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25일 일요일

안병직 인터뷰(김기철 조선일보 학술전문기자)/ 허병두(숭문고 교사)의 코멘트

[아무튼, 주말- 김기철 학술전문기자의 막전막후]
 
마오주의자에서 뉴라이트 代父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
 
1971년 가을 서울대 경제학과 2학년생이던 이영훈·김문수는 교련 반대 시위를 쫓아다니다 제적당했다. 앞길 막막한 두 사람은 서울 돈암동에 살던 지도 교수를 찾아갔다. 따뜻한 조언을 기대했을 스무 살 제자에게 교수는 한술 더 떴다. "내가 자네들 나이였다면 교수가 아니라 노동운동을 하겠다." 학교에서 쫓겨난 것도 기막힌데 공장으로 내모는 스승이 야박했을 법하다.
 
제자 뺨치는 이 '열혈 운동권'이 안병직(83) 서울대 명예교수다. 1965년 서울대 전임교수가 된 그는 마오쩌둥 혁명론에 영향받은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을 내걸고 한국 자본주의의 몰락과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던 좌파 지식인이었다. 그러다 1980년대 중반 전향했다. 본인 표현으로 "연옥을 통과하는 고통을 겪었다"고 했다. 2000년대 보수의 혁신(革新)을 내건 '뉴라이트 운동' 대부(代父)로 활동했다. 최근 출간돼 논란을 빚은 '반일종족주의' 필자 대부분은 그의 사상적 세례를 받은 제자들이다.
 
'반일종족주의'는 일제하 강제 동원은 '허구'이고 '헌병과 경찰이 길거리 처녀를 납치하거나 빨래터 아낙네를 연행해 위안소로 끌어갔다는 통념은 거짓말'이라고 직설적으로 받아친다. 대한민국이 이웃을 적으로 모는 근거 없는 '반일(反日)종족주의' 때문에 위기에 처했다고 도발적으로 주장한다. 조국 법무장관 후보자는 '구역질 나는 책' '부역·매국 친일파'라며 공격했고, 필자들은 조 후보자를 모욕 혐의로 고소했다. 이런 논란 와중에 '반일종족주의'는 교보·예스24 등 대형 서점 베스트셀러 종합 순위 1위에 올랐다. 책을 읽은 지식인들의 찬반(贊反) 토론이 소셜미디어에 쏟아지고, 일반 독자들의 반응은 첨예하게 갈린다. "반일·반미에 신물 났는데 속 시원하다" 혹은 "역시 친일파다운 주장"이라며 호오(好惡)는 극단을 달린다.
 
이 극단의 호오 속에서 21일 안병직 교수를 만났다. 안 교수는 '반일종족주의' 대표 필자인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와 2007년 낸 대담집 '대한민국 역사의 기로에 서다'에서 이번 책의 주요 이슈를 다룬 바 있다. 어쩌면 이 모든 논란의 '뿌리'이자 '배후 세력'인 셈이다. 근원부터 물었다.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는 말했다. ‘기적의 대한민국을 만든 주역을 친일과 친미라는 잣대로 패대기칠 수 있냐고. 미국과 일본에서 기술·자본·제도를 들여와 이룩한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 동시에 그 나라는 자유와 인권을 지키는 민주국가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는 말했다. ‘기적의 대한민국을 만든 주역을 친일과 친미라는 잣대로 패대기칠 수 있냐고. 미국과 일본에서 기술·자본·제도를 들여와 이룩한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 동시에 그 나라는 자유와 인권을 지키는 민주국가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남조선 혁명'을 꿈꾸던 이론가
 
스무 살 제자들에게 왜 노동운동을 권했나.
 
"당시 '조직운동'을 하고 있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 10년 정도 했다. 목표는 '남조선혁명'이었다. 북한이나 외부 도움은 받지 않고 내부에서 체제 전복을 시도했다. 노동 현장을 비롯, 사회 각 분야에 진출한 엘리트 청년 40~50명을 지도했다."
 
인혁당이나 남민전은 들었지만 그런 조직이 있는지는 몰랐다.
 
"2차 인혁당에서 포섭하려 했다. 하지만 박현채(서울대 상대 2년 선배, '민족경제론'을 주창한 좌파 경제학자) 선배가 말렸다. 인혁당은 이미 수사기관에 드러난 조직인데, 거기에 들어가 잡혀갈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내가 소속한 단체는 이름이나 강령을 정하지 않았고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일대일 점조직으로 움직였다. 수사기관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어떻게 됐나.
 
