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도 간혹 엄대섭 선생과 관련된 글을 이 블로그에 올리곤 했다.
오늘도 그런 글 한 편. 소설가로 널리 알려져 있는 최일남 선생이 쓴 기사. 동아일보 1965년 11월 16일자에 실린 기사다. 제목은 '지역사회의 교육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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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사회의 교육센터
전국 ‘마을문고’ 대표자대회
효과적 방법 진지하게 토의
자연부락 4만9천 중 4천여 개 설치
“행정기관의 협조, 아쉽다”
바깥 날씨는 쌀쌀한 편이었다. 백 평도 안 되는 학교강당에는 의자도 없이 마루바닥에 2백 명 가까운 전국 ‘대표’들이 쭈그리고 앉아 무엇인가 열심히 듣고 있었다. 11일부터 13일까지 3일간 경주여중고 강당에서 열린 제1회 전국 ‘마을문고’ 대표자대회라고 이름을 붙이기에는 그 형세가 너무 초라해보였다.
대표자들의 행색도 가지가지. ‘넥타이’를 맨 사람은 보기 드물 정도로 소박한 농촌청년들의 모임이었다. 20대의 청년이 있는가 하면 40에 가까워 보이는 아주머니에 단발머리의 소녀, 교복을 입은 남자 고등학생도 있었다.
그러나 대회의 분위기는 기자가 접해본 어느 ‘대회’보다도 진지하고 알뜰해 보였다. 이들은 사흘 동안의 대회를 통해서 농어촌 사람들의 독서운동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이끌어 나갈 것인가에 대해서 서로의 체험을 중심으로 토론해 나갔다.
‘마을문고’가 생긴 것은 6년 전인 1960년 말이었다. 동회 회장인 엄대섭 씨의 ‘아이디어’로 경주시립도서관에서 태어났는데 경주 변두리 농촌에서의 시험에 성공한 데 자신을 얻어 다음해에 사단법인 마을문고진흥회를 창립, 전국적인 운동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후 문교부가 이 사업을 정책으로 채택하여 보조금을 지급하고, 내무부가 지방행정의 기반사업으로 채택 하에 지방자치단체의 예산사업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책도 없고 독서습관도 없는 대다수의 농어촌 사람들에게 독서습관을 길러주고, 농업부업, 생활개선 교양 사회상식에 이르기까지 모든 지식을 공급해 주기 위해서 마련된 이 운동은 한국의 농어촌 실정에 가장 알맞은 지역사회의 사회교육 ‘센터’라고 평을 받고 있다.
전국의 자연부락은 4만9천 가량(20호 이상으로 추산해서) 그중에서 지금 ‘마을문고’가 설치되어 있는 부락은 4천여 개에 달하고 있는데 동회에서는 69년까지 나머지 타락에 전부 ‘마을문고’를 설치할 계획을 추진 중이다.
특히 이번 대회에서 표창을 받은 전남 강진군에는 1백 85개의 자연부락이 있는데 청년군수인 김재호 씨의 열성으로 1백15개 부락에 이미 ‘마을문고’를 설치했고, 내년 3월까지 나머지 부락에 모두 ‘마을문고’를 설치할 계획이다.
그러면 이러한 운동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 것일까?
‘마을문고’는 1개 설치하는 데 4천 원이 든다. 이 돈으로 설립자가 희망하는 곳에 세울 수 있으며 설립자의 이름이나 명칭을 적어 기념한다. 한 문고에 들어가는 책은 3백여 권. 책 내용은 생산 기본도서 40%, 교양 20%, 문학 아동 30%, 기타 10%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이 ‘문고’의 살림은 도시나 지방의 뜻있는 개인이나 기관 및 단체에서 자기 고향이나 자매부락에 설립할 수도 있지만 부락의 청년들이 모여 자기네들의 힘으로도 많이 설립한다.
충남 보령군 남포면 기동리 새싹독서회 대표 윤순자(34) 여사(지금은 소송리로 이주)는 시모를 모시고 있는 외에 4남매의 아이들을 거느리고 있는 농부. ‘마을문고’를 설치하기 위한 자금으로 밤으로만 집집을 찾아다니며 마늘을 모았다. 3년 전 일이었다. 그 결과 모아진 마늘이 6접, 그것을 시장에 갖다 팔려고 하자 1천5백50원밖에 부르지 않았다. 너무 억울해서 도로 지고 오는데 마침 대전에 있는 어떤 석유회사에서 이 부락에 ‘마을문고’ 하나를 설치해주는 바람에 그 마늘은 고마워서 그 회사에 선사했다.
그 후 문맹인 처녀들을 모아 모내기 절미 운동 등의 공동작업으로 송아지 한 마리를 사고 그 송아지를 키워 팔아서 다시 두 마리로 늘려 지금은 두 마리의 큰 소가 되었다.
이 운동에 몰이해한 동리 노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노인들의 회갑이면 독서회원들의 성금으로 수저 식기 한 벌씩을 선물하고, 회원들을 결혼 명일 잔치도 열어주었다.
경남 고성군 구만면 중암리 독서회(대표 이재호)에서는 ‘책을 읽자’는 소인 연극을 꾸며 4천 원의 찬조금을 얻었고, 전북 완주군 운주면 가천 독서회의 정정자 양은 군수를 설복, 회관 건립 자금의 일부를 얻기로 되었으며, 회원들에게서 월 회비로 10원씩을 걷었다. 대출되는 책은 회부대종이로 싸서 책의 소중함을 알도록 하고 남녀 회원들이 모이는 것을 색안경을 쓰고 보는 동리 노인들의 오해를 사지 않도록 각자가 각별 조심하도록 당부하고 있다. 이 부락에서는 처음에 마을 처녀들이 중심이 되어 독서운동을 전개해왔는데 처음에는 비방만 하던 청년들도 지금은 적극 협조하게 되었다.
충북 제천군 덕산면 수산리 숙갓독서회에서는 회원들이 퇴비 풀베기 등의 공동작업으로 기금을 모으고 있는데 처음에는 ‘앰프’ 시설로 확성기 소리나 듣자고 주장하던 마을사람들도 이제는 독서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이처럼 하향식으로 밑바닥에서 움트고 있는 이 독서운동의 장래에 대해서 이번 대회에 모인 대표들은 비교적 낙관적이긴 했으나 이 운동이 더 본격적으로 확대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지방행정 기관의 인식과 협조가 긴요하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경주에서 최일남 기자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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