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무웅 선생의 글, 차분히 읽기 위해 옮겨 옵니다.
강조는 인용자. 책 제목의 약물이 깨져 있다.
"통일은 단순히 휴전선의 제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통일은 남북 각 사회의 질적 발전을 통한 더 높은 차원에서의 통합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평화와 민주주의, 민족적 자주와 사회적 평등이 한반도 전역에 걸쳐 실질적으로 관철되는 진정으로 바람직한 상황의 실현이 통일이라 할 때, 그것은 어떤 극적인 한순간의 감격이라기보다 일상적 실천과 자기희생을 동반한 점진적 성숙의 축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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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어독문학회(회장 김누리 중앙대 교수)는 <독어독문학의 역사인식>이라는 제목으로 ‘베를린 장벽붕괴 30주년 기념’ 가을학술대회를 11월 9일 오후 중앙대학교 310관에서 열었다. 모두 다섯 분과로 나뉘어, 제1분과 :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을 주제로 「동독 민주혁명과 독일통일의 관계」 등 세편, 제2분과 : ‘독일문학과 역사인식 일반’을 주제로 「파울 첼란의 시적 앙가주망」 등 세편, 제3분과 : ‘문학 - 자유주제’로 「프로이트의 학문적 선회에 대한 고찰」 등 세편, 제4분과 : ‘독어학 & 문화학’ 주제로 「익살과 혐오 사이의 언어」 등 세편, 제5분과 : ‘학문후속세대’ 명칭으로 「독일광고에 나타난 화행분석」 등 세편, 모두 15편의 논문이 발표되고 이에 대한 토론이 진행되었다. 나는 김누리 회장으로부터 과분하게도 ‘기조강연’을 부탁받아 독일보다는 한국에 대한 얘기를 더 많이 했다. 엄밀한 학술발표가 아님을 전제로 했으므로 출처를 밝히지 않은 채 인용하기도 하고 선학들의 의견을 끌어오기도 했다. 상당히 길다. 혹시 시간 나시는 분들은 살펴보시라고 아래에 전문을 옮긴다.(염무웅)
【분단시대 너머를 상상하는 일】-
염무웅
〘유일한 분단국가로서〙
다들 아는 것처럼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대표적인 분단국가들 가운데 베트남과 독일은 통일을 이루었고 한반도는 여전히 분단상태로 남아 있다. 왜 우리 한반도만 분단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나.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객관적 조건 때문이고 또 객관적 조건을 넘어설 만한 주체적 역량도 모자랐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 베를린장벽 붕괴 30주년 되는 날을 맞아, 주로 우리 자신의 문제점들을 생각해보려고 한다.
알다시피 세 나라는 분단의 성격이 다르고 분단극복에 기울인 노력의 과정이 달랐다. 베트남은 외세의 오랜 식민지지배를 거친 끝에 독립을 쟁취하려는 민족운동세력과 식민지지배를 계속하려는 프랑스(1945~54)⦁미국(1963~75) 등 제국주의 외세 간의 싸움 속에서 일시적으로 분단국가가 된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베트남전쟁은 전형적인 민족해방전쟁이자 통일전쟁이었다. 따라서 이 나라에서 통일은 외세의 지배에 대한 베트남 인민의 투쟁의 전국적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독일과 한반도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국 군대의 분할점령이 분단의 출발이었다는 점에서 외관상 비슷하다. 그러나 독일은 연합국 군대와의 전투에 패배하여 점령된 반면, 한반도는 일본의 무조건항복에 따라 별다른 전투 없이 연합국인 소련군과 미군이 진주함으로써 점령되었다. 독일과 일본은 전범국가이자 패전국가로서 승전국의 점령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하지만 한국은 베트남이 프랑스의 지배에 대항해 싸웠던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지배에 대항해 오랜 저항운동을 벌여왔었고, 따라서 연합국들이 전쟁 중에 합의한 대로 정당한 절차를 밟아 독립을 부여하면 그걸로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한반도는 패전국 독일처럼 승전국들에 의한 분단의 운명을 맞았다. 유럽대륙을 동서로 갈라놓은 분단의 경계선이 동북아시아에서는 한반도를 남북으로 쪼개놓은 것이었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6⦁25전쟁이었다. 