"1980년 신군부 집권 당시에 발각됐다. 조직원들이 잡혀가 취조당했지만 두 명 정도만 사법 처리됐다. 내 이름도 당연히 나왔다. 하지만 끌려가 취조를 당한 적은 없다. 우린 이미 알고 있었다. 경찰에서 자백하더라도 재판 과정에서 부인하면 무죄로 풀려난다는 걸. 그 엄혹한 시기에도 개인의 기본권은 보장하는 게 자유민주주의국가였다. 공산주의 국가는 허위 자백까지 받아 처형해버리지 않나. 이런 게 몇 년 후 사상 전향을 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신군부가 집권한 5공 시절 부천서 성 고문 사건이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처럼 인권유린 사건이 잇달아 터졌다. 국가 안보를 내세워 개인의 자유와 기본권을 억압하던 권위주의 정권 시절이었다. 안 교수가 몸담은 조직은 어쩌면 운()이 좋았던 사례다.
 
사상 전향 과정에서 연옥을 통과하는 고통을 겪었다고 했다.
 
한국 자본주의가 1970년대 말 무너질 줄 알았다. 그런데 1980년대 무역 흑자를 내면서 승승장구했다. 내 시각이 잘못된 거였다. 1985년부터 2년간 일본 도쿄대에서 한국을 비롯해 대만, 싱가포르 등 신흥공업국 경제를 다시 들여다봤다. 후발 저개발국도 선진국이 몇 백 년에 걸쳐 축적한 기술과 제도, 자본을 들여와 고도성장을 이룩할 수 있다는 중진(中進)자본주의론에 도달했다.”
 
그들 보기에는 변절자 아니었나.
 
나 혼자 생각을 바꿀 일이 아니었다. 내가 가르치고 노동 현장으로 보낸 수많은 제자까지 책임져야 했다. 일일이 만나 설득했다. 우리가 그동안 잘못 생각한 것 같다고. 박현채 선배는 나를 비난하지 않았다. 하지만 민주화운동을 함께해오다 서먹서먹한 사이가 된 이도 많다. 노동운동을 하고 있던 김문수는 얘기를 듣더니 선생님, 너무 변했습니다라고 했다. 그도 소련 붕괴 후 껍질을 벗는 고통을 겪으며 제도권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후배 제자 30명쯤을 학계로 이끌었다.”
 
그는 2001년 정년까지는 서울대 민교협 초대·2대 회장을 맡으면서 소위 민주화 진영에 남아 있었다고 했다.
 
친일파욕먹으며 한국 경제성장사 연구
 
안 교수는 1987년 서울대 후문 근처에 낙성대경제연구소를 세워 후학들과 함께 한국 자본주의 발전을 실증적으로 분석하기 시작했다. 1700년부터 현재까지 인구, 경지 면적, 임금 등 기초 경제통계를 정리한 한국의 장기통계’ ‘근대 조선공업화의 연구’ ‘한국경제성장사등을 출간했다. 안 교수는 이런 연구를 토대로 19세기 후반 조선 경제는 몰락했고, 일제 식민지 시기 일본에서 유입된 제도·기술·자본으로 근대화가 이뤄졌으며 해방 후에도 이런 유산 위에 대한민국 경제성장이 가능했다고 주장한다. 일부에선 근대화 과정에서 일본의 역할을 높이 평가하는 낙성대학파식민지근대화론이라 비판한다. 안 교수와 제자들을 친일파라고 욕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조선총독부가 1910년대 토지 조사 사업을 시행한 이유가 조선 농민의 땅을 수탈하기 위한 것이라고 배워왔다. 안 교수를 비롯한 경제사학계, 그리고 반일종족주의는 현행 국사 교과서가 허위를 가르쳐왔다고 비판한다.
 
