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0월 8일, 서천 문산마을도서관에서 서천군의 도서관문화 조성과 관련하여 여러 관계자 분들과 간담회를 겸한 협의를 마친 뒤, 어희재 연구위원의 현장 답사를 돕기 위해 잠시 종지교회에 있다는 작은 도서관을 둘러보았다. 교회가 있는 곳은 이상재 생가가 있는 마을이었다. 광주로 가기 위해 차를 돌리다 말고 아주 짧은 시간, 생가와 유물 전시관을 둘러보았다. 처음 서천을 방문하였을 때 생가도 둘러보았는데, 마침 수리한다고 예전에 보았던 건물은 온데간데 없다. 이상재 선생의 유물을 전시해놓은 곳을 휙 둘러볼 수 있었을 뿐이었다. 눈에 띄는 것은 전택부 선생이 쓴 <이상재 평전>이라는 책이었다. 이 책은 전시물이 아니라, 이 곳에서 일하는 분이 넘겨 보고 있는 책인 듯싶었다.
전택부(1915-2008)는 함경남도 문천 사람이다. 일본신학교 본과를 중퇴하였다고 한다. 월간 <새벗>과 <사상계> 주간을 맡아서 일한 바 있으며, 서울 YMCA 명예회장을 역임하였다. 지은 책으로 수필 <강아지의 항변>, 〈Y맨의 세계일주기〉,<인간 신홍우>, <월남 이상재>, <그 신앙과 사상>, <역사 한국의 에큐메니컬 운동사>, <한국교회 발전사>, <한국 기독교 청년회 운동사> 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는 <정의와 사회질서>, <정의와 자유>, <한류는 바람을 타고 한글은 쌍두마차를 타고> 등이 있다.
전택부와 마찬가지로 함남 사람인 아동문학가 강소천(1915-1963)의 전기를 보면, 두 사람은 학창시절에 적지 않은 영향을 서로 주고 받은 사람인 듯싶다. 강소천을 소개하고 있는 누리집 http://kangsochun.com/sochun/life.asp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소천은 초등학교 3학년인 13살 때 평생 친구였던 전택부를 만나게 된다. 전택부는 소천의 첫 인상을 이렇게 쓰고 있다. 첫인상은 무엇인가에 쫓기는 아이처럼 불안해 하고, 주제가 몹시 째째하고 초라해 보였다. 새까만 얼굴에 눈은 더 까매서 나들이 옷을 입고 있었지만 시골뜨기 티를 벗지 못 했다. 소천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함흥에 있는 영생고보에 들어 가면서부터 의젓한 아동문학가로 변신한다. 고보 1학년이 던 16세에 아동잡지인 아동생활에 버드나무 열매라는 동시 를 발표하고 문단에 얼굴을 내민 것이다. 그리고 고원읍에 서 잠시 만나 우정을 나누었던 전택부를 다시 만난다. 이때 전택부는 고보 2학년이었다. 소천은 상급생인 전택부와 친하게 지내지는 않았지만 전택부 때문에 일제에 대한 깊은 분노를 느끼게 된다. 전택부가 일본인 교사의 조선 학생 차별 대우에 항의, 동맹휴학을 결의했는데 곧 주모자로 색출당하여 퇴학을 당하였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소천은 동시와 동요만을 써 왔었으나 이때 동화도 써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 막연한 생각은 나중에 구체적인 동화가 되어 나타난다. 그는 첫화 돌멩이의 후일담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오랫동안 동요와 동시를 써 왔었지만 나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그때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동화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동화에다 나는 일본 사람들이 우리 나라를 빼앗은 이야기며 그 때문에 우리들이 고생하는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다. 이렇게 소천의 가슴을 분노에 떨게 했던 전택부 퇴학 사건은 그러나 2년 뒤 전택부가 학교에 다시 복교하면서 마무리 되었다.소천은 4학년 동급생으로서 전택부를 다시 만났다. 전택부 퇴학 사건은 복교로 마무리되었으나 일제에 대한 소천의 분노는 더욱더 깊어만 갔다. 일제는 무자비한 한글 탄압을 시작했던 것이다. 우리말과 우리글로 시를 쓰는 소천에게 한글 탄압이란 그야말로 사형선고와 같은 것이었다. 학과 시간에 조선어 독본이라는 것이 있어서 우리말과 우리글을 가르치기는 했다. 그러나 그 독본은 조선 사람으로서의 얼을 심고 가꾸기 위해서 가르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식민지 교육을 위한 것이 목적이었다. 그 속에 담긴 문장이 오죽했겠는가? 당연히 소천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나중에 일제는 그나마 조선어 독본 시간마저도 없애버렸다. 소천의 실망과 울분, 좌절과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여기서 전택부와 강소천이 다녔다는 영생고보는 바로 백석(1912-1995?)이 교사로 근무하던 그 영생고보다. 함경남도 지방에서 뿌리를 내리는 기독교정신의 세례를 이 세 사람은 각기 어떻게 받아들였던 것일까 하는 궁금증이 인다. 그런데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영생고보에서 교사로 근무한 백석의 글에서 기독교적 체취를 풍기는 글을 쉽게 발견하기 어렵다는 것. 좀 이색적이라면 이색적인 것이 아닐까?