이 전쟁의 진실이 무엇인지 아직 충분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분명한 것은 통일을 목표로 벌인 전쟁이 결과적으로 한반도 내부에, 그리고 한반도 주위에 반통일적 대결구조를 고착 강화시켰다는 것이다. 정전 66년을 넘긴 오늘도 우리는 역사의 정상적 흐름에 역행하는 분단의 구조물들 때문에 매일같이 고통을 받고 있다. 어떻게 하면 이 땅에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건설하고 평화로운 미래를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겠는가.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절체절명의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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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의 시작〙
기록에 따르면 일본이 항복문서에 서명하던 1945년 9월 2일 연합군 사령부는 미-소 양군에 의한 한반도 분할점령 방침을 공표했다. 그러나 38선을 경계로 한 분단의 결정은 종전 4일전인 8월 11일 몇몇 미군 대령들의 심야회의에서였다고 하며, 미군이 도착하기 전에 러시아는 한반도 전체를 차지할 수 있었음에도 미국의 38선 분단제안에 동의했다고 한다.(존 페퍼 지음, 정세채 옮김, 『남한 북한』 모색 2005 p. 36) 동아시아에서의 참전을 망설이던 소련군은 히로시마 원폭투하 바로 다음날 만주지역으로 진군하여 단시일 내에 일본 관동군을 무력화하고 한반도 동북쪽 함경도로 진입했고, 미군은 그보다 거의 한달 뒤 인천으로 상륙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사실은 미-소 양군에 의한 분할점령이 필연적으로 분단국가 성립으로 귀결되어야 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즉, 1945년 8월부터 1947년까지의 상황은 매우 유동적이어서 자력으로 분단을 막을 수도 있었다는 말이다. 미-소 양군의 한반도 점령은 처음부터 한민족의 양분을 목표로 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전쟁의 승자인 미-소가 패자인 일본의 영토를 접수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 시점에서 한반도는 그들 전승국에게는 일본의 영토로 간주된 것뿐이었다. 따라서 점령 초기에는 미국도 소련도 한반도 분할점령을 단지 전쟁의 종결과정에 포함된 임시적 경과조치로 여겼음이 분명하다. 특히 주목되는 점은 카이로선언(1943.11)과 포츠담선언(1945.7)을 거쳐 모스크바 3상회의(1945.12)에 이르는 과정을 통해 나타났듯이, 미국으로서는 확립된 한반도 정책이 아직 없었다는 사실이다. 반면에 소련은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의 이름으로 현지 점령군에게 보낸 비밀지령에서 드러나듯 조선의 통일이라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점령한 지역에 친소정부를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와다 하루키, 『북조선』, 돌베개, 2002, p.73)
어쨌든 한반도문제 처리에 관한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은 1945년 연말 언론보도를 통해 서울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데 안타까운 점은 통일국가 수립이라는 목표부분은 가려진 채 신탁통치라는 경과부분만 강조되어 알려지게 되고, 더구나 신탁통치를 제안한 것이 미국이었음에도 소련이라고 잘못 알려지게 된 사실이다. 그것은 물론 일부 언론의 의도적인 거짓보도였다. 이 날조의 진짜 배후가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아무튼 이를 계기로 국내의 정치상황은 냉전의 개시라는 새로운 국제정세의 전개에 포섭되면서 찬탁-반탁 간의 대결로 큰 혼란에 빠져들고 말았다. 한반도의 운명이 국제정치의 환경변화에 직접적으로 좌우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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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적 통일국가 노력의 좌절〙
일본의 무조건항복과 더불어 한반도 주민들은 자주독립의 희망에 불타올랐다. 도처에 ‘건준’(건국준비위원회) 지휘 하에 주민자치조직이 결성되었고, 특히 지방에서는 일부 흥분한 군중들이 경찰서를 습격하기도 했다. 해방의 환희와 독립국가 건설의 열망이 온 나라에 끓어 넘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상황의 일면일 뿐이었다.