토지 수탈은 전혀 근거 없는 주장이다. 토지 조사 이후 왕실 소유지와 황무지, 산림이 총독부로 귀속된 것은 당연하다. 당시는 총독부가 국가였으니까. 하지만 경남 김해처럼 일제강점기 토지 조사 관계 자료가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을 보면, 민유지가 국유지로 수탈된 것은 단 1건도 없다. 농민들은 땅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겼고, 총독부도 무리하게 땅을 빼앗으면 식민지 통치의 안정성을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총독부가 토지 조사 사업을 한 이유는 효율적인 식민 지배를 위해 세원(稅源) 확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근대적 토지소유권제도가 확립됐고, 지세(地稅) 징수가 이뤄졌다. 1910년대 지세율(地稅率)은 토지 가격의 1.3%로 연간 토지생산액의 5% 미만이었다. 대만의 2분의 1, 일본의 5분의 1 수준이다. 식민지 조선의 기본 세원은 지세와 관세(關稅)뿐이었다. 이 때문에 총독부 재정은 만성 적자였다. 그 적자를 메워준 것이 일본 정부 보충금(補充金)이다. 이 보충금은 일제 말기까지 계속됐다.”
 
반일종족주의는 강제 동원이 허구라고 한다. 대부분 자발적 취업이고, 임금도 높았다는 주장이다. 임금은 거의 못 받고, 강제 노동에 시달렸다는 피해자 증언과 다르다. 이런 노무동원을 조선 청년의 로망이라고 말하는 건 지나친 미화 아닌가.
 
징용 이전의 노무동원은 회사의 모집(19399), 총독부의 관() 알선(19422) 등 기본적으로 자발적 지원이다. 우리 집의 경우, 누님이 정신대에 지원하지 않으면 아버지를 징용하겠다고 협박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정신대에 지원했다(정신대는 노무동원으로 위안부와는 구별된다). 정신대는 사실상 강제하는 경우가 많았다. 동원된 노무자들은 임금을 받았다. 일본은 메이지 이후 부역노동 관행이 없어졌기 때문에 임금을 지불하지 않는 노무동원은 있을 수 없었다. 임금 수준도 태평양전쟁 때는 노동력이 모자랐기 때문에 상당히 높았다. 국제 노동 이동은 세계사적으로 중간착취가 가장 큰 문제인데 관 알선 및 징용은 중간 브로커가 임금을 착취할 여지가 거의 없었다. 관이 개입했기 때문이다. 동원된 노동자 중에는 도망하는 경우가 아주 많았다. 농사만 짓던 조선인들이 탄광이나 공장의 노동 강도를 견디기 어려웠던 측면도 있다. 하지만 노동자들이 단지 일본으로 가기 위해 동원에 응한 경우가 많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국 대법원의 미쓰비시 징용 배상 판결은 어떻게 보나.
 
국제조약이나 협약을 지키지 않으면 국제사회에서 따돌림당한다. 1965년 한일협정으로 정리된 문제에 법원이 독단적으로 개입한 데서 문제가 시작됐다. 전임 양승태 대법원장은 이런 사실을 알기 때문에 대법원 판결에 관여했는데, 현 대법원장이 사법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만용을 부렸다.”
 
헌병과 경찰이 길거리의 처녀를 납치하거나 빨래터 아낙네를 연행해 위안소로 끌어갔다는 통념은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했다. 하지만 강제로 끌려갔다고 증언한 위안부 피해자가 많다. 이 증언을 일방적으로 부정할 수 있나.
 
피해자들이 헌병이나 경찰에 의해 끌려갔다고 주장하는 건 이해할 만하다. 일본군 위안소는 기본적으로는 풍속산업의 일종이다. 풍속산업에선 납치, 폭행 및 강간 등이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일본군이 조선총독부 및 조선군사령부와 협조해 위안부를 동원한 건 엄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헌병·경찰이 위안부를 강제로 끌고 갔다는 자료는 지금까지 나온 적 없다. 총독부와 조선군 지원 아래 위안소를 운영할 민간 업자들을 모집하고 업자들이 위안부들을 모집했다. 모집의 기본 수단은 전차금(前借金·선금)’이었다. 인신매매(人身賣買). 인신매매를 통해 위안부를 동원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이런 불편한얘기는 당연히 우리의 얼굴을 찌푸리게 만든다. ‘평화의 소녀상이 들어선 이후 위안부 피해자라고 하면 어린 소녀를 떠올리게 된 최근엔 더 그렇다.
 
