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연대 2012년 2월호, 안건모 씨(작은책 발행인)의 칼럼. 폭력을 부르는 사회, 그리고 인문학
요즘 사회 문제로 아이들의 폭력이 심각하다. 일진이니 하는 조직(?)까지 만들어 친구들의 돈을 빼앗고 왕따를 시켜 자살하는 아이들이 늘고 있다. 그런 소식을 들을 때면 나는 놀림을 받던 내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내가 어릴 때 학교에는 일진이라는 조직은 없었지만 별반 차이가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힘없고 빽 없는 아이들은 늘 맞고 다녔다. 내가 어릴 때 다니던 홍제초등학교는 한 반에 60명 정도였다. 나는 그 많은 아이들 가운데 키가 가장 작았고, 몸이 약했고, 공부를 못했고, 게다가 집안이 가난해 늘 주눅이 들어 있었다. 그 소심한 성격은 아버지의 영향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아버지는 무척 성격이 급했고 난폭한 분이었다. 밥을 먹다 수틀리면 밥상을 뒤엎는 건 예사였고, 어머니의 머리채를 잡거나 발길질도 서슴지 않았다. 이웃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키가 작다고 얕보면서 덤빈 이웃에게 날카로운 삽을 휘두를 정도로 앞뒤를 가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우리들에게도 폭력을 휘둘렀다. 한번은 두 살 위인 형을 가죽 허리띠로 때리기도 했다. 그러니 우리 형제들은 늘 아버지가 무섭고 조심스러웠다.
나와 우리 형제들은 아버지를 무서워하면서도 난폭한 성격을 닮아갔다. 내가 학교에서 맞고 집에 들어오면 아버지는 미간을 찌푸리며 화를 벌컥 냈다. “이 새끼야, 너는 손발이 없어? 왜 맞고 다녀? 힘 없으면 연필로 콱 찍어 버리면 되지!”라며 혼을 냈다. 내가 벌벌 떨면서 울면 아버지는 “울긴 왜 울어?”라고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나를 내쫓았다. 어쩔 때는 벌거벗긴 채 내쫓기도 했다. 그렇게 혼나면서 나에게도 그 폭력적인 성격이 형성됐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 말대로 나를 놀리고 괴롭히던 한 아이의 가슴을 연필로 찍어 버렸다. 연필심이 그 아이 가슴에 박혔다.
12살 나이에 나는 중학교 진학을 못 하고 공장에 들어갔다. 동네에는 학교를 못 가고 공장에 다니는 아이들이 많아 폭력을 휘두르는 건달들이 많았다. 그런 폭력적인 사회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을 수 없었다.
공장을 다니기도 하고 신문 팔이도 하면서 2년 뒤, 중학교 과정을 가르치는 ‘비인가’ 고등공민학교에 들어갔다. 그 학교는 정규 학교가 아니라서 나보다 더 사회에서 굴러다니다 들어온 아이들이 많았다. 나도 늦게 들어간 학교인데 나보다 나이가 서넛이 많은 아이들도 있었다. 나는 여전히 150cm 정도로 키가 작았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키도 크고 어른 덩치만큼 컸다. 역시나 거기서도 다른 아이들을 괴롭히는 놈들이 있었다.
검정고시로 들어간 한양공고도 마찬가지였다. 선배는 하느님과 동격이었다. 조금만 눈에 거슬려도 끌려가서 매를 맞았다. 동급생 중에서도 약한 아이들은 늘 시달림을 받았다. 나는 그나마 2년 늦게 학교를 들어갔기 때문에 선배와 나이가 같아 맞지는 않았다. 학교 규율은 엄격해서 조금만 어긋나도 매 타작이었다. 교문을 통과할 때는 걸리는 게 없나 하고 마음을 졸였다. 단추가 떨어졌거나 명찰이 없거나 머리가 조금만 길어도 걸려 몽둥이로 엉덩이를 맞았다. 가뜩이나 공부에 취미를 못 붙였는데 그런 폭력적인 학교 분위기까지 한 몫 해 2학년 초에 학교를 나와 버렸다. 물론 늘 쪼들리는 집안 사정도 내가 빨리 학교를 그만두게 한 원인이었다.
군대에 갔다. 나는 그 때 전두환이 사령관이었던 보안부대에 근무했다. 광주항쟁이 전두환이 일으킨 쿠데타 때문인지도 모르는 멍청하고 순진한(?) 놈이었다. 부대 안에는 알게 모르게 폭력이 많았다. 늘 매 타작을 하는 고참들한테 폭력을 배웠다. 고참이 된 뒤에는, 나 또한 그런 알량한 위세를 떨고 다녔다. 총칼을 앞세워 무력으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때문에 알게 모르게 폭력의 정당성을 주입받았던 것도 있었을 것이다.
제대하고 사회에 나와서 노가다를 하면서 그럭저럭 살았다. 하지만 먹고살 만한 일이 아니었다. 희망이 없어 거의 자포자기하고 살았다. 아무리 열심히 살려고 해도 안되면 자포자기하게 된다. 폭력적인 아버지의 성향을 이어 받고, 될 대로 되라 식으로 살게 되니 자연 폭력적인 성격이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다행히 책을 보면서 광주항쟁과 근대사를 알게 됐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의 실체를 깨닫고, 리영희 선생 같은 분들이 쓴 인문학 책을 보면서 이 사회 구조를 어렴풋이 알게 됐다. 나는 그렇게 가난하게 사는 게 내 개인의 문제인 줄만 알았다. 우리 집이 못살았기 때문에 내가 어릴 때부터 공부를 못했고 좋은 학교를 가지 못했다는 원망이 가슴 속에 맺혀 있었다. 하지만 이 사회는 아무리 부모님이 열심히 일해도 잘살 수 없는 구조였다. 가난을 못 벗어나는 건 부모님 개인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런 구조 속에서 열두 살 때부터 공장에서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성공할 수가 없었다. 그런 구조를 깨닫고 난 뒤부터 나를 돌아볼 수 있었다. 열등의식에서 벗어나면서 소심한 성격도 많이 나아졌고 폭력적인 성격이 조금씩 완화돼 갔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나마 다행인지, 난폭했던 아버지는 우리 형제들에게 학교 성적을 가지고 이야기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우리가 뭘 하든 간섭하지 않았다. 때문에 우리 형제들이 공부에 스트레스를 받은 적이 없다. 비록 우리 형제들에게 급한 성격이 아버지의 유산으로 남겨져 있지만 그나마 공부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폭력성에까지 물들지는 않지 않았나싶다.
물론 아버지의 폭력적인 성격을 옹호하는 건 아니다. 결코 자식들에게 폭력을 휘둘러서는 안 된다. 그것은 자식들에게 폭력을 가르치는 것이다. 자신을 때리는 엄마를 죽이고 방 안에 둔 채 몇 달을 살았던 고등학생의 사건은 극단적인 사례이지만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부모님이 아이들에게 폭력을 쓰지 않고 공부를 강요하지 않는 것이 학교에서 폭력을 없애는 길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 사회를 배울 수 있게 해 주는 것. 그것은 인문학이다. 자식만 성공(?)시키려고 애쓰지 말고 사회를 배울 수 있는 인문학이 담긴 책과 가까이 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아이들이 폭력에 물들지 않게 하는 길이다. 이 어려운 사회에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은 거기서 나오는 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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