『‘삐라’로 듣는 해방 직후의 목소리』라는 책에는 8.15 직후 ‘조선헌병대 사령부’ 명의로 발표된 「내선 관민(內鮮官民)에 고함」이라는 일본어 포고문이 실려 있다. 포고문 제2항은 다음과 같다. “조선이 독립한다 해도 조선총독부와 조선군이 내지로 철수하기까지는 법률과 행정 모두 현재대로다.” 그러니까 8.15 당시 조선헌병대 사령부는 조선의 독립 가능성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과 소련군이 들어와 인수인계가 이루어질 때까지는 행정과 사법의 모든 권한이 일본에 있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38선 이남 지역에 대한 군정을 선포했다. 미군 사령부는 자신들 이외의 어떤 권력기관도 인정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결성된 자발적인 치안조직도 해산시켰다. 반면에 그들은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구를 거의 그대로 계승했는데, 9월 29일자 포고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그때서야 일본인 경찰관을 조선인 경찰관으로 교체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조선인 경찰관 중에는 독립지사들을 체포 고문하는 데 앞장섰던 악질분자도 다수 섞여 있었다. 식민지체제의 모세혈관을 구성했던 조선인 행정관료들도 대부분 원래의 직책으로 복귀했다. 요컨대 미군정 체제는 기본적으로 일제 식민지통치의 계승이었던 바, 이로써 오늘까지 지속되는 한국 기득권구조의 기초가 마련된 것이었다.
한반도에 독립정부 수립을 지원하기 위해 구성된 미-소공동위원회(1946.1~47.5)는 결국 성과 없이 결렬되고 좌우합작을 통해 통일정부 구성을 모색하던 여운형•김규식 등의 노력도 실패함에 따라 이승만과 김일성이 주도한 분단정권이 남북에 건설되었다. 김구•송진우•박헌영 등 정치지도자들도 나름의 역할이 있었지만 분단을 저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한마디로 해방시기 한반도에는 통일정부 수립을 성사시킬 만한 강력하고 중심적인 정치세력이 성장하지 못한 채였고, 그리하여 수많은 정치적 분파들의 난립 속에 외세를 등에 업은 야심가들만 권력투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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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의 냉전〙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더불어 중부유럽 역시 동아시아와 마찬가지로 미-소 양대 세력의 영향력이 첨예하게 대치하는 거대한 전선 위에 놓이게 되었다. 전범국가 독일로서는 당연히 분단에 저항할 힘도 명분도 없었다. 그런데 오스트리아는 어떻게 되었던가. 이 나라 역시 전승 4대국에 점령되어 분할통치를 받게 되었다. 한반도와 비슷한 상황이었지만 연합국 군사위원회와 오스트리아 임시정부가 공존했다는 점이 달랐다. 종전 직전 원로정치인 칼 레너(Karl Renner, 1870~1950)가 나치 계열을 뺀 모든 정파를 아울러 세운 임시정부를 연합국 군사위원회가 인정한 결과였다. 소련을 제외한 3개 연합국은 사민당인 레너의 임시정부를 경계했으나 곧 승인했고, 그리하여 임시정부는 오스트리아 전역에 관할권을 행사하게 됐다. 그해 11월 총선에서는 보수주의 국민당이 50%를 득표해 제1당이 되었지만 단독정부 대신 사회당, 공산당과의 대연정을 구성했다. 국민당은 국유화라는 사회주의 정책인 수용했고 반면에 사회당도 미국이 주도하는 마셜플랜 참여에 찬성하는 등 정치권은 이념을 떠나 협력했다. 이렇게 10년의 위임통치를 거친 1955년 오스트리아는 주권을 회복하여 중립국가로 거듭 났다. 해방 후 극심한 분열로 통일정부 수립의 기회를 잃어버린 한반도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유럽에서 냉전의 발톱이 할퀴고 지나간 또 다른 예를 들자면 그리스일 것이다. 1820년대의 독립전쟁 이후 그러지 않아도 오랫동안 왕당파와 공화파 사이의 갈등과 정치적 혼돈이 거듭되던 이 나라에서는 1941~44년 나치독일 점령기간 중 대독항전을 민족해방전선이 주도했으므로 전쟁이 끝나자 좌파 공화주의세력이 성장하고 우파 족벌정치세력은 쇠퇴했다. 그런데 그리스는 한반도와 비슷하게 소련 대륙세력의 남하와 미국 지중해세력의 북상이 만나는 지정학적 요충에 위치해 있다. 즉, 무력충돌의 현장이 될 위험이 높았다. 1947~49년의 그리스 내전은 허다한 레지스탕스 운동가들의 비통한 죽음과 수많은 애국청년들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엄청난 물량적 지원에 힘입어 결국 우파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그것은 10년 전의 스페인 내전을 반복한 것이자 바로 이듬해 발발한 6.25전쟁의 전초전과 다름없었다. 다만 그리스는 내부적 진통의 요소를 후일의 정치적 숙제로 남겨놓았을망정 분단의 비극은 피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한반도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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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통일개념〙