친일·친미의 판단 기준은 國益
 
안 교수와 인터뷰하는 동안 자연스레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의 관제(官製)민족주의비판이 떠올랐다. 최 교수는 지난 3월 한국국제정치학회 학술회의에서 일제 식민 지배 역사 청산은 사실적이지도, 가능한 일도 아니다라고 했다. 대한민국은 식민지 시대서 물려받은 인적(人的), 제도적 유산으로 이룩한 나라라며 식민 잔재를 청산한다는 말은 한국의 국가와 사회 몸체를 청산한다는 것을 뜻한다고 했다. 최 교수는 정부가 일제 식민 잔재 청산을 말하거나 행동한다면 위선’”이라며 가능하지 않은 것을 옳다고 말하고, 그것을 위해 행동하려 하지만, 실제로는 정치적 목적을 위한 기획일 뿐이라고 했다. 최 교수도 친일파인 것일까.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3·1절 기념사에서 친일 잔재 청산은 너무 오래된 숙제라며 다시 과거사 청산을 들고나왔다.
 
해방된 지 74년이 지났는데, 무슨 잔재가 남아 있다고 아직까지 친일 청산을 얘기하나. 대한민국은 1950년대 이승만 대통령이 주도한 한·미 동맹 아래 미국의 원조와 지원을 통해 기틀을 닦고 박정희 대통령은 1960년대 한일협정을 통해 일본의 기술과 자본을 들여와 세계사에 유례없는 고도성장을 이룩했다. 친미(親美)와 친일(親日)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힘이다. 대한민국 국익(國益)을 기준으로 판단해야지 친일파’ ‘친미파로 낙인찍는 선동은 그만하자.”
 
보수의 반성을 내건 뉴라이트 운동은 이명박 정부 출범 후 사실상 소멸됐다.
 
아쉽다. 그래서 새로운 사상운동의 중요성을 더 느낀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도 민족주의와 포퓰리즘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자유주의 시각에서 한·미 동맹 토대 아래 대한민국의 헌법적 가치를 지켜나갈 시민운동이 필요하다.”
 
여든셋 노()학자 안병직은 여전히 혈기 충만했다. ‘식민지반봉건사회론을 주장한 이론가이자 혁명가로 살았던 30~40대와 중진 자본주의로의 사상적 전환, 그리고 뉴라이트대부로 활동한 70대부터 현재까지 바뀐 건 별로 없었다. 그는 몇 년 전 산에 오르다 넘어져 오른쪽 고관절 골절로 수술받고 골수암 치료까지 받았다. 지금은 왼쪽 손을 지팡이에 의지한 채 오른쪽 다리를 내딛는다. 그는 말했다. “‘기적의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미국·일본의 역할을 떼놓고 생각할 수 없다. 이 선진국들이 오랫동안 쌓아온 기술과 자본, 제도를 들여와 불과 수십 년 만에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다. 그런데 우린 친일 청산’ ‘반미(反美)’ 타령이나 하고 있다. 이젠 대한민국을 위한 친일, 친미를 당당하게 이야기할 때 아닌가.” 그는 친일파로 불리는 것쯤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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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병두
 
[좋지 못한 학자와 학설의 가장 좋은 예], 
또는 [인터뷰 분석을 통한 실체적 진실 추리와 분석]
 
물어 보자. 꼼꼼하게 인터뷰를 읽고 던지는 질문이다.
 
1. '열혈 운동권' '식민지 반 봉건 사회론'을 꿈꾸던 '좌파 지식인'이었다는 사실이 무슨 훈장인가? 이건 아마도 비슷한 부류에게나 먹혀들 전력 아닌가?
 
- 이런 고백은 스스로 현실을 그만큼 제대로 못 봤다는 결정적 증거다. 한마디로 관념론적 책상 물림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조직 운동'을 했던 관념론적 책상 물림.
 
2. '1980년대 중반 전향'하면서 "연옥을 통과하는 고통을 겪었다"?
 
- 비유적 표현이겠으나, 이 또한 현실을 제대로 봄으로써 일어나는 결정적 증거라 말할 수 없다. 그저 자신의 전향 과정을 감각적 차원에서 감상적으로 강조할 뿐이다. 학자라면 무엇을 어떻게 시각, 세계관을 바꾸게 되었는지 좀더 치밀하게 분석하는 글로 대신해야 한다.
거듭 말하겠다. '연옥을 통과하는 고통을 겪었다'는 것은 지극히 감정적 수사에 불과하다. 무엇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바뀌었는지 학자와 학문의 관계를 다양한 측면과 각도, 차원에서 얘기한다면 학문하는 학자로서 신뢰할 만하겠지만, 그와는 거리가 멀다.
 