이상재 선생(1850-1927). 개화파 박정양의 식객이었다가 1881년 32살 때 신사유랍단의 수행원으로 따라 간 일 등이 그의 정치적/사회적 삶의 궤적의 출발이었다. 갑신정변이나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등의 일.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밀사 파견 관련, 개혁당 사건, YMCA나 보이스카우트 관련의 일을 하였다. 그의 이력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다. "1927년 신간회 초대 회장에 추대되었으나 곧 병사하였다. 장례는 한국 최초의 사회장으로 집행되었다."
무엇보다도 그의 해학적인 말과 범상한 일들 너머의 것을 지향하며 격동기에 조선의 선비로서 대처하였던 일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있다. 특히 어느날 선생께서 강연 하는데 일본 순사랑 형사들이 뒤에 들어와 감시하니까 뒷산을 보면서 '개나리가 만발하였군!' 하였다 한다. 그러자 청중이 모두 웃음을 떠뜨렸으나 일본 순사들은 영문을 몰랐다는 것이다. '나리'는 당시 일본 순사를 부르는 호칭인데 그 앞에 '개'라는 욕을 붙여서 부른 말이었다. 시절의 엄혹함을 웃음거리로 만들 수 있는 어떤 여유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는 에피소드다.
*서천을 다녀오고, 이 포스트의 정리를 시간을 이유로 미루어 두었는데, 그 사이 전택부 선생이 별세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우리말 운동가라 할 이대로 선생의 글을 옮겨 놓는다. 출처: http://blog.daum.net/idaero/15728991
오리 전택부 스승님 영전에 이 글을 바칩니다.
당신은 이 겨레와 이 땅의 큰 별이었습니다.
존경하는 스승님께서 하늘나라로 가셨다는 소식을 중국 땅에서 듣고 보니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 한글날에 서울에 가서 병원에 계신 스승님을 찾아뵙고 제 책“우리말글 독립운동 발자취”를 드렸을 때 글이 안 보이신다며 아드님께 추천사를 다시 읽게 하시는 모습을 보고 걱정을 했는데 이렇게 갑자기 가실 줄은 몰랐습니다. 한글학회 100주년 축하 행사 때도 불편한 몸을 이끌고 제가 쓴 책의 추천사를 써가지고 오셨는데 뵙지도 못하고 가셔서 바로 전화를 드렸더니 병원 응급실로 가셨다고 해서 걱정을 했습니다.
존경하는 스승님, 저는 너무나 큰 사랑과 가르침을 스승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스승님을 모시고 한글날을 국경일로 만들려고 국회로 정부로 쫓아다닐 때 많은 감동과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스승께서는 한글날을 국경일로 만들어 달라고 청와대로 대통령을 만나러 가셨다가 만나지 못하니 그 충격으로 그 자리에서 쓰러지셔서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가셨다가 다행히 깨어나셨으나 그 뒤에 몸을 제대로 쓰지 못하셨습니다.