6.25전쟁은 분단이 가져온 최대 최악의 참화였고 그 여파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전쟁 이전에도 이후에도 살육의 광기는 남북을 가리지 않고 이 땅을 핏빛으로 물들였다. 4⦁3사건은 그 시발점이었고, 전쟁발발 전후 남한 전역에서 자행된 좌익혐의자에 대한 집단학살은 아직 진상조차 다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패전국 독일은 동서 양국으로 독립한 뒤에도 군대를 갖지 못했다. 서독의 경우 1955년에야 연방군(Bundeswehr) 보유와 나토가입이 승인되었다. 반면에 대한민국 국군의 모체인 국방경비대는 이미 1946년 1월에 창설되었고, 북쪽에서는 실권자 김일성이 처음부터 소규모 게릴라부대를 이끌고 국내로 진입했을 뿐더러 중국에서 활동한 항일부대도 여기에 합류하였다. 남북 정권들이 모두 무력에 의한 통일을 공언하고 실제로 전쟁을 일으킨 것은 부분적으로 이런 조건의 결과였다. 2000년에 이루어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의 6⦁15 남북정상회담 및 그 성과물로 나온 공동선언이 분단역사상 최대의 위업인 까닭은 바로 기존의 오랜 적대정책과 무력에 의한 통일의지를 드디어 포기하기로 공공연히 약속한 데에 있다.
한 마디로 6⦁15공동선언은 남북이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과정을 통해 점진적으로 통일에 접근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북측이 오랫동안 주장해온 연방제 통일방안과 남측의 국가연합 통일방식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는 점을 남북 두 정상이 인정한 것이야말로 평화를 위한 위대한 합의였다. 냉전시대의 소위 적화통일론과 북진통일론 및 흡수통일론이 모두 위험하고 비현실적인 발상임을 인정하고 통일을 장기적이고 단계적-평화적인 과업으로 설정하는 데 남북 양자가 드디어 합의했기 때문이다.
6.15공동선언은 무엇보다 통일개념에 대한 새로운 정의이다. 이 새로운 통일개념은 각기 독립적인 정부 밑에서 서로 다른 이념과 체제로 운영되어오던 별개의 정치단위, 즉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각자 자기 나름의 연속성을 어느 정도 유지한 채, 즉 심각하고 급격한 자기부정 없이 단계적-평화적 과정을 통해 하나의 단일한 국가적 정체성 안에 포괄될 수 있음을 선언한 것이다. 냉전에 길들여진 우리의 관습적 사고는 당연히 새로운 통일개념에 익숙지 않다. 따라서 그것은 우리에게 발상의 일대 전환을 요구한다.
이 새로운 통일개념에 따른 제1단계의 사업은 남과 북이 화해하고 교류하며 상호 접근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 각각 좀더 평등하고 민주적인 사회로 변화함으로써 서로 닮아가는 것이다. 남쪽의 경우, 민주화운동이 활기를 띠는 시기가 동시에 통일에 대한 염원이 분출되는 때였음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민주화와 통일염원 간에는 뗄 수 없이 긴밀한 연관성이 있음을 말해준다. 이 경험을 북한과 공유하는 것이 숙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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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통일의 내적 동력〙
독일은 30년 전 바로 오늘 베를린장벽의 붕괴에 이어 이듬해 10월 드디어 통일을 달성했다. 무엇이 이 위업의 달성을 가능하게 했는가.
분단의 순간부터 통일의 그날까지 가장 중요한 내적 동력은 교회에서 나왔다. 분단 이후 동독과 서독은 “서로 현저하게 다른 방식으로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양쪽 주민들은 공동체의식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럴 수 있었던 바탕은 바로 교회, 특히 개신교였다. 19세기에 출범한 평신도운동인 독일 기총(기독교총연합회)은 나치시대에 잠시 중단된 적도 있으나 종전 후 빠르게 재건되었다. 특히 동독에서는 교회가 “유일무이하게 자립적이고 정치적으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기관”이었다. 통일 당시의 대통령 리하르트 바이츠제커(Richard von Weizsäcker, 1920~2015)는 1964년부터 1970년까지 동서독 양 지역 신도들에 의해 선출된 기총 명예의장으로서 독일이 간직해온 정서적 단일성의 기반이 분단에 의해 허물어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바이츠제커에 의하면 1949년의 첫 기총 행사에서도 중심문제는 통일목표를 세우는 것과 사람들 간의 결속을 이어가는 것이었다. 1950년 에쎈 행사에는 신도 15만 명이 모여 동서독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는 동시에 국가정책과 무관하게 통일된 사회적 의제를 제시하고자 했다. 1951년 베를린 행사의 마지막 날에는 “우리는 형제입니다”라는 모토 아래 30만 신도들이 모여 국민적 단결을 과시했다. 동독 신도들의 서독행이 어려워진 1954년에도 동독지역 라이프치히에 60만 동서독 신도들이 집결하여 강력한 연대를 보여주었다. 이 행사의 폐막 때 낭독된 다음과 같은 선언은 당시의 독일인에게뿐 아니라 그로부터 65년이 지난 오늘의 한국인에게도 살아있는 감동을 준다.