다시 말해, 그는 자신의 전향이 학문적으로, 학자로서 어떤 과정을 겪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말하지 않고, 자신의 그간 '연구 결과'만 강조하고 있다.
 
결국 똑같은 '전향'을 언제라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아주 높다. 역시 극단의 전향이 될 가능성도 역시 높고.
 
3. '단체', 그러니까 자신이 '점조직 활동'을 했다고?
 
- "내가 소속한 단체는 이름이나 강령을 정하지 않았다. 일대일 점조직으로 움직였다." 이걸 조직이라고 하나? 이름도 강령도 없는데 조직? 수사기관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 '일대일 점조직'이라고?
 
이름도 강령도 없는 일대일 점조직이란 아예 처음부터 실체가 없다는 말과 같다. 지금이라도 말해 보시라. 누가 누구하고 연결되었나? 점조직이니 점과 점을 연결해서 선을 대보라. 고 박현채 교수를 거명하는 것부터 실체를 감추는 것 아닌가? 스스로 개인의 신화를 쓰고 싶은 게다.
 
4. 수사 기관 추적을 피해서 '강령'도 아예 만들지 않았다면서, 자신은 끌려가 취조를 당한 적도 없다? 게다가 '우린' 이미 풀려날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하지만 끌려가 취조를 당한 적은 없다. 우린 이미 알고 있었다. 경찰에서 자백하더라도 재판 과정에서 부인하면 무죄로 풀려난다는 걸. 그 엄혹한 시기에도 개인의 기본권은 보장하는 게 자유민주주의국가였다."
 
이해할 수 없다.
 
4.1. 조직 활동이 발각되었는데 끌려가 취조를 당한 적은 없다고?
 
- 스스로 밝혔듯이 '남조선 혁명''체제 전복'을 기도했어도(실제 했는지 안했는지 실체적 진실은 불확실하지만!) 자신과 같이 발각되어도 취조도 안 당했다니 이상하다. 신군부 시대에? 없던 조직도 만들어대던 그 시대에!
 
이런 경우는 대개 두가지다. 조직 활동 자체가 처음부터 없었거나, 신군부 독재와 모종의 거래를 했거나 둘 중 하나다. 차라리 조직이 발각되지 않아서라면 설득력이 좀더 있겠다. 당시 현실에 발각되고도 취조도 안 당했다는 것을 믿을 수는 없다.
 
4.2. 우린 재판과정에서 '부인'하면 무죄로 풀려난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고?
 
- 조직 활동을 했다면서, 자신이 재판과정에서 '부인'하면 무죄가 될 거라고 말하니 자가당착의 모순이다.
 
체제 전복 활동을 했다면 지금도 있는 국가보안법 위반이다. 그런데 재판과정에서 이를 '부인'하면 무죄가 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는 지었는데, 발각되어도 끌려가지도 않고, 취조도 받지 않고, 설령 재판 과정에 가서도 부인하면 풀려난다고?
 
이게 가능하다면 죄를 스스로 인정하는 사람 외에는 다 풀려나는 사회다.
 
결국 이런 경우가 가능하겠다. 실질적으로 조직 활동을 하지 않았거나, 실질적으로 활동했지만 나중에 '협조'하면 무죄로 풀려날 수는 있었겠다. 결국 '부인'이란 말을 '협조' 또는 '자백' 등으로 바꿔 보면 논리적으로도 자연스럽게 읽힌다.
 
또한, '우린', '이미 알고 있었다'는 말도 따져보자. 나와 같은 복수의 사람들이 진작부터 '협조' 또는 '자백' 했다면 이미 '밀고'했다는 말로도 역시 자연스럽게 대치 가능하다. 인터뷰 내용을 분석적으로 읽다가 보면 이러한 합리적 의문과 추리가 가능하다.
 
언제라도 자신은 '부인'하면 무죄가 분명하다고 확신하는 사람의 체제 전복 활동에 관한 이야기는 아무래도 자기 기만의 개인 신화화로 읽힌다.
 
5. "그 엄혹한 시기에도 개인의 기본권은 보장하는 게 자유민주주의국가였다"?
 
