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서울대 법학) 교수의 페이스북에 있다는 내용입니다. '김주완 김훤주 지역에서 본 세상' 에서 읽었습니다.
"파리가 앞발을 싹싹 비빌 때는" 사과라고 착각하지 말고 때려 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Kuk Cho 유명환 장관은 야당 찍은 사람은 북한 가라는 '충성' 발언으로 장관직을 유지했지만, 결국 다른 데서 터지고 말았다. 옷 벗는 것은 시간 문제. 외통부 내에 암암리에 존재하는 '음서제'가 이번에 드러난 것은 다행이다. MB 주변에는 '공정한 사회'에 반하는 인간만 득실거림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사실 '신하'는 '주군'을 보고 따라하는 법이거늘.
한편 유명환을 비롯한 고위직들이 무슨 일이 터지면 '사과'를 한다. 어디선가 들은 우스갯소리 하나 하겠다. "파리가 앞발을 싹싹 비빌 때 이놈이 사과한다고 착각하지 말라." 이에 내 말을 추가하자면, "파리가 앞발 비빌 때는 뭔가 빨아 먹을 준비를 할 때이고, 우리는 이놈을 때려 잡아야 할 때이다." 퍽~~ (교정은 인용자)
이 글은 루쉰 선생의 글을 떠올리게 합니다. 루쉰 선생은 잡감문인 '페어 플레이는 아직 이르다'는 글에서 "요컨대 만약 사람을 무는 개라면, 땅위에 있거나 물 속에 있거나 모두 때려야 할 종류의 개라고 나는 생각한다."라고 말하면서, 요약하자면 흠씬 두둘겨패서 다시는 사람을 물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오늘날의 비평가는 흔히 "죽은 호랑이를 때린다"와 "물에 빠진 개를 때린다"를 함께 다루면서 그 어느 것이나 비겁한 일로 친다. 나의 생각으로는 "죽은 호랑이를 때리는" 것은 겁쟁이가 용감한 자의 시늉을 내는 것으로 자못 익살스러운 데가 있으며, 비겁의 협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미워할 수 없는 비겁이다. 그런데 "물에 빠진 개를 때리는" 쪽은 그처럼 간단하지 않다. 그 개는 어떤 개인가, 왜 물에 빠졌는가, 그걸 보지 않고는 결정할 수 없다. 생각건대 물에 빠진 원인은 대충 세 가지이다. (1) 개가 스스로 발을 헛디뎌 빠진 경우, (2) 다른 자가 밀어서 빠진 경우, (3) 자기가 스스로 빠진 경우이다. 만약 앞의 두 종류를 만나 남과 함께 부화뇌동하여 때린다면, 그것이 너무나 멋쩍은 짓임은 말할 나위도 없으며, 또한 비겁에 가까운 짓인지도 모르다. 그러나 만약 개와 힘껏 싸우다가 물속으로 밀어넣었다면 물속에 빠진 개를 몽둥이로 마구 때리더라도 결코 심한 것이 아니다. 앞의 두 종류의 경우와 같이 논할 수는 없는 것이다.
들은 바로는 용감한 권법가는 이미 땅에 넘어진 적에겐 절대로 손을 대지 않는다고 한다. 참으로 우리들이 모범으로 삼아야 할 일이다. 다만 거기엔 한 가지 조건이 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곧 적도 또한 용감한 투사여야 할 것, 패한 뒤에는 부끄러워하거나 후회하면서 다시 대항하지 않든가, 또는 당당하게 복수를 해오든가, 그렇게 한다면 어느 쪽이든 나쁘지 않다. 그러나 개는 그 같은 예에 어울리는 대등한 적으로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개는 아무리 미친 듯이 짖어대도 실제로는 '도의(道義)' 같은 건 절대로 알 리가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개는 헤엄을 칠 수 있다. 따라서 틀림없이 뭍에 기어올라와서 마음놓고 있노라면, 갑자기 몸을 털어 물방울을 사람의 몸이나 얼굴에 마구 뿌리고 나서 꼬리를 감추며 달아날 것이다. 더구나 그 뒤로도 그런 성정(性情)은 여전히 변치 않는다. 우직한 사람은 개가 물에 빠진 것을 보고 세례를 받으면서 참회하는 것으로 알는지 모른다. 따라서 다시 나타나 사람을 무는 일은 없을 것으로 생각할지 모르나 그것은 터무니없는 착각이다.
요컨대 만약 사람을 무는 개라면, 땅위에 있거나 물 속에 있거나 모두 때려야 할 종류의 개라고 나는 생각한다.
......