“동서독이 통일될지 안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길고 험한 여정이 될 수도 있다. 어느 한 쪽이 지쳐 무너지고 다른 한쪽이 자신만 살려고 할 위험성도 있다. 우리는 그것을 용납해 서도 안 되고, 또 그것을 원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서로 힘을 모아 단결해나갈 것이다. 주 님의 평화가 우리를 지켜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독일 통일이 달성된 데는 이와 같은 독일 내부의 정서적 통합의 노력뿐 아니라 어쩌면 더 중요한 외적 요인이 작용했다. 일찍이 아데나워(Konrad Adenauer, 1876~1967) 수상은 완고한 반공주의자였지만 프랑스와 화해를 이룩하고 나토에 가입하는 등 성공적인 ‘서방정책’을 펼쳤고, 이어서 브란트 수상은 동독에 대해서뿐 아니라 소련을 비롯한 폴란드•체코 등 동유럽에 대한 평화적 접근으로서의 ‘동방정책’을 추진함으로써 통일에 우호적인 국제환경을 조성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독일 정치가들은 기민당-사민당 등의 구별을 초월한 일관된 외교정책을 추진했다. 그들은 냉전의 종식이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했고 독일통일이 유럽통합과정의 일부이자 세계평화에의 기여라고 이웃나라들이 믿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다. 1990년 10월 3일 마침내 통일의 날이 왔을 때 대통령 바이츠제커는 베를린필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독일통일은 민족의 자유와 유럽대륙의 새로운 평화정착을 목표로 하는 유럽 역사발전 과정의 일부입니다. 우리 독일인들은 이러한 목표에 기여코자 합니다. 국경이 더 이상 분리의 선으로 인식되지 않게 하는 것이 절실합니다. 독일의 모든 국경은 인접국들과 이어주는 가교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의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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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우리의 장벽인가〙
1980년대 독일 통일과정에서 교회와 언론이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사실을 상기한다면 우리는 한반도의 상황이 얼마나 열악한지 새삼 깨닫게 된다. 북한에는 정부권력으로부터 독립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자립적 종교가 아예 존재하지 않은 지 오래고, 남한에서도 대형교회⦁부유사찰의 지도부는 기득권체제의 울타리 속으로 들어가 민주주의의 퇴보와 분단의 강화에 오히려 봉사하고 있지 않은가.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대북 화해정책은 그 다음 정권에 의해 쓰레기통으로 던져지지 않았던가. 이주민과 탈북자들에 대해 나타내는 국민들 다수의 배타적 정서와 점점 심해지는 사회적 양극화는 통일이란 말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쑥스럽게 한다.