- 왜 그 시기를 '엄혹한 시기'라고 부르나? 적어도 그 자신에게는, 엄혹할 게 하나도 없다. 점조직으로 10여 년간 체제 전복 활동을 했지만 끌려가지도 않고 취조도 안 받고, 심지어 재판을 받지도 않았으면서도 이미 재판 과정에서 '부인'하면 언제라도 무죄로 풀려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 기본권 보장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5.1. 그렇게 기본권을 보장했다면 7,80년대 수많은 행방불명자와 고문피해, 고문사 당한 이들이 어떻게 존재했는가?
 
- '엄혹한 시기'란 통상 개인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사회라면서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를 뜻한다.
 
6. 그들의 의식과 그들의 주장
 
그들은 자유민주주의국가와 공산주의국가를 너무나 단순 비교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독재정권 시절이라도 자유민주주의국가이므로 기본권을 보장하므로 그렇지 않은 공산주의보다 분명히 낫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근거가 자신의 사례(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개인의 경우를)를 미화, 과장, 왜곡하고 있기에 설득력이 떨어진다. 남영동 분실에서 고문 당해 죽어간 희생자들에게 자유민주주의국가와 공산주의식 숙청이 무엇이 그리 다를까? 그들은 재판 과정에서 자신들의 '''부인'하지 않아서? 그래서 '무죄'가 아니기에? 재판도 못 받고 욕조에서 질식사 당하고 고문기술자들이 나왔나?
 
이러한 단순 이분법의 시각은 식민지 조선을 보는 그들의 시각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식민지 조선이 혼란한 왕조말보다는 낫고, 친미와 친일의 바탕 위에서 발전했으니 대한민국이 북한보다 낫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거다.
 
그들에게 식민지 조선과 독재 정권은 일본의 강점이든 미국의 군정이든 모두 현재의 성공을 낳는 유일하고도 필연적인 근거들이라 본다.
 
이 정도는 정말 친일과 친미의 단순 이분법적인 '선동'이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식민지 경험은 근대화의 밑바탕이 되고, 일본은 식민지 지배의 원죄는커녕 원조를 준 은혜의 나라다.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은 이렇게 과격하면서도 관념에 치우친 엉터리 책상물림의 또 다른 전향에 불과하다.
 
다만 이들의 주장은 공산주의라는 대립 세력이 있어야 상대적 우위를 자랑하면서 자신들의 분석과 이론의 근거와 결과를 마련할 수 있다.
 
결국,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자들은 분단 현실을 개선할 어떠한 의지도 없으며, 실질적인 개선 방안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들에게 가장 이상적인 현실은 절대적으로 단순 비교할 허약한 공산주의국가가 존재하는 것이다. 당연히 통일에 대한 어떠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전략도 없다. 그럴 이유도 능력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저 무력을 사용한 흡수 통일을 과격하게 주장할 수밖에 없다. 안보 위기는 이들의 부실한 관념주의와 무력한 해결방안을 감출 수 있는 좋은 위장막이자 방패가 된다.
 
결국 이들의 주장은 일제강점기가 구시대 왕조인 조선보다 낫다는 거다. 그걸 실제적 통계와 자료로 뒷받침하면서 학문적으로 위장할 뿐이다. 이는 고스란히 어떤 경우라도 대한민국이 공산당 독재인 북한보다 낫다는 것에 집중한다. 그래서 일본을 끝까지 감싸고, 이를 부정하면 좌파니 뭐니 떠드는 것이다.
 
7. '식민지 근대화론'은 사실상 무엇인가? 이거 누가 붙인 이름인가?
 
- "근대화 과정에서 일본의 역할을 높이 평가하는 '낙성대학파'"에게 묻고 싶다.
 
토지 수탈은 전혀 근거 없는 주장이라고? 총독부가 국가였으니까 수탈이 아니라고? 결국 총독부를 합법적 국가로 보는 견해가 기본 근거다. 당연히 을사늑약이라고 부르지 않겠지. 일한병합조약이라고 부른다면 '식민지'라고 말하는 것조차 말하면 모순 아닐까? '식민지 조선'이라고 부르나? 식민지 본국이 식민지 대상국가를 그렇게 열정적으로, 분에 넘치게 지원했다고? 그럼 본국이 식민지였다는 소리다.
 
총독부 장부상의 재정은 만성적자라는 말을 하다니 설득력이 떨어진다. 식민지 조선에서 금만 249톤을 반출해 간 그들이다. 이것도 적당한 거래 형식을 빌어서다. 세금도 적어, 금만도 249, 게다가 은, 구리, 텅스텐 등...수많은 광물 자원만 따져도 이런 장부상의 조작된 통계를 훨씬 상회하는 막대한 부가 유출되었다. 이건 수탈이 아닌가?
 