속설에 "얌전은 무능의 별명이다"는 말이 있다. 좀 야박한 말 같지만 잘 생각해 보면 그것은 사람에게 나쁜 짓을 하도록 부추기는 말이 아니고 쓴 경험을 많이 한 끝에 나온 경구임을 알게 된다. 예를 들면 "물에 빠진 개는 때리지 않는다"는 설만 보더라도 그것이 생긴 원인은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다. 하나는 때릴 힘이 없는 것이고, 또 하나는 비교의 착오다. 전자는 잠시 논외로 하고, 후자를 살펴보면 그 착오에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실각한 정객을 물에 빠진 개와 마찬가지로 보는 착오이고, 또 하나는 실각한 정책들 가운데도 착한 자와 악한 자가 있는 것을 가리지 못하고 한타령으로 보기 때문에 도리어 악을 만연시키는 착오이다. 그 같은 경우를 오늘의 상태에서 말한다면, 정국의 불안정 때문에 일어났는가 하면 자빠지고, 자빠졌는가 하면 일어나 흡사 수레바퀴 돌 듯 그 교체가 격심하다. 그리고 악한 자는 권력의 뒷받침이 있을 때에는 횡포하기 이를 데 없으나, 일단 실각하면 곧바로 남의 동정을 구한다. 그렇게 하면 무는 것을 실제로 보거나 자기가 직접 물려 본 일이 있는 우직한 사람은 그것을 '물에 빠진 개'와 동일시하여 때리는 일을 그만둔다. 아니 때리지 않을 뿐 아니라 동정까지도 베풀려고 한다. 정의는 드디어 이겼으니 이제야말로 의협심을 보일 때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러니 어찌 헤아릴 수 있으랴. 그는 정말로 물에 빠진 것이 아니고, 보금자리는 물론 양식도 넉넉히 쌓아 놓았다는 것을, 더구나 조계(組界 : 치외법권이 작용하는 중국내 외국인 거주지)안에다... 드물게는 그가 부상한 것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는 절름발이 흉내로 사람들의 동정을 끌다가 틈을 보아 유유히 사라지는 계략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땐가 다시 세력을 되찾게 되면 그 전과 같이 순직한 사람을 물어뜯는 것을 시작으로, 별의별 나쁜 짓을 다하는데, 그 원인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순직한 사람들이 "물에 빠진 개를 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금 가혹하게 말하자면 개에게 물린 것은 자기 스스로 묘혈을 판 탓일 뿐, 하늘을 원망하거나 남을 탓할 일이 전혀 아니다.
어진 사람들은 반문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들에게 페어 플레이란 일체 쓸데없는 것인가라고. 나는 당장 대답하겠다. 물론 필요하지만 지금은 시기가 아직 이르다고, 그것이 바로 '자업자득'의 논법이다. 어진 사람들은 이 논법을 따르지 않으려고 할지 모르나 내 주장이 사리에 맞는 걸 어쩌랴. 왜냐하면 국산형 신사 , 또는 서양형 신사들은 중국에는 중국 나름의 사정이 있으므로 외국의 평등이나 자유 따위는 중국엔 적용할 수 없다고 입버릇처럼 되뇌고 있기 때문이다. 이 '페어 플레이'도 그 가운데 하나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잖으면 그가 너에게 '페어'하지 않은데 너는 그에게 '페어'하게 대한 결과, 너만 바보가 되고 만다. 그래서는 '페어'하기를 바라다가 '페어'에 실패할 뿐 아니라, 가령 '페어'하지 않기를 바라더라도 그 역시 실패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페어'하기를 바란다면 먼저 상대를 잘 보고, 만약 '페어'한 대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라면 조금도 '페어'하게 대할 필요가 없다. 상대가 '페어'하게 나올 때, 비로소 '페어'를 문제삼아도 늦지 않다.
그렇게 하는 것은 다분히 이중도덕을 주장하는 협의가 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중국엔 따로 더 나은 길이 없기 때문이다. 중국에는 오늘날에도 많은 이중도덕이 있다. 주인과 노예 사이나 남자와 여자 사이의 도덕이 다 다르며, 통일이 되어 있지 않다. 만약 '물에 빠진 개'와 '물에 빠진 사람'의 경우만 유독 동일시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편파적이고, 너무나 이른 조치이며, 신사들의 이른바 자유 평등은 나쁘지 않지만 중국에서 실행하기는 너무 이르다는 말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러므로 '페어 플레이' 정신이 널리 실행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적어도 앞에서 말한 '물에 빠진 개'가 인간다워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지금은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앞에서 말한 대로 상대를 잘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꼭 가려내야 할 필요가 있다. '페어'는 상대에 따라 베풀어야 한다. 무엇 때문에 물에 빠졌던 상대가 사람이면 구해내야 하고, 개면 그대로 둬야 하며, 나쁜 개면 때려야 하는가.(인용자: 마침 사무실의 제 책상 머리맡에 <아침꽃을 저녁에 줍다>가 없기에 인터넷 인용 후 몇 군데 오자를 수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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