우리를 둘러싼 국제적 환경 또한 지극히 비우호적이다. 무엇보다 가장 치명적인 문제점은 자신의 국가적 생존을 외국 군사력에 의존하고 있다는 데 있을 것이다. 6.25전쟁 발발 직후 당시 대통령 이승만은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사령관 즉 미군에게 넘겼고 휴전 두어 달 뒤에는 한미상호방위조약(1953.10.1. 조인, 1954.11.18. 발효)을 맺어 한국의 안보를 미국에 위임했다. 바로 이와 같은 대한민국의 정치⦁군사⦁외교적 대미주권제한(對美主權制限)상태를 일컬어 한미동맹이라 부르는 것이다. 게다가 이승만은 전쟁 말기 전국적인 휴전반대운동을 벌이면서 어리석게도 정전협정 조인에도 참가하지 않았다. (1953년 봄 초등학교 6학년이던 필자는 가소롭게도 휴전반대 웅변대회에 학교대표로 나간 적이 있다.) 그러니 한국은 종전논의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지도 의문이다. 따라서 한반도에 평화체제를 정착하는 우리 자신의 문제에서도 우리는 주권적 자격을 빼앗기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과 연관하여 지난 70여 년 동안 쉬지 않고 지속된 미국의 대북압박정책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 옳게 읽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미국이 정말 원하는 것이 북한의 정권교체(regime change)인지 체제변형(regime transformation)인지 또는 심지어 국가붕괴인지 미국 안에서도 논란이 있어 왔다. 어쩌면 미국의 손아귀 안에는 북한의 국가붕괴, 정권교체, 체제변형, 정책변화, 현상유지 등 여러 개의 옵션이 다 들어 있어서 동북아 정세의 조종을 위한 그때그때의 지렛대로 북한을 장기간 활용하는 것이야말로 미국이 진정 원하는 것일지 모른다. 아마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북한과 같이 유례를 찾기 어려운 독특한 국가체제의 경우 정권교체와 체제변형이 실질적으로 구별되지 않으리라는 점이다. 북한의 경우, 정권과 체제가 일체화되어 있다고 믿어지기 때문에 단순한 정권교체만으로도 사실상 국가의 와해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북한 지도부로서는 체제변형이든 정권교체든 어떤 외부적 작용에 대해서도 목숨을 걸고, 즉 전쟁발발을 불사하고서라도 저항하고자 할 것이라는 점이다.
반면에 21세기 초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중국을 관리-제어하는 것이 대외정책의 최고 목표인 미국으로서는 북한은 중국과의 연계 속에서 놓칠 수 없는 카드일 것이다. 동아시아의 역학변화 속에서 군사적 대국을 노리는 아베 정권의 일본 또한 우리의 평화체제 추진에는 커다란 장애로 되고 있다. 대한민국도 미국에게는 불변의 상수가 아니다. 1953년 이란의 모사데그 정부, 1966년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정부, 그리고 1973년 칠레의 아옌데 정부가 무너지는 과정에서 보았듯이 미국은 자신의 국가이익에 상충된다고 여겨지는 경우 가차 없이 타국의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인명의 살상을 외면하였다. 1980년 5월 한국에서 벌어진 정치적 사변도 그 맥락의 연장선 위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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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운명의 주인은 우리 자신이다〙
돌이켜보면 북한은 2006년 10월 제1차 핵실험을 시작으로 2017년 9월까지 모두 여섯 차례 핵실험을 감행했다. 이와 병행하여 북한은 핵탄두의 소형화-경량화에도 박차를 가하는 한편 그것들을 운반할 중-장거리 미사일의 단계적 시험에도 성공하여, 결국 미 대륙 전체가 북한 미사일의 사정권 안에 들게 되었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그러자 미국 대통령 트럼프는 유명한 ‘화염과 분노’라는 말을 써 가며 북한에 대해 선제공격을 불사할 듯한 협박을 발했고, 이에 질세라 북한도 괌의 군사기지에 타격을 가할 수 있다는 위협을 내놓았다.
그런대로 소시민적 안일에 젖어 살던 다수 국민들로서는 트럼프와 김정은 사이의 ‘말폭탄’ 주고받기가 단순한 언론전을 넘어 실제상황으로 확대되는 것은 아닌지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만에 하나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가공할 재앙이었다. 휴전선에서 불과 40km 거리에 인구 1천만의 서울이 있고 서울 포함 수도권에 2천만 인구가 살고 있지 않은가. 이게 불과 2년 전이다.
그런데 2018년 들어서자마자 반년 남짓 지나는 사이에 상상을 뛰어넘는 반전이 일어났고, 우리는 남북분단과 전쟁의 참극 이후 6~70여년 만에 처음으로 암흑의 터널에 끝이 보이는 지점까지 왔다는 희망조차 갖게 되었다. 알다시피 북한의 핵개발문제가 본격 테이블 위에 오른 것은 소련해체 뒤인 1990년대였다. 빌 클린턴 시대인 1994년 영변 핵시설에 대한 미군기의 폭격이 검토된 사실을 대부분의 남한 사람들은 끔찍한 위기가 지나간 뒤에야 알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북핵문제 해결을 둘러싼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고, 두어 차례 잠정적 해결에 접근한 적도 있으나, 결국 2017년 여름에 겪었던 것과 같은 위험상황으로 치달았다.