장부상으로 토지가 정상 가격으로 매매된 듯 보이면 합법적이고 정상적인가? 조폭이 위협해서 강제로 찍은 계약서는 무효이며, 서류상의 문제만 없으면 실체적인 사실은 진실이 될 수 없는가? 18만 점까지 추정되는 반출 문화재들은 모두 정상 거래 되었다는 것인가? 식민지가 본국이고, 본국 일본이 식민지였다는 것인가?
 
강제 노동에 시달렸는데, 그건 농사일보다 광산일이 힘들어서 그랬을 거라고? 그럼 군함도에서 왜 그리들 탈출하려고 했는가? 왜 그리 많이 죽었는가? 근대화 중인데 노동자들이 기력이 딸려서?
 
그 당시의 수많은 '유민들'과 임시정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등으로 다양하게 세분화 된 독립운동의 활동은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1930년대 유일한 문맹률 조사(조선총독부)에서 10세 이상의 조선 거주 일본인의 경우 3%, 조선인 평균은 77.7%. 식민지 근대화가 어떻게 국민의 77.3%를 문맹으로 만들면서 가능했다는 것인가?
 
(그 이후는 아예 한국어도 못쓰게 했다. 한글도 못쓰게 해서 동아와 조선 같은 신문이 브나로드 운동, 농촌 계몽 운동을 펼친 게 아닌가!)
 
8. 식민지 근대화라고? 현재 일본은 근대화 되었는가?
 
- 샤마니즘의 산 증거인 신사가 곳곳에 널려 있고, 대화혼을 내세우는 게 바로 일본 '종족' 아니든가?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국가임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정권이 일당독재하는 일본이 과연 근대화된 국가인가?
 
그들의 민주주의는 미국에 의해 이식되었을 뿐, 변형된 막부 체제 아닌가?
 
그들이 생각하는 민주주의는 과연 무엇인가? 인터뷰 내용을 인용하자.
 
"한국 대법원의 미쓰비시 징용 배상 판결은 어떻게 보나.
국제조약이나 협약을 지키지 않으면 국제사회에서 따돌림당한다. 1965년 한일협정으로 정리된 문제에 법원이 독단적으로 개입한 데서 문제가 시작됐다. 전임 양승태 대법원장은 이런 사실을 알기 때문에 대법원 판결에 관여했는데, 현 대법원장이 사법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만용을 부렸다.”
 
국제조약이나 협약이 국내법에 위반된다면 대법원이 개입하는 것은 정당하다. 이를 독단적 개입이라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행정부와 입법부, 그리고 사법부를 3권 분립으로 견제와 균형을 도모하게 하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 아닌가? 학자라면서 이러한 사법부의 행위를 '만용'이라고 비학술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더구나 일본이 조선과 한국에 들여온 이른바 '근대화' 관련 제도와 문물 들은 대부분 유럽과 미국에서 이식해 온 것들 뿐이었다.
 
그들이 스스로 근대화하여 우리에게 제시한 것들이 도대체 무엇이 있나 제시해 보라.
 
9. 식민 지배 청산은 불가능하다고? 한국의 국가와 사회 몸체를 청산한다는 것이라고?
 
- "하지만 헌병·경찰이 위안부를 강제로 끌고 갔다는 자료는 지금까지 나온 적 없다. "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문서 자료가 없으면 그 존재는 의심되고 부정된다.
 
살아있는 위안부들의 증언은 증거력이 없다고 본다. 아니면 위안부가 아니라 매춘부라고 보는 식이다.
 
일제 잔재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이용해 왔는지 따지고,
이 과정에서 잘못과 비효율적인 점들을 찾아내 좀더 근대화의 길을 분명히 잡고, 효율성 있게 추진하는 데 앞장섰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않아서 한심스럽게 똑똑한 바보들이 되었다.
 
그들은 심지어 대한민국도 식민지의 연장, 식민지를 바탕으로 성립되고 발전된 국가로 본다. 독립투사의 존재와 의미는 없고, 수많은 일제 잔재 청산의 노력들은 단박에 무시한다.
 
