어 다윈, 드디어 『종의 기원』]
거의 15년 전의 일입니다. 한국 과학 문화 공동체의 말석에서 취재하던 저에게 귀를 쫑긋 세울 수밖에 없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한국의 진화 연구자 몇몇이 ‘다윈 포럼’을 결성했고, 그 포럼의 첫 번째 중요한 프로젝트로 찰스 다윈의 중요한 저작 번역을 시작하기로 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1차분으로 『종의 기원』(1859년), 『인간의 유래』(1871년),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1872년) 세 권을 선정하고, 당시로써는 한국 과학 출판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었던 사이언스북스에서 출판한다는 구체적인 내용도 확인했습니다. 마침 2009년이 『종의 기원』 초판 출간 150주년과 다윈 탄생 200주년이 겹치는 해였으니 정말로 시의적절한 기획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설렜던 일은 『종의 기원』 번역을 진화 생물학자 ‘장대익’이 맡은 것이었죠. 한때 생물학도로서 또 현대 지성사에 관심이 많았던 독자로서 몇 차례 『종의 기원』 정독에 도전했다 번번이 실패했던 터였습니다. 진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 소설가 뺨치는 이야기꾼의 감각, 날렵한 글 솜씨까지 겸비한 장대익이라니! 기대가 컸습니다.
공교롭게도 그 시점에 장대익과 이런저런 일을 함께했습니다. 현대 과학과 종교 사이의 뿌리 깊은 갈등의 근원을 되짚어보는 학제 간 기획을 생물학, 종교학 등을 아우르는 세 명의 학자(김윤성, 신재식, 장대익)와 함께 진행하면서 『종교 전쟁』(사이언스북스 펴냄)이라는 (지금 봐도 어깨가 으쓱한) 결과물도 책으로 펴냈었죠.
그 즈음 장대익은 대학의 안팎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면서 2008년에 현대 진화론을 둘러싼 내로라하는 과학자의 논쟁을 자신의 관점에서 정리한 『다윈의 식탁』(바다출판사 펴냄)도 펴냈죠. (개인적으로 2009년 1월 3일 새벽에 초판 1쇄의 오타를 정리해서 2쇄 때 참고하라고 보냈던 기억이 납니다.)
이렇게 장대익과 교류하면서 틈만 나면 물었습니다. “장 선생님, 『종의 기원』 번역은 얼마나 진척이 되셨나요?” 그때마다 그와 함께 『종의 기원』을 놓고서 여러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번역 과정의 어려움(과 번역을 덥석 맡은 일에 대한 후회), 또 진화론과 과학사 더 나아가 지성사에서 『종의 기원』이 차지하는 위상, 21세기에 『종의 기원』이 가진 의미 등등.
그러고 나서, 시간이 아주 많이 흘렀습니다. 며칠 전에 ‘드디어 다윈’ 시리즈의 첫 번째 권으로 출간한 『종의 기원』(사이언스북스 펴냄) 한국어판을 ‘드디어’ 받아보고서 앞에서 언급한 일화들이 주마등처럼 스쳤습니다. 원서 출간 160년 만에 또 처음 번역을 기획한 지 거의 15년 만에 정말로 장대익 번역의 『종의 기원』을 읽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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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전에도 한국 사회에 『종의 기원』 번역본이 있었습니다. 나름의 고군분투 끝에 나온 책들이었습니다만, 여러 한계가 또렷했습니다. 결정적으로 그간 나온 국내 번역본 대다수는 『종의 기원』 6판을 번역한 것이었어요. 장대익의 『종의 기원』은 초판(1859년)을 번역했습니다.
이 대목은 설명이 필요합니다. 지금은 초등학생도 고개를 끄덕이는 진화론의 아이디어(자연 선택)가 160년 전만 하더라도 머리의 신경망을 다시 배치해야 할 정도로 충격적인 주장이었습니다. 기독교의 영향력, 빅토리아 시대의 고루한 도덕 관념, 사회 진보에 대한 맹신 등이 삶을 지배하던 당시의 상황에서 『종의 기원』은 출간과 동시에 화제와 오해의 중심에 서야 했죠.
신중하고 또 소심했던 다윈으로서는 이런 세간의 반응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초판 이후 오탈자를 수정하고 몇 달 후에 나온 2판의 맨 마지막 문단에 “창조자에 의해”라는 구절을 삽입해 “종교적 반감을 최소화하려” 한 일은 단적인 예입니다. 실제로 다윈은 초판 이후 개정판을 거듭하면서 내용을 계속 가감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흥미로운 변화도 보입니다. 장대익의 정리에 따르면, 놀랍게도 1859년 『종의 기원』 초판에는 ‘진화(evolution)’라는 용어 자체가 없습니다. 다윈은 이 단어(evolution)가 ‘진보’와 떼려야 뗄 수 없다고 생각해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종의 기원』에 ‘진화’가 없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다윈은 ‘진화’ 대신 “변화를 동반한 계승(descent with modification)”이라는 표현을 쓰다가 1872년 출간한 마지막 판(6판)에서야 “진화”로 대신합니다. 다윈의 『종의 기원』을 읽고서 ‘사회 진화론’이라는 악명 높은 사상을 전개한 당시 학계의 슈퍼스타 허버트 스펜서의 영향을 받은 결과였습니다.