그동안 북한 핵이 한반도의 평화를 가로막는 유일한 장애물인 것처럼 국내외의 많은 언론과 정치가들이 떠들어 왔기에 우리 머릿속은 북핵의 악마적 이미지가 고정관념처럼 박혀 있다. 물론 핵무기가 본질적으로 평화에 적대적인 것은 사실이다. 그렇기에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도 ‘4.27판문점선언’에서 “6.25전쟁의 종전과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핵심적 목표의 하나로 합의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유의할 대목은 남북의 두 정상이 선언문 속에 박아 넣은 것이 속칭 ‘북핵 폐기’가 아니라 ‘한(조선)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란 점이다. 사실 알고 보면 남한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핵무기가 배치되어 있었다. 인터넷만 찾아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인데, 1957년 6월 유엔군(의 이름을 빙자한 미군)은 신무기의 한반도 도입을 금지하는 정전협정 조항의 폐기를 선언하고 이후 아무런 제약 없이 전술핵을 비롯한 신무기를 남한에 들여왔던 것이다. 물론 1990년대 초에 냉전종식과 더불어 전술핵은 남한에서 철수했다. 하지만 매년 되풀이되는 이런저런 연합훈련 때마다 미군의 최첨단 전략자산들은 거침없이 한반도 주변을 배회하며, 그럴 때마다 북한은 긴장과 공포의 시간을 보내곤 했다.
따라서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란 북한이 개발한 핵무기와 그 운반수단 및 북한이 보유한 핵물질과 핵시설 등의 ‘완전한’ 폐기뿐만 아니라 남한에 드나드는 각종 미군 전략자산들의 ‘완벽한’ 출입금지도 의미해야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6.25전쟁의 종전이 선언되고 북미간 평화조약이 체결되며 비핵화가 한반도 전역에 걸쳐 완수되어야 비로소 평화체제가 성립되었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 점에서 우리는 왜 북한이 그토록 미국과의 양자회담에 집착하는지 추론할 수 있다. 북한에 있어 미국과의 담판은 사활적 중대성을 갖는 안건이며, 이에 비해 남한과의 관계는 말하자면 국내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한반도의 남쪽에 살고 있는 우리들로서는 당연히 미국과 입장이 다를뿐더러 북한과도 같은 입장일 수 없다. 우리는 미국과 북한이 대결하든 타협하든 그 결과에 일방적으로 끌려가기만 하는 수동적 객체가 결코 아닌 것이다. 더구나, 비록 미국의 압도적인 영향력 아래에서일망정 독재권력과의 끈덕진 싸움을 통해 독자적인 민주화를 이룩하는 데 성공했고 또 노동자/농민 등 민중들의 커다란 희생을 대가로 치렀을망정 괄목할 만한 산업화의 성취를 이룩한 남쪽 국민들로서는 이제 한반도의 운명에 관해 좀더 주도적인 역할을 맡을 자격과 역량을 갖추었다고 자부할 당연한 권리가 있다.
앞으로의 세계가 어떤 모습으로 전개될지 상상하기 어렵다. 많은 사람들은 미국 헤게모니의 퇴조와 중국의 부상을 지적한다. 트럼프 같은 인물이 대통령 노릇하는 것 자체가 미국 쇠퇴의 반영이다. 이런 대전환의 시대에 한반도의 운명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분명한 것은 미국도 중국도 또 일본도 우리에게는 항시 경계의 대상이자 협조를 구할 상대라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 내부의 지역적•계급적•문화적 갈등을 원만하게 극복하고 이 세기 안에 자주-평화 통일을 이룩해야 한다. 하지만 통일로 가기 위해서도 우선은 통일의 열망을 자제하고 교류와 협력의 경험을 오랜 기간 축적할 필요가 있다. 독일통일이 동독주민들에게 주고 있는 고통과 상처를 우리는 깊이 새겨야 한다. 통일은 단순히 휴전선의 제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통일은 남북 각 사회의 질적 발전을 통한 더 높은 차원에서의 통합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평화와 민주주의, 민족적 자주와 사회적 평등이 한반도 전역에 걸쳐 실질적으로 관철되는 진정으로 바람직한 상황의 실현이 통일이라 할 때, 그것은 어떤 극적인 한순간의 감격이라기보다 일상적 실천과 자기희생을 동반한 점진적 성숙의 축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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