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12일 경향신문, 김호기 교수의 칼럼, 문재인의 운명, 안철수의 선택 (1). 이 칼럼이 시리즈로 계속될 모양이다.
민주통합당 공천심사위원을 맡게 됐다. 그래서 이 시평에서 당분간 공천을 평가하긴 어렵다는 점에 대해 양해를 구하고 싶다. 오늘 이야기하려는 것도 물론 쉬운 주제는 아니다. 선거의 해를 맞이해 두 인물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문재인과 안철수가 그들이다. 그 동안 두 사람을 사석에서 몇 번 만난 적이 있다. 특히 안철수와의 만남은 일부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미리 밝히고 싶은 건 두 사람과의 대화 내용을 구체적으로 말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언론의 입장에선 선거 향방을 결정짓는 사안을 보도할 의무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공개하지 않기로 한 약속은 지켜져야 하며, 기실 한국사회 분석과 전망을 공부하기 위해 만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내가 주목하려는 것은 문재인과 안철수가 선 자리와 갈 길이다.
사회학적으로 인간은, 특히 최종 의사결정을 담당하는 정치가는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인 동시에 구조로부터 강제받는 존재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의 시각에서 보면 사건사와 사회사 속에 놓인 존재이기도 하다. 사건사 아래서 개인의 자유의지는 극대화되지만, 사회사 아래선 그에게 부여된 시대적 구속이 부각된다.
올 두 선거에서 먼저 주목할 것은 사회사다. 한 번 더 브로델로 돌아가면, 그는 사회사를 콩종크튀르(국면)의 역사라 이름짓고, 국면의 변화가 사건에 미치는 영향을 강조한다. 국면사적 시각에서 1987년 6월 항쟁 이후 우리 사회를 이끌어 온 두 원동력은 민주화와 세계화다.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87년체제’를 등장시켰다면, 세계화로부터의 강제가 ‘97년체제’를 낳았다. 민주화가 민주적 사회개혁을 위한 구심력으로 작용한 반면,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그 개혁에 한계를 부여하는 원심력으로 나타났다.
문제는 이명박 정부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는 그래도 국민기초생활보장법 등을 통해 세계화의 그늘을 제어하려 했지만, 이명박 정부는 부자 감세, 4대강 사업 등 신자유주의 토건정책에 전력투구해 왔다. 세계화의 원심력이 민주화의 구심력을 압도해 양극화를 포함한 신자유주의의 적폐가 가감 없이 드러난 것은 이명박 정부 아래서다. 중산층이 붕괴해 ‘1 대 99 사회’가 만들어지는 ‘현실적 폭력’은 물론 비정한 ‘해고’가 그럴싸한 ‘구조조정’이란 말로 둔갑하는 ‘상징적 폭력’의 이중적 폭력이 거침없이 행사돼 온 곳이 바로 우리 사회다.
신자유주의 국면의 암울한 현실 속에 놓인 개인은 자연 과거에의 그리움과 미래에의 기대를 동시에 갖게 된다. 한때 미워했으나 그래도 좋았던 시절로 추억되는 건 노무현 정부이며, 이중적 폭력으로 훼손된 인간다움이 다시 제 자리를 찾아가는 것은 소망스러운 미래상이다. 문재인과 안철수는 이런 그리움과 기대에 짝하는, 고유명사이자 보통명사다. 문재인이 더없이 인간적이고 서민적인, 가장 노무현다운 정치가라면, 안철수는 불통과 안주에 맞서서 소통과 혁신의 변화를 예감하게 하는 다수 시민의 멘토다.
올 두 선거에서 문재인과 안철수가 주목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정치가에겐 무엇보다 권력의지가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국면사가 요구하는 새로운 비전이다. 문재인은 경제민주화·검찰개혁·통일정책 등을 비전으로 내비춰 온 반면, 안철수는 청춘콘서트와 안철수연구소로 상징되는 사회적 소통과 경제적 혁신의 아이콘으로 인식되고 있다. 6월항쟁 25년이란 국면을 고려할 때 두 사람의 비전은 설득력을 가진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시 한 번 더 브로델로 돌아가면, 어느 사회이건 국면이 강제하는 힘이 약화되고 개인의 자유의지가 강화되는 순간이 도래한다. 선거는 바로 그 ‘결정적 순간’이다. 정치의 역동성을 생각할 때 문재인과 안철수의 미래를 예단하긴 어렵다. 그러나 대선을 10개월 앞둔 현재, 문재인의 ‘운명’과 안철수의 ‘선택’에 좁게는 진보세력의 미래가, 넓게는 우리사회의 미래가 달려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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