스펜서는 다윈의 『종의 기원』에 악명을 안겨 준 또 다른 영향도 줬습니다. 애초 초판에는 다윈 진화론의 상징처럼 알려진 용어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도 없습니다. 이 용어는 5판부터 등장합니다. 역시 스펜서의 영향력이 작용한 결과였죠. 이런 사정을 염두에 두고서, 장대익과 다윈 포럼은 지난 160년간의 연구를 종합해서 초판을 번역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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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익의 번역으로 읽는 『종의 기원』은 흥미진진합니다. 지금으로써는 하품 나오는 비둘기의 품종 개량을 둘러싼 이야기마저 그 맥락을 알고 나면 다르게 읽힐 정도입니다. 과학자로서 다윈의 단호한 결단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은 벅찬 감동을 줍니다. “나는 아무리 이 시각이 다른 사실이나 논의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망설임 없이 채택할 수밖에 없다.”
결론의 어떤 대목에서 다윈은 21세기 과학의 어떤 경향을 예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런 부분입니다. “먼 미래에는 더욱더 중요한 연구 분야가 개척될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심리학은 점진적인 변화를 통해 정신적인 힘이나 역량이 필연적으로 획득된다는 새로운 토대에 근거해 그 기초가 세워질 것이다. 또 인류의 기원이나 역사를 이해하는 데도 서광이 비칠 것이다.”
드디어 손에 쥐게 된 『종의 기원』 초판 번역을 읽으며 장대익의 수고에 다시 한 번 축하와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이런 시도가 끊이지 않고 계속되려면 독자 여러분의 관심과 지지가 필요합니다. 개인적으로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1976년) 같은 책보다 『종의 기원』이 더 많이 읽혀야 한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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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왕 이야기가 길어졌으니 『종의 기원』과 함께 읽으면 흥미로운 책을 몇 권 추천하겠습니다. 데이비드 쾀멘의 『신중한 다윈 씨』(승산 펴냄)는 『종의 기원』이 탄생하기까지 다윈의 지적 여정을 정확하고 경쾌하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함께 읽으면 『종의 기원』을 훨씬 더 입체감 있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종의 기원』 이후 160년간 진화 연구의 성과를 정리한 책으로는 칼 짐머의 『진화』(웅진지식하우스 펴냄), 션 캐럴의 『한 치의 의심도 없는 진화 이야기』(지호출판사 펴냄), 리처드 도킨스의 『지상 최대의 쇼』(김영사 펴냄)를 추천합니다. 다윈 진화론의 의미를 성찰한 스티븐 J. 굴드의 『다윈 이후』(사이언스북스 펴냄)는 그 자체로 현대의 고전입니다.
(다윈이 『종의 기원』 출간을 일부러 미루다 1858년 앨프리드 월리스의 편지를 받고서야 서둘러 출간했다는 쾀멘 등의 주장을 놓고서는 강력한 반론이 있습니다. 최재천은 『다윈 지능』(사이언스북스 펴냄)에서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다윈 서간 자료 간리 책임을 맡고 있는 과학사학자 존 밴 와이 등의 연구를 인용하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296~298쪽).
『다윈 지능』은 그 자체로 다윈 이후 진화 생물학의 현재와 미래 과제를 그려볼 수 있는 훌륭한 책입니다.
“첫째, 다윈이 수행한 다른 연구 주제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진행되었는지를 보면 『종의 기원』에 이르는 연구 기간은 전혀 특별할 게 없다는 분석이다. 식물의 수정에 관한 그의 1876년 저서 『식물 왕국에서의 타가 수정과 자가 수정의 효과』에 이르는 연구는 1839년부터 시작되었으니 무려 37년이 걸린 것이고, 난초에 관한 연구는 1830년대에 시작하여 1862년에야 『난초의 수정』이라는 책으로 출간되었다. (…) 이런 관점에서 분석하면 1835년의 스케치로부터 2859년 『종의 기원』에 이른 연구는 불과 27년밖에 걸리지 않은 다분히 정상적인 속도로 진행된 연구였던 것이다.
(…)
다윈이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그의 생각들을 비밀에 부치다가 월리스의 논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떠밀리듯 발표를 하게 되었다는 설명 역시 전혀 근거가 없어 보인다. 살인을 저지르는 심정을 운운하며 후커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 벌써 1844년의 일이다. 실제로 다윈은 후커, 라이얼, 그레이 등 가까운 동료에게 일찌감치 그의 생각을 알리고 검증을 받았다. 신앙심이 너무 두터워 알리길 꺼렸을 것이라는 부인 엠마에게도 비교적 상세하게 그의 새로운 이론에 대해 설명하곤 했다. (…) 다윈은 그의 생각들을 동료에게 설득하는데 결코 머뭇거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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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회의>(통권 494호)에 격주에 한 번씩 연재하는 ‘이 주의 큐레이션’. 이번에는 초판 출간 이후 160년 만에 제대로 된 번역본이 나온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 출간의 의미를 짚었습니다. ‘신중한 다윈 씨’와 ‘재주꾼 대익 씨’의 협업이 한국 과학사와 출판사에 두고두고 기억될 성과로 나왔습니다. 다시 장대익 선생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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