최장집 같은 이도 또한 이들의 주장에 자의반 타의반 입장을 같이하고 있다. 관 위주의 과도한 일제 잔재 비판을 하기에 앞서, 일제 잔재의 실체를 정확히 규명하고 식민지 근대화론 같은 문제를 좀더 과학적이고 역사적으로 들여다 보는 게 급선무였다. 관제 민족주의 비판이라는 제목보다도 엄청나게 논지를 확대하고 왜곡하고 과장하고 있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의 관제(官製)민족주의비판이 떠올랐다. 최 교수는 지난 3월 한국국제정치학회 학술회의에서 일제 식민 지배 역사 청산은 사실적이지도, 가능한 일도 아니다라고 했다. 대한민국은 식민지 시대서 물려받은 인적(人的), 제도적 유산으로 이룩한 나라라며 식민 잔재를 청산한다는 말은 한국의 국가와 사회 몸체를 청산한다는 것을 뜻한다고 했다. "
 
도대체 이제는 식민 잔재라는 표현조차 쓰지 말자는 말 아닌가. 식민 잔재가 아니라 식민 바탕 덕분에 근대화가 되었다는 주장이다. 식민 잔재가 근대화의 바탕이 되었다는 국제적 사례는 어디 있는가? 학문적으로 증거를 대 보라.
 
10. 끝으로 덧붙인다. 일제 잔재 청산에 나섰기에 그나마 이만큼!
 
우리가 해방후 일제 잔재 청산에 나서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는 모두 일본어를 쓰고 있어야 정상이다. 이미 식민지 시대에 태어난 국민들 대다수가 문맹의 상태에서도 일본어만 사용하도록 '조선어 말살 정책'을 펼치지 않았던가!
 
또한 강제 '창씨 개명'된 성으로 지금 불리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일본에 의한 '근대화'를 우리가 바랐다면, 또한 친일파로 불리는 것을 꺼려하지 않는다면 창씨 개명된 이름으로 자신들의 이름 도한 쓰기를 권한다.
 
당신들이 진정한 학자들이라면 실체와 본질을 가감없이 또한 총체적이면서도 자세하게 보아야 한다. 하지만 일제가 보라는 방향과 방식만 고집하면서 스스로 거짓의 집을 짓고 그 안에서 진리와 자유를 욕보이고 있을 뿐이니 개탄스럽다. 당신들에게 '국익'은 과연 무슨 의미일까? 도대체 누구를 위한 국익이고, 국가를 말하는 것인가?
 
'기적의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미국, 일본의 역할을 떼놓고 생각할 수 없다'고 단언하며 선동하는 대신, 여기까지 오게 만든 독립투사들과 우리 국민들을 얘기하는 게 먼저다.
 
어줍잖은 좌파 혁명을 관념적으로 내세우다가 실패하고, 다시 일본에 대한 과도한 주장으로 선회하며 현실과 역사를 왜곡하지 마라.
 
일제 강점의 엄청난 피해를 준 범죄국임을 규명하는 데, 신사를 생활 속에 들여온 샤마니즘 일본 종족의 실체를 천착하는 데 나머지 생애를 바쳐주기를 조금이나마 기대한다.
 
* 덧말:
이런 식의 인터뷰 기사가 갖게 되는 근본적 한계를 잘 알고 있다. 인터뷰어의 질문과 인터뷰이의 대답이 유기적으로 연계되기 어려우며, 이 과정에서 본의가 왜곡되는 현상도 충분히 발생할 수 있다. 모쪼록 내가 잘못 읽은 것이기를 기대한다.
 
그래도 그렇지. '해방된 지 74년이 되었는데 무슨 잔재가 남아있냐'는 식의 발언은 너무 심한 왜곡과 선동이다. 아직 많이 남아 있다. 당신들의 의식 속에 특히! 그러니 식민지 근대화 타령 좀 그만 해라.
 
마지막으로 다시 물어보자.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 일본에 기대어, 일본의 심기를 거스르지 말고 살라는 말이냐?
 
그러기에는 대한민국의 '민도'가 너무 높아졌다. (요즘 '민도'라는 말이 전혀 안 나오는 현실임을 돌이켜 보라. 예전에는 툭하면 국민 수준을 핑계 삼고, 민도가 너무 낮네 마네하면서 조선놈, 엽전...운운하면서 조선 놈들은 때려야 말을 들어! 이렇게 말하던 자들이 과연 한둘이었는가? 일제잔재를 청산해서 그나마 이 정도라도 살고 있는 거다.
 
2019824일 허병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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