그런데 스승님은 병원에서 깨어나셔서 ‘각설이 타령’이란 글을 쓰셨는데 그 글에서 “나는 죽어도 좋으니 한글날은 국경일로 만들어달라고 호소하셨습니다.” 저는 그에 감동해서 더 발 벗고 나서서 스승님을 모시고 한글날을 국경일로 만들었습니다. 두 달 전 제가 처음으로 책을 내게 되었다고 말씀드리며 댁으로 찾아가서 추천사를 부탁드렸을 때 “ 살아온 모습이나 역사관이 나와 어쩌면 그리 똑같으냐. 내 젊은 날 사상계 주간으로 있을 때 외솔 선생님이 나를 찾아와서 고맙다고 큰 절을 했는데 오늘 내가 너에게 큰 절을 하겠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네가 다 했구나.”시며 불편한 몸을 일으켜서 진짜 절을 하시려고 해서 저와 제 아내가 황급하게 붙잡고 앉으시게 한 일이 있습니다.
그 때 스승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대로가 있기까지 부인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말을 안 해도 안다고 하시며 제 아내에게 “고맙습니다. 애썼습니다.”라고 인사까지 해주셨습니다. 기독교 일에, 또 다른 사회단체 일에 보이지 않게 구준 일을 다 하셨지만 성과와 칭찬은 다른 사람 몫이었고 알아주지 않았다고 하시며, 이대로가 꼭 당신과 닮았다고 하시면서 “내가 다 아니 끝까지 가라.”고 격려하셨습니다. 그런데 스승께서 이렇게 먼저 가시면 한글날을 국경일로 만들어달라고 청와대에 가셨다가 쓸어 지신 뒤에 스승님의 병을 간호하시다가 병이 나신 사모님이 어찌합니까?
저는 그동안 많은 이들로부터 멸시와 비웃음을 받을 때도 스승님이 계셔서 든든했습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힘들어도 스승님만 믿고 뛰었고 칭찬해주셔서 힘이 났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떠나시면 저는 누굴 믿고, 누구의 가르침을 받는 단 말입니까! 스승님! 스승님! 저는 지금 먼 중국 땅에서 스승님이 이 땅을 떠나시는 것도 보지 못하고 있으니 이 죄스러움을 어찌 한단 말입니까! 이 세상 아무리 잘난 사람이 있어도 저는 스승님이 가장 훌륭한 어른이고 애국자입니다. 스승님은 돌아가시는 날까지 이 겨레와 나라와 한글을 사랑하고 걱정하셨습니다.
보름 전 경기도 마석 병원으로 제 아내와 함께 제 책을 가지고 가서 보여드렸을 때 “아! 참 좋다! 부인과 함께 와서 참 기쁘다!”고 하시며 불편한 몸을 일으키셨습니다. 그 때 제 글을 읽지 못하신다며 아드님에게 읽어달라고 하시면서도 제 아내를 격려했습니다. 그리고 아드님은 제게 “요즘 이대로 선생님 말씀을 자주 하십니다. 아버님과 선생님이 많이 닮은 거 같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선생님 손을 꼭 잡고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 스승님께서 못하신 일을 제가 다 하겠습니다. 건강하게만 계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 이렇게 빨리 가실 줄 알았으면 좀 더 스승님의 손을 잡고 이야기 더 할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듭니다. 저는 그 때 스승님께서 손자 손녀와 조용한 시간을 갖기 바라는 마음에서 황급하게 서둘러 자리를 뜬 게 가슴이 아픕니다.
스승님께서는 한글학회 100돌이 되는 해에 제 책이 나와서 기쁘다고 하시더니, 올해에 이 땅을 떠나셨습니다. 일생을 이 겨레와 나라와 한글을 위해 많은 일을 하셨는데 나라로부터 변변한 상을 받지 못하셨습니다. 다행히 살아 게실 때 그 덕을 알아주었으면 했는데 마침 올해 세종문화상을 받게 되었지만 그 상장도 보지 못하고 가시니 안타깝고 가슴 아픕니다.
스승님, 이제 편안하게 가소서! 살아있는 제가 스승님의 뜻과 가르침을 이어가겠습니다. 저도 죽는 날까지 스승님처럼 바른 말을 하고 된 글을 쓰다가 스승님을 따라 가겠습니다.
중국 절강성 소흥에서 제자 이대로 올림.
*이승만 대통령의 '한글 간소화 방안'을 비판했던 <사상계> 54년 4월호 목차 부분.
출